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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19일 (금)부활 제3주간 금요일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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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1988-2018 복음의 기쁨으로1: 한국 교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45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8-05-12

[1988-2018 복음의 기쁨으로] 특별 기획을 시작하며


복음의 기쁨으로 맞서도록… 신앙인이여 응답하라

 

 

영화 ‘1987’에 비친 명동대성당은 펄펄 끓었다. 

 

시민들은 교회 품에서 민주화와 사회 정의의 열망을 분출했다. 교회는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정의와 공정’(시편 33,5)으로 변혁의 길을 열었다. 또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나름의 책무를 다했다. 이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와 신뢰가 한국 천주교의 비약적인 교세 성장을 견인했다. 

 

눈 밝은 신앙인은 영화 속에서 질문을 하나 찾아냈다. 1987년 이후 교회는?

 

혹자는 말한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이제 교회에 찾아가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다고. 대신 굴뚝에 올라가거나 광장으로 간다고. 종교가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시대가 저물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다는 아니지만, 일정 부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30년 세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많은 것이 변했다. 이 순간에도 속도에 발맞추기 버거울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시대가 변한만큼 교회 내부 상황과 종교를 둘러싼 지형도 바뀌었다.

 

내부적으로 보면, 활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신자 증감률이 교회 활력을 가늠하는 척도는 아니지만, 교세 통계만 놓고 보면 침체가 뚜렷하다. 30여 년 전 매해 5~7%씩 치솟던 신자 증가율은 1%대까지 주저앉았다. 지난해 증가율은 1.3%다. 2010년부터 1%대 저성장 시대가 됐다. 미사 참여율, 판공 성사율, 주일학생 수 등 사목 · 성사 지표 가운데 성장세를 감지할 만한 항목은 거의 없다. 유일하게 사제 증가율만 상향 곡선이다.

 

2017년 주민등록 인구와 천주교 신자의 연령대별 비율. 전체 인구 연령대와 비교하면 한국 가톨릭은 0~19세 청소년이 적고, 60세 이상 고령자가 많은 ‘초고령 교회’다.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청소년 감소와 고령자 증가 추세가 심각하다. 개인주의와 세속화로 인한 젊은이들의 탈(脫)교회 현상도 무시할 수 없다. 모두 빠르게 늙어가는 교회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징후다. 한국 가톨릭의 자랑이던 평신도 열성도 예전 같지 않다. 교회는 올해를 ‘평신도 희년’으로 선포했지만, 희년의 기쁨은 찾아보기 어렵다.

 

제도와 전통의 울타리에 안주하려는 성직자들의 소극적 자세, 돈 혹은 성(性) 관련 추문으로 인한 사회 신뢰도 하락은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밖으로 나가는 교회’를 외치고 있다.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더 좋아한다”(「복음의 기쁨」 49항)며 거리로 나가 가난한 이들, 멸시받는 이들과 함께 있으라고 재촉한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만날 때면 “악마는 호주머니로 들어온다”며 물질로 인한 타락을 경계하라고 당부한다. 한국 교회가 이런 당부에 얼마나 호응하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우리 사회도 그새 더 살벌한 전쟁터가 됐다. 각자도생이 경쟁 사회의 생존 전략이다. 연대와 공동체성은 날이 갈수록 비현실적인 구호가 돼가고 있다. 경제는 몰라보게 성장했으나 대문 앞에 누워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라자로(루카 16,19-31) 행렬은 오히려 길어졌다. ‘1987’보다 복음의 기쁨이 더 필요해 보인다. 따라서 교회로서는 기회다. 이 정글 같은 사회에서 사랑과 연대, 자비와 나눔 같은 보편 가치를 누가 가장 큰 목소리로 외치면서 사람들 의식에 스며들게 할 수 있을까. 교회가 나서야 한다.

