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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김홍섭의 자연 영성과 실천적 삶

127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8-21

金洪燮의 자연 영성과 실천적 삶

 

 

1. 머리말

 

金洪燮(바오로, 1915. 8. 28~1965. 3. 16)은 法院의 명망이 있는 判事로 활동하다가 民族 相殘의 처절한 비극이었던 6ㆍ25동란의 와중에 삶의 무게를 느껴 가톨릭에 입교한 후, 平信徒로서 남다른 신앙생활을 실천하여 가톨릭 교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커다란 反響을 불러일으켜 생존 당시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생애에 대한 평가는 크게 나누어 法官으로서의 그것과 종교적 求道者로서의 그것으로 나뉠 수 있다고 본다.

 

우선 前者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당대 최고의 辯護士였던 李丙璘이, 김홍섭의 사망 후 그를 기리면서 “한국 사법부의 훌륭한 역대 법관 가운데서도 故 김홍섭 판사라 하면 모를 이가 없을 정도로 훌륭한 생애를 살다간 名法官이다… 실로 그의 고매한 인격과 깊은 정신세계는 여러 가지 逸話 가운데 한국 사법부의 龜鑑으로서 진정한 사법 정신을 일깨워주는 永久한 활력소와 자극제가 될 것이다”1)라고 했음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그에 대한 평가 가운데서 더욱 눈여겨볼 점은 다음의 글에서 잘 드러난다.

 

① 그는 사형폐지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생명의 존엄성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재판의 적정도를 ‘과녁 맞추기’에 비유하며, 법관은 최선을 다해 돌을 중심부에 가깝게 맞히려고 노력할 뿐이라고 했다. 그는 법관이라는 직무의 본질을 자각하고 실천한 위대한 법관이었다. 또한 인생의 覺者로서 민족의 등불이요, 정신적 지주였다. 그는 인간에 대한 형벌의 궁극적 근거에 대해 깊이 고민한 끝에 자신의 독특한 실존적 법사상을 수립, 중국의 吳經熊, 일본의 다나카 고타로와 함께 동양의 3대 가톨릭 법사상가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2)

 

이에 의거하면 김홍섭이 사형폐지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생명의 존엄성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홍섭이 법관 직무의 ‘본질을 자각하고 실천한 위대한 법관’으로서 자신의 독특한 실존적 법사상을 수립하였으므로, 李丙璘 辯護士는 그를 동양 3대 가톨릭 법사상가 중의 하나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김홍섭이 당시에 법조인으로서 누구 못지않게 뛰어난 삶을 살았던 인물임을 여실히 알 수 있겠다.

 

한편 김홍섭의 생애에 대한 평가 가운데 後者, 즉 종교적 구도자로서의 모습은 天主敎의 盧基南 大主敎가 “김 판사의 경우는 법률가로서도 모범적인 법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改新敎에서 출발하여 불교를 거쳐 가톨릭 聖敎會로 귀의한 원숙한 求道者였기 때문에 한국 천주교회사에 길이 남을 존재라고 생각된다”3)고 언급한 것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에 대한 이러한 평가를 구체적인 사안들을 제시해 가면서 더욱 심화시킨 것으로는 아래의 것도 있다.

 

② 김홍섭 형제는 청렴결백하고 강직하면서 겸손한 구도자적 생활로 존경을 받아 왔고, 많은 죄수들을 사랑으로 돌봐주며 신앙으로 인도하였다. 특히 사형수들의 전교에 힘썼다. 그는 법정에서 부득이 사형언도를 내리고서 며칠 후 교도소로 그 사형수를 방문, 직책상 사형언도를 내렸지만 심히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하고 나서 영혼을 구하라고 권고하며 각기 적당한 교리책을 사서 엽서를 끼워 들여보냈다. 반응이 있으면 계속 방문하여 권고했다. 그래서 많은 사형수들이 영세 입교하였다. 그와 사형수들과의 사이에 많은 편지가 오갔으며, 사형수들에게 《가톨릭 성인전》 등 교회 서적을 보내주었다. 사형수들이 새 사람으로 변화하여 감옥을 수도원으로 생각하고, 기도와 묵상으로 시간을 보내며 총살형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 때문이었고, 그것은 바로 김홍섭 형제의 공로였다.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그가 베푼 사랑은 얼마나 컸던가. 囚人들의 대부로서 그는 성탄 때가 되면 전국 교도소에 있는 대자들에게 매번 친필로써 축하 편지를 보냈고, 《경향잡지》 30부를 교도소에 계속 보내주었다. 매달 월급의 절반가량을 사형수 등 중형수를 위해 썼다. ‘法衣 속에 聖衣를 걸친 사람’, ‘司徒法官’이란 칭호를 얻을 만하다.4)

 

여기에서 그가 그야말로 ‘청렴결백하고 강직하면서 겸손한 구도자의 생활로 존경’을 받았고, ‘특히 사형수들의 전교에 힘썼던 것’으로 유명하였음이 눈에 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사형을 언도한 사형수들에게 《가톨릭 성인전》과 《경향잡지》를 계속 보내주면서까지 열심으로 전교하여, 결국에는 그들을 자신의 代子로 삼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가 ‘法衣 속에 聖衣를 걸친 사람’, ‘司徒法官’이라고 평가받을 만하다는 것이다.

 

사후에 이토록 법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종교 구도자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김홍섭의 생애를 찬찬히 되짚어 살펴보면,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看過되었던 점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다른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점은 당시의 우리나라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드물다고 감히 단언해도 좋을 정도로 그가 自然 靈性을 깊이 지니고 있었던 사상가이자 실천가였다는 사실이다. 본문에서 상세히 거론하듯이 그가 인간 중심의 자연 영성을 극복하고 相生을 추구하는 면면이 강했음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곧 聖 프란치스코 修道會 제3회 入會로 이어지면서 성 프란치스코의 자연 영성을 실천하려는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현실화되었음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논문에서는 기왕의 연구 성과들을 토대로 삼아 지금까지 간과되었던 이러한 측면들을 구체적으로 기록을 제시하면서 밝혀보려고 하는 것이다.

 

 

2. 청년 시절 김홍섭의 사상적 전회와 죽음 / 자연 체험

 

김홍섭은 1915년 8월 28일 全北 金堤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普通學校를 마친 뒤 어려운 살림살이 때문에 진학하지 못하고 상점 일을 돌보다가, 미국 대통령 링컨의 전기를 읽고 法學을 공부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뒤 全州에 가서 일본인 변호사 사무실에서 심부름하며 독학하다가, 주인인 변호사의 도움으로 1939년에 일본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東京의 日本大學 法科에서 수학하던 그는 1940년 8월에 조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후 변호사 활동을 하다가 1945년 解放이 되면서 서울地方 檢察廳 檢事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곧 검사직에 회의를 느껴 사표를 내고 뚝섬에 들어가 농사를 짓기에 이르렀다. 이때에 전원생활을 하며 자연에 대한 영성을 깊게 지니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大法院長 金炳魯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여 다시 判事로 임명되었다. 그렇지만 곧이어 6ㆍ25동란이 터지고 그 와중에 그는 자신을 피신시켜 주었던 절친한 친구가 공산당에게 납치되었다가 끝내 살해되자, 이를 계기로 인생무상의 고민에 빠져 종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5)

 

어렸을 적에 改新敎의 신자였던 그는 이때의 충격에 휩싸여, 홀로 깊은 산속에 들어가 지내면서 佛敎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거듭하였다. 하지만 1953년 休戰될 무렵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되는데, 그 과정과 그 이후의 역정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이 참고가 된다.

