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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사목] 임계장 이야기와 교회: 노인과 노동, 그리고 노인 노동 - 복음과 교회의 관점

123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9-26

[경향 돋보기 - 「임계장 이야기」와 교회] 노인과 노동, 그리고 노인 노동


복음과 교회의 관점

 

 

교구 노인 사목을 맡으면서 노인에 관해 많이 생각하고, 공부하고, 말하게 되었고, 마침내 글까지 쓰게 되었다. 성경이 말하는 노인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지혜롭고 거룩하며 마땅히 존경받아야 할 삶의 완성을 지향하는 존재다. 하지만 물질의 가치를 인간의 가치보다 점점 더 높이 두는 이 시대, 이 사회는 노인을 어떻게 보는가? 노인들도 그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노동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회칙 「노동하는 인간」은 노동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본질적인 행위라고 보지만, 동시에 비인간적인 노동을 낳는 현실의 조건들에 관해서도 말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고다지(‘고르기도 다루기도 자르기도 쉽다.’를 줄인 말)’, ‘임계장’이 되어 버린 노인 노동자들은 노동시장의 절대‘을’이 되었다. 우리 사회 안에서 노인으로서, 그리고 노인 노동자로서 이중의 소외와 박탈을 겪는 것이다.

 

성경은 진리의 질서 속에서 명기한 원리는 제시해 준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 주신 하느님의 사랑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이를 세상에서 어떻게 찾고 실천할지가 교회와 신앙인의 과제다.

 

 

노인이라는 말이 싫은 노인들 - 빼앗긴 자존감

 

노인 대학은 많은 별명을 가진다. 의정부교구의 경우 ‘은빛 여정 대학’이라고 부르고 본당마다 ‘성 바오로 대학’ 등 다른 명칭을 붙이기도 한다. 요점은 ‘노인’을 되도록 숨기는 것이다. 무슨 불이익이 있어서는 물론 아니고 그저 싫기 때문이다. 성경이 아무리 ‘장수는 하느님의 은총이고 백발은 노인의 명예’라고 말해도, 노인이 노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끼기에 충분하지 않다.

 

세월에 따르는 신체적, 정신적 변화에는 잃는 것과 얻는 것이 있다. 노년으로 가면 기억력과 집중력은 떨어지지만 쌓인 경험으로 이해력은 높아질 수 있다. 체력과 활력은 떨어져도 판단력과 정신적, 영적 균형 감각은 올라갈 수 있다. 물론 지혜롭게 나이 들기 위해선 개인의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삶의 지혜라는 말대로 노인의 경험이란 겪어 보지 못한 이에게는 보고와 같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계의 다양한 노인들과 협력하여 펴낸 「세월의 지혜」라는 책의 의도가 바로 이 삶의 지혜를 전하는 것이다. 인생의 중요한 주제들에 대한 노인들의 생각을 교황의 응답과 함께 제시한다.

 

하지만 매스컴이 고령 사회의 위기를 말하면 노인들은 왠지 문제의 원인이라도 된 듯 움츠러드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개인의 소유와 생산력을 그 가치의 척도로 생각하는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물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성 노인의 경우에는 퇴직에 따른 상실감도 자존감에 큰 타격을 주는 듯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8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의 자살률은 10만 명당 48.2명으로 전체 인구 비율보다 약 1.8배인데, 그중 남성 노인의 자살률은 여성 노인의 약 3.5배나 되었다. 이는 전체 남성 자살률이 여성 자살률의 2.6배인 점과 비교해도 월등한 차이다. 퇴직에 따른 자존감의 저하가 정신 건강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성당에서도 그리 다른 처지는 아니다. 노인 신자의 비율이 높은 미사 풍경을 보면서 사제나 신자들은 노인이 많이 참석한 것을 기뻐하지 않고 젊은이가 적다는 사실만을 걱정한다. 그러면서 일할 사람, 봉사할 사람이 없어 걱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도 지금의 사회와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지 않았던가? 이제 그들이 봉사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고 일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더는 소중하지 않다는 말인가? 물론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우리의 말과 태도에 사람보다 일을 중시하는 세속적 기준이 깊게 자리함을 부정할 수 없다. 사실 노년기에 많은 이가 하느님을 찾는 것은 자연스럽고 기뻐할 일이다.

 

 

인간의 노동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노동하는 인간」은 인간 노동의 본질과 가치를 강조한다. 낙원에서 추방된 아담은 노동의 고통을 원죄의 벌처럼 선고받지만, 그것은 노동의 한 단면일 뿐 그 본질은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신 창조주의 명령이다. 그것은 만물의 창조주요 주인이신 분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이고 인격적인 행위다.

 

회칙은 먼저 객관적인 의미의 노동을 살펴보는데, 그 배경에는 기술의 발달에 따른 변화가 있다. 정밀한 기계의 등장과 자동화 등의 기술 발전으로 인간이 노동의 기회를 박탈당하거나 주도권을 잃고 부품처럼 되어 버릴 수 있다는 우려다. 인공지능이 직업 대부분을 대체할 것으로 예상하는 지금, 이러한 고민은 더욱 중요해졌다. 인류는 노동에서 해방될까? 그러면 무엇이 되는 것일까?