 

하지만 교회는 복음과 그 안에 담긴 기쁨을 세상으로 활발하게 실어나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교회로까지 넘어온 세속화와 다원주의의 파도에 흔들리는 지경이다. 그 파도가 교회 곳곳에서 영적 세속화를 부추기고 있다. 영적 세속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오히려 사회가 교회를 걱정한다”는 조롱 섞인 핀잔을 가톨릭교회라고 피해갈 수 없다.

 

‘1987’은 예외적 상황의 특수(特需)였다고 자위하면 안 된다. 그러면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한다. 승리주의는 더더욱 경계해야 한다. 거기에 도취하면 도전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된다.

 

밀려오는 도전들을 보고 위기라고까지 단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징후임은 분명하다. 위기는 번개처럼 내리치지 않는다. 사전에 여러 지표 아래에서 꿈틀대면서 몇 차례 징후를 드러낸다. 그러다가 인과 관계가 딱 맞물리는 어느 순간에 화산처럼 폭발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런 도전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는다.

 

“교회는 시대마다 숱한 도전에 부딪혀왔다. 도전은 우리를 성장시켜 준다. 그것은 살아있는 신앙의 표지이다. 오히려 도전 없는 신앙을 두려워해야 한다.”(2017년 3월 25일 이탈리아 밀라노 연설 중에서)

 

교황은 이날 인상적인 조언을 덧붙였다. “이러한 도전에는 황소를 붙잡을 때 뿔을 잡듯이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황소 뿔을 잡으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교회의 근육은 성찰과 쇄신으로 강해진다. 교회 역사가 이를 증언한다.

 

가톨릭평화신문이 창간 30주년을 맞아 ‘1988-2018, 복음의 기쁨으로’라는 특별 기획을 시작하는 이유다. 우리 앞에 놓인 도전들을 식별하고, 그것들과 맞설 힘을 기르기 위한 취지다. 교회 각 분야를 들여다보고 쇄신의 길을 찾을 것이다.

 

 

연재순서

 

1. 한국 교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1) 1988년과 2017년 교회 통계 비교 분석

2. 교회 미래를 위한 청소년 사목의 새로움을 찾아서

3. 청년들에게 신앙을 불어넣으려면

4. 하느님의 부르심, 성소 증진으로 가는 길

5. 한국 교회의 속병, 냉담교우

6. 받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회로

7. 피할 수 없는 고령화, 교회 해법은

8. 작고 낮은 곳을 향하여

9. 순교자 현양 사업과 시복시성 운동

10. 한국 교회의 생명운동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5월 13일, 김원철 기자]

 

 

[1988-2018 복음의 기쁨으로] 1. 한국 교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1) 1988년과 2017년 교회 통계 비교 분석


교세 통계 ‘빨간 불’… 질적 성장으로 내실 다져야

 

 

구호와 함성은 멎은 지 오래다. 지난 30년 사이 한국 가톨릭의 ‘얼굴’만 바뀐 게 아니다. 현대사의 격동기에 급성장한 가톨릭교회는 신앙 활력의 급격한 저하, 냉담교우 증가, 영적 세속화 등 내부적으로 많은 도전에 직면했다. 외부로부터 밀려오는 도전도 만만치 않다. 1987년 6·10 민주 항쟁 당시 들머리 시위 장면. 가톨릭평화신문 DB.

 

 

1970년대 이후 한국 천주교 신자 수가 한 해에 18%나 급등한 해가 있다. 6·25 전쟁이 끝나고 성당에서 구호물품을 나눠주던 1950년대라면 모를까, 18% 성장은 매우 이례적인 기록이다. 1973년이다.

 

눈에 띄는 구간이 한 군데 더 있다. 매년 7% 정도씩 신자가 불어나던 1980년대다. 1982년에 9.6%로 정점을 찍었다. 미세한 오르내림이 있기는 하지만 그 이후로 신자 증가율은 계속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지난해 증가율 1.3%는 최근 10년 내 가장 낮은 수치다. 하향 추세가 이대로 지속하면 5년쯤 뒤부터 마이너스(-) 성장이 예상된다. 