 

③-가 김 판사는 본시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다. 예배당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 그는 어느 절을 찾아가 오랫동안 묵으면서 불교를 연구하였다. 절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돌아온 그는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임시 수도 부산 시에서였다. 서울로 환도한 다음 그는 결국 가톨릭에 귀정하였으니, 1953년 복자 축일에 김 판사 가족 전원이 영세 입교하였다.6)

 

③-나 소년 시절에 개신교 예배당에 다녔고 판사 생활을 하면서 불교에 매력을 느껴 방한암, 김일엽 스님들과 깊은 교류를 하였던 그는 끝내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하다가 육당 최남선과 새로운 사귐을 나누고 거의 같은 무렵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7)

 

두 기록을 종합하면 그는 소년 시절에 프로테스탄트에 만족을 얻지 못하였고, 6 ‧ 25동란을 거친 후에는 佛敎에 歸依하였지만, 方漢巖(1876~1951) ‧ 金一葉(1896~1971) 스님들과의 깊은 교류에서마저도 만족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는 결국 六堂 崔南善과 사귀면서 같은 무렵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산에서 서울로 還都한 후인 1953년 복자 축일의 일이었다.

 

그러면 그는 왜 이리도 宗敎的 轉回를 거듭하면서 人生에 대한 깊은 省察을 하였던 것일까? 무엇보다도 그의 종교적 전회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자신의 글 가운데 이와 관련된 것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을 한 토막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④ 사람은 죽는다. 죽은 사람은 살아나지 않는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내가 죽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최초로 절실하게 느껴본 것은, 아직 내 나이 6~7세였을 적, 나를 업어도 주고, 그 밖에 무척 귀여워해 주던 외삼촌이 무슨 병으로서인지 알 수 없었어도, 장기간 앓다가 끝내 죽어 버리고만 그때부터서였다. 이 일을 目睹한 뒤부터는, 동네 아이들이 喪輿 뒤를 따라다니며 그 행렬을 마치 구경거리로 삼는 것이나, 죽음의 전조로서의 아픈 것에 대하여 몹시 침울해하던 것을 기억한다… 열 두서너살 적 일로 생각된다. 兄妹 간에 동포를 가져보지 못했던 나는 그 때 마침 이웃 全씨라는 이의 서너 살쯤 난 아이를 귀여워하다가, 하루아침 그 아이가 죽게 되자, 나는 너무도 큰 충격에서 그 전부터 다니고 있던 예배당에서 배워 안 하느님께 그 아이의 蘇生을 빌기 위하여, 早朝 뒷산 한 모퉁이 소나무 사이에 엎드려 一心으로 기도를 드렸던 일이 있었다. 그 일을 月餘간이나 계속하였다.8)

 

이 글에서 그는 그 자신이 죽는 것에 대해서 최초로 절실하게 느껴본 것이 6~7세 때 외사촌의 죽음에서였음을 토로하고 있다. 그리고 열두서너살 때에는 귀여워하던 이웃의 어린 아이가 죽자, 그 아이의 소생을 위해 ‘그 전부터 다니고 있던 예배당에서 배워 안 하느님께’ 빌기를 1개월 이상 계속했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어려서 프로테스탄트 예배당에 다니던 그가 불교에 깊이 심취하게 되는 계기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ㆍ25동란으로 말미암아 절친한 친구와 영영 이별하게 되면서 받은 정신적 충격이 워낙 컸기 때문이었는데, 이후도 방황을 거듭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던 그가 안정을 찾고 가톨릭에 귀의하게 되는 것 역시 죽음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면서부터였다.

 

이는 아래와 같은 그 자신의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⑤ 三知=즉, 생자의 필멸과, 혼자서 죽는다는 것과, 그리고 空手로 죽어가야만 한다는 사리를 안다 하면서, 三不知=그 시기와, 처소와, 어떻게 당하게 될는지를 모름으로 해서 애매하게 偸安하기 쉬운 인간들은 이처럼 사람의 종말을 목격함으로써 많은 교훈을 얻는다. 또, 죽음은 필경 슬픈 것만은 아니리라. 세속적으로도 죽음은 한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지만, 그것은 때로 豊厚한 대상을 돌려받는 경우가 결코 없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예수의 죽음이 만 인류에게 救靈의 길을 개척하여 놓은 것처럼.9)

 

즉, 가톨릭 교리의 三知와 三不知를 통해 죽음이 결코 슬픈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세속적으로 죽음이 비록 한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기는 할지언정, 예수의 죽음이 인류에게 救靈의 길을 개척해 놓은 것처럼 그야말로 豊厚한 대상을 돌려받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으로써 종래에 거듭하던 종교적 전회를 이제는 접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림으로써 비로소 정서적 안정을 얻어 가톨릭에 귀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인식 전환과 더불어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자연 영성에 대한 체험이었다고 보인다. 그는 檢事가 되어 1946년 ‘朝鮮精版社 僞造紙幣 事件’을 담당하면서 명성을 떨쳤지만, 이 해 9월 검사직에 회의를 느껴 사임하였다. 그런데 그 직후 ‘흙으로 된 인간은 흙과 더불어, 흙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갈지니라’는 뜻에서 뚝섬 벌에다가 거처를 마련하여, 채소를 가꾸고 닭을 치며 돼지를 기르는 전원생활을 하였다. 이곳의 생활 속에서 자연에 대한 성찰을 깊이 있게 하였던 것임이 역력하다. 당시의 글 가운데 그의 자연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다음의 것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⑥ 南漢山의 遠景도 한 眺望이 아닐 수 없다. 시방이 한창으로 전원에 가득한 작물 - 오이, 가지, 호박, 토마토, 옥수수, 그 밖에 푸성귀들. 멀리 구르고 있는 거름마차, 드나드는 장사꾼들의 짐 실은 引車며 방금 일손에서 놓인 사람들의 그림자, 구름, 하늘, 버드나무 숲을 비끼는 바람 - 모두 저물어가는 郊外의 一場의 風景이다.10)

 

이러한 전원생활을 통해 그는 자연에 대한 체험을 생활화하였다. 이 당시의 자연에 대한 체험은 이후 그 자신의 靈性的 成長에 적지 않게 기여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大法院長 金炳魯의 간청으로 흙에 대한 미련과 ‘재판’에 대한 회의로 망설이다가 法曹界에 복귀하여 서울地方法院判事로 재직하는 한편, 1948년부터는 中央大學에서 法學을 강의하기도 하였다.11) 그러던 그는 당시의 누구에게나 그러하였듯이 전혀 예단할 수조차 없었던 사건들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새로운 인생의 항로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歸着點은 가톨릭 入敎였다.

 

 

3. 법관 김홍섭의 가톨릭 입교 이후의 활동과 가톨릭시즘 형성

 

그가 가톨릭에 入敎한 것은 6ㆍ25동란이 끝나갈 무렵으로 서울로 還都한 다음이었다. 入敎 이후 그의 생활에서 드러난 획기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다음의 기록이 있다.

 

⑦ 서울로 환도한 다음 그는 결국 가톨릭에 귀정하였으니, 1953년 복자 축일에 김 판사 가족 전원이 영세 입교하였다.

