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자료실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0일 (토)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신학자료

sub_menu

세계교회ㅣ기타
1974년, 지학순 주교가 남긴 정신: 유신헌법 무효 46년 만에 무죄

61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10-13

1974년, 지학순 주교가 남긴 정신


“유신헌법 무효” 46년 만에 무죄… 하느님 정의 증거한 지학순 주교

 

 

초대 원주교구장을 지낸 지학순(1921~1993) 주교가 긴급조치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지난 9월 17일 46년 만에 열린 재심 선고 공판에서다. 지 주교는 1974년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유신헌법은 무효’라고 양심선언을 발표한 뒤 체포됐다.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지만, 고(故)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가톨릭교회와 민주화 지지자들의 대대적 구명운동으로 1975년 석방됐다.

 

성 베네딕도회 김상진 신부는 최근 소장 자료를 정리하던 중 지 주교의 양심 선언과 관련한 여러 필사 자료들을 찾아내 본지에 알려 왔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과 이를 우리 사회와 한국 교회, 그리고 보편 교회에 알린 사제단의 활동을 생생히 전해주는 자료들을 기초로 지학순 주교의 삶과 신앙, 신앙에 뿌리를 두고 불의에 맞섰던 그의 활동과 정신을 돌아본다.

 

 

양심선언으로 정면돌파

 

“본인은 1974년 7월 23일 오전 형사 피고인으로 소위 비상군법회의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그러나 본인은 양심과 하느님의 정의가 허용치 않으므로 소환에 불응한다. 본인은 분명하게 말해두지만, 본인에 대한 소위 비상군법회의에 어떠한 절차가 공포되더라도 그것은 본인이 스스로 출두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끌려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첫째,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월 17일에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둘째,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국민의 최소한도의 양보도 할 수 없는 기본인권과 기본적인 인간의 품위를 집권자 한 사람의 긴급명령이라는 단순한 형식만 가지고 짓밟는 것이다. ….”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를 정면으로 부정한 선언이 지학순 주교 입에서 단호하게 흘러나왔다. 여차하면 체포되고 까딱하면 사형선고가 날아들던 서슬 퍼런 시절이었다. 지 주교는 1974년 7월 23일 중앙정보부의 소환장을 받은 뒤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옛 성모병원) 앞마당에서 양심선언문을 발표했다.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대주교를 비롯해 수도자와 신자, 국내외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그는 “유신헌법은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된다”면서 “이 외에 어떠한 말이 나오더라도 나의 진정한 뜻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타의에 의한 강박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양심선언을 한 지 주교는 성모 동굴 앞에서 기도를 바치고 명동대성당으로 유유히 걸어가 미사를 집전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이 휘두르는 칼날 앞에서도 꼿꼿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미사를 마치고 나온 지 주교를 곧바로 연행해 갔다.

 

지 주교는 자신이 구속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양심선언으로 정면돌파를 택했다. 자신과 같은 혐의로 잡혀가 옥고를 치르는 청년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그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런 지 주교에게 비상군법회의는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했다.

 

지 주교는 양심선언 전 이미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면맹) 사건에 개입됐다는 이유로 한 차례 강제 연행됐다. 당시 그는 해외에서 열리는 회의 참석차 대만과 필리핀을 방문하고 유럽을 들렀다가 귀국하던 길이었다. 1974년 7월 6일 김포공항에 도착한 그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체포됐다. 마중 나온 사제들은 지 주교가 입국장에 나타나지 않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틀이 지나서야 김수환 추기경을 통해 지 주교가 중앙정보부에 감금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 주교에게 씌워진 혐의는 긴급조치 1호(개헌논의 금지)와 4호(민청학련 관련 활동 금지) 위반이었다.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내란을 선동하려는 목적으로 김지하에게 자금을 줬다는 이유였다.

 

 

민주화의 새벽을 연 성직자

 

지 주교의 양심선언과 구속은 한국 사회가 유신체제에 저항하게 된 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 주교가 ‘민주의 새벽을 연 성직자’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 사회는 물론 한국 가톨릭교회의 민주화 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지 주교의 구속으로 주교와 사제, 수도자들은 불의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며 박정희 정권의 폭압에 침묵하지 않았다. 명동대성당을 필두로 전국 성당에선 시국 미사와 기도회가 잇달아 열렸다. 그럼에도 지 주교에게 실형이 선고됐다. 교구를 초월해 지 주교 석방을 외치던 사제들은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을 결성해 어둠 속에 갇힌 인권과 민주주의를 밝히는 횃불이 되기를 자처했다.

 

지 주교의 신학교 동기이자 오랜 친구였던 윤공희(전 광주대교구장) 대주교는 지 주교 평전 「그이는 나무를 심었다」에서 “지학순 주교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감옥에 들어감으로써 민주화를 향한 사회적 열망을 교회 안에서 성취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또 “세상의 불의 앞에서 교회는 무엇이라 답변해야 하는지 온몸으로 보여줌으로써 하느님 정의를 증거했다”며 교회를 세상으로 나오게 한 지 주교의 역할이 그의 사명이었음을 강조했다.

 

지 주교는 교회와 사회 곳곳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석방 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힘입어 투옥된 지 226일 만인 1975년 2월 17일 풀려났다. 서울 서대문구치소에서 나온 지 주교는 곧장 명동대성당으로 향했고, 김수환 추기경과 윤공희 대주교 부축을 받으며 제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성체조배를 했다. 감옥에서 나온 교구장을 맞이하는 원주교구는 교구 전체가 들썩였다. 원주역에서 주교좌 원동성당까지 이르는 1.5km 거리의 길 양쪽에는 태극기를 손에 든 신자 5000여 명과 시민 1만여 명이 모여 돌아온 지 주교를 환영했다. 석방 이후 그는 또다시 그가 걷던 민주화의 길에 힘찬 발걸음을 내디디며 가장 가난하고 아프고 고통받는 이들을 찾아다녔다.

 

 

세상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 실현

 

모두가 지 주교의 민주화 활동에 지지를 보낸 건 아니었다. 성직자가 지나치게 정치적이라고 손가락질하던 이들도 많았다. 굳이 왜 주교가 나서 교회와 사회를 분열시키느냐는 비난도 쇄도했다. 하지만 지 주교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는 모두 하느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는 그가 수감생활 중에 바오로 6세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교황님, 저는 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교회의 주교로서, 하느님과 교회와 국가를 사랑하는 하느님의 충실한 종입니다. 저는 인간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했습니다. 억울하게 갇혀 있는 많은 정의의 투사들, 목사, 교수, 학생, 변호사, 언론인들과 함께 이곳에 있으면서 저는 가장 미소한 형제들의 벗이 되고 싶었습니다.”(1974년 9월 서울 구치소에서 쓴 편지 중 일부)

 

그는 교회가 신심 활동과 미사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교회는 세상을 비추는 빛이 돼 사회 전체에 도움을 주고, 가장 약한 이들을 돌보는 데 투신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는 그가 주교로 임명된 해에 참여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1962~1965) 정신이기도 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세상과 단절된 교회가 아닌 세상 한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교회상을 새롭게 제시했다.

 

지 주교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체 회의에 참여했던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은 누구보다 지 주교의 행보를 깊이 이해했다. 김 추기경은 지 주교 장례 미사에서 “지 주교가 이같이 일어선 동기는 결코 정치적 취향 때문이 아니고 남다른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강조했다. “특히 가난과 고통이 본인의 탓이라기보다 억압 정치와 구조 악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에 대한 지 주교의 의분은 불과 같았고 정의를 위해 개혁을 위해 결연히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0월 11일, 박수정 기자]


0 949 0

추천  0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