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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환경] 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

1756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7-19

시작하는 글 : ‘찬미받으소서 주간’을 알고 계셨나요?

 

 

“지금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까?”(<찬미받으소서> 160항). 프란치스코 교종은 가톨릭교회 최초의 생태 회칙으로 불리는 <찬미받으소서> 반포 5주년을 맞아, 지난 5월 16일에서 24일까지를 ‘찬미받으소서 주간’으로 선포했습니다. 지구의 생태적 위기가 계속 악화하고 인간의 삶도 위기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 사태를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교종은 우리 그리스도인부터 솔선하여 생태 위기의 현실을 각성하고 행동하자고 호소하기 위해 이 기념 ‘주간’을 선포하셨습니다.

 

코로나19 재난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사태’입니다. 2000년 이후의 잦은 바이러스 창궐은 인간의 생태계 파괴와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초래한 재난에는 모두가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그 뿌리에 놓여 있는 생태 위기에 대한 엄중한 인식이나 과감한 변화의 조짐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체념마저 느껴집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우리를 ‘찬미받으소서 주간’에 초대하시며 호소하셨습니다. “생태 위기에 응답하십시오. 지구의 울부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이 계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피조물을 돌봅시다. 이는 좋으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교종의 이 호소는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온 현실을 고발하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의 외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새로운 길로 부르십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생명과 죽음의 기로에 섰습니다(신명 30,19 참조).

 

많이 늦었지만, 완전히 늦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어야 합니다. “지금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까?” 우리는 세상에 대한 창조주 하느님의 뜻인 창조질서가 온전히 보전되는 세상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여 생명을 보듬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자연의 한 부분임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생태적 균형과 질서를 존중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세상입니다. 정의와 평화의 세상,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신 예수님이 원하시는 세상입니다(루카 4,18-19). 우리가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생명의 길을 충실히 걷노라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사회적 꿈’과 ‘문화적 꿈’과 ‘생태적 꿈’은 차츰 현실이 될 것입니다(<사랑하는 아마존> 7항). ‘찬미받으소서 주간’을 우리를 생명으로 부르시는 하느님께 기쁘게 응답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미래 세대가 살 만한 지구를 물려주는 것에 관심을 보이는 첫 세대”가 되었으면 합니다(160항).

 

 

「찬미받으소서」 1장 : 쓰레기는 넘쳐나고, 시간은 없습니다

 

 

인간의 폭력적 개발과 채굴로 자연환경이 파괴되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소비가 일상화되어 세상은 “엄청난 쓰레기 더미”로 변해갑니다(21항). 만드는 데 5초, 사용에 20분 정도라는 일회용 플라스틱 컵은 자연 분해에 최대 수백 년이 걸립니다. 우리의 플라스틱 사용량은 1인당 한 해 평균 98kg, 세계 1위입니다. 매년 800만t의 쓰레기가 육지에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 태평양에는 한반도 넓이의 6배보다 큰 쓰레기 더미가 생겼습니다. 의류, 음식물, 종이, 전자, 산업 쓰레기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24기의 핵발전소가 있고, 신고리 5·6호기가 건설 중입니다. 핵발전소에서 매년 배출하는 고준위핵폐기물은 750t 정도로, 최소 10만 년 동안 세상과 완전히 분리 보관해야 합니다. 하지만 ‘완전히’는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가 아니고, ‘10만 년’은 기껏해야 4만 년 전에 지구상에 출현한 인류의 시간이 아닙니다.

 

2015년, 세계 195개국은 산업화 이후 지구의 평균 온도 상승을 2도로, 가능하면 1.5도로 제한할 것을 골자로 하는 ‘파리기후변화협약’을 채택했습니다. 2018년 제48차 IPCC(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 총회는 <지구온난화 1.5도 특별보고서>를 채택했습니다. 온도 상승을 1.5도로 억제하라는 이 권고를 따르려면, 2030년 탄소 배출을 2010년 대비 최소 45% 줄이고, 2050년에 ‘탄소 제로’를 달성해야 합니다. 엄청난 요구입니다. 산업화 이후 지구 온도는 이미 1도 정도 올랐고, 상승 속도는 점점 빨라져 지금은 10년에 0.2도 정도 오르고 있습니다. 현재의 추세를 가정하면 1.5도 상승까지 길어야 20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기후 위기는 긴급하고 절박한데(23-26항), 세상은 자기가 가던 길을 갑니다. 2017년 미국은 2020년 11월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를 공식 선언했습니다. 한국은 기존의 계획이라며 7기의 신규 석탄화력발전소 건설을 강행합니다.

