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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19일 (금)부활 제3주간 금요일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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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함께 슬퍼할 줄 아는 것이 곧 거룩함입니다

145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7-08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함께 슬퍼할 줄 아는 것이 곧 거룩함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여전히 세상은 어수선합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를 물리친다 해도 또 다른 감염병이 다가올 것이라고 말입니다. 감염병과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감염병과 함께 산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상황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청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특성은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대형 집회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대형화와 외적 성장을 추구해 왔던 교회들의 삶의 방식이 변할 것입니다. 미래의 신앙생활은 작은 공동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미국의 어느 신학자는 예견하고 있습니다.

 

즉, 가까운 이웃에 살며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끼리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며 신앙생활 하는 방식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대형 집회를 형성하는 부흥회 형식의 신앙 모임은 아무래도 줄어들 것 같습니다. 코로나 시대에는 작은 모임들이 확산되어 좀 더 큰 모임으로 발전할 수는 있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처음부터 대형 집회를 형성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교회의 작은 공동체 운동을 촉진시키는 역설적인 매개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슬픈 일들에 응대하는 신앙의 방식

 

살다보면 많은 일들을 겪습니다. 기쁘고 행복한 일들도 있고 슬프고 고통스런 일들도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피하고 싶습니다. 자기 삶 안에 기쁨과 행복만 가득하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의 대부분은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에게 운명적으로 다가온 것들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을 우리 자신이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 응대하는 방식을 우리는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은 자기 생의 여정에서 다가오는 것들을 어떻게 응대하고 있는가에 달려있는지도 모릅니다.

 

살면서 돌아보면, 우리 주변에 유난스레 고통스럽고 힘든 일들을 많이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운 좋게도 평탄하고 기쁜 생을 보내기도 합니다. 물론 마냥 평탄하고 기쁜 생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큰 질병과 큰 고통 없이 평탄하게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생을 살아갑니다. 운명의 질곡 속에서 혹독함을 겪는 사람도 있고, 순탄하게 자기 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끔 우리 생의 운명은 차별적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거듭 강조합니다. 자신에게 왜 어떤 일들이 운명처럼 다가오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다가오는 일들을 어떻게 응대하는가 입니다.

 

가끔 신앙인들이 혼동스러워 합니다. 자기에게 다가온 고통스럽고 슬픈 일들이 혹시 하느님의 시험이거나, 아니면 자신이 범한 어떤 잘못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자연 재해와 커다란 질병의 성행이 인간의 잘못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라고 말하는 극단적인 종교 지도자들도 있습니다. 분명하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의 인과응보의 논리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꾸 원인과 결과의 인과율로 하느님의 섭리를 재단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의 섭리는 언제나 인간의 논리를 넘어서 있습니다. 우리의 얄팍한 논리로 하느님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저 우리가 할 일은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 복음과 신앙의 방식으로, 즉 예수님의 태도와 방식으로 응대하는 일입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행복선언 가운데, 역설적인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선언입니다. 슬픔은 슬픔입니다. 슬픔이 기쁨일 수는 없습니다. 사실, “세속적인 사람은 가족이나 주변의 질병과 슬픔 같은 문제들을 외면하고 눈을 돌립니다. …. 세상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무시하는 편을 택하고 이를 덮어 두거나 감추어 버립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75항) 하지만 신앙인은 다가온 슬픔을 수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슬픔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슬픔을 발생시킨 상황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어디서든 십자가가 결코 없을 수 없”(75항)다는 것을 수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슬픔을 수용한다는 것이 단순한 체념과 굴복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슬픔을 견뎌내고 극복하기 위해 슬픔을 정직하게 수용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값싼 동정과 거짓 위로를 구하지 않습니다. 참다운 위로는 언제나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이 슬픔 가운데 계신다는 것이 우리를 위로합니다. 슬픔은 슬픔만이 감싸 안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슬픔이 우리 생의 슬픔을 감싸 안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슬퍼하는 사람만이 십자가의 신비를 깊이 깨달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퍼할 줄 아는 사람만이 십자가의 구원 능력을, 십자가의 그 깊은 위로를 맛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물을 존재하는 그대로 보고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는 사람은, 삶의 깊은 곳까지 다다를 수 있고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께 위로를 받습니다.”(76항)

 

 

슬픔의 연대만이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끌 것입니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슬픔을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도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람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슬픔을 수용할 줄 아는 것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사람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어떻게 응대하고 있는가에 달려있는지도 모릅니다.

 

자기의 고통과 슬픔보다 먼저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헤아리고 공감하는 일은 분명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생의 여정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고통과 슬픔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가 깊이 깨닫는다면,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고 연대할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슬픔을 정직하게 수용할 줄 알고, 그래서 예수님의 위로를 깊이 체험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고통을 함께 나눌 용기를 낼 수 있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피해 달아나지 않습니다.”(76항) 참 신앙인은 “고통을 겪는 이들을 도와주고 그 사람들의 슬픔을 이해하며 그들에게 위안을 줌으로써, 자기 삶의 의미를 찾”(76항)는 사람입니다.

 

슬픔만이 슬픔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슬픔을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은, 즉 진정으로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은 타인의 슬픔을 수용(공감)할 수 있으며 함께 슬퍼할 수 있습니다. 슬픔의 연대는 깊고 큽니다. 슬픔의 연대만이 참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타인과 함께 아파하니 모든 거리감도 사라지게 됩니다.”(76항) 참다운 친밀성의 공동체는 오직 슬픔의 연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무관심하고 외면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신비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 12,15) 함께 울 줄 모르는 사람은 십자가의 신비를 받아들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슬퍼할 줄 아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7월호, 정희완 사도요한 신부(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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