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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하느님의 종 133위 약전: 김필립보 · 박마리아, 이알로이시오 곤자가

1897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2-01

하느님의 종 ‘이벽 세례자 요한과 동료 132위’ 약전


김필립보 · 박마리아, 이알로이시오 곤자가

 

 

김필립보ㆍ박마리아(1812~1868)

 

김필립보는 충청도 면천 중방(현 충남 당진시 순성면 중방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부친과 함께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았다. 박마리아와 혼인한 그는 자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본분을 잘 지키게 했고,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모방 신부의 복사와 수원 걸매(현 충남 아산시 인주면 걸매리) 교우촌 회장으로 교회에 봉사했다. 박마리아는 어디 출신인지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녀는 남편이 회장 소임을 맡자 열심히 남편을 도왔다.

 

1866년 병인박해 때 김필립보는 가족과 함께 신창 남방재(현 충남 아산시 신창면 남성리)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다가 1868년에 다시 박해가 심해지자 홍주 신리에 살던 사위 집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양에서 파견된 포교들이 신리에 들이닥쳤다. 마침 그때 김필립보는 아내와 함께 아침 기도를 바치고 있었는데 포교들이 자신에 집에 들이닥친 것을 알고는 기도를 다 마친 뒤에 그들 앞으로 나갔다.

 

포교들은 김필립보를 체포한 뒤 천주교 신자인지를 묻고 나서 교회 서적이 있는 곳과 다른 신자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그는 “지금이라고 어찌 천주교를 믿지 않겠는가? 우리를 내시고 기르시며 사후에 심판하실 주님을 마땅히 힘을 다해 공경해야 한다. 책은 지난 박해 때에 모두 불태웠고, 아는 신자 없이 나 혼자 얻어먹고 다니며 살았다”고 대답했다.

 

김필립보와 아내 박마리아는 체포돼 남양으로 압송됐다. 포교들은 김필립보만 데려가려 했는데 박마리아가 남편과 포교들이 말려도 듣지 않고 “남편을 따라 함께 죽겠다”고 자원해 따라갔다.

 

김필립보와 박마리아는 남양 옥에서 한 달가량 갇혀 있다가 1868년 9월 18일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부부는 동갑내기로 56세였다.

 

 

이알로이시오 곤자가(1838~1868)

 

이알로이시오 곤자가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수산나와 여동생 프란치스카, 데레사와 함께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대구 감영 아전이었다. 그는 16살 때 가족과 함께 입교했다. 세례를 받은 후 그는 미신을 모두 끊고 동정으로 살아갈 결심을 했다. 그의 어머니가 결혼을 권유할 때마다 여러 이유를 들어 이를 물리치기도 했다.

 

그는 교리 실천에 열심했고, 동정을 지켰음은 물론 아주 검소한 생활로 모범이 됐으며, 죽어가는 이들에게 대세를 주는 일에 열심했다. 그는 재산 일부를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주고 남은 재산을 가지고 칠곡 한티 교우촌(현 경북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으로 이주해 교우들과 농사를 지으며 함께 살았다.

 

그는 한티에서 교회 서적을 필사하고,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묵상과 기도 생활에 전념했다. 그는 평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며 고신 극기를 위해 이불도 덮지 않고 생활하고, 몸에 편태를 치며 열심히 재를 지켰다. 이런 모습을 본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말을 하면 그는 “죄가 많고 흉한 육신이니, 이를 보속하지 않는다면 무엇에 쓰겠습니까?”라면서 모친을 달래곤 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교우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 이알로이시오 곤자가도 대구로 이주해 살았는데 어느 날 서울 포교가 대구까지 내려와 천주교 신자를 색출했다. 그는 하양의 한 비신자 집에서 체포됐다. 그는 대구 관아를 거쳐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됐다. 옥에 갇힌 그는 온종일 기도를 했고, 옥졸들에게 “천주 교리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믿어야 할 교리이니, 당신들도 이를 믿으시오”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포교와 옥졸들은 “이 자가 천주학쟁이 가운데 제일”이라고 했다.

 

이알로이시오 곤자가는 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2월 2일, 정리=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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