 

“인간 환경과 자연환경은 함께 악화됩니다”(48항).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똑같이 피해를 받지는 않습니다. “환경과 사회의 훼손은 특히 세상의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48항). 재난은 같지만, 고통은 다릅니다. 상대적으로 책임이 덜한 사회적 약자가 먼저 피해를 보고 고통을 더 많이 겪습니다. 재난 피해는 공정하지 않습니다. 코로나19 재난이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생태 문제로 발생하는 재난은 공정과 정의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구의 부르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모두 들어야 합니다(49항). [2020년 7월 19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수원주보 6-7면, 조현철 프란치스코 신부(예수회, 서강대 교수, 녹색연합 상임대표)]

 

 

「찬미받으소서」 2장 : 창조의 기쁜 소식

 

 

“하느님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 함께 보편 가정”을 이룹니다(『찬미받으소서』 89항). 창세기의 창조 설화(창세기 1-2장)는 하느님과 사람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의 관계를 묘사합니다. 하느님의 모습, 곧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존재이며, 모든 사람은 존엄하고 평등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을 보시며 ‘좋다.’고 하셨고, 모든 생명체에게 번성하라고 축복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에덴동산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에게 부여하신 책무는 모든 피조물을 존중하고 돌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에덴동산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먹어도 되지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다른 피조물의 관계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창조질서를 이룹니다(66항).

 

평화는 “정의의 작품”입니다(이사 32,17). 평화는 또한 “인간 사회의 창설자이신 하느님께서 심어 놓으신 그 질서의 열매”, 곧 창조질서의 열매입니다(『기쁨과 희망』 78항). 따라서 정의는 창조질서의 보전이며, 그럴 때 평화가 옵니다. 이렇게 정의와 평화와 창조질서 보전은 하나로 통합됩니다(92항). 여기서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발견됩니다. 첫째,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보전하는 정의는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둘째, 창조질서 훼손을 지속하는 것은 불의한 사회 구조이므로 우리 신앙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복음의 기쁨』 182항). 사회정의와 생태정의는 창조질서 보전이라는 하나의 정의의 두 측면입니다. 생태정의가 훼손되면 사회적 약자가 먼저 피해를 보고, 사회정의가 훼손되면 생태환경이 악화합니다(49항, 82항; 호세 2,4). 에너지를 덜 쓸 수밖에 없는 가난한 나라와 사람들이 기후변화의 피해를 더 많이 입습니다. 코로나19 재난이 보여주듯이, 무분별한 개발과 채굴로 자연생태계가 파괴되어 바이러스 감염이 촉진되면 사회적 약자들이 먼저 재난의 희생자가 됩니다.

 

성경은 땅에 대한 인간의 절대적 소유권을 거부합니다(67항).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 25,23). 땅의 소유권에 대한 성경의 시각은 오늘날 자연에 대해 주인 행세를 하는 인간의 오만한 태도와 자의적 행태를 엄중히 경고합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의 필요를 위해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자연에서 우선시해야 할 가치는 지속가능성과 분배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찬미받으소서」 3장 : 세계를 ‘기계’로 보다

 

 

기후변화에서 보듯이, 생태 문제는 인간의 활동으로 생깁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렇게’ 행동한 것은 세상을 ‘그렇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생태 문제는 우리의 세계 이해와 연결됩니다.

 

17세기, 데카르트를 필두로 세계를 정신과 물질,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으로 분리하고, 자연을 물질적인 운동의 법칙으로 파악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이 등장한 이후, 이러한 세계관은 오늘까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자연을 물질로 보니 자연에서 인간의 행동을 제어할 장치가 제거되었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피조물이 인간이 ‘쓰기’에 좋은 것이 되었습니다.

