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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근현대 신앙의 증인들: 이현종 신부와 도림동 성당

1903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3-08

근·현대 신앙의 증인들 (1) 이현종 신부와 도림동 성당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한국 교회의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시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신앙의 증거자”인 이분들 가운데에는 어쩌면 살아생전에 직접 뵌 독자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위원장 유흥식(라자로) 주교님의 바람대로 “특별히 이분들이 하늘에서 우리 교회와 남과 북의 통일을 위해 빌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서울미래유산’인 도림동 성당

 

1930년대 서울에는 성당이 딱 세 개뿐이었습니다. 명동(당시 종현) 성당, 약현 성당, 혜화동(당시 백동) 성당. 그런데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으로 농토를 강탈당한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서울 영등포 지역도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서울 시민에게 채소를 공급하는 조용한 근교 농업 지역이었던 영등포 일대는 이때부터 일본 자본가들에 의해 근대적 공업 지역으로 변모되었습니다. 편리한 교통 · 풍부한 공업용수 · 평평한 지형 등 입지 조건과 함께 실업자와 다름없는 이농민들을 저임금으로 고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소 공소 예절을 드리고 대축일에나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 약현 성당에 갔던 영등포 지역 신자들은 1936년에 이곳이 수도권으로 편입되자 본격적으로 본당 승격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현재의 영등포 경찰서 뒤쪽에 있던 8칸짜리 공소가 1936년 5월 10일 본당 승격이 되자 이듬해 1월 당산동 2가 지역에 임시 성당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신자수 증가와 성당 위치가 공업 지대의 중심부였고 침수가 빈번한 저지대라는 점을 고려하여, 도림동 산 43번지(옛 애전학교)에 1941년 7월 20일 성당을 신축함으로써 한강 이남 최초의 성당이 되었습니다. 광복 후 행정 구역 명칭이 변경됨에 따라 1946년 10월 본당 이름도 ‘도림동 본당’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도림동 성당은 2013년 서울시로부터 ‘서울미래유산’ 지정을 받은 유서 깊은 성당이 되었습니다.

 

 

이현종(야고보) 신부와 서봉구(마리노) 형제의 순교

 

1950년 4월 15일, 명동 성당에서는 이현종(李顯宗, 야고보) 부제를 비롯한 9명이 노기남(바오로) 주교에게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주님께 봉헌되던 날, 이현종 새내기 신부는 “나의 청춘을 즐겁게 하여 주시는 천주께 나아가리로다.”라며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4월 22일 각자 본당으로 발령을 받았고, 이현종 신부는 도림동 본당 제5대 보좌로 임명되어 부푼 꿈을 안고 사목의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다른 본당에 비해 월등히 많은 공장 직공 등을 위해 청소년 사목을 펼칠 수 있게 된 것도 의욕을 더욱 불러일으켰습니다.

 

박일규(朴一圭, 안드레아) 주임 신부를 도와 의욕적으로 사목활동을 한 지 2개월이 조금 지난 1950년 6월 25일, 날벼락 같은 한국전쟁이 터졌습니다. 파죽지세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그 여세를 몰아 도강 작전에 성공한 후 순식간에 영등포까지 그 손아귀에 넣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소탕전을 감행한다는 구실로 민가에 침입하고 급기야 신성한 교회에까지 그 마수를 뻗쳤습니다. 한강 인도교가 국군에 의해 폭파되던 6월 27일, 주위의 권유에 못 이긴 박일규 주임신부는 이현종 보좌 신부, 본당 수녀 3명, 서봉구(마리노) 형제를 데리고 경기도 시흥의 하우현 성당으로 피난길을 떠났습니다.

 

도림동 본당 관할 광명리 공소까지 갔을 때, 두고 온 신자들이 생각난 이현종 신부는 미사 경본을 챙긴 뒤 서봉구 형제와 본당 동정도 살필 겸 도림동 성당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박일규 신부는 류지선(요한) 공소 회장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하우현 성당으로 떠났습니다.

 

7월 3일(혹은 2일) 오후 3시경 성당에 들이닥친 인민군 서너 명이 느닷없이 총부리를 이현종 신부에게 들이대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뉘기야?”

“나는 이 성당에 있는 가톨릭 신부요.”

