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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교부들의 신앙: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 더불어 살아가는 삶

59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9-26

[교부들의 신앙 –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더불어 살아가는 삶

 

 

비대면 사회로의 전환 이후 교우들의 발걸음이 뜸해진 성전에 홀로 머물러 봅니다. 이곳을 가득 메우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활력을 불어넣었던 교우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정현종, ‘방문객’ 중에서)라는 시구가 겹쳐지면서, 희로애락이 서린 각자의 삶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코로나가 창궐해서 제도적 ‘비대면’이 되고 나서야 사람 얼굴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니, 사람의 깨달음은 어찌 이리 더딘가.”(김훈, ‘얼굴’, 한겨레신문, 2020년 5월 17일 자)라는 뉘우침처럼, 팬데믹(전염병 세계적 유행) 시대의 거리 두기와 비대면 접촉이라는 ‘새로운 일상’(new normal)을 맞이하고 나서야 이웃의 소중함을 깨달아 갑니다.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인간

 

신학생 시절 아가페 시간 끝 무렵에 늘 동료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즐겨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동지의 손 맞잡고 …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 됨을 위하여.’

 

김남주 시인의 시에 안치환 씨가 노래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는 곡입니다. 요즘 들어 이 노래가 자꾸 흥얼거려지는 걸 보니,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사람 인[人] 자는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인간의 본성을 형상화한 상형문자입니다.)을 다시 돌아보라는 뜻인가 봅니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azianzenus, 329-390년)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De pauperum amore)이라는 작품을 통해 어려움 가운데 놓인 이웃 형제들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를 서해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본성을 자각해서 역경과 환난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며 이 위기를 함께 극복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상아탑에 갇히지 않은 진정한 신학자

 

‘신학자’(Theologos)란 별명을 지닌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역사상 두 번째로 열린 세계 보편 공의회인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의 의장이기도 했습니다. 이 공의회를 통해서 ‘카파도키아의 삼총사’인 대 바실리오, 니사의 그레고리오와 함께 삼위일체에 관한 참된 신앙을 굳게 지켜 냈습니다. 작고 아름다운 기도문인 ‘영광송’이 바로 그 결과물입니다.

 

그레고리오는 위대한 신학자였기에, 무엇보다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말장난에 빠지지 않으려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의 현존을 늘 뜨겁게 선포하며, 사회적 약자의 존엄과 권리를 지키는 데 앞장섰습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에서도 하느님의 마음으로 피조물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새겨진 그리스도의 얼굴을 읽어내는 그레고리오의 따뜻한 마음을 만나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레고리오의 메시지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바오로 사도 또한,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이며 모든 덕목 중에서 으뜸이자 가장 위대한 계명은 사랑이라 말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난한 이들을 향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합니다.

 

한 몸의 지체들이 서로 연결되어 움직이듯이, 우리 모두도 서로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공공의 돌봄이 필요한 이들을 결코 외면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건강하다는 사실에 기뻐할 것이 아니라 고통 중에 힘들어 하는 형제들을 두고 아파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과 육신의 구원은 형제를 아끼고 사랑하는 데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가난에는 끔찍한 질병이 따라다닙니다. 그 병은 또 다른 악이고, 너무나 참혹해서 온갖 혐오의 대상이 됩니다. 게다가 많은 이는 그들에게 다가가려 하지도 쳐다보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피하고 두려워하고 혐오합니다. 자신들의 불행 때문에 거부당하고 미움받는다고 느끼는 것은 질병 자체보다 더 참혹합니다.

 

저는 형제의 비참함을 눈물 없이 바라볼 수 없으며, 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집니다. 저는 여러분에게도 이런 연민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눈물로써 눈물을 없애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친구이자 가난한 이들의 친구인 여러분이 이 슬픔에 공감하리라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로부터 자비의 선물을 받은 여러분은 고통받는 이들의 산증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자비와 은총을 받은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그들을 마치 죽은 사람처럼, 뱀이나 야생동물보다 못한 혐오스러운 사람처럼 취급하고 외면하겠습니까? 멸시하겠습니까?

 

형제 여러분, 절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시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양에게는 원기를 북돋아 주시는(에제 34,16 참조)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그런 짓은 우리에게 결코 어울리지 않습니다. 또한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연민의 정으로 여기는 인간의 본성과도 거리가 먼 행동입니다.

 

그들은 고통을 겪는데 저는 자신을 위해서 부를 축적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지 못하면서 저만 건강해지기를 바라지 않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쉴 곳을 제공하고 그런 뒤에야 비로소 저 또한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편안한 보금자리에서의 쉼을 누리겠습니다.

 

무리는 진실로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어깨 위로 십자가를 진심으로 지고서 예수님과 함께 저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려면, 우리를 얽매고 있는 지상의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한 마음으로 희망을 간직한 채 가난함으로 하늘에 보화를 쌓을 때, 우리는 썩어 없어질 세상의 재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재물을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진 것을 그들과 나눌 때 우리의 소유도 의로워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요 형제이며 공동 상속자인 여러분, 만물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주님께서는 수만 마리의 살진 양보다 빈곤한 이들과 억눌린 이들에게 행하는 우리의 자선을 더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엎드린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께 우리의 선한 마음을 보여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들이 먼저 나서서 영원한 안식처로 우리를 안내하여 그리스도를 마주 뵙게 해 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광 속에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심을 믿습니다. 아멘(「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 참조).

 

※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현대어 번역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M.F.Toal, The Sunday Sermons of the Great Fathers, vol. 4. Chicago, 1957. 43-63(영어); Quintino Cataudella, San Gregorio Nazianzeno, Orazioni scelte, Torino, 1935, 108-151(이탈리아어), Piero Gribaudi, Servire i poveri gioiosamente, Torino, 1971, 81-105(이탈리아어).

 

* 김현 안셀모 – 부산교구 신부로 언양성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교 아우구스티노 교부학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사목 단상을 담은 수필집 「나그네 생각」을 썼으며, 역서로 「그리스도교 신앙 원천 5, 브라가의 마르티누스」가 있다.

 

[경향잡지, 2020년 9월호, 김현 안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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