 

근대 이전, 인간은 자연 자체의 “가능성을 존중하며 더불어 존재하는” 방식으로 자연을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제약이 없어지자 기술을 앞세운 사람들은 자연에서 “최대한 모든 것을 뽑아내는 것”에 몰두합니다(『찬미받으소서』 106항).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의 등장입니다. 예전에는 가축이 적당한 공간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생명체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누렸지만, 이제는 몸도 가눌 수 없는 좁은 철창 속에서 짧은 생애를 마칩니다. 사람들은 가장 효율적으로 균질한 ‘고기’를 시장에 공급하여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 골몰합니다.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에서 인간의 능력과 생태 문제는 비례합니다. 기술의 발전만큼 “인간의 책임과 가치관과 양심의 발전”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05항). “자연 질서의 착취에서 오는 부정적인 결과”는 무시되고(106항), 기술이 “모든 환경 문제를 해결”한다는 기술만능주의가 횡행합니다(109항). 공장식 축산과 유전자 변형 작물(GMO) 재배를 위해 숲을 없앱니다. 숲이 품고 있던 탄소가 풀려나며 기후변화를 부채질합니다. 서식처를 빼앗긴 야생동물과 거기에 기생하는 바이러스는 인간에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자연생태계를 훼손하여 바이러스 감염의 가능성을 키우면서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목을 매는 어리석은 짓을 반복합니다. 두 가지 모두 ‘돈’이 됩니다. 이윤만 보장되면 “인간에게 미치는 잠재적 악영향”은 무시된 채 새로운 기술이 쉽게 사회로 들어옵니다(109항).

 

아직, 절망은 이릅니다.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기술을 제한하고 그 방향을 바꾸어 […] 온전한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112항). 그러려면 “잃어버린 가치와 중요한 목표들”을 되찾기 위해 “속도를 줄여서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114항). [2020년 7월 26일 연중 제17주일 수원주보 6-7면, 조현철 프란치스코 신부(예수회, 서강대 교수, 녹색연합 상임대표)]

 

 

「찬미받으소서」 4장 : 세상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으니

 

 

프란치스코 교종은 생태 문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적 사회적 차원”을 고려해야 한다며 “통합 생태론(integral ecology)”을 제안합니다(<찬미받으소서> 137항).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환경위기와 사회위기라는 별도의 두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하나의 복합적인 위기에 당면한 것입니다”(139항). 환경위기는 자연의 문제이면서 근원적으로는 성장과 개발, 곧 사람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코로나19 감염은 질병의 문제이면서 근본적으로는 성장과 개발, 곧 사람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생명과 비생명, 식물과 동물, 인간과 자연으로 분리해서 보기 쉽지만,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89항). 하나의 ‘나무’나 ‘물고기’는 관념일 뿐, 현실에서 나무와 물고기는 땅과 물과 연결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연결이 없으면 생명도 없습니다. 땅과 물은 개별 생명체의 어머니입니다. 동물은 산소를 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뱉고, 식물은 이산화탄소를 마시고 산소를 내뱉습니다. 인간도 “자연과 끊임없는 상호 작용”을 합니다(139항). 순환이 없으면 생명도 없습니다. 성경의 창조질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존엄하며, 인간은 자연과 깊이 연결되어 있고 자연을 존중하고 돌봐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도 만물의 근원적 유대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통합 생태론은 자연환경을 경제, 사회, 문화, 일상생활의 측면에서 고려하고, 공동선과 세대 간 정의의 문제도 함께 고려합니다. 인간은 자연의 부분이며 사회는 자연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연 생태계는 “이산화탄소의 분해, 물의 정화, 질병과 전염병의 통제, 토양의 형성, 배설물의 분해”처럼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일을 수행합니다. 사회는 인간의 힘만이 아니라 자연에 의해 “미리 주어진 것”을 기반으로 유지됩니다(140항). 오늘날 경제는 자연을 ‘언제나 저기 있는 것’ 정도로 여기고 자연과 무관한 듯 행세하지만, ‘희소한 자원의 관리와 분배의 원리’를 다루는 경제는 근원적으로 자연의 제약을 받습니다. 그리고 지구의 자연은 유한합니다.

 

현대 세계를 지배하는 ‘성장’과 ‘개발’ 패러다임은 기계론적 관점에서 자연을 대상화, 도구화했고, 이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들도 희생됩니다. 통합 생태론의 관점에서 생태문제에 접근한다는 것은 결국 오늘날 ‘종교’의 반열에 오른 이 패러다임에 문제를 제기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태문제를 뿌리에서 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생태문제는 “사회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하나의 복합적인 위기”라는 것을 재확인하게 됩니다(139항).

