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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베 성인의 벗들: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 성 프란치스코 수녀회의 창설 배경

617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2-13

[콜베 성인의 벗들]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 성 프란치스코 수녀회의 창설 배경

 

 

하느님의 예정된 섭리

 

1930년에서 1936년까지 콜베 성인의 일본 선교 활동에 있어 분명 모든 것이 낯설고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인의 발자취를 뒤돌아볼 때 찬탄을 금할 수 없다. 물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공감의 정도는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래서 성인의 자서전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성인의 생전 행보는 나의 나약한 신앙을 뒤돌아보게 했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추호의 흔들림 없이 성모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완전하게 그분의 도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열망으로 내 마음속에 더욱 강한 울림이 되어 다가왔다.

 

콜베 신부님의 일본 선교 활동에 미로하나 신부님도 더없는 조력자가 되어 활동하셨다. 그 가운데 1935년에는 사제품의 은총도 받으신다. 1936년 콜베 신부님이 폴란드로 완전히 귀국하신 후에는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이, 그분의 뒤를 이어 수도회의 후학 양성과 생활 전반의 책임을 맡으시게 된다. 한편으로는 그토록 존경하던 콜베 성인과 헤어지며 느끼셨을 인간적인 아쉬움과 함께, 낯선 동양의 한 나라인 일본에서 새 수도원을 정립하고 뿌려진 선교의 씨앗을 육성하기 위해 소임에 열정을 다하셨을 미로하나 신부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또한 몇 년이 지난 후, 신부님은 나치의 폴란드 점령과 탄압 소식에 이어 1941년에는 콜베 성인의 순교 소식까지 들으셨다. 신부님의 절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콜베 신부님이 폴란드로 귀국하시던 1936년, 그 당시 미로하나 신부님은 28세였다.

 

시대적 배경으로 20세기는 그야말로 인간의 야욕이 자국의 보호와 이익이라는 명분아래 극명하게 드러나는 역사적 사건들로 뒤범벅이 된 듯했다.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소비에트 연방 수립, 대공황, 1945년까지 이어진 제2차 세계 대전 등…….

 

마치 악이 미친 듯이 창궐하여 세상을 절망 속에 빠뜨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세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과연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셨을까? 나는 묵상했다. 그리고 성모님의 현존 체험과 그분이 입으신 특별한 은총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믿음, 그러한 성모님의 존재를 알리는 것은 물론 성모님의 더없는 열애자이자 사도인 콜베 성인으로까지 자연스럽게 생각이 이어졌다. 그러나 콜베 성인은 성모님을 통해 예견되었던 47세의 짧은 생애로 순교의 화관을 쓰셨고, 이어질 나머지 모든 결실들은 성모기사회(M. I.)를 통해 실현시키고자 하셨던 것 같다. 그런 가운데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 성 프란치스코 수녀회의 역사도 시작된다. 수녀회의 창설 배경에 이러한 여러 가지 시대적 · 신앙적 상황들이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예

정된 섭리가 아니었을까 하고 묵상해 본다.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오르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이어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도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일본은 그야말로 지옥 같은 불바다를 이루었고 수많은 사상자와 원폭 피해자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비로소 일본이 패전을 받아들이면서 제2차 세계 대전도 종식됐다. 그런데 이 전쟁의 이면에는 두 가지 아이러니한 점이 있다. 이러한 면들을 이해해 보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일본의 가톨릭교회를, 좁은 의미에서는 일본 성모기사회의 영성을 이해하는 데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첫 번째, 최초의 원폭 투하 계획에 나가사키는 포함되지 않았다. 갑자기 바뀐 것이다. 나가사키는 일본의 로마라고 불릴 정도로 가톨릭 신앙의 구심적인 역할을 해 왔고, 지금까지도 그 역할의 비중이 크다. 그런데 왜 하필 그런 곳에서 그토록 처참한 일이 일어났으며, 하느님께서는 과연 무엇을 원하셨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전쟁의 잔혹함과 비참함 속에서 인간의 교만과 무모한 욕망, 나약함과 함께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인류의 화해와 평화의 상징을 동시에 드러내고자 하신 것은 아니었을까?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처럼 당신이 사랑하는 어린양의 도시로서 나가사키에 그 모든 비참한 상황들을 허락하셨을지도 모른다는 묵상을 해 보았다. 나가사키는 현재 일본의 그 어느 지역보다도 종교나 전쟁의 역사에서 큰 아픔을 간직한 채 깊은 신앙과 평화의 상징으로 존재하고 있다.

