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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11: 초기 수도생활 (2)

131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9-09

[세상과 소통한 침묵의 관상가 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11) 초기 수도생활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발견한 새로운 하느님

 

 

필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수도원 체험

 

필자가 18살이 되던 해, 사제 성소를 느끼면서 처음에는 ‘수도 사제’의 길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교구 사제 성소 모임에 다니던 중 본당 수녀님께서 수도원 성소 모임을 소개해 주셨다. 그해 여름, 수도원에서 보낸 3일간의 체험은 필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마치 천상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아름다운 전례, 천사와 같이 새하얀 수도복을 입은 수도승들, 그리고 푸른 잔디가 오래된 나무들과 어우러져 마치 오래전에 방문을 한 듯한 편안함을 가져다준 수도원에서 한 성소 피정은 어린 고등학생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소극적이고 내향적이라 다른 이들 앞에 말하기를 부끄러워하던 이 청소년에게 수도원의 침묵과 기도는 수도 성소를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게 만들어 주었다.

 

20살이 되던 해, 수도원에 입회한 필자는 모든 것이 행복이요 감사로움이었다. 함께 살아가는 수사님들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 신학과 수도생활에 대해 배우는 모든 시간, 그리고 단순한 육체노동 모두가 기쁨이요 은총이었다. 땀 흘려 일하면 일할수록, 궂은일을 하면 할수록, ‘하느님 안에 숨어 사는 특별한 사람’, ‘보통사람이 걷지 않는 길을 가는 사람’, 그래서 ‘나는 다른 교구 신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수도원에서 살면서 필자의 이러한 영웅적 우월감은 점점 퇴색되어 갔고, 천사들처럼 보이던 수도승들도 어느덧 땅에서 함께 사는 평범한 사람들로 보이기 시작하며 실망감이 밀려들었다. 점점 그 실망감의 화살은 필자 자신에게 향해 갔다. “내가 이렇게 잘 살지 못하는데, 과연 수도승으로서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나는 하느님 때문에 이곳에 와 있는가? 아니면 자기 만족을 위해 도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나의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열망은 종신서원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과 가면’ 때문이라는 것을!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에 자기 자신과 수도형제들, 수도원, 심지어 하느님도 가두어 두었던 것이다. 이 틀이 부서지는 순간, 하느님과 수도형제들 앞에 “예”라고 서원을 할 수 있었다.

 

 

1940년대 후반 이상과 현실의 괴리 고민

 

이러한 수도생활의 여정(혹은 신앙생활의 여정)은 토마스 머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젊은 수도승은 수도원 입회 초기 시절에 수도생활이 수도원 밖에서 살아가는 삶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여겼다. 그는 수도승은 평신도들보다 깊은 영적 삶에 도달할 가능성이 더 많다고 믿은 것이다. 그는 또한 「칠층산」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우월적인 태도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우월적인 태도는 다른 이들이나 종교를 존중해 주고 이해하려고 할 때 더 빛날 텐데, 아직 머튼에게는 그러한 모습이 부족했다.

 

이에 관련해 머튼 학자, 윌리엄 샤논은 「칠층산」의 독자들에게 알리는 글에서 “머튼은 ‘하나의 진실된’ 교회에 속해 있다는 확고한 신념 안에서, 교회의 자기 만족적인 승리주의의 거울이 된 듯 다른 그리스도교 교회들을 종종 경멸조로 말하고 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머튼이 자서전(「칠층산」)을 기록하던 시기 동안 다른 전형적인 개종자들과 같이 경이로운 행복감에 가득 차 있었으며, 그의 회심의 체험으로 자라난 열정 아래에 있었다.

 

이러한 신혼시절과 같은 시기가 지난 다음, 1940년대 후반부터 머튼의 이상주의는 그것에 대한 자신의 한계점들과 자신이 자연과 초자연적 은총 사이의 괴리에 갇혀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점점 담금질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940년대 후반에 머튼은 자신의 우울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내일이면 내가 겟세마니수도원에 입회한 지 8년이 되는 해이다. 내가 예전 (8년 전)에 한 명의 세속의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렸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지금 나의 정체성은 더 모호해진 느낌이 든다.”

 

 

세속과 수도원 사이에서 정체성 충돌

 

머튼은 이 시기 특별히 두 가지 정체성의 충돌이 상당한 좌절과 우울과 불행한 감정을 갖게 했다. ① 작가와 관상가(세속의 세상과 수도원) 사이에서 정체성의 충돌 ② 카르투시안 수도승과 시토회 수도승(독수도자적 삶과 공동체적 삶)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 충돌.

 

역설적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분투가 오히려 그가 관상적 영성의 새로운 비전을 얻을 수 있도록 자극을 주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의 관상적 체험은 이러한 두 가지 선택들을 뛰어넘는 새로운 영적 의식이 그의 내면에서 깨어나도록 도왔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9월 8일,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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