김 판사는 두고두고 찾던 것을 그제 얻었다. 그는 평소에 느끼기를 우주관, 인생관에 있어서는 기독교가 옳다. 그렇다. 절대자가 없을 수 없다. 그런데 도덕을 닦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불교가 옳다. 그러니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융합시킬 수 없을까하고 생각하여 왔었는데, 이제 천주교에 들어와 보니, 이 두 가지가 잘 융합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고 지극히 만족히 생각하였다.12)

 

가족과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스스로 토로하기를 ‘두고두고 찾던 것을 그제 얻었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가 당시에 절절히 體得한 바를 여기에 잘 정리해주었다고 보여 진다. 즉 평소에 우주관과 인생관은 基督敎가 옳고, 도덕 수양의 방법론은 佛敎가 옳다고 여겨, 이 둘을 융합시킬 수 있는 방도를 강구하던 차에 天主敎에는 이 둘이 ‘잘 융합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고 지극히 만족히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그의 기독교, 불교 그리고 천주교에 대한 인식은 각 종교의 고유한 입장에서 보면 옳다커니 그르다 커니 논란의 여지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김홍섭이 그렇게 인식하였다는 점은 이미 변함이 없는 역사적 사실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인식에 토대를 둔 그의 생활은 이후 지속되었는데, 이와 관련하여서는 아래의 글이 참조가 된다.

 

⑧ 천주교 신앙에서 새로운 경지를 찾은 그는 이런 감격과 상념을 《무명》, 《창세기초》, 《무상을 넘어서》와 같은 시집과 수필집으로 발표하였다. 김홍섭의 재판과 인간의 문제, 특히 범죄인에 대한 형량과 수감자의 처우 문제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고민은 독특한 법인간학과 法神學의 경지를 이루었다. 그가 성호를 긋고 미사를 드리는 듯한 분위기로 재판을 진행하면 피고마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13)

 

그는 자신의 변모를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詩集으로서 《無明》(通文館, 1954)을, 그리고 隨筆集 《創世記抄》(育成閣, 1954)를 연이어 출간하고, 뒤이어 또 하나의 隨筆集 《無常을 넘어서》(正音社, 1960)를 출간하여 자신의 내면 의식을 전면적으로 표출하였다. 이러한 그의 저술들을 통해 그는 자신의 가톨릭시즘의 正體性을 있는 그대로 여실히 드러내었는데, 그 자신이 종전에 지니고 있었던 몇 가지 선입견을 정리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였다.

 

몇 가지 선입견은 “(1) 천주교는 기독교 諸流波 중의 하나로서 그것은 유태교의 후신, 구약을 믿는 구교라는 점, (2) 성모 공경의 모순성, (3) 고해 제도의 부자연성, (4) 교황 지배의 불합리성, (5) 중세기 문화 사상에서 범한 諸過誤 등”이었다.14) 하지만 얼마 후 그 자신의 표현대로 ‘이상 모든 문제에 대한 의혹이 완전히 풀리면서’, 그에 대한 답으로 “(1)은 천주교만이 유일, 정통의 교의와 신앙을 간직하여 내려온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이다. 여타의 기독교 유파는 전부가 이의 모사한 것에 불과함, (2)와 (3)은 허다한 先聖의 修行 足跡은 後進의 지표와 격려가 되는 것이며, 또 이것이야말로 다른 諸聖事와 더불어 내가 그토록 찾아 마지않던 進度에의 발판이요 방법이었다는 것, (4)는 (1)과 더불어 천주교가 正統 眞敎임을 증명하고, 또 보장하는 것인 점, (5)는 중세기 천주교회가 서양 문화사상에서 점한 정당한 위치와 공적이 그동안 얼마나 왜곡 유포되었던 것인가를 알고 경악하였음”15)이라고 적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전면적인 인식의 전환을 토대로 형성된 그의 가톨릭시즘은 그 자신이 법관이었으므로 재판과 인간의 문제로 투영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로 앞서 인용한 글에서처럼 법인간학과 법신학의 경지를 이루었고, 그에 따라서 “그가 성호를 긋고 미사를 드리는 듯한 분위기로 재판을 진행하면 피고마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면 이와 같은 그의 가톨릭시즘은 어떤 토대 위에서 형성되었던 것일까? 그의 가톨릭시즘의 형성을 뒷받침해주는 두 축은 聖母 信心과 殉敎者 恭敬 信心에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에 다른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은 성모 신심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글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⑨ 마치 聖書가 홀연 하늘로부터 떨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예수의 탄생도 신에서 인간에로 돌연 換生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의 受胎가 特異하였을 뿐, 受胎 후는 전연 凡人과 똑같은 경로의 달수와 진통을 겪으셨고, 公 - 이전의 생활 30년간은 專門學者로도 考證해 낼 수 없으리만큼 평범 이하에 묻혀서 지내셨다. 구차한 살림 속에 마리아 - 어머니를 도와 심부름도 하셨을 것이고, 木手인 아버지를 따라 작은 목수 노릇도 하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情을 붙여서 지낸 가정이요, 어머니 마리아에게 대한 憐憫은 마지막 十字架의 고통 속에서도 차마 잊을 길이 없어서, 전에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에게 後事를 懇曲히 부탁하시던 것으로 보아도 넉넉히 알만하다… 30년 동안 모친으로 극진히 섬기셨으며, 그 생애가 끝나는 마당에서 차마 못 잊어하시던 어머니 마리아께 대하여, 가톨릭 敎人들이 愛慕의 情을 붙여 恭敬하는 것이 무엇이 불가하다는 말인지.16)

 

그는 인간 예수에게 있어서도 그의 受胎가 특이하였을 뿐 지극히 평범한 생활의 연속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자식으로서 부모 특히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연민이 컸음을 언급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30년 동안 극진히 모친으로 섬겼던 어머니 마리아에게 ‘가톨릭 교인이 애모의 정을 붙여 공경하는 것이 무엇이 불가하다는 말인지?’라고 적고 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입장에서, 그가 그토록 연민하던 어머니 마리아께 대한 애모의 정을 표시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취지로 성모 신심을 설명하고 있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한편 그의 가톨릭시즘에 있어서 또 하나의 축은 殉敎者 恭敬 信心의 體驗이었다. 특히 全州 地方法院長으로 근무할 때 登山을 즐기던 그가 인근의 全州 致命山에서 李順伊 누갈다를 위시한 여러 구의 순교자 시신을 발굴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동참하면서부터 순교자 공경 신심이 강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그에 따라 1959년 3월에는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이순이 누갈다의 순교기념탑을 건립할 정도였다. 그리고 〈春香과 루갈다-특히 루갈다의 生涯와 그 事蹟-〉 등의 글을 써서 발표하기도 하였다.17) 그의 강렬한 순교자 공경 신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글들이 입증한다.