 

두 번째는 8월 15일이다. 일본이 전쟁 국가로서 패망한 날이지만 일본의 가톨릭 신앙에서는 해방을 이룬 날이다. 일본에 있을 때 본원의 지도 신부님께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1549년 일본에 로마 가톨릭이 들어오고 나서 한동안 가톨릭교회에 대한 심한 탄압과 금지령이 내려졌는데, 여기엔 일본이 가톨릭을 받아들인 역사적 배경에 서양 문물을 통해 이익을 보고자 하는 경제적인 측면이 있었으며, 천왕을 살아 있는 신처럼 여기던 일본인들에게 가톨릭 신앙은 자연히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도 신부님이 학교에 다닐 때 신부님은 물론 신앙을 가진 학생들은 선생님이나 학교 측으로부터 여러 모로 눈에 띄는 차별을 받았는데, 8월 15일 일본이 전쟁에 패망하면서 종교적으로는 오히려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얘기를 들으면서 일본 가톨릭 신자들이 느꼈을 감정들을 생각해 보았다. 이는 뒤집어 생각하면 일본에서 신앙을 전파한다는 것이 그만큼 쉽지 않다는 뜻이다(성모기사회의 영성 또한 마찬가지다). 다른 측면에서는 양보다 질이라는 말도 있듯이, 일본에서 가톨릭 신자가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신심이 깊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해되었다. 어찌 되었건 종전 후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 신체적 ·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음은 물론이고, 부모와 가족을 잃은 전쟁고아들도 수없이 많이 생겼다. 특히 원폭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어 시내 중심부가 거의 사라진 나가사키의 피해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미로하나 신부님도 당연히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에 입각하여, 1946년 주님 공현 대축일에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던 전쟁고아 3명을 혼고치(本河內) 수도원에 받아들였다. 이는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사도직인 성모의 기사원(聖母の騎士園)의 시작이 된다. 수도원이 받아들인 전쟁고아들과 갈 데 없는 노인들의 수가 급격히 불어나면서 생활이나 경제적인 면에서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지만, 신부님은 그들을 돌려보내지 않으셨다. 성모님에 대한 신뢰와 의탁 속에서 그들을 끝까지 돌보셨다고 한다. 실제로 기도 가운데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으로부터 식품 같은 경제적 지원을 받으면서 여러 난관들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이처럼 성모의 기사원으로 모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재정적인 면 이외에도 생활적인 측면에서 도움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했는데, 다수의 자매들이 자발적으로 신부님을 도우며 그곳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그러한 가운데 미로하나 신부님은 늘 마음속으로 품고 있던, 콜베 성인의 원의인 성모기사회의 정신으로 보다 완전하게 봉헌하며 살아갈 수 있는 수도 공동체를 본격적으로 구상하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관구장님의 허락 아래, 성모의 기사원에서 무료 의료 봉사를 하고 있던 나가야마 가즈코(中山和子)를 주축으로 7명의 자매들이 청원 착의식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 성 프란치스코 수녀회(통상 성모의 기사 수녀회)가 창설된 역사의 시작이다. 지금으로부터 69년 전인 1949년 12월 28일의 일이다.

 

[성모기사, 2019년 2월호, 오정순 비비안나(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 성 프란치스코 수녀회 수녀, 해외 선교 사목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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