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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미국에서 온 편지

693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6-08

[허영엽 신부의 ‘나눔’] 미국에서 온 편지 (1)

 

 

“허 신부님! 이 어려운 시절에 저를 기억해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합니다. 저희 부부는 이미 평균수명을 넘었으니 이제 여한이 없으나 딸, 사위 그리고 손자가 매일매일 병원으로 쏟아지는 환자를 보고 있습니다. 마치 전쟁터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보병 일등병 같아서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기고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신부님, 저희 부부 도리노, 데레사, 그리고 모두 의사로서 코로나 일선에서 근무하고 있는 딸 사비나와 사위 윌리만 그리고 손자 알베르또를 잠시나마 기억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밑의 사진은 딸 사비나입니다.”

 

필진과 독자로 만나 20여 년간 귀한 인연을 맺어온 분에게 메일 한 통이 와있었습니다. 의사로서 한평생을 일하시다가 이제는 일선에서 은퇴한 구순(九旬)의 아버지는 저에게 전쟁터와 같은 의료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딸과 사위, 손자를 위한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보호장비를 입고 일하는 딸의 사진을 보내셨을까 싶어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한 번도 만나보진 못했지만, 사진으로나마 만난 그분의 따님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사진을 보며 기도하는 것은 저에게도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의 일상 중의 참으로 많은 것들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필진과 독자로 만나 20여 년간 귀한 인연 맺어와

 

2001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미국에서 편지 한 통이 도착했습니다. 당시에 평화신문에 ‘성서의 인물’을 기고하고 있었는데, 편지의 내용은 성경 속 인물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감사한 마음이 들어 바로 답장을 써서 미국으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다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지난번에 야고보 성인에 대해 질문한 사람입니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신부님의 친절한 답장을 받고 정말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라고 시작하는 편지 속에서 한국에서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다녔으며, 비록 서품은 받지 못했지만 여러 친구 신부님들이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또한 현재 우주항공국의 중앙의료원(NASA MEDICAL CENTER) 원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그곳 공동체에서는 공소 회장을 맡고 있다고 적혀있었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레 편지와 메일을 주고받은 지가 벌써 20년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정진석 추기경님과 대화에서 그분의 이름을 조심스레 여쭈어보았습니다. 사제서품 후 소신학교 교사로 소임 하셨던 정 추기경님은 이름을 듣자마자, 신심이 깊고 지적 능력이 뛰어난 학생으로 기억하셨습니다. 또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슬픈 근대사를 온 몸으로 살아낸 인물이라고 덧붙이셨습니다. 그분은 우주항공국에서 정년을 넘기며 중앙의료원 원장직을 수행하셨고, 뒤늦게 은퇴한 후에도 다시 요청을 받아 계속해서 원장으로 일하셨던 특별한 분입니다.

 

그분을 알면 알수록 우리나라를 빛내는 위대한 한국인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또한 제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준 부분은 그 분의 삶 안에서 함께 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손길이었었습니다. 그 분과 나누었던 편지 속에는 우리 삶의 기반에 신앙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분과의 편지 중 신앙의 체험을 느꼈던 몇 편을 레지오 단원들과도 나누고자 합니다.

신부님! 잘 계시지요? 저는 지금 상주하시는 신부님이 안 계시는 공소의 회장직을 20년 동안 맡아오고 있습니다. 얼마 전 이곳 주교님을 모시고 2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습니다. 저는 의학박사이고 현재 미국 헌츠빌의 우주항공국 메디칼 센터(NASA MEDICAL CENTER)의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우주비행사들과 엔지니어 등의 선발, 훈련 및 건강 관리 등이 제가 주로 하고 있는 일입니다.

 

미국 사회에서 살아오느라고 스트레스가 많을 때마다 신부님의 ‘성서의 인물’을 즐겨 읽습니다. 칠순의 나이인데도 아직 은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의사로 우주항공국의 병원에서 일했습니다. 보통의 의사로는 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보다, 지금까지 살면서 미국에서 공소를 창설하고 예비자 200여명에게 교리를 가르쳐서 영세와 견진을 하는데 자그마한 도움이 된 것에 더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평화신문 원고를 열심히 읽을 뿐 아니라 전부 저의 컴퓨터에 타자해서(성서를 필사한다는 마음으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그냥 성서를 읽을 때에는 이해하기 힘들었던 대목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칠순이 지나 진작 은퇴를 해야 했지만, 아직도 우주항공국(NASA)에서 필요하다고 하니 그냥 원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사실 요새 컬럼비아호 사고 때문에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컬럼비아호를 조종했던 비행사 맥콜 중령은 미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했고 제가 미 해군 현역 군의관 시절에 근무하던 곳에서 시험비행사로 있었던 분입니다. 이분은 1993년도에 늦게 영세하였으나 매우 열심한 신자였으며, 우주선 발사 전 날 밤에 고해성사까지 보고 우주로 떠났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너무 안타깝고 슬프지만 영혼의 준비를 이렇게 잘하고 떠나갔다고 생각하니 믿음 안에서 안심이 됩니다. 언젠가는 한번 다 가야하는 길인데 저도 이렇게 잘 준비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다음 호에 계속>

