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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신앙 선조의 불꽃 같은 삶: 하느님의 종 권철신 암브로시오​

181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4-19

[신앙 선조의 불꽃 같은 삶] ‘하느님의 종’ 권철신 암브로시오

 

 

2017년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대한 시복자료 제1집을 간행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종 133위는 모두 평신도입니다. 자발적 신앙 공동체를 세운 한국교회 초기 신자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 평신도에게는 언제나 모범 중의 모범입니다. 이에 자료집의 내용을 발췌하여 게재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공부하고 순교 영성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태 19, 27)

 

하늘이 시운(時運)을 살펴 현량을 내셨으나

참소하는 무리 매우 모질어 이 어진 분 죽였도다

공의 덕용(德容) 생각하니 온화한 봄 기상일세

백세 뒤에는 다시 공을 알 사람 없겠기로

이 변변치 못한 글을 묻어 천명(天命)을 기다리노라

- 정약용, 「녹암 권철신 묘지명」 중에서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 1736-1801년)은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51-1792년)의 형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기명(旣明). 호는 녹암(鹿菴)이며, 당호는 감호(鑒湖)이다. 복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의 백부이자 양부이기도 하다. 경기도 양근의 감호(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권철신은 일찍부터 부친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24세 되던 1759년(영조 35) 성호 이익(李瀷, 1681-1763년)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퇴계 이황과 백호 윤휴 등 기호 남인계의 학자들과 폭넓게 교류하여 점차 성호학파의 존경받는 학자로 지목되었다. 이병휴·안정복·윤동규·신후담과 홍유한 · 이기양 · 한정운 등이 당시 그의 학문에 영향을 준 인물들이다. 특히 이병휴는 죽을 때까지 권철신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권철신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녹암계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이익 · 이병휴가 사망한 다음이었다. 이때 그의 문하에 들어간 인물들은 김원성 · 이총억 · 이존창 · 홍낙민 등이었다. 그리고 이어 이승훈, 정약전 · 약용 형제, 이윤하 · 이벽 · 윤유일과 조카인 권상학도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벽이 권씨 일가에 복음을 전했을 때 즉시 확신을 가지고 믿은 동생 권일신과 달리 권철신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럴 것이 새로운 교리를 믿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쌓아온 학문적 업적과 그와 관계를 맺어온 여러 사람들을 버려야 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학을 연구하고 그 속에서 참된 진리를 찾았을 때, 권철신은 온 마음으로 수계하기 시작했으며 집안사람들도 모두 실천하게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전하고 싶은 열망에 많은 벗과 지인들에게도 설교했다. 1779년(기해년) 겨울의 주어사(走魚寺) 강학은 권철신의 주도로 이루어진 자리였다. 이때 모인 사람들은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여러 명이었다. 권철신은 스스로 규정을 정했다. ‘그들은 새벽에 일어나 얼음물을 떠서 세수를 한 다음 「숙야잠」(夙夜箴)을 암송하고, 해가 뜨면 「경재잠」(敬齋箴)을 암송하고, 정오에는 「사물잠」(四勿箴)을 암송하고 해가 지면 「서명」(西銘)을 암송하도록 하였으니, 씩씩하고 엄하며 정성스럽고 공손함으로써 규도를 잃지 않았다.’ 이 강학회는 녹암계 인물들이 종래의 유교적 강학 형태를 빌려 서학에 대해 처음 토론하는 기회가 되었다. 물론 이전부터 이미 여러 형태로 천주교 신앙을 담은 한역 서학서에 접해 오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801년 2월 11일 심문 중에 금부도사 박조원이 “너는 교주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렇더라도 그 세가 심히 걱정스러운 것에는 사학(邪學)보다 급한 것이 없다. 이를 금지하는 방도에 어떤 계책이 필요하겠는가? 너는 이미 사학의 이면을 알고 있으니 마땅히 계책도 알 것이다.” 하고 묻자, 권철신은 “정학(正學)을 밝히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너무도 마땅한 대답이었으나, 권철신이 말하는 ‘정학’은 반대자들이 말하는 ‘정학’과는 달랐다.

 

 

“네가 양근 사학의 우두머리냐?”

 

그 무렵 천주교에 관한 활기는 그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권철신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교리를 신봉했다. 본인은 아니라고 했으나, 정부 측 기록을 보든 교회 측 기록을 보든 이구동성으로 그를 ‘신부, 대부, 사학의 우두머리’로 지목하였다. 신앙인으로서 권철신의 삶이 어떠하였기에 그러했을까. 정약용이 권철신을 위해 지은 묘지명을 읽어 보면 저절로 수긍이 간다.

 

“부모에게 순종하고 뜻을 봉양하며, 친구와 형제를 한 몸처럼 아끼는 데에 힘쓰니, 그 문하에 들어간 자는 다만 한 덩어리의 화기(和氣)가 사방으로 퍼져 마치 향기가 사람을 엄습하는 것이 지란(芝蘭)의 방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뿐이었다. 아들과 조카들이 집안에 가득하나 마치 친형제처럼 화합하니, 그 집에 10여 일이나 한 달을 머문 뒤에야 비로소 누가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겨우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노비와 전원, 또는 비축된 곡식을 서로 함께 사용하여 내 것 네 것의 구별이 조금도 없으니,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까지도 모두 길이 잘 들고 순하여 서로 싸우는 소리가 없었다. 진귀한 음식이 생기면 비록 그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고루 나누어 종들에게까지 돌려주었다. 그러므로 친척과 이웃이 감화되고 향리가 사모하였으며, 먼 곳에 사는 사람들까지 우러러보니, 학문과 행검(行檢)을 힘쓰는 상류 사족(士族)들까지 모두 공을 사표로 삼아 자제를 문하에 들여보냈다.”

 

마치 사도행전에 기록된 첫 신자 공동체의 삶과 빼닮았던 것이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4-47)

 

권철신은 초기 교회 신자들처럼 아름답고 빛나게 복음을 살았다.

 

‘권 암브로시오는 음력 2월 22일에 6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매를 맞아 죽었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상처가 덧나서 죽었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감옥 밖에서 죽었다고도 한다. 권 암브로시오의 항구함에 의구심을 가질 만도 하다. 그러나 달리 어떠한 자료에도 근거를 두고 있지 못한 단순한 의구심 때문에 우리는 이 교우에 대한 기억을 더럽힐 수 없다. 권 암브로시오의 마음가짐과 행실은 오랜 세월, 그리고 형벌을 받는 순간까지 너무나 확고하였던 것이다.’

 

다블뤼 주교가 쓴 『비망기』를 빌려 권철신의 믿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본다. 그는 현양 받아 마땅한 순교자이다.

 

[평신도, 2018년 겨울(계간 62호), 정리 송란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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