 

⑩-가 그는 매일 미사참례와 영성체를 궐하지 않았고, 저녁에는 온 가족들과 함께 만과를 바쳤으며 전주지방 법원장으로 있을 때는 날마다 순교자 누갈다 묘지에 참배하였다.18)

 

⑩-나 본시 眞擊하려는 敎徒에게 있어, 순교자의 정신과 그의 사적이란 훌륭한 하나의 도표요 烽火이며, 위안이요 격려이기도 한 것이다. 持身, 守戒, 수덕, 전교에 있어 순교자의 정신을 상기하고 그를 본뜨기를 바란다는 것은 얼마나 효과적인 방법일 것인가! 千萬 思量이 하나의 ‘行’-실천만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19)

 

매일같이 미사참례와 영성체를 궐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도 대단한 신앙심을 드러내 주는 것임에 再論의 여지가 없다. 더욱이 저녁에 온 가족과 함께 晩課, 즉 저녁 기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바쳤다는 사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法院長으로서의 막중한 업무를 고스란히 다 수행하면서도 날마다 殉敎者 이순이 누갈다의 墓地를 참배한 사실은 특기할 만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게다가 자신의 이러한 순교자 공경 신심에 대해서 스스로 ‘순교자의 정신을 상기하고 그를 본뜨기를 바란다는 것은 얼마나 효과적인 방법일 것인가! 千萬 思量이 하나의 ‘行’-실천만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서술한 것 역시 그러하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그가 돈독한 신심을 실제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은 천주교 신자로서 예나 지금이나 또는 시대를 초월하여 언제나 지극히 모범이 된다고 평가해 마땅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가 지녔던 영성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되는 바는 당시로서는 누구에게서나 찾아보기가 어려운 自然 靈性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 제3회에 入會하는 게 아닌가 여겨진다. 후술하는 바처럼 성 프란치스코의 자연 영성을 위시하여 그의 영성 전반을 잇고 따르는 平信徒들의 信心 團體가 바로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 제3회이기 때문이다.

 

 

4. 김홍섭의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 제3회 입회와 성 프란치스코 영성의 실천

 

김홍섭은 1964년에 이르러 聖 프란치스코 修道會 第3會(이른바 在俗 프란치스코會)에 입회함으로써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잇고 따르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와 관련된 기록 가운데 우선 주목할 만한 것으로 다음의 글이 있다.

 

⑪ 1964년 1월에는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대전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가본 후, “8남매를 다 키운 다음에는 대전 수도원에 가서 종지기로 일평생을 지내고 싶다”는 말을 가끔 하곤 했는데, 형제회 회원이 되어 평신도로서 수도 생활의 꿈이 이루어진 셈이다… 프란치스코회 신부들을 자주 만나 형제회 생활을 하곤 했다. 그는 재판의 공정, 인간의 참된 삶에 대한 불꽃 같은 신념으로 사회 정화와 인간 구원에 전심전력한 재속 프란치스칸으로서 우리 마음에서 길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20)

 

이 글을 통해 그가 大田 所在의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가본 후, 자녀들을 다 기른 뒤에는 대전 수도원에 가서 종지기로 일평생을 지내고 싶어 했을 정도로 평신도로서 수도 생활의 꿈을 이루고 싶어 했음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그에게 있어서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은 본받을 대상으로써 점철되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텐데, 그런 가운데서도 특히 그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익숙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란치스코의 자연 영성에 관한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가운데 특히 자연 영성은 어떤 내용이었으며, 이를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는 어떻게 실천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따르는 평신도 신심단체인 소위 재속 프란치스코회에서는 실제의 현실 생활 속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었는지를 먼저 알아본 뒤에, 김홍섭이 이를 실천하며 살았던 실제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성 프란치스코의 자연 영성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는 모든 것이 같은 근원에서 생겨난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아주 미미한 피조물도 형제 ‧ 자매라고 불렀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태양의 노래〉가 그의 자연 영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21) 프란치스코는 이 노래를 통해 ‘우리의 고귀한 형제 태양’과 ‘자매인 달’이, ‘형제 바람’과 ‘자매 물’이, ‘형제 불’과 우리의 ‘자매 어머니 땅’이 함께 형제가 되어, ‘당신의 사랑으로 서로 용서하고, 병과 시련을 견디어 내는’ 모든 사람과 일치 안에서 높으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던 것이다.22)

 

이렇듯이 프란치스코가 모든 피조물 안에 있는 아름다움과 선함과 유익한 것을 감지하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모든 소유적인 독점에서 해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음에 틀림이 없다.23) 성 프란치스코는 이럴 정도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서, 성경에 나오는 피조물에 대한 가장 온화한 동정심을 드러냈으며,24) 모든 것을 선하다고 보기 때문에 그의 신학은 하나의 인간학을 함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르러서는 생태학으로까지 연결된다.25) 그런데 생태학(에콜로기, Ökologie)이란 용어는 본디 ‘집’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오이코스(oikos)에서 파생된 것이므로, 글자 그대로 ‘집에 관한 학문’을 뜻하며, 이 ‘집’은〈시편〉104편의 의미에서 볼 때,26) 철저히 창조의 집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태학은 모든 생명체가 사는 환경의 집에서 그것의 공동생활에 대하여 인식하는 학문이다.27)

 

이 생태학에서는 자연을 서로 구별하기는 하지만, 결국은 하나인 유기적 총체로 본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학이 창조의 신비보다는 구원의 신비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구원과 창조를 연결지으려는 흐름이 있어 왔고, 이 흐름은 다름 아닌 바로 성 프란치스코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28) 게다가 그는 하느님 앞에서는 물론이고, 형제들 앞에서나 동물과 사물들 앞에서도 언제나 현존을 느끼면서 애정과 성실성을 다해 다가갔으므로, 그의 현존 의식에서 유래되는 인간학적 태도는 전 인류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29) 한마디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서구 문화에서 자연과의 형제애를 모범적으로 보여 준 전형적인 인물이기에, 그를 생태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30) 이러한 평가의 구체적인 면면은 1989년에 발표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담화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 담화문에서는 이미 1979년에 성 프란치스코를 자연 환경을 증진시키는 사람들의 천상 수호자로 선포하였음을 상기시키면서, 그가 “모든 피조물들을 - 동물들과 식물들, 온갖 자연들, 형제자매인 해와 달까지 - 초대하여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주님을 찬미하였음”을 찬양하였다.31)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위대하고도 숭고한 형제애에 비추어 모든 피조물을 존중하고 보살펴야 할 우리의 중대한 의무”라고 하겠다. 물론 1939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이탈리아의 주보성인으로 정해졌던 성 프란치스코는 1979년 11월 2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생태학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하였으므로, 1980월 4월 6일의 부활절부터 이렇게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32)

 

2)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자연 영성 실천

 

이러한 성 프란치스코의 자연 영성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가 《회헌》에서 규정하고 있는 자연 영성 수도 생활이야말로 모든 이의 귀감이 된다고 하겠다. 이 《회헌》에서 우선적으로 주목되는 것은 평생토록 정결함을 서약한 형제들에 대해서 ‘정결 서원을 살기 위하여 형제들은 순수한 마음을 간직할 것이며, 피조물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음을 인식하여 모든 피조물을 겸손하고 신심 있게 바라보도록 주의할 것이다’33)라고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들은 성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자들로서…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 안에서 복음의 소식을 온 세계에 전하고 화해와 평화와 정의를 행동으로 설교해야 하며, 피조물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주어야 한다’34)고 단정적으로 자연 영성의 필요성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자연을 형제로 받아들여야 함도 규정하였는데, ‘형제들은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 오늘날 어느 곳에서나 위협받고 있는 자연에 대해 존경스런 태도를 보일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연을 완전히 형제적인 것이 되게 하고 창조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35)라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성자가 성부로부터 파견되신 것처럼 모든 형제들은 성령의 인도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그분의 음성을 증거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외에는 전능하신 분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온 세상에 파견되는 것이다’36)라고 함으로써,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형제들을 온 세상에 파견되는 것이라고까지 정의 내리고 있을 정도이다.

