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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클 죠의 바티칸 산책36: 요한 성탑과 라디오 바티칸

600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9-01

[엉클 죠의 바티칸 산책] (36) 요한 성탑과 라디오 바티칸


바티칸의 레오 성벽, 현대 가톨릭의 역사가 되다

 

 

올리브나무와 요한 성탑, 그리고 착한 의견의 성모님(왼쪽부터). 성 요한 23세 교황은 착한 의견의 성모님을 찾아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을 최종 결심한 후 요한 성탑에서 피정하며 공의회를 구상했다.

 

 

바티칸 역사에서 846년은 치욕의 해입니다. 이교도(이슬람)인 사라센족이 성 베드로 대성전을 약탈한 뒤 사흘 만에 돌아갔습니다. 다행히 베드로 사도의 묘는 파손되지 않았습니다. 사라센족은 이때 성문 밖 성 바오로 대성전도 털어갔습니다. 당시 교황청은 라테라노 대성전에 있었지요.

 

성 레오 4세 교황은 사라센족이 다시 공격해 올지 모른다고 판단해 바티칸에 거대한 성벽을 쌓았습니다. 두께 3.5m에 높이 12m, 돌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견고한 방어벽입니다.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성벽의 대부분이 허물어져 없어졌습니다. 지금은 약 300m만 남아 있습니다. 레오 성벽은 20세기 위대한 역사를 썼습니다. 가톨릭 개혁의 산실이 되었고, 공산권의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밝힌 희망의 등대가 되었습니다. 성벽에 얽힌 역사를 따라가 보죠.

 

 

성 요한 23세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하고 있어야 할 ‘사건의 현장’이 레오 성벽에 두 군데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 성탑’이고, 다른 하나는 ‘라디오 바티칸’입니다. 성벽 양쪽 끝에 있는 원형 방어탑을 개조한 시설입니다. 망루 기능을 했던 이 방어탑은 로마에서 가장 높은 바티칸 언덕에 세워져 있어서, 초병들이 로마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사라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워진 망루에서 가톨릭의 새로운 역사가 쓰인 것이지요.

 

역사의 주인공은 성 요한 23세 교황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입니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년)를 소집하여 현대 가톨릭에 지각변동을 일으켰습니다. 공의회는 요한 23세 교황이 소집했지만 마무리하신 분은 성 바오로 6세 교황입니다. 교황청은 공의회를 통해 복음의 본질과 무관한 낡은 교리와 전례를 과감하게 뜯어고쳤습니다. 3년 동안의 토론을 거쳐 나온 결론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가톨릭이 공의회 전과 후로 구분될 정도로 전면적이고 파격적인 개혁을 담고 있습니다.

 

공의회 문헌은 그 후 가톨릭 교리 해석과 전례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공의회는 가톨릭은 물론이고 정교회와 개신교 등 그리스도교 전체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역사적 사건입니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이 엄청난 일을 요한 성탑에서 구상하고 지휘하셨습니다. 개혁에 대한 반발도 심했습니다. 교황은 아마도 성 레오 4세 교황이 사라센족으로부터 가톨릭을 지켰던 심정으로 개혁을 추진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교황청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요한 성탑 입구에 성 요한 23세 교황의 문장을 새겨놓았고, 앞마당을 ‘요한 23세 광장’이라 명명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냉전 시대 동유럽 공산국가에 자유의 바람을 불어넣은 주인공입니다. 모국 폴란드에서는 ‘교황 열풍’이 불었고, 이에 힘입은 자유노조운동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교황은 라디오 바티칸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단파 방송으로 띄워 보냈습니다.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공산국가의 신자들은 교황의 메시지를 수신하여 묵상하며 해방의 그 날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라디오 바티칸은 캄캄한 밤바다의 등대와 같았습니다. 소련의 정보기관(KGB)도 속수무책이었다고 합니다. 교황은 동유럽과 소련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에 결정적 공헌을 했습니다. 교황이 사용했던 스튜디오와 책상이 지금도 라디오 바티칸에 남아 있습니다.

 

미국의 유력 시사주간지 타임은 두 교황의 이러한 공적을 평가하여 1962년과 1994년에 각각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습니다. 두 교황은 같은 날 동시에 성인 반열에 오르는 기록도 세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4월 27일 바티칸 베드로 광장에서 두 교황에 대한 시성식을 가진 것입니다.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에서

 

저는 순례객들을 안내할 때마다 근사한 기념사진을 한 컷 찍어 드리는 뷰포인트 한 곳을 찾아냈습니다. 가운데는 요한 성탑이, 오른쪽에는 ‘착한 의견의 성모님’이, 왼쪽에는 구원의 상징인 오래된 올리브나무가 있습니다. 로마 동남쪽 소도시 제나짜노의 대성당에 있는 ‘착한 의견의 성모님’은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의견을 주십니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취임 후 ‘착한 의견의 성모님’을 찾아 의견을 구했고 공의회 소집을 최종 결심했답니다. 아기 예수님이 오른손으로는 엄마의 목을 살포시 감싸고 있고, 왼손으로는 엄마 앞가슴의 옷깃을 쥐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성모님은 뭔가 깊은 상념에 빠져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8월 30일, 이백만(요셉, 주교황청 한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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