“신부? 무시게 하는 거이 신부야? 반동분자지비? 인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악질이다…. 쏴라!”

“탕, 탕, 탕”

 

성당 문을 나서던 이 신부는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어 그 자리에 쓰러지며 말했습니다.

 

“나를 죽이는 게 그렇게도 원이라면 마저 쏘시오. 당신들이 내 육신은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은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요.”

 

인민군은 “너는 남의 돈을 착취하여 생활하는 자 중의 하나가 아니냐?”고 하면서 재차 총을 난사하였다.

 

그때 총소리를 듣고 서봉구 형제가 성당으로 뛰어들어왔습니다.

 

그를 본 인민군 중 하나가 “너는 무엇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이 성당 일꾼이요.”라고 대답하자, 그대로 현장에서 총을 쏘아 즉사시키고 그들은 돌아가 버렸습니다.

 

당시 28세였던 이현종 신부는 성품을 받았던 그 기쁨, 그 감회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백합화와 같은 순결한 청춘의 몸을 그리스도의 제물과 같이 송두리째 천주께 바쳤습니다. 사제 생활 79일만입니다.

 

풍수원 본당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신부에 의해 본당 고아원 영애원에서 자란 서봉구 형제는 정원진(鄭元鎭, 루카) 신부가 도림동 본당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할 때 함께 와서 삼종을 치며 성당의 궂은일을 도맡다가 함께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현양 사업과 순교 기념관

 

두 분의 시신은 7월 11일(혹은 12일) 이 신부의 부친과 삼촌, 고모들에 의해 순교 현장인 사제관 뒤 공터에 가매장되었습니다. 손수 수의를 만들어 입히고, 본당 기숙사를 건축하다가 남은 널빤지를 모아 임시 관을 만들어 두 구의 시신을 입관하였습니다. 어린 시절의 이현종 신부를 지극정성으로 길러준 고모들은 “천주께서 웬만하시면 그놈들의 총알을 좀 막아주시지! 참말 성모님께서는 야속하시다.”라고 울부짖으며 매우 비통해하였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휴전 협정이 체결된 뒤 본당에서는 1953년 10월 용산 성직자 묘지(묘 번호 41번)로 이장하였고, 1963년 9월 12일 새 성당을 신축하면서 이 성당을 이현종 신부 기념 성당으로 봉헌하였습니다. 1989년에는 이현종 신부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성당 경내에 추모비를 건립하고 ‘야고보 장학회’를 발족시켰으며, 2018년 8월 19일에는 정순택(베드로) 주교 주례로 순교 기념관 축복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정순택 주교는 축복 미사 강론에서 “이현종 신부님이 성당을 지키다 공산군의 총을 맞으며 ‘내 몸은 당신들이 죽일 수 있어도 내 영혼은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영원한 생명이 하느님에게 달려 있음을 알려준다.”고 하였습니다.

 

이현종 신부와 서봉구 형제의 성모님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는 돔 형태로 설계된 아담한 순교 기념관은 붉은 기와로 두 분이 흘린 순교의 피를 표현하였고, 창은 12사도를 상징하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하였습니다. 이현종 신부가 사용한 기도서와 묵주, 식기류 등이 전시된 ‘유품 전시실’이 있고, 24석 규모의 작은 ‘경당’은 차분한 분위기를 낼 수 있어 소박한 혼인 미사 장소로 요즘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순교 기념관 경당에는 서봉구 형제가 순교하기 전까지 타종하였던, 1938년 프랑스에서 제작한 종이 전시되어 있어 종의 울림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리고 성당 마당에는 두 분의 순교 현장을 분노의 눈길로 지켜보았을 수령 200년 이상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오늘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참고 도서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 자료집 제2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2019.

『모랫말 반세기 : 도림동 성당 50년사』, 천주교 도림동 교회, 1986.

김정진, 「오호! 이현종 신부 : 순직 10주기에 즈음하여」, 『가톨릭 청년』 제14권 6호(1960. 6), 10~12쪽.

조성희 펀저, 『용인 천주교회사』, 용인 천주교회사 간행위원회, 1981.

서상요, 「한국 교회의 증언자 ⑨ : 이현종 신부」, 『교회와 역사』 제63호(1980. 11), 한국교회사연구소.

 

[평신도, 2020년 봄(계간 67호), 글 · 정리 김주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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