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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사목] 한반도에 평화를: 십자가의 평화

1147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1-20

[경향 돋보기 - 한반도에 평화를] 십자가의 평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1-42).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흘리신 예수님의 눈물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예수님께서는 무슨 이유로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예루살렘의 눈에는 감추어져 있다고 말씀하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의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을 잔인한 죽음으로 몰았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한반도를 바라보고 계실까? 또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교회에 무엇을 바라실까? 더 나아가 한국 교회는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려는 평화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고자 교회가 말하는 평화는 무엇이며, 어떤 평화를 바라고 있는지 살펴보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지 들여다보자.

 

 

교회가 말하는 평화

 

히브리 문화에서 ‘샬롬’은 ‘온전한’, ‘완성’, ‘번영’, ‘물질적이고 영적인 안녕’을 의미한다. 「성경」의 시편 저자는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리라.”(85,11)라며, 평화는 정의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강조한다. 이사야 예언자는 “정의의 결과는 평화가 되고 정의의 성과는 영원히 평온과 신뢰가 되리라.”(32,17)라며, 정의가 실현된 세상에서 하느님의 “백성은 평화로운 거처에, 안전한 거주지와 걱정 없는 안식처에 살게 되리라.”(32,18)라고 선포한다. 성경은 하느님의 평화는 정의와 분리될 수 없음을 천명한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실현하려고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훼손하는, 곧 정의를 위협하는 모든 불의에 저항하셨다. 그 저항은 폭력적인 방법이 아닌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인 동시에 ‘함께 고통을 느끼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역사의 현장에서 변두리로 쫓겨난 억압받고 착취당했던 이들과 함께 아파하며 그 불의에 저항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인간이 서로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모든 이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과 더불어 모든 피조물이 온전히 보존되며 인간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선포하신 평화를 위해 노력해 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은 사목 헌장을 통하여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에 국한할 수 없고 사람들 사이에 더욱 완전한 정의를 이룩하는 것’(78항 참조)이라고 단호하게 밝혔다.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부하신 ‘더 완전한 정의의 실현이 평화’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평화는 꾸준히 수고로운 노력으로 실현된다.

 

요한 23세 교황은 회칙 「지상의 평화」에서 “사실 개인들 안에 평화가 없다면, 곧 각자가 자신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면,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165항)고 천명했다. 이처럼 평화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교회가 바라는 평화

 

예수님께서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시다가 가장 잔인하고 평화롭지 못한 방식으로 죽임을 당하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이로써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 주시면서 세상이 하느님과 화해할 가능성을 열어 주셨다. 또한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평화는 함께 아파하는 것이며 용서와 화해의 산물임을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땅에서 용서와 화해,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포하는 사명을 지닌다. 사회 교리는 평화는 오로지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용서와 화해는 창조주의 본디 계획에 따라 인간의 다중적인 관계망을 회복하려는 진실한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성숙한 용서와 화해가 주는 열매가 평화이다.

 

교회는 평화를 이루는 길로 용서와 화해를 제시한다. 교회는 서로 불신하고 반목하며 파편화된 세상에서 평화를 촉진하는 가교 역할을 하도록 부름받았다. 이 사명을 이루고자 교회는 인류가 화해하여 평화로운 가족이 되도록 수고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교회는 가난한 이와 함께 정의를 위한 투신으로 하나의 인류 가족을 만드는 데 기여하도록 부름받는다. 교회는 모든 인류가 마음을 열어 타인을 환대하고 적대자와 평화를 이룰 수 있도록 끊임없이 평화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마치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일치시키셨던 것처럼, 더 이상 서로를 적대하지 않고 한 가족이 되게 하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교회의 역할

 

지금 한반도는 평화와 공동 번영의 시대로 나아갈 것인지, 여전히 휴전 상태로 남아 전쟁의 위험 속에서 살아갈 것인지 기로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교회가 적개심으로 분열된 한반도에 평화를 이루고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성찰할 때이다.