 

※ 필자 주 : 2003년 2월1일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가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던 중에 미국 텍사스주 상공에서 폭발하였고, 공중 분해되어 승무원 7명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편지에 언급된 맥콜 중령은 이 우주선의 파일럿이었던 윌리엄 캐머런 윌리 맥콜(William Cameron Willie McCool, 1961-2003) 해군 중령으로 컬럼비아호 폭발사고 희생자 중 한 명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6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허영엽 신부의 ‘나눔’] 미국에서 온 편지 (2)

 

 

지난 호에서 소개한 편지를 보낸 분은 북한 평양교구 관후리성당 출신으로,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항공우주국(NASA) 메디컬센터에서 오랫동안 의사로 일해 오신 이병갑(도리노) 원장님입니다. 원장님은 본래 사제를 지망하여 북한의 덕원신학교와 서울 대신학교를 다니셨습니다. 그러다가 가톨릭대 의대로 전과, 의학을 전공하여 가톨릭대 의대를 졸업한 후 미국 존스 홉킨스대에서 유학하셨습니다. 몇 차례나 NASA의 메디컬센터 원장을 지낸 특별한 이력의 원로 의료인입니다.

 

한때 국내에서 4년간 경희대 의대 교수를 지내기도 하셨는데 유신 독재 정권에 반대하다가 정보기관에 끌려갈 위기에 처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미국 이민을 선택했고, 미 해군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잠수 의학을 전공하고 항공우주국(NASA) 메디컬센터에서 근무하셨습니다.

 

원장님은 사제가 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백만분의 일이나마 보속한다는 마음으로 살고 계십니다. 삼십년 가까이 미국 앨라배마주 헌츠빌에 있는 공소에서 공소회장으로 봉사하면서 많은 이들을 교회로 이끌었습니다. 지금은 현직에서 은퇴하여 매일 기도하며 수도자와 같은 삶을 살고 계십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그분과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그 중에서 신자 분들과 나누고 싶은 편지를 소개합니다.

 

- 이병갑 원장의 큰누나 이 비르지타가 1938년 4월1일 평양교구 관후리성당에서 혼인성사를 받은 뒤 성당 정문에서 기념 촬영한 모습. 맨 앞줄 오른쪽 흰옷 입은 여자분 옆의 어린이가 당시 5세였던 이 원장. (가톨릭평화신문 제공)

 

 

“허 신부님! 저는 항상 변함없이 무사히 지내고 있습니다. 미국에 처음 유학 온 해를 따져보니 벌써 반세기가 훨씬 지났네요. 유학 후 귀국해서 서울에서 대학교수를 하다가 다시 온 가족이 이민 온지도 벌써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올해 겨울이 가장 추웠고 눈이 많이 온 해로 기억됩니다. 한국도 아주 춥고 눈이 많이 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휴가 때가 되면 미국의 아팔래치아 산맥 기슭에 통나무로 지은 산장을 자주 찾곤 합니다. 이번에도 산장에 갔는데 며칠 동안 계속 함박눈이 내려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덕분에 온 산이 하얀 눈에 덮인 절경 속에서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명상에 젖을 수 있었습니다.

 

며칠 후 눈이 뜸해진 후 산을 내려오다가 그만 샛길로 잘못 들어섰습니다. 날도 저물고 어두워져서 어느 산 속 테네시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마침 다음날은 주일이었지만 지리도 잘 모르고 일기도 좋지 않아 대송을 바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희 집사람 성화에 떠밀려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천주교 경당 같은 곳이 하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찾아갔더니 건물에 ‘00 Catholic Mission’이라는 간판이 있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처음 보는 간판이었습니다. 얼핏 생각에 ‘이곳은 정식 본당이 아니고 우리나라의 공소 같은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이 미국 신자들이 눈길을 조심스럽게 운전하여 한두 명씩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도 작은 경당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미사시간이 되었는데도 신부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공소의 회장인 듯 보이는 초로의 농부 같은 어르신께서 앞에 나오셔서 눈이 많이 와서 신부님께서 좀 늦으신다고 말했습니다. 신부님의 도착을 기다리는 동안 이상하게도 그날은 지나온 나날들이 제 머리 속을 주마등처럼 스쳐 갔습니다.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공소와 인연이 깊었던 제 삶의 조각들이 하나둘씩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제가 제일 처음 공소를 접하게 된 곳은 만주의 봉황성이라는 곳이었습니다. 평양에 살던 우리 가족은 2차 세계 대전 중에 잠시 만주로 이주하여 살았습니다. 현재 심양(일제 때에 봉천)에서 기차로 세 정거장쯤 남쪽으로 내려와 있던 곳으로 아주 아름다운 마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어렵게 한국 신부님을 모셔와서 저희 집에서 미사도 드리고 고해성사도 하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드디어 1945년 해방을 맞아 단동(예전 이름은 안동)을 거쳐서 압록강 다리를 걸어서 신의주로 돌아왔습니다. 신의주의 신부님과 신자 분들이 떡과 주먹밥을 준비해서 저희들에게 나누어 주어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었던 기억도 납니다. 이후 1951년 1.4 후퇴 때 피난 갔던 부산 영도에선 감격스러운 일도 있었습니다. 청학동성당에 미사참례를 갔다가 만주에서 모셔와서 우리 집에서 미사를 드려주셨던 그 신부님을 다시 만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어린아이처럼 울었습니다.