 

교세 통계를 다룰 때 전제돼야 할 사항이 있다. 숫자가 모든 걸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리는 작지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복음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창조적 소수’의 교회가 훨씬 더 건강하다고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은 누누이 강조했다. 기업의 마케팅 분석 기법으로 신앙 공동체의 건강도를 측정하는 것도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다. 양적 성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내실 있는 질적 성장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비약적인 성장 시기의 교회 안팎 상황을 살펴 그 연유를 찾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1970년대 초반은 박정희 대통령이 1인 장기집권 체제의 발판을 만들어 가면서 국민을 억압하던 시기다. 시대의 양심들은 숨죽이고 울분을 달래야 했다. 이 시기에 교회는 두려워하지 않고 예언자적 목소리를 냈다. 1971년 원주교구 시위운동은 교회의 사회 참여에 일대 전환점이 됐다. 김수환 추기경은 1972년 전국에 TV로 생중계되는 명동대성당 성탄 자정 미사에서 박 대통령의 독재를 비판하는 강론으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메시지의 핵심은 인간의 존엄성과 민주주의다. 두려워서 침묵하고 있던 국민들은 교회 지도자의 예언자적 목소리에 환호했다. 

 

1980년대에는 광주의 비극과 정의구현사제단, 명동대성당과 6·10 민주항쟁이 있었다. 국민들은 교회에서 위로와 정의, 희망을 찾았다. 교회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 요구에 부응하자 사회적 영향력은 자연스럽게 확대됐다. 

 

두 시기의 급성장은 교회가 세상이 목말라하는 것, 시대의 요구와 징표를 정확하게 읽고 신속하게 응답한 데 따른 것이다. 세계 교회는 당시 한국 교회의 높은 성장세와 공신력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물론 이런 요인으로만 성장 비결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좌측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성직자 · 수도자 · 주일학교 학생 수·본당 수 변화. 가운데는 주일 미사 참여율 변화다.

 

 

더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고민해야 할 문제는 2000년대 들어 뚜렷하게 나타나는 하향 추세다. 급격한 양적 성장의 후유증은 특히 각종 성사 지표를 통해 드러났다. 1995년 35%, 2007년 27%를 보이던 주일 미사 참여율은 지난해 19.4%까지 떨어졌다. 주일에 신자 5명 가운데 1명만 미사에 참여하는 현실이다. 견진성사 · 첫 영성체 · 판공성사 · 수도회 입회자 등의 항목도 반등할 기미가 없다.

 

한국 교회의 강점은 사제와 수도 성소의 풍요로움이다. 2017년 말 현재 성직자는 5360명, 수도자는 1만 1736명(남성 1593명, 여성 1만 143명)에 달한다. 하지만 사제와 수도자를 꿈꾸는 대신학생과 수련자 증감 현황을 보면 안심할 상황이 아니다. 교구 신학생 수는 2016년 -3.3%, 2017년 -7.2%를 기록했다. 

 

수도 성소 위기는 이미 현실이 됐다. 남자 수도회는 교황청 설립과 교구 설립을 합해 46개인데, 수련자는 91명밖에 안 된다. 2016년에도 91명이었다. 입회자와 퇴회자를 합산하면 한 명도 늘지 않았다. 여성 수련자는 같은 기간 3명 느는 데 그쳤다. 

 

주민등록 인구와 천주교 신자의 연령대 분포 비율도 주의 깊게 봐야 한다. 한국 교회는 이미 ‘초고령 교회’다. 낮은 연령대(0~19세)에서는 주민등록상 인구에 비해 신자 비율이 낮다. 구체적으로 10~14세의 경우 주민등록상 인구 비율은 4.5%인데, 신자 비율은 2.7%밖에 안 된다. 60세 이상 고령층에서는 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60~64세의 경우 주민등록상 인구 비율은 6.4%다. 하지만 신자 비율은 8.3%다. 초고령 교회에 대한 사목적 대응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한편, 1980년대 도시 지식인층의 대거 입교 이후 고착된 교회의 중산층화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의 전진 속도를 더디게 하고 있다. 도농(都農) 본당 간의 격차는 사회의 전반적 도농 격차보다 정도가 심하다. 