 

한편 〈프란치스칸 신앙 고백〉 가운데에는 ‘이 세상을 바라보노라면 / 생명은 곧 사랑이고 / 모든 생명의 아버지는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오니 / 우리로 하여금 / 모든 피조물을 형제자매로 대하여 살도록 재촉하시나이다’37)라는 구절이 있다. 뿐만 아니라 프란치스칸들의 《시간 전례서》에는 9월 17일을 ‘우리 사부 세라핌 성 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을 기리는 날로 정하여 기도를 함이 명시되어 있다. 그날 아침기도 속의 마침기도 가운데 하나로 ‘세상이 냉담해지기 시작하자 성 프란치스코를 당신 사랑의 표징으로 보내 주신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 주님께서는 그의 몸에 당신 아드님의 수난 상처를 새겨 주시어 그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충실한 모상이 되게 하였으니, 그의 기도를 들으시어 저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게 하시어 하느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소서’38)라는 기도문이 들어 있다. 또한 10월 4일의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 세라피코 부제 세 수도회의 창설자 날’, 〈성모의 노래〉 후렴에서는 ‘프란치스코에게는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을 향한 기쁨의 노래였고, 그가 창조주께 완전히 순종하였기에 모든 피조물이 순종하였도다’39)라고 읊도록 되어 있다.

 

3)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 재속 3회원으로서 김홍섭의 실천적 삶

 

수도원 소속의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도 성직자와 함께 매일 바치는 《聖務日禱》 중 10월 4일의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에는 제2독서로서 성 프란치스코가 〈모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인용하여 ‘다른 사람들보다도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보다는 우리가 종이 되어야 하며, 하느님 때문에 피조물인 모든 사람에게 복종해야 합니다’40)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가 뒷부분에서 인용한 말씀을 원문에서 찾아보면 바로〈베드로의 첫째 서간〉의 2장 13절을 거론한 것임을 알 수 있다.41) 이럴 정도로 《성무일도》에도 성 프란치스코의 자연 영성을 본받으려는 대목이 몇 군데에 걸쳐서 들어 있음이 입증되는데, 이 《성무일도》가 채택된 제2차 바티칸 公議會의 첫 번째 문헌인 〈전례헌장〉(Sacrosanctum Concilium)에 따르면 ‘성교회의 소리, 즉 하느님을 공적으로 찬미하는 전 신비체의 소리’로서, ‘초대 그리스도교 전통을 따라 낮과 밤의 온 과정이 하느님께 대한 찬미로 말미암아 성화되도록 조직되어 있으며’, ‘성교회의 공식 기도이니만큼 신심의 원천이요, 개인 기도를 위한 滋養物’이므로, ‘참으로 신랑에게 이야기하는 新婦의 목소리이며, 또한 자기 몸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그리스도의 기도’에 이어서 이를 바침으로써 ‘하느님께 간단없이 찬미를 드리고,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전구한다’고 되어 있다.42)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헌장에 따라 평신도들도 이후 성직자와 수도자들 못지않게 이를 기도함이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는데, 한국 가톨릭의 프란치스칸들도 이를 따라 매일매일 기도함이 일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로, 그들의 《회헌》 가운데에 빠짐없이 이를 지키도록 거듭 강조함이 규정되어 있다.43) 따라서 이만큼 성 프란치스코의 자연 영성이 현재에도 부지불식간에 직분과 상관없이 가톨릭 신자들에 의해 되뇌어지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특별히 재속 프란치스코회, 즉 프란치스코 제3회의 회원들이 바치는 성무일도 속에는 청원기도의 한 구절로 ‘생태계 보존의 수호자이신 프란치스코여, 당신은 주께서 창조하신 세상 만물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 뵙고 찬미하였사오니 각종 오염으로 훼손되고 있는 자연을 보살피시고, 우리도 자연을 통해 주님을 찬미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44)라는 대목이 있다.45)

 

김홍섭이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 재속 3회(이하 ‘재속 3회’라 약칭)에 입회한 이후 그 역시 이러한 삶을 여느 재속 3회원과 똑같이 지속적으로 지내게 되었음은 재론을 필요치 않는다. 원래 재속 3회는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라 회칙을 준수하며 세속 생활 중에서 완덕에 도달코자 노력하는 단체이니 만큼,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성황에 전력을 기울이고, 나아가서 이웃 사람의 성화와 그들에 대한 사랑의 봉사로 주님의 영광을 희구하며, 적어도 각자의 가정과 직장 환경에서 복음적 표양으로 사랑과 평화의 사자 구실을 해야 할 사명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재속 3회는 어떤 단일 목적을 위한 신심 단체가 아니고 의연한 수도회이니만큼, 그의 생활을 전반적으로 규제하는 회의 규범에 따라야 하는데, 그 기본 요령은 복음 정신의 실천, 특히 愛主愛人, 청빈, 절제, 겸비, 정결, 근로, 극기, 찬미, 봉사 등이다.46)

 

入會한 이후 김홍섭은 실제로 재속 3회 회원으로서 이 기본 요령에 충실하며 실천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이에 대한 증거로서는 아래와 같은 尹亨重(1903~1979) 神父의 증언이 있다.

 

⑫ 영세 입교한 김 판사에게는 점차로 수도자 ‘타입’이 박혀졌다. 한번은 진지한 태도로 내게 묻기를 자기로서 수도 생활을 할 수 없겠느냐고 문의하기에, 가정에 대한 책임이 더 크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나는 대답한 일이 있다. 김 판사의 부인은 증언한다. 그분이 결혼 전에 가톨릭을 알았더라면 틀림없이 수도원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김 판사는 대전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을 가본 일이 있었다. 그는 8남매를 다 키운 다음에는 대전 수도원에 가서 종지기로 일평생을 지내고 싶다는 말을 가끔 하였다… 검소한 생활에 자기 생일잔치를 거부하는 그였지만, 전교상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친지들을 자기 집에 초청하여 간소한 만찬을 베푸는 수도 가끔 있었다. 김 판사의 전교의 결과로 6~7명의 법관이 영세 입교하였다. 그는 검소하고 언제나 겸손하였다. 양복을 지어 입는 일은 없고, 시장에서 중고품을 사 입었으며, ‘오버’는 미군 모포지에 물감을 들여서 입었고,‘비닐’신이나 검정 고무신으로 출퇴근하는 수가 많았다. 그는 판사였지만, 판사 티는 조금도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허술한 보통 시민에 불과하였다.47)

 

이런 얘기를 통해서 수도원에 들어가서 신앙생활을 하고픈 그의 소망이 잘 드러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얼마나 청빈하고 검소하게 살려고 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요컨대 그는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종지기로 살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判事로서 사회적 지위가 대단함에도 불구하고 의복에 있어서는 양복도 맞춰 입지 않고 중고품을 시장에서 사 입었으며, 신발로는 아예 검정 고무신을 신고 출퇴근하는 일이 많았을 정도로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을 실행하였다. 이러한 삶에서 그야말로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본받고자 했던 그의 면면이 그대로 우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였기에 의당 성 프란치스코의 다양한 영성 속에 뚜렷이 자리매김하고 있었다고 여겨지는 자연 영성이 그에게는 역시 매우 매력적이어서 이를 체득하고 따랐던 것 같다. 이렇게 여길 수 있는 여지는 그가 이미 재속 3회에 입회하기 훨씬 이전부터 자연 영성 자체를 지니고 있었으며, 詩와 隨筆을 통해 이를 표출하고 있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가 있다. 그러면 그가 지녔던 자연 영성의 핵심은 무엇이며, 어떠한 특징을 지니는 것인가? 이에 대해 이제 살펴보기로 한다.