 

한편, 6.25 동란이 일어났을 때 저는 겨우 17살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평양 거리에서 강제로 인민군에 붙잡혔습니다. 법적으로 군대 갈 나이가 아닌데도 끌려가, 총알받이로 전선으로 보내졌습니다. 낙동강 전투에 패전하여 패잔병으로 북상하던 중의 일입니다. 인민군에게 발견되면 제 행색으로 보아 탈영병으로 여겨져 총살당할 것이고, 또한 한국군에게 잡히면 그 자리에서 총살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산을 타고 도망가던 중이었습니다. 깊은 밤중에 하도 배가 고파서 음식을 훔치려 산을 내려갔습니다. 어느 경상북도의 아주 작은 시골 같은데, 정확한 지역 이름을 모르겠습니다. 몰래 마을로 들어가서 좀 큼직한 집을 발견하여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그 집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달빛에 반짝이는 십자가가 강당 정면에 걸려있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가 달빛에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천주교 00공소’라는 간판이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나는 배고픔도 잊은 채, 죄송한 마음이 들어 그 자리에서 십자성호를 긋고 무릎을 꿇은 채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무턱대고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전쟁이 끝난 지, 십여 년이 흐른 뒤, 저는 대한민국 해군 군의관이 되어 포항 해병상륙사단의 군의관으로 근무했습니다. 경상북도 어디쯤이었을 그 공소를 찾아보려고 여러 곳을 찾아보았지만 결국에는 찾지 못했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7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허영엽 신부의 ‘나눔’] 미국에서 온 편지 (3)

 

 

평양교구 관후리본당 출신으로, 북한의 덕원신학교와 서울대신학교를 다니다가 가톨릭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항공우주국(NASA) 메디컬센터 원장을 지낸 이병갑 도리노 원장님의 편지를 이어서 소개합니다.

 

“저는 평양사범부속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덕원신학교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47년 여름방학을 맞아 선배 장 마티아 신부님(당시는 부제님)과 같이 장 신부님의 고향인 신미도공소를 찾아갔었습니다. 평안남도와 북도 경계선에 청천강이란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 강에서 서해로 들어가는 하구 바다에는 작은 섬 신미도가 있습니다. 이곳에 작고 작은 공소 신미도공소가 있었고 이곳이 장 부제님의 고향이며 출신 성당이었습니다.

 

청천강 하구에서 돗단배에 올라 장 부제님과 신학교 친구 서우석 요한(서 신부님은 서울에서 오래전에 선종함)과 같이 여럿이 배에 올라 신미도를 향하여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중에는 보안서원(북한 경찰관) 한 명도 끼어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중국어선(당시 중국은 내전 중이었음)을 발견하고 보안서원이 급히 신미도행을 포기하고 이 중국배를 추격하도록 했습니다. 몇시간의 추격전 끝에 보안서원의 위협사격으로 결국 이 중국어선을 나포하여 신미도로 끌고 갔습니다. 어느새 해는 지고 어두컴컴해져서 신미도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바닷물은 썰물이 되어 빠져나가 우리 배는 포구에 대지 못하고 부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대고 무릎까지 오는 갯벌을 걸어서 겨우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미도 신자분들이 한명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분들을 보자 저희들은 감격해서 목이 메었고 피로는 한순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다음날 일요일에는 장 부제님 주례 하에 공소예절을 행하였으며 고향에 부제로 돌아와서 첫 강론을 하시니 장 부제님도 감격하여 울었고 신미도 모든 공소 신자들의 그 감격하는 모습 이루 말과 글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 (중략) ……

 

6.25전쟁이 일어난 이듬해 서울의 신학교가 제주도로 피란가게 되어 미군 LST(전차 상륙함)를 타고 제주도로 떠났습니다. 거기서 신학교가 자리 잡은 곳은 현재의 서귀포시에 속한 곳이지만 당시는 서홍리(일명 홍로라고도 불림)라고 하는 작은 마을의 공소 건물이었습니다.