 

교세 통계는 여러 가지를 얘기해준다. 신자 수 증가가 교세를 뒷받침하고, 교세가 강해지면 복음화가 이뤄질 것이라는 양적 팽창 논리는 모래탑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통계 수치들이 경고음을 내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5월 13일, 김원철 기자]

 

 

[1988-2018 복음의 기쁨으로] 1. 한국 교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2) 한국 교회 현주소와 새로운 복음화


생기 없는 반복적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복음화’ 향해야

 

 

2014년 8월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해미순교성지 소성당에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교회 주교들에게 세속화와 물질주의에 맞서 싸우라고 독려하고 있다. 세속화와 물질주의는 한국 교회 앞에 놓인 큰 도전이다. 가톨릭평화신문 DB.

 

 

교세 통계 속에서 교회 현주소를 찾는 데는 한계가 있다. 

 

통계에는 세례를 받고 나서 얼마 안 가 신앙에 흥미를 잃고 몇십 년째 냉담 중인 신자들도 포함돼 있다. 반면 하루하루를 순교자처럼 살아가는 성실한 그리스도인의 인내, 봉사자들의 땀방울, 양떼를 이끌고 풀밭을 찾아 헤매는 사목자의 고뇌, 세상을 위해 바치는 이른 새벽 수도자의 기도 같은 신앙의 진정한 가치는 들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교회의 오늘을 달리 진단할 방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 통계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통계는 △ 냉담 교우 증가 △ 급격한 고령화 △ 나태한 성사생활 △미래 세대로의 신앙 전수(傳授) 저조 등 교회 각 영역에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이러한 지표들은 하나의 사실로 수렴된다. 신자들이 날이 갈수록 신앙생활의 활기와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원인은 단순하지 않다. 상당히 복합적이다. 교회 내적으로 신앙과 구원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구원의 확실성과 신앙적 체험을 얻지 못하는 이들은 대형화, 익명화된 공동체 안에서 회의하고 갈등한다. 사목 현장에 팽배한 무사 안일주의에도 원인이 있다. 돈을 하느님처럼 숭배하게 하는 물질주의와 신자유주의, 진리의 다양성을 주입하는 현대 다원주의 등 사회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이런 지표들은 서구 사회에서 일찍이 나타난 ‘신앙의 개인화’가 한국에서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개인화된 신앙은 하느님을 믿 지만, 교회의 전통적 교리와 도덕적 가르침, 공동체성을 가볍게 여긴다. 제 생각과 맞는 교리와 가르침만을 취사선택한다. 교회 권위와 메시지에 냉소를 보내기도 한다. 교회에 소속되지 않고, 또 주일 미사 참여 의무를 지키지 않아도 신앙을 간직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는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3년 전 가톨릭대 사목연구소 주최로 서울에서 열린 학술 심포지엄에서 독일 뮌헨대 페터 노이너 신부와 미국 포담대 제임스 켈리 명예 교수가 교회 위기의 징후로 똑같이 꼽은 것이 신앙의 개인화다. 우리보다 앞서 세속주의의 타격을 받은 유럽과 미국 교회 경험을 전하는 대목에서였다. 

 

노이너 신부는 “종교적 질문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에게 도움이 되거나, 기쁨을 주거나, 삶을 개선하는 것으로 보이는 요소를 고른다”며 “이는 조각조각 이어붙여 스스로 종교를 제작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종교를 개인적으로 선별, 제작하는 것은 오늘날 유럽 교회가 받고 있는 세속화보다 더 심각한 도전의 핵심”이라며 “많은 이가 교회를 떠났다는 사실보다 개인이 종교를 스스로 제작한다는 사실이 교회의 진짜 위기”라고 강조했다. 

