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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우리는 신을 이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

560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10-30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우리는 신을 이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

 

 

세계 곳곳에서 인류 문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이루어져 온 종교의 흔적이나 기념물이 발견된다.

 

각 종교는 저마다 믿는 신에 대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한다. 물론 계시 종교를 믿는 이들은 자신들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경전을 바탕으로 신에 대해 인식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종교를 믿지 않는 이들은 특정한 종교적 표상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계시의 필연성과 신앙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신학자로서 신의 인식 가능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신학대전」(이하 STh)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다양한 철학자와 대화하면서 “이성적인 피조물인 인간이 어떻게 신을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I,12).

 

베이컨과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 철학에서는 확실성을 추구하고자 본격적인 주제들을 다루기 전에 매우 난해한 인식론적인 탐구를 수행한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신의 존재와 속성에 대해 상당히 논의가 진행된 다음에 앞의 논의들을 반성적으로 바라보며 인식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현대 사회 안에서 신은 단순히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대상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상당히 설득력을 얻으면서 무신론적인 분위기가 널리 퍼지고 있다.

 

모든 종교적 권위를 거부하는 이들과 대화하려면 모든 인간이 지닌 이성이 과연 신 같은 절대자를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파악 불가능한 ‘신의 본질’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현세의 삶 속에서도 예언자들처럼 특별하게 ‘영광의 빛’을 받은 이들이 신에 대한 특별한 인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창조된 인간의 이성이 신과 비슷하게 ‘영광의 빛’에 의해 들어 올려져야 한다(STh, I,12,2&5).

 

그런데도 인식 능력의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인간은 신이 무엇인가(신의 본질)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못하고, 다만 신의 존재 여부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STh, I,12,11; 13,1). 우리의 인식은 감각적 지각에 의존하고, 시공간적인 사물을 인식의 자연스러운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형성하는 관념은 피조물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서 생겨난다. 심지어 초기 작품인 「명제집 주해」에 따르면 “신은 일종의 무지의 어둠 속에 살아 있다”(I Sent 8,1,1,ad 4). 이런 표현을 볼 경우, 신의 본성에 관한 극단적인 불가지론(agnosticism)을 의미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이는 토마스가 의도하는 바가 아니다. 그는 계시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성적인 숙고를 통해서도 신에 대해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감각적 경험을 초월한 신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 아퀴나스는 피조물이 신을 제시하기 때문에, “우리는 피조물로부터 신을 인식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 명제를 설명하는 대신에, 구체적인 세 단계의 인식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그 내용을 설명한다.

 

 

원인성의 방법

 

우리는 모든 사물의 근원인 신을 그가 자신의 결과인 피조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 알 수 있다.

 

“결과는 원인에 종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감각적인 것들에서 신에 대해, 그가 존재하는지의 인식에까지 인도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신은 그한테서 원인이 되어 온 모든 것을 초월하는 모든 것의 제1 원인이다. 그러므로 신에게 필연적으로 적합한 모든 것을 그에 대해 인식하게끔 우리가 인도될 수 있는 것이다”(STh, I,12,12).

 

달리 말해서 우리는 먼저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받은 완전성을 알게 되고, 이것을 통해 신에 대한 인식에 이르게 된다. 신의 결과로서 피조물들은 아주 근소하다고 하더라도 창조주와 약간의 유사성을 지녀야 한다.

 

전통 철학에 따르면, 결과 안에 실존하는 것은 그것의 원인 안에 선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퀴나스는 이미 그의 신존재 증명(다섯 가지 길) 가운데 첫째에서 셋째, 그리고 다섯째 길에서 이러한 방법을 활용하여 부동의 원동자, 제1 원인, 자체 필연유,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 최고 지성자에 도달했다.

 

 

부정이나 제거의 방법

 

원인성의 방법을 통해 우리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나, 신에 대한 충분한 인식에 이를 수 없다. 왜냐하면, 감각적 대상들은 신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신의 능력에 온전히 대비되는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은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그 완전성을 통해서 모든 것을 능가한다.

 

이러한 신과 피조물의 차이 때문에,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피조물들에게서 발견되는 불완전성들을 신으로부터 배제해야만 한다. 이 내용은 전통적으론 ‘신은 무엇이 아니다.’라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우리는 완전한 신에 대해 불완전성, 가령 변화, 수동성, 그리고 복합을 함축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부인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신에게 부동성, 완전한 현실성, 그리고 절대적 단순성을 돌릴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도대체 어느 정도의 인식이 가능할까? 어떤 것이 무엇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알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무엇을 아는 것인가? 모든 부정은 하나의 긍정을 전제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그 부정이 어디에서 취해졌는지를 주목해야만 한다.

 

다른 한편으로 신은 수동적 가능태가 ‘아니다’, 신은 질료가 ‘아니다’, 신 안에는 합성이 ‘없다’ 등과 같이 각각의 부정은 계속해서 연속되는 부정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 연속되는 부정은 많은 내용이 신에 대해 타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기에, 부정될수록 우리는 신을 점점 더 잘 알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다른 모든 존재로부터 신을 구별함으로써 충분한 신의 관념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인식 방법을 통해서 신에게 다만 수렴적으로 도달할 수 있을 뿐이지 결코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부정의 방법’은 전통에 따라 우선시될 수는 있을지라도, 결코 배타적인 권한을 얻을 수는 없다.

 

 

탁월성의 방법

 

더 나아가 우리는 피조물이 지닌 완전성이 훨씬 더 높고 넓은 방식으로 신에게 속한다는 것을 늘 의식해야만 한다. “이렇게 피조물들이 신에게서 제거되는 것은 신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신이 그런 것들을 초월하기 때문이다”(STh, I,12,12,c).

 

그러므로 신은 유형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신은 물체 이하의 것이어서 물체라는 것에 포함된 완전성이 신에게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신은 물체 ‘이상’이어서 유형적인 실체에 반드시 포함된 불완전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설명에 따르면, “신은 단적이며 보편적 의미의 완전자로서 피조물들의 모든 완전성을 자체 안에 미리 갖고 있다.”

 

이런 생각은 그가 제시한 신존재 증명의 넷째 길에서도 이미 드러난 바 있다. 더 나아가 신의 속성들을 논의하면서 신은 완전하고, 선하고, 무한하고, 편재한다고 말할 때는 탁월성의 방법을 활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탁월성은 단순히 그 완전성의 정도가 점차 상승하는 것이나 어떤 다른 요소들이 신에게 추가되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질적인 비약으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오히려신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규정과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고려하여 ‘원인성의 방법’을 통해 감각적인 피조물로부터 시작해서 그 원인인 신에게 나아간다.

 

또한 ‘부정의 방법’을 통해 신의 본질을 완전하게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신에게 점차로 다가갈 수 있는 방식을 제안한다. ‘탁월성의 방법’을 통해 신은 인식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무한히 초월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이 모든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 인식의 한계를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자신이 신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야말로 신에 대한 인간 인식의 극한이다”(「권능론」, 7문제 5절).

 

* 박승찬 엘리야 - 가톨릭대학교 철학 전공 교수.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가톨릭철학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라틴어 중세 철학 원전에 담긴 보화를 번역과 연구를 통해 적극 소개하고, 다양한 강연과 방송을 통해 그리스도교 문화의 소중함을 널리 알린다. 한국중세철학회 회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9년 10월호, 박승찬 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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