 

 

5. 김홍섭의 인간 중심 극복과 상생 추구의 자연 영성

 

김홍섭이 同時代의 다른 인물들에게서는 거의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시대에 앞서 자연 자체에도 영성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자연 영성을 지니고 있었음은 特記해 옳다고 생각한다. 1950년 6ㆍ25동란이라는 혹독한 전쟁을 겪은 이후의 궁핍한 생활 속에서 누구 할 것 없이 끼니를 어찌하면 거르지 않으면서 남부럽지 않고 살 것인가에만 정신을 쏟았다. 이후 1960년대에 들어서서는 경제 논리만을 내세워 어떻게 하면 남부럽지 않게 잘 살 것인가에만 혈안이 되어 국토 개발이란 이름으로 앞장서서 자연을 대대적으로 훼손할 뿐 보호한다는 개념조차도 설 자리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1950ㆍ60년대에 걸쳐 그는 詩나 隨筆을 통해 분명 자연에도 영성이 존재함을 설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영성을 높이 평가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자연에도 영성이 있음을 드러낸 그의 글은 적지 않은 편인데, 단적인 예를 하나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⑬ 童子가 너를 보고 귀여라고 하던구나 / 나는 땅의 精氣 童子는 人間의 꽃 / 피인 뜻 안다 할 이는 저뿐이라 하리까.48)

 

제목도 〈花心童心〉이라 하여 꽃에도 마음, 즉 영성이 있음을 전제로 하면서 꽃을 ‘너’로 지칭하고, 인간인 ‘나’를 ‘땅의 정기’라고 표현하였으며, 꽃을 아름답다 하는 童子를 ‘인간의 꽃’으로 삼고 있다. 이를 보면 앞서 지적한 바처럼 마치 성 프란치스코가 〈태양의 노래〉에서 ‘우리의 고귀한 형제 태양’과 ‘자매인 달’이, ‘형제 바람’과 ‘자매 물’이, ‘형제 불’과 우리의 ‘자매 어머니 땅’이 함께 형제가 되어, ‘당신의 사랑으로 서로 용서하고 병과 시련을 견디어 내는’ 모든 사람과 일치 안에서 높으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던 것을 연상케 한다. 따라서 김홍섭의 이러한 자연 영성 역시 성 프란치스코 못지않은 수준의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더욱이 여기에서 하나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자연 영성이 자연 자체에도 영성이 있다는 수준에만 머문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한 단계 더 발전시켜 자연 영성이 인간 중심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 다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그의 자연 영성을 뚜렷하게 밝힌 대표적인 예의 하나는 아래의 글이다.

 

⑭ 왜 피며 또 그렇게 精美하게 피는지 - 저녁에 피었다가 아침에 지는 꽃, 그늘에서 피어 그늘 속에서 시드는 꽃, 그 밖에 다른 유명무명의 꽃들은 인간 중심에서, 자체 중심으로, 本然의 方位에로 돌려서 대할 때 나는 다만 그 앞에서 놀랍고 기이한 감에 잠길 뿐이다. 그리하여 어여삐 피는 꽃의 의미를 믿는 마음 - 그것을 내 안에 의식한다.49)

 

이 글에서 분명 그는 ‘인간 중심에서 자체 중심으로’라고 명시하여 꽃의 영성을 인간 중심으로 볼 것이 아니라 꽃의 영성 자체로 보아야 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꽃 속에서 드러나는 자연의 이치에 대해 놀라워하며 참으로 기이한다는 인식을 깊이하면서 그 의미를 자신의 영성 속에 새기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는 한편 김홍섭은 자연 영성이 無常한 게 아니라 常生이며, 天上의 妙華를 이루기 전에 不滅임을 강조하였다.50) 그럼으로써 자신의 그림자는 바람이며, 자신의 뜻이 蒼天이라고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⑮-가 이 길을 가자꾸나 가는 대로 가자꾸나 / 흐르는 물줄 따라 나는 새벗이 되어 / 가다가 해 저물거든 돌베개에 쉬자꾸나.

 

⑮-나 바람은 내 그림자 蒼天이 내 뜻인저 / 功名이 허랑커니 富貴 기더 믿을 것이 / 草野에 知己 많으니 福地 옌가 하오.51)

 

자신이 그야말로 田園의 ‘새 벗’이 되었으므로 草野에 많은 ‘知己’가 있는 셈이니 자신이 살고 있는 이곳이야말로 곧 福地, 복 받은 땅이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중심이 아닌 자연 본연 중심의 자연 영성을 체득함으로써 知己인 이들과 더불어 常生하는 이 현세가 곧바로 복 받은 땅이라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吐露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자연의 법칙이 다름 아닌 順理의 법칙임을 說破하고 있다.

 

⑯ 자연의 법칙이 만인에 의하여 順服되고 불평 없이 추진되는 이유는 오직 그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이치에 맞는, 즉 順理의 法則인 때문인 것을 나는 하나 더 헤아려 두고 싶다. 가사 천 길의 절벽 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瀑水의 알알을 헤아려 보라. 百年 喬木의 가지가지에 맺는 연약한 화변을 살펴보라. 巨와 細, 嚴과 柔의 대조가 이토록 현격하되 이것이 하나요, 자연이요, 도리요, 극치임을 나타내지 않은 것이 다시 있는가.52)

 

그는 천 길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수의 한 알 한 알, 백 년 묵은 喬木의 가지가지에 맺은 꽃을 예로 제시하면서 거대하면서도 세밀하고, 엄격하면서도 유연한 대조가 결국엔 하나이며, 그것 자체가 자연이자 그것의 도리이며 극치를 나타낸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로 비추어 김홍섭의 자연 영성은 한마디로 인간 중심의 그것을 극복하고 자연 자체를 중심으로 여기는 것이었으며, 어느 것과도 常生을 추구하는 것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김홍섭의 자연 영성에 대해서 그의 전기를 저술한 崔鍾庫가 ‘김홍섭은 또한 자연 애호가요, 자연 연구가다. 아니 그는 한 자연 신학자이다. 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산과 들, 풀과 꽃, 별과 물의 속삭임을 찾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에게 있어서 자연은 인간과 대립된, 인간의 생존의 수단으로 착취되는 대상이 아니라 신의 共造物로서 그 앞에서 신의 현존과 영원의 의식을 일깨우는 한 계시자였다’53)고 정리한 바가 역시 크게 참고가 된다.

 

 

6. 맺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김홍섭은 법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종교적 구도자로서 생존 당시에 이미 높은 지명도를 지녔으며, 아울러 자연 중심 및 상생 추구의 자연 영성을 지닌 뛰어난 靈性家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평신도로서 가톨릭 전교에도 누구보다도 열심히 앞장섰던 인물이었는데, 이 점은 그에 관한 다음의 글에 잘 씌어져 있다.