 

켈리 교수는 미국에서 이런 현상을 ‘카페테리아(cafeteria) 가톨릭’ 혹은 ‘스모르가스보드(smorgasbord) 가톨릭’이라고 부른다고 전했다. 스모르가스보드는 스웨덴식 뷔페 식사다. 둘 다 여러 가지 음식 중에서 원하는 것을 골라 먹을 수 있다. 즉, 교회 가르침 전체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만 골라서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이런 신자들은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자신의 영적 여정을 이끄는 내면의 목소리를 신뢰하는 성향을 보인다. 냉담 교우, 성사생활에 나태한 신자, 자녀의 유아세례와 주일학교에 무관심한 부모들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8월 방한해 닷새 동안 한국 교회 곳곳을 찾아다니며 ‘일어나 비추어라’(이사 60,1)는 말씀을 상기시켰다. 성장에 자만하지 말고 쇄신을 통해 한국 사회의 빛이 되라는 당부였다. 사진은 서울 광화문 광장 시복 미사에서 한국의 성모자 상에 예를 표하는 교황. 가톨릭평화신문 DB.

 

 

이런 안팎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새로운 개념의 복음 선포, ‘새로운 복음화(New Evan- gelization)’를 다시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처음 주창한 새로운 복음화는 전통적 의미의 복음화(선교)를 훨씬 뛰어넘는 개념이다. 이전의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열정, 새로운 방법, 새로운 표현으로’ 복음 선포 사명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이 대륙의 복음화 500주년을 기념하는 일이 정말 의미를 지니려면, 주교 여러분이 각자 소속 사제와 신자들과 더불어 새로운 각오와 헌신으로 복음화 사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재(再)복음화가 아니라 새 복음화여야 합니다. 열정에서, 방법에서, 그리고 표현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1983년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 총회) 

 

그렇다고 한국 교회가 그동안 새로운 복음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00년 대희년 준비 기간부터 2013년 신앙의 해를 보낼 때까지 한국 교회의 주 관심사는 새로운 복음화였다. 이 기간에 신앙의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쇄신 프로그램이 줄을 이었다. 나 자신부터 시작해 교회 구성원 하나하나가 사도적 확신을 갖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자는 결의도 무성했다. 이와 관련한 세미나와 심포지엄도 많았다. 넓게 보면 ‘새로운 양 찾기’와 ‘잃은 양 찾기’ 운동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신앙의 해가 끝나자 이런 프로그램과 결의는 무슨 유행 지나가듯 사그라졌다. 반응과 평가는 다양했다. 뜻밖의 성과에 기뻐한 공동체가 있는가 하면 어떤 공동체에서는 “해봤지만 안 된다”는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 복음화에 대한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마치 신발 끈을 동여매고 다시 새로운 복음화에 나서라고 한국 교회에 재촉하는 ‘맞춤형 메시지’처럼 들려온다.

 

교황은 5일 ‘네오까떼꾸메나도 길’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문제로 가득한 구름이 무겁게 짓누를 때도 하느님의 충실한 사랑은 지지 않는 태양처럼 빛난다”며 이 희망의 메시지를 세상에 선포하러 나가라고 당부했다. 앞서 3일에는 “교회는 개종이 아니라 매력에 의해 성장한다”며 어떤 매력으로 주님을 모르는 사람과 신앙 열정을 잃어가는 사람의 관심을 끌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4월 19일 아침 미사에서는 “복음화는 이론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몸으로 부딪쳐야 하고, 사람을 상대로 해야 한다”며 복음화의 세 가지 열쇳말을 제시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Alzati, alzati)”, “가까이 다가가라”,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에서 시작하라”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것이 예수님 방식”이라며 복음화는 이 세 가지 태도만 있으면 성령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교황이 평소 사목자들에게 자주 당부하는 말이 하나 더 있다. “생기 없는 반복적 사고에서 벗어나라.”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5월 20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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