 

 

「찬미받으소서」 5장 : ‘근원적 전환’이 필요하다

 

 

2018년 제48차 IPCC(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 총회의 ‘지구온난화 1.5도 특별보고서’는 산업화 이후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1.5도로 억제할 것을 권고합니다. 이 권고를 따르려면 전 세계가 탄소배출을 2030년까지 2010년 대비 45% 감축하고, 2050년에는 ‘탄소 제로’를 달성해야 합니다. 이 권고는 오늘날의 대량 생산, 유통, 소비, 폐기 체제의 ‘근원적 전환’으로만 가능합니다. 산업화 이후 세상이 발전할수록 ‘위험’도 커졌습니다. 21세기에 부쩍 늘어난 바이러스 감염은 발전의 부산물인 기후변화나 숲의 파괴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추정들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었습니다. 우리가 재난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확대하는 시스템을 계속 고집하면 가능성이 현실이 될 확률은 그만큼 커집니다. 어차피 변화는 불가피합니다. “강제된 변화인가 자발적 변화인가?” 이 물음을 직시하고 고민한다면, 코로나19 재난은 우리의 미래를 위한 축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산업화 이후 물질적 풍요를 약속했던 성장과 개발의 결과로 자연은 파괴되었고, 사회적 불평등이 심해지며 삶은 피폐해졌습니다. 만족과 여유가 아니라 긴장과 경쟁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하는 사람들이 급증했습니다. 풍요는 소수의 풍요를 뜻했습니다. “지속 가능한 성장에 대한 논의는 흔히 주의를 다른 곳에 돌리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수단”으로 전락했고(<찬미받으소서> 194항),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과 지구의 울부짖음은 더 커졌습니다(49항). 근원적 전환은 성장과 개발이라는 환상을 단호히 거부할 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최근 우리 정부는 포스트 코로나 대응 방안으로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을 두 축으로 하는 ‘한국판 뉴딜’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그린 뉴딜에서 정작 ‘그린’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산업 문명의 ‘발전’에 대한 고민은 없고 경기 부양을 위한 ‘사업’만 있습니다. ‘그린’을 말하면서 하루속히 ‘회색’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근원적 전환은 “이윤이 유일한 판단 기준”인 시장 논리로 성취할 수 없습니다(187항). “이윤 극대화의 원칙”으로 작동하는 시장은 “미래 자원이나 환경의 건강” 훼손은 개의치 않습니다(195항). 경제에 정치가 필요한 까닭입니다(189, 196항). 정치가 ‘공동선의 증진’이라는 제 역할을 할 때, 경제는 “효율 중심의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에 종속”되지 않고 ‘살림살이’라는 자기 본연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189항). 근원적 전환은 정치적 행위입니다.

 

“성장 신화를 넘어 지속 가능한 세상으로” 올해 가톨릭교회가 발표한 ‘환경의 날’ 담화문 제목입니다. 그렇습니다. 지속해야 할 것은 성장이나 발전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2020년 8월 2일 연중 제18주일 수원주보 6-7면, 조현철 프란치스코 신부(예수회, 서강대 교수, 녹색연합 상임대표)]

 

 

「찬미받으소서」 6장 : 안식일 정신과 생태적 회개 - 근원적 전환의 길

 

 

생태 위기의 뿌리에 “강박적”이고 “집착적”인 소비주의가 있습니다(<찬미받으소서> 203항). 성장의 이름으로 생산과 유통과 소비가 서로를 부추기는 세상의 근원적 전환은 우리가 먼저 변해야만 가능합니다(202항). “타자를 향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우리는 “피조물들의 본질적 가치”와 “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를 존중하는 “새로운 길”에 나설 수 있습니다(208, 205항).

 

성경의 안식일 전통에는 ‘자기 관조’와 ‘타자 배려’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안식은 “관상하는 안식”입니다(237항). 우리가 하느님의 안식에 참여하여(탈출 20,11) 삶을 성찰할 때, 안식은 “비생산적이며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일구고 돌보는” 노동의 의미를 깨달아 “공허한 행동주의”와 “배타적 개인적 이득”만을 추구하는 “끝없는 탐욕과 고립감”을 방지해줍니다(237항). 이렇게 안식은 우리에게 축복이자 거룩한 시간이 됩니다(창세 2,3).

