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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4일 (수)부활 제4주간 수요일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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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사회교리: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2416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1-19

사회교리 :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1) 하느님 나라

 

 

고통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가르침을 보면 우리가 이 고통 가득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도 있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선포하신 것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느님 나라의 개념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서의 한 구절을 봉독하시며 희년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2; 루카 4,18-19) 이어서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이 말씀 안에 하느님 나라의 요체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이 하느님 나라의 개념을 현실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분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셨으며, 병자들을 치유해주셨고, 죄인들과 어울리셨으며,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이러한 행위들의 공통점은 인간 고통의 해소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확립되는 과정은 인간 고통이 해결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미’와 ‘아직 아니’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그러나 ‘아직 아니’ 완성되었습니다. 완성을 향해가는 여정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투신으로 이루어집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중에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으셨습니다. 이를 통해 신앙인들의 투신이 결코 현실과 무관하지 않음을, 오히려 구체적 현실 안에서 일어나야 함을 증거해주셨습니다.

 

“복음이 제안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루카 4,43 참조). 이는 세상에서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에서 다스리시는 그만큼, 사회생활은 보편적인 형제애, 정의, 평화, 존엄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선포와 삶은 사회에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교황 프란치스코, 권고 「복음의 기쁨」, 180항) [2020년 1월 19일 연중 제2주일 의정부주보 5면, 김승연 프란치스코 신부(구리 부주임)]

 

 

사회교리 :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2) 사랑의 이중 계명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음의 핵심을 두 가지로 정리해 주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마태 22,37-39)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

 

사랑은 하느님께서 인간과 관계 맺는 방식을 말합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그 사랑으로 우리 인간들을 초대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서 온전히 계시되었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통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1)

 

 

이웃 사랑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를 통해 ‘이웃’의 범위를 생면부지의 사람으로까지 확장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었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더라도 그가 고통을 받고 있다면, 이웃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사회교리는 이 이웃 사랑을 사회적이고 구조적 차원으로까지 확장합니다.

 

“사회적 차원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상황에 따라 사회의 중개를 활용해 이웃의 삶을 개선하고 이웃의 가난을 초래하는 사회적 요인들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사랑의 행위, 자비의 행위를 통하여 인간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기 이웃의 실재적이고 절박한 필요에 응하는 것이다.”(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 「간추린 사회교리」, 208항)

 

생각해보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 채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위선이 됩니다. 하느님 사랑이 결여된 이웃 사랑 역시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훌륭한 행위라고 하더라도, 하느님 사랑이 결여된 이웃 사랑은 올바른 열매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하느님 대신에 자기 자신을 내세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함께 가야 하는 것이고 사회교리는 세상 안에서 이 두 사랑을 인도합니다.

 

“많은 사람이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지만 그들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인이자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언제나 이웃사랑을 거쳐 올라가는 하느님께 바치는 참된 예배를 망각합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9년 10월 27일 아마존 시노드 폐막미사 강론) [2020년 1월 26일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해외 원조 주일) 의정부주보 5면, 김승연 프란치스코 신부(구리 부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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