 

서홍리는 서귀포에서 한라산 쪽으로 한 2Km정도 북쪽에 있었고 한라산 공비들의 습격을 막기 위하여 돌로 성을 쌓아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군데 성문을 만들어서 성문을 통해 출입하는 모든 주민들의 성명과 통과 시간, 출입목적 등을 기록했습니다. 당시 제주도에는 젊은 남자들은 대부분 한라산 공비들에게 잡혀서 입산하여 공비가 됐고 또 나머지는 해병대에 입대하게 되어 젊은 남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성문을 지키는 일은 신학생들과 이곳 여성 주민들이 하게 되었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1951년 1월로 생각됩니다. 차가운 비가 내리는 캄캄한 밤, 공비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여러 성문 중 한곳을 선배 한 명과 지키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지키고 있던 성문 바로 옆 성문으로 공비가 쳐들어온 것입니다. 이 성문은 당시 대신학생이었던 박정일 주교님이 지키고 있었는데, 박 신학생은 성문 망루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숨죽여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망루에 올라온 공비 한명이 어둠 속에 손을 뻗어 박 신학생의 발을 만졌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곧바로 망루를 내려가더니,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았고 공비들은 돌아갔습니다. 하느님께서 주님의 도구로 크게 쓰시려고 보호하신 것이 아닌가 지금도 생각됩니다. 나는 그것을 그냥 기적이라 생각하고 하느님의 은총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있던 성문 망루가 습격을 받아 경찰서로 달려갔으나 그냥 돌아가서 싸우라는 명령만 돌아왔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죽창뿐, 총을 든 공비와 상대도 안 되지만 무작정 명령에 따라 다시 달려가다가 횃불을 들고 총을 쏘며 달려오는 공비들을 보았습니다. 죽창으로 어떻게 총칼을 든 공비들과 싸울 수 있겠습니까?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순간 무슨 힘이 어디서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죽창을 움켜쥐고 길가 포플러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몸을 숨겼습니다. 제 평생에 1미터 되는 나무에도 올라가본 적 없는데 무슨 힘이 생겨서 10미터도 더 되는 포플러나무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었는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아침에 숙소에 돌아오니 신학생 한 명이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아마도 납치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몇 십 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휴가를 얻어 미국에서 일시 귀국하여 6.25 후 처음으로 다시 제주도에 갔었습니다. 서흥리(현재는 서귀포시 서흥동)에서 몇 십 년 동안 살고 있는 신자분의 안내로 옛날 신학교가 있던 그 공소를 다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이 공소 건물의 십자가를 제대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공소 마당의 작은 돌 하나를 얻어 미국으로 갖고 와서 아직도 저희 집 화병들 한 가운데 모셔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찰서 옆 포플러 가로수길은 어디냐고 물으니 왼쪽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보니 제 생명을 구해주었던 포플러나무는 오간 데 없고, 대신 현대식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 (중략)……

 

그동안 공소와 맺은 인연들을 생각하며 깊은 명상에 잡혀있었는데 백발의 미국 신부님께서 미사를 드리기 시작하여 저는 깊은 명상에서 깨어났습니다. … 참으로 한국, 북한, 미국 세 나라의 각기 다른 군복을 입어야 했던 나의 기구한 운명을 생각하며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그리고 감사 또 감사하였습니다. 벌써 60년이란 세월이 지났구나 하며…

 

신부님! 하얀 눈을 보며 옛날 고향인 평양의 하얀 거리와 온천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지난 6월15일에는 코로나19로 인해 병원에서 분투하는 딸을 위해 기도를 청하면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가만히 뒤돌아보니 정진석 추기경님하고는 오랜 우정이 있었습니다. 1953년 정전(停戰) 후 대신학교도 다시 서울 혜화동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당시 대신학교 1학년(철학과 1학년)이었는데 방학 때 부평으로 내려갔다가 당시 서울대학교 공과 대학생이었던 정진석 추기경을 만났습니다. 정 추기경님은 당시 서울대학교 복학 대신 신학교를 가기 위해서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 후 계속해서 정말로 친하게 지냈었습니다. 정 추기경님은 저보다 2년 정도 연상이었으나 신학교는 제가 2년 선배가 되었지요. 방학 때마다 우리는 부평으로 내려가서 참으로 바둑을 많이 두었지요. 줄바둑이지요. 한번 이기면 한번 지고, 끝이 없었습니다. … 아무쪼록 정진석 추기경님 건강 조심하셔서 오래오래 우리 곁에 계셔주기를 기도합니다. 제 딸 사비나를 위해 기도 부탁드리면서 너무 길게 푸념을 한 것 같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도리노 올림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8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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