 

⑰ 죄수뿐 아니라 멀리 시골 공소에까지 복음 전파에 여념이 없었던 그는 온전히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했다. 한동안 강원도에 다닌 것은 그의 말대로 하면 ‘노다지’ 때문이었다. 그가 강원도 어떤 촌락에 가보니까 촌민들이 마음의 의지할 바를 몰라 미신을 숭상하더란다. 그래서 그들에게 천주 존재와 영혼 불멸 등 천주 교리를 설명하여 주었더니 잘 받아들여 종종 그들에게 가서 교리를 설명하여 주었다. 이들을 가리켜 ‘노다지’라 하였던 것이다… 1964년엔 서울 고등법원장을 지냈고, 법관직을 물러난 후 변호사로 일했다. 이후 간암과 투병 중이던 1965년 3월 16일 눈 덮인 북한산을 등산하던 중 마루터에서 숨졌다. 그의 영정 앞에는 사형수였던 10여 명 대자의 사진이 나란히 놓여 있어 조객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54)

 

평신도이지만 法官이라는 직책을 십분 활용하여 죄수들에게 전교함은 물론이고, 강원도 산골 마을에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힘을 쏟았던 것이다. 그가 강원도 촌민들을 ‘노다지’라고 했다고 하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노다지’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필요한 물건이나 이익이 한 군데서 많이 쏟아져 나오는 일, 또는 그 물건이나 이익’을 일컫는다.55) 그만큼 프로테스탄트 등 다른 종교에서는 손을 못 대게하고 오로지 자신만이 가톨릭을 전교할 수 있었음을 비유하여 한 말이라고 헤아려진다. 이처럼 평신도로서 정력적으로 전교에 열심이었던 그를 가장 높이 평가한 이는 당시 가톨릭의 首長이었던 盧基南 大主敎로, 그는 김홍섭의 사후에 다음과 같이 썼다.

 

⑱ 돌이켜 보면, 김 바오로 판사와 같은 平信徒 知性人이 1960년대에 한국 천주교회에서 활동하였다고 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우리 가톨릭교회가 눈에 보이지 않는 폭넓은 底力을 갖게 된 데에는 聖職者들의 노력만이 아니라 김홍섭 판사나 張勉 전 부통령 같은 平信徒 使徒職의 모본적 인물들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김 판사의 경우는 법률가로서도 모범적인 법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改新敎에서 출발하여 불교를 거쳐 가톨릭 聖敎會로 귀의한 원숙한 求道者였기 때문에 한국 천주교회사에 길이 남을 존재라고 생각된다. 나는 이 老境에도 지난 날 김 판사가 간간이 나를 찾아 들려주던 정리된 社會觀과 깊은 인생 체험의 고백들을 문득문득 회상하곤 한다. 나도 불원간 천주의 곁에 가서 그를 다시 만나겠지만 이 땅 위에서 참으로 잊혀지지 않는 인물이다.56)

 

이를 통해 노기남 대주교가 1960년대의 한국 사회에서 천주교회가 폭넓은 저력을 갖게 된 데에는 김홍섭을 비롯한 張勉 등의 平信徒 使道職의 모본적인 인물들의 활약이 지대했다고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노 대주교와 같은 當代의 대표적 司祭가 평신도의 역할을 이토록 높이 기린 것은 종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지극히 이례적이고 거의 유일무이한 경우가 아닐까 여겨지는데, 특히 ‘한국 천주교회사에 길이 남을 존재’라고 했으며, 나아가 ‘이 땅 위에서 참으로 잊혀 지지 않는 인물’이라고까지 쓰고 있음이 주목된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살펴본 바대로 시대에 앞서 인간 중심의 자연 영성을 일찍이 극복하여 자연 중심 및 상생 추구의 자연 영성을 지녔음은 물론이고, 전교에도 남달리 열심이었던 김홍섭을 현대 한국천주교회사의 한 페이지를 분명히 장식할 평신도의 대표적인 존재였다고 평가해 마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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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李丙璘, 〈序文〉, 《使徒法官 金洪燮》, 育法社, 1975, 13쪽.

 

2) 재속 프란치스꼬회 50주년 기념집 편집위원회, 《평화의 사도 ; 한국 재속프란치스꼬회 50주년 기념집》, 재속 프란치스꼬 한국연합회, 1988, 228~229쪽.

 

3) 盧基南, 〈축하의 말씀〉, 《使徒法官 金洪燮》, 15쪽.

 

4) 재속 프란치스꼬회 50주년 기념집 편집위원회, 앞의 책, 227~228쪽.

 

5) 최종고, 《使徒法官 金洪燮》, 1975 ; 〈사형수의 아버지 김홍섭 바오로〉, 《경향잡지》 1462호(1990. 1) 참조.

 

6) 尹亨重, 〈슬프다 金洪燮 판사〉, 《가톨릭시보》 1965. 4. 4 ; 김홍섭, 《無常을 넘어서》, 성바오로 출판사, 1971, 525쪽 ; 2003, 526~527쪽.

 

7) 최종고, 앞의 잡지, 103쪽.

 

8) 김홍섭, 〈無常에서 常生에로〉, 앞의 책, 1971, 321~322쪽 ; 2003, 109~110쪽.

 

9) 김홍섭, 〈情과 無常에서〉, 앞의 책, 1971, 124쪽 ; 2003, 153쪽.

 

10) 김홍섭, 〈田園〉, 앞의 책, 1971, 39~40쪽 ; 2003, 56쪽.

 

11) 재속 프란치스꼬회 50주년 기념집 편집위원회, 앞의 책, 226쪽.

 

12) 尹亨重, 〈슬프다 金洪燮 判事〉, 《無常을 넘어서》, 1971, 525~526쪽 ; 2003, 526~ 527쪽.

 

13) 최종고, 앞의 잡지, 103쪽.

 

14) 김홍섭, 〈無常에서 常生에로-求道記-〉, 앞의 책, 1971, 337쪽 ; 2003, 125~126쪽.

 

15) 김홍섭, 앞의 글, 1971, 337~338쪽 ; 2003, 126쪽. 

 

16) 김홍섭, 〈어떤 프로테스탄트에게〉, 앞의 책, 1971, 169~170쪽 ; 2003, 282~283쪽.

 

17) 김홍섭, 앞의 글, 1971, 113~120쪽, 2003, 178~186쪽.

 

18) 尹亨重, 앞의 글, 1971, 526쪽 ; 2003, 527쪽.

 

19) 김홍섭, 〈殉敎者의 遺址를 찾아서〉, 앞의 책, 1971, 159쪽 ; 2003, 187쪽.

 

20) 재속 프란치스꼬회 50주년 기념집 편집위원회, 앞의 책, 228~229쪽.

 

21) 노용필, 〈성 프란치스코의 자연 영성과 한국 프란치스칸의 수도생활〉, 《인간연구》 11, 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 2006, 131~133쪽 ; 《종교 ‧ 생태 ‧ 영성》, 생명의 씨앗, 2007, 177~180쪽.

 

22) 강운자 : 헤수스 알바레스, 《수도생활 역사》 II, 성바오로, 2002, 223쪽.

 

23) 김현태 : 호세 메리노, 《프란치스칸 휴머니즘과 현대사상》,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992, 270~271쪽.