 

회칙은 노동의 주관적 의미, 곧 그 주체인 인간에 대한 고찰로 넘어간다. 요컨대 노동의 가치는 객관적인 행위 자체와 그 결과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주체인 인간의 가치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존엄하고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듯이, 인간의 노동도 그 내용과 관계없이 그 주체인 인간에 의해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언제나 노동이 인간을 위해 있지 그 반대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일 또한 그것을 만들어 내고 운영하고 사용하는 인간에 의해 가치를 지니는 인간의 노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이 어떻게 인간을 그 목적의 중심에 두고 인류를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데 봉사하게 할 것인지가 우리 사회의 과제이며, 그러려면 많은 부분에서 근본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이루어 내야 할 것이다.

 

 

노동의 조건과 윤리

 

노동의 본질과 의미를 더 넓은 시각으로 보면서도 이제 삶의 수단으로서의 노동, 직업 노동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제기된다. 윤리적이고 현실적인 많은 문제가 여기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창세 3,19 참조)가 에덴을 떠난 인류에게 내려진 선고라면, 어떻게 함께 일하고 모두를 먹일지가 우리의 과제가 된다. 여기까지는 분명 노동이 인간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자본이 형성되어 인간을 고용하면서 인간의 가치는 곧 그 노동의 가치가 되고 거기서 생산되는 재물의 가치에 종속되어버렸다. 그것이 노동의 동기를 유발하고 ‘공정한’ 분배를 위한 장치가 된다고 하여도 그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이의 인간다운 삶을 지향해야 한다.

 

인간의 가치는 절대적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가운데 자살률 1위, 출산율은 꼴찌. 산재 사망률 1위라는 우리나라의 통계는 하나의 사실을 알려 준다. 우리나라 사람의 가치가 가장 낮다는 것이다. 비용 절감을 위해 비정규직, 파견직 등의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 지위를 만들고, 안전한 노동을 위한 투자나 업무 조정, 규정 준수가 이루어지지 않아 사망 사고와 심지어 자살까지 반복되는데도 그것을 고치지 못하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인간 생명의 가치가 절대적이지 못하고 상대적인 것은 물론이요, 그나마도 헐값으로 매겨졌다는 뜻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의 가치)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26) 행복할 수 없는 사회, 자살률과 출산율은 그 결과일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노동의 가치에 대한 하느님의 관점을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 20,1-16)로 보여 주신다. 일할 시간이 1시간밖에 남지 않은 오후 5시까지 일자리를 찾지 못했던 일꾼들에게 가장 먼저 하루 품삯을 준 주인의 기준은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그와 그의 가족이었다. 그가 공정하지 못했는가? 온종일 일한 이들에게 불의를 행했는가? 그렇지 않다. 인간 노동의 가치는 인간에게 있고 노동은 인간을 위한 것이다.

 

 

노인의 노동

 

노화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 삶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대부분의 노동에 적합하지 않게 되는 노년기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는 세상의 욕망과 고생에서 벗어나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준비하라는 것, 삶을 정리하고 그 깨달음을 다음 세대에 전하라는 것,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이 두려움 없이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도록 도우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루를 쉬셨다. 그 하루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힘이 들어 쉬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 하루도 창조의 일부라고 보아야 한다. 밥을 해도 뜸을 들이고 술을 빚어도 숙성이 필요하듯이, 노동이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인간의 가장 인간다운 행위라면 휴식도 그 중요한 일부인 셈이다. 안식일은 노동에 관한 법이면서 인간에 관한 법이다. 노동이 인간을 위한 것임을 잊지 않게 하는 법이다. 노동이 인간을 착취하고 피조물을 착취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하셨다.

 

노년은 인생의 안식일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한 마지막 단계이며 바쁘고 힘들게 살아온 인생의 의미를 찾고 정리하는 시기다. 노동이 인간의 의무이자 권리라면, 노년기에 일을 멈추고 삶을 정리하는 일도 그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그리고 이를 보장해 주는 것이 사회의 책임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통계가 우리의 현실을 알려 준다. 대한민국의 65세 이상 노인 빈곤율은 2018년 기준 45.7%로, OECD 국가 가운데 1위이며 그 평균인 12.9%를 훨씬 웃돈다. 노후의 삶을 보장하는 우리 제도가 매우 부실하다는 지표이다. 노인 자살의 원인 1위가 정서적 어려움(우울증), 2위가 경제적 어려움인데, 경제적 어려움인 빈곤은 동시에 정서적 어려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많은 노인이 경제적인 이유로 선택의 여지 없이 가장 열악하고 비인간적인 조건의 노동에 내몰린다. 이 사회의 물질 중심 가치관으로 상처받은 자존감은 그러한 노동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무너진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노동 또는 휴식을 선택하고 누릴 수 있는 권리이다. 인간적인 삶을 위한 경제적 보장이 먼저 필요하다. 그리고 노동을 선택한다면 다른 모든 노동자와 같이, 존중과 배려받는 환경에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노인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누구나 언젠가 맞이할 보편적인 미래다. 노인이 행복할 수 없는 사회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사회다. 복음은 보편적 사랑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가장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존중할 때 가능한 것이다.

 

* 변승식 요한 보스코 – 의정부교구 노인사목부 담당 겸 사목연구소장이다.

 

[경향잡지, 2020년 9월호, 변승식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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