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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19년 7월 23일 (화)연중 제16주간 화요일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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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신앙 선조의 불꽃 같은 삶: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

1812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4-19

[신앙 선조의 불꽃 같은 삶]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

 

 

2017년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대한 시복자료집 제1집을 간행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종’ 133위는 모두 평신도입니다. 자발적 신앙 공동체를 세운 한국교회 초기 신자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 평신도에게는 언제나 모범 중에 모범입니다. 이에 자료집의 내용을 발췌 · 정리하여 게재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공부하고 순교 영성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이승훈 초상」(황창배 작, 명동 주교좌대성당 소장). 한국교회사연구소에 남아 있는 프랑스 선교사 피숑(Pichon, 1893~1945년) 신부의 원고에는 이승훈이 서소문밖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구경나온 사람들에게 “수확의 때가 왔다. 잘 깨어있어야 할 때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한국 교회의 첫 세례자”

 

1784년 이승훈(李承薰, 1751~1801년)이 한국 천주교회의 첫 세례자가 된 ‘사건’에 대한 첫 기록은 당시 북경에 있던 예수회 소속 방타봉(Ventavon, 1733~1787년) 신부가 고향의 동료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1784. 11. 25)이다.

 

방타봉 신부는 “천주께서는 아마 그로 하여금 아직 어떤 선교사도 들어가지 못한 나라를 복음의 빛으로 비추게 하실 것입니다. 그 나라는 중국 동편에 있는 반도 조선입니다. 이 조선 사신들이 작년 말에 왔는데, 그들과 그들의 수행원들이 우리 성당을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종교 서적을 주었습니다. 이 양반 중 한 분의 아들은 나이 27세인데 박학하여 그 서적들을 열심히 읽어, 거기에서 진리를 발견하였고, 또 천주의 은총이 그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교리를 깊이 연구한 다음, 입교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에게 성세(聖洗)를 주기 전에 그에게 많은 문제를 물어보았는데, 그는 모두 잘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만일 왕이 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결심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서슴지 않고, ‘이 종교를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형벌과 죽음까지도 감수하겠다’고 했습니다.”라고 썼다.

 

유교만이 정학(正學)인 줄 알고 유교적 예식과 풍속을 실천해 온 이승훈이 세례를 받기까지 즉, 개종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북경에 체류하던 단 2개월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교리에 대한 이해와 통회는 강렬하게 진행되었다. 만일 이승훈이 천주 신앙의 문 앞에 섰으나 성령의 은총이 개입하여 그를 문 안으로 들여 놓지 않았다면, 이승훈은 천주학(서학)을 학문으로 인식할 뿐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승훈에 대한 기록은 다른 이들에 비해 많다. 시복 자료집에 따르면, 교회 기록이 12건이고 정부에서 편찬한 관찬 기록이 26건, 이만채 등 개인기록이 7건이다. 그 밖에 『평창 이씨 족보』와 『사마방목』(1790년, 생원시와 진사시 합격자 명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겼다고 하는 「유시(遺詩)」가 있다. 그에 대한 교회 측 기록은 편지들이 많은데 이승훈이 북당 선교사들에게 쓴 2통의 편지도 있다(프랑스어 번역본으로 원본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 편지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깊이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했으며 성사의 은총을 받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다.

 

사제품을 받지 않은 채 성사를 행한 것을 ‘하느님의 은총을 완전히 저버린 채 마귀의 종이 되어’라고 표현했으며, ‘세례를 받을 당시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교리를 피상적으로밖에 알지 못하여 잘못을 저질렀다.’며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또한 ‘세상의 모든 나라는 구속의 은혜를 받아 신부와 주교가 가득 찼는데 어찌하여 우리만 제외되었는가?’라며 탄식하기도 했다.

 

 

나아감과 망설임이 교차하던 삶… 그것도 그분의 뜻

 

1790년 7월 11일에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승훈은 어쩌면 자신이 앞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행보를 예감한 듯하다. “저의 집안이 아직 박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처지이지만 그래도 저 힘닿는 대로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당연한 의무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천주교 신자들을 돌보는 일을 책임지는 것은 현재 제가 처한 상황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감히 청하오니, 부디 이 의무에서 저를 벗어나게 해주길 바랍니다.”

 

반주골(현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 이승훈의 묘. 이승훈은 순교한 뒤 반주골에 안장되었으나, 1981년에 유해를 발굴하여 경기도 광주시 천진암성지로 이장하였다.

 

 

이 편지를 쓴 이후 이승훈은 관직의 길로 나아간다. 1790년 10월에 의금부 도사, 1791년 2월에 서부도사(西部都事), 그해 6월에는 평택(平澤) 현감이 되었다. 하지만 5개월 후 파직당한다. 이후 이승훈의 삶은 가시밭길이었다. 예산현(禮山縣)으로 유배를 당하고 1796년 봄에 풀려나 유교 경전이 아닌 것은 책상에 두지 않아 친척과 벗들에게 자신이 교회를 떠났음을 보여주려 하였으나 1801년 2월 9일(양력 3월 22일) 사학도의 원흉으로 체포되었다. 그날부터 2월 18일(양력 3월 31일)까지 총 여섯 차례의 신문을 받았다. 그리고 2월 26일(양력 4월 8일)에 이승훈은 정약종, 최창현, 홍교만과 함께 자신이 살던 염초청다리(현 서울시 중구 순화동의 염천교) 근처 서소문밖 네거리 형장에서 사형당했다. 이로써 조선의 첫 세례자는 서소문밖 네거리 형장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월락재천(月落在天) : 달은 졌다고 해도 여전히 하늘에 있지만

수상지진(水上池盡) : 물이 증발해 버리면 연못은 마르고 만다.

- 이승훈 베드로가 남긴 유시(遺詩)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Marchini) 신부는 1790년에 조선 사신들과 함께 북경에 도착한 신입 교우로부터 들은 이승훈에 대한 소식을 포교성성 장관에게 전한다. “6년 전 북경에서 세례를 받았던 이 베드로는 자기 나라로 돌아간 후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으며 짧은 시간 내에 여러 학자들을 회개시켰다고 합니다. 그 학자들은 모두 또 다른 복음의 전파자가 되었고, 1,000명도 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세례 받은 사람들 중에서 남자 12명과 여자 12명을 회장(교리교사)으로 선발하였다고 합니다. …”

 

다블뤼 주교는 ‘이승훈이 조선에 천주교를 도입하였고 열렬히 그것을 전파하였음에도 대중의 눈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했던 수많은 변절과 그에 동반된 글들로 인해 그 빛이 바래지고 말 것’이라 마음 아파했다. 하지만 이기경의 『벽위편』에 실린 「판결문」을 보면 이승훈의 사형 이유는 오직 ‘사교인 천주교를 이 땅에 처음 들여왔으며 사교의 우두머리’라는 죄목이다.

 

“너는 직접 세례를 받고 만 리 밖에서 그 책을 구해 와서 인척들에게 전파하고 경향 원근에 퍼뜨렸다. …무릇 나라의 금령이 반포되고 사악한 실상이 모두 드러난 후에도 요사하고 추한 무리들이 너를 교구 대부로 삼지 않음이 없었으니 그 범한 죄를 논하자면 천지간에 그대로 두기 어렵다.”

 

신유년 2월 26일에 죄인 이승훈은 사형에 처해졌다. 3일 뒤 이승훈의 시신은 자기 집으로 옮겨졌다. 아무도 감히 애도의 말을 하려고 그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의 친구이자 인척이었던 심유(沈浟)만이 홀로 상가를 찾아가 시신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평신도, 2019년 봄(계간 63호), 정리 송란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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