 

24) 권숙애 : 성 보나벤뚜라, 《보나벤뚜라에 의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 분도출판사, 1979, 91쪽. 보나벤투라는 1263년에 성 프란치스코 전기를 썼는데, 3년 후에는 이것이 유일하게 권위 있는 전기임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고 한다(박규태, 미르치아 엘리아데, 《세계종교사상사 3-무함마드에서 종교개혁의 시대까지》, 이학사, 2005, 304쪽).

 

25) 김현태 : 호세 메리노, 《프란치스칸 사상에 비추어 본 인간을 위한 미래 건설》, 분도출판사, 1990, 85쪽. 26) 〈시편〉 104편에서 피조물들의 자연 영성과 관련하여 가장 대표적인 구절은 특히 24절로 판단된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주님, 당신의 업적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모든 것을 당신 슬기로 이루시어 세상이 당신의 조물들로 가득합니다”(《성경》,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05, 1355쪽).

 

27) 이제민 : 쿠르트 마르티, 《창조 신앙-하느님의 생태학》, 분도출판사, 1995, 81쪽.

 

28) 김항섭 : 레오나르도 보프, 《생태 신학》, 가톨릭출판사, 1996, 53쪽.

 

29) 김현태, 〈프란치스칸 사상 안에서의 인간의 문제〉, 《프란치스칸 삶과 사상》 1, 프란치스칸사상연구소, 1992; 개제, 〈프란치스칸 사상 안에서 인간 문제와 스코투스의 인간학〉, 《둔스 스코투스의 철학 사상》,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994, 137쪽.

 

30) 김항섭 : 레오나르도 보프, 앞의 책, 59쪽.

 

31)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 하는 평화,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는 평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회보》 제56호(1990. 1. 1), 4~5쪽.

 

32) Agostino Cardinal Casaroli, Francis : Patron Saint of Ecology, The Cord : A Franciscan Spiritual Review, Vol. 30, No. 8, 1980, Franciscan Institute, p. 236.

 

33) 작은형제회 한국관구, 〈작은 형제들의 회헌〉 9-4, 《작은 형제들의 회칙 ‧ 회헌 ‧ 총규정》, 2006, 47쪽.

 

34) 작은형제회 한국관구, 〈작은 형제들의 회헌〉 1-2, 앞의 책, 41쪽.

 

35) 작은형제회 한국관구, 〈작은 형제들의 회헌〉 71, 앞의 책, 73쪽.

 

36) 작은형제회 한국관구, 〈작은 형제들의 회헌〉 83-1, 앞의 책, 79쪽.

 

37) 재속 프란치스꼬회 전국 형제회, 《재속 프란치스꼬회 지침서》, 1992, 632쪽.

 

38) 한국 프란치스칸 가족, 《(프란치스칸 가족을 위한) 시간 전례서》, 익산 성 글라라 수도원, 2000, 184쪽.

 

39) 한국 프란치스칸 가족, 앞의 책, 205쪽.

 

40)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엮음, 《성무일도》 IV 개정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1, 1471쪽.

 

41) 성 프란치스꼬회 한국관구,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소품집》, 분도출판사, 1973, 113

쪽.

 

4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69, 27~32쪽.

 

43) 예컨대 성녀 글라라의 가난한 자매회, 《수도 규칙과 회헌》, 성 글라라회 한국협의체, 2003, 89쪽에 보면, 〈전례헌장〉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음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성무일도는 ‘신랑을 향한 신부의 목소리이며,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비체와 함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로 자매들은 이를 정중하고 신심 깊게 거행할 것이며, ‘그들이 하느님께 이 같은 찬미를 드림으로써 자모이신 성교회의 이름으로 하느님 어좌 앞에 서 있으며’ 온종일, 즉 낮과 밤이 온통 성화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외에도 성무일도에 대한 세세한 규정이 이 구절의 전후에 잇따르고 있다. 또한 꼰벤뚜알 작은형제회의 《회헌》에도 성무일도와 관련된 상세한 규정들이 보이는데, 성무일도를 “매우 중하게 생각하여… 각 수도원에서는 《성무일도》체를 날마다 공동으로 드려야 하고… (만약 그렇지 못하면) 개인적으로라도 해야 하며…신자들도 참여하도록 권장할 것이다”라고 하였을 정도이다(《회헌-성 프란치스꼬의 꼰벤뚜알 작은형제회》, 로마 12사도 수도원, 1984, 123쪽 및 125쪽).

 

44) 재속 프란치스꼬회 전국 형제회, 〈시간경 소성무일도〉, 앞의 책, 293쪽.

 

45) 노용필, 앞의 글, 144~149쪽 ; 앞의 책, 192~198쪽.

 

46) 장면, 〈성 프란치스코 재속 3회〉,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증보판, 가톨릭출판사, 1999, 311~312쪽.

 

47) 尹亨重, 앞의 글, 1971, 526쪽 ; 2003, 527쪽.

 

48) 김홍섭, 〈花心童心〉, 앞의 책, 395쪽 ; 2003, 402~403쪽.

 

49) 김홍섭, 〈秋思〉, 앞의 책, 1971, 68쪽 ; 2003, 64쪽.

 

50) 이는 다음의 詩에서 읊조린 바가 있다.

‘… / 無常 아니라, 常生이라 / 그날, 네 精水를 받아 품은 때부터 / 내 안에 부푸는 생명의 움직임은. 天上의 妙華 이루기 전에 / 시방 바로 내 不滅의 燈明이어라 / 내 불멸의 등명이어라’(김홍섭,〈晩種〉, 앞의 책, 1971, 342쪽 ; 2003, 457쪽).

 

51) 김홍섭,〈田園風物帖〉, 앞의 책, 1971, 393쪽 ; 2003, 400~401쪽.

 

52) 김홍섭, 〈自然의 法則과 人間의 法律〉, 《法曹會誌》 1954년 8월호 ; 앞의 책, 1971, 89~90쪽 ; 2003, 137~138쪽.

 

53) 최종고, 〈자연법과 자연신학-김홍섭의 자연관〉, 앞의 책, 182쪽. 

 

54) 재속 프란치스꼬회 50주년 기념집 편집위원회, 앞의 책, 228쪽.

 

55) 이 말의 어원은 舊韓末의 역사에서 유래한다. 당시 구한말에는 外勢의 利權侵奪로 鑛山採掘權이 외국인에게 많이 넘어갔는데, 金이나 銀 같은 高價의 채굴된 광물을 캐내어 한국인 鑛夫들이 만지면 미국인들이 놀란 듯이 ‘손대지 말라’는 의미로서 ‘노 터치’(no touch)라고 외쳤는데, 영어를 잘 모르는 한국인 광부들이 그 말을 금이나 은 따위 광물을 뜻하는 말로 받아들이면서 ‘노다지’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해서 동양 최대의 매장량을 지닌 雲山金鑛이 노다지 광산으로 유명하였던 게 대표적인 예이다(李培鎔, 《韓國近代鑛業侵奪史硏究》, 一潮閣, 1989, 57 및 87~88쪽 참조).

 

56) 盧基南, 〈축하의 말씀〉, 《使徒法官 金洪燮》, 1975, 13~14쪽.

 

[교회사 연구 제29집, 2007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노용필(전북대학교 인문한국연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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