 

그러려면 첫째, 회심이 필요하다. 한국 교회는 지난날 한반도 분단에 어느 정도 일조했지만 이에 대해 아직 설득력 있는 사과나 용서를 청하지 못했다. 분단을 조장하고 형제를 적대시하게 했던 지난날을 성찰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참회와 속죄를 통해서만 지난날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한국 교회는 한국 전쟁이 가져온 상처로 남북이 상호 적대감과 증오를 넘어 분노와 보복의 심리로 증폭해 왔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제 그 상처를 넘어 ‘형제적인 사랑으로 십자가의 평화’를 이야기할 때이다.

 

둘째, 한국 교회는 어머니요 스승의 역할을 해야 한다. 북한 신자들은 통제된 사회에서 전교의 자유 없이 하느님을 목말라하고 있다. 또한 수십 년 동안 성직자와 수도자 없이 사제를 기다리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북한 신자들은 한국 교회와 전 세계에 흩어진 교회를 위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북한에서 발행한 교리서에 따르면 “교우들은 천주께 어린양들을 위하여 하루빨리 훌륭한 사제를 보내 주시기를 간절히 빌어야 한다.”고 밝힌다.

 

이제 교회는 북녘 신자들을 돌봐야 한다. 그들의 진위 문제로, 또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그동안 방치되다시피 한 북녘 신자가 하느님을 목말라하다가 늙어 가고, 죽음을 맞이하는 현실에 함께 아파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그들이 하느님을 깊이 만나고 깊은 영적 갈망을 채워 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한국 교회는 북한의 실상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가르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북한학을 전공한 성직자와 수도자가 많다. 한 가지 방안은 각 교구 본당에서 대림 시기나 사순 시기에 북한학을 전공한 성직자, 수도자를 초청해서 강의를 듣는 것이다.

 

분명 북한은 변하지만, 천주교 신자 가운데도 여전히 북한을 이념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보면서 판단하는 이가 있다. 평화의 시대로 나아가는 현시점에서 변화하는 북한을 이해하고 인정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언제나 평화를 이야기했던 교부들의 가르침을 깊이 새겨야 한다. 또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 맞서도록 세상을 가르쳐야 한다.

 

마지막으로 마음을 연 대화가 필요하다. 서로를 이해하려면 대화가 절실하다. 자주 만나서 대화하다 보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대화는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거나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노력이 함께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 무엇보다 대화를 강조한다. 남북 정상이 만나고 북미 정상이 만나 대화를 통해 용서와 화해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진정성 있는 대화는 서로가 품은 오해를 풀어 갈 의미 있는 기회이다.

 

 

십자가 없는 평화는 예수님의 평화가 아니다

 

오랫동안 이 땅의 많은 이가 분단된 한반도 현실에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평화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눈물이기도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받으며 고통받는 이와 함께 아파하셨다. 곧 평화는 서로가 함께 아파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평화로운 가운데에도 평화를 침해받는 이들이 있다. 그러므로 평화는 가장 약한 이를 배려하며 이룩되어야 한다.

 

또한 ‘평화’는 누군가에게는 위험한 단어일 수 있다. 예수님 시대에 평화는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의 지배 권력이나, 내부적으로는 헤로데, 착취와 폭력을 일삼던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에게는 위험한 단어였을 것이다. 결국 그 위험을 제거하려고 역설적으로 평화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평화를 거부하고 파멸을 선택했다.

 

평화를 향하여 가는 길은 참혹한 고통과 죽음으로써 불목하고 분열하는 세상과 불균형을 타파하시려고 했던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동반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교황청 국무원장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이 2018년 10월 17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면서 “십자가 없는 평화는 예수님의 평화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평화를 주시고자 몸소 십자가를 지셨다. 한국 교회가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 참평화를 이루는 길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꼭 이루어야 하는 사명임을 인식해야 한다.

 

* 김연수 스테파노 - 1998년 예수회에 입회하여 2008년 사제품을 받았다. 현재 예수회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9년 1월호, 김연수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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