 

안식일의 배경인 출애굽은 ‘해방’이 안식일 정신임을 보여줍니다(신명 5,15). 안식일은 당시의 사회적 약자인 “아들과 딸, 남종과 여종, 이방인”에게 최소한의 존엄과 평등을 보장합니다. “소와 나귀, 집짐승”에게도 적용되는 안식일 계명은 모든 피조물의 존중과 돌봄을 요구합니다. 안식년은 땅을 묵히는 ‘휴경’으로 땅의 휴식을 보장합니다(레위 25,2-7). 안식년의 소출은 모두의 것입니다. 희년은 빚 탕감과 땅 무르기를 통한 해방과 원상회복을 꾀합니다(레위 25,10-13). 안식년과 희년은 이웃과 지구와의 관계에서 “균형과 공정”을 보장하고, “땅의 결실”을 모두에게 돌려 창조질서의 회복을 꾀합니다(71항).

 

자신과 타자를 위해 일을 ‘멈추는’ 안식은 ‘자발적 자기 제한’의 정신으로 집약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자발적 자기 제한의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육화와 십자가라는 ‘자기 비움’(필리 2,6-8)은 자기 제한의 절정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주님의 은혜로운 해”인 희년을 선포했던 예수의 삶(루카 4,18-19)은 육화의 충실한 지속이었으며 십자가 죽음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예수의 삶에 자신을 조율하는 그리스도인의 회개는 예수님을 본받아 자발적 자기 제한을 기꺼이 수용하는 “생태적 회개”입니다(217항). 생태적 회개는 소유와 소비가 자랑인 문화에서 “적은 것이 많은 것”이라는 확신으로(222항), 단순과 절제와 검약의 삶으로 구현됩니다. 우리가 안식일 정신으로 주일을 지내며 우리 자신을 변화시킨다면, 오늘날의 폭력적 소비문화는 “서로를 돌보는 작은 몸짓”에서 비롯되는 “돌봄의 문화”에 차츰 자리를 내줄 것입니다(231항). 근원적 전환의 시작입니다.

 

 

「찬미받으소서」 마무리 : <찬미받으소서>에 관한 ‘특별 기념의 해’를 시작하며

 

 

코로나19 감염과 기후위기는 근원적 전환을 요구하는 ‘시대의 징표’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가던 길을 재촉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무관심합니다. 지난 5월 24일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찬미받으소서 주간’을 마무리하며 다시 <찬미받으소서>에 관한 ‘특별 기념의 해’를 선포한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 소비문화의 홍수 속에서 안식일 정신을 수용하는 자발적 자기 제한의 삶이 가능할까요? 지금까지 소수가 누려왔고, 다수가 선망해 온 풍요와 편리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겠지요. 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희년을 선포하시고 타자를 위한 자발적 자기 제한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분을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습니다(요한 16,33).

 

삼위일체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은 모두 “고유한 삼위일체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찬미받으소서> 239항). 삼위일체를 묘사하는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 상호내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의 완전한 개방과 신뢰와 의탁으로 온전히 하나를 이룬다고 말합니다(요한 14,20; 17,23). 삼위일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사랑은 비울수록 채워집니다. 삼위일체를 가장 빼닮은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은 자신을 비울수록 충만해지는 역설의 존재입니다. 자기 비움이 인간 본질의 내적 역동성이라면, 타자를 위한 자발적 자기 제한, 검약과 절제의 삶은 우리를 억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해방하고 완성합니다(223항). 자기 확장에 몰두하는 탐욕이야말로 인간 정체성의 부정입니다. 인간 정체성의 긍정은 자발적 자기 제한에 있습니다.

 

코로나19 감염으로 뒤늦게 학교가 개학했습니다. 감염을 막는다고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들이 엄마도 친구도 없이 홀로 난생처음인 학교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가 이 현실을 만들었다는 자괴감과 함께 프란치스코 교종의 물음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까?”(160항) 정부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우리마저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어린이들을 보아서라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스팔트에 균열을 내는 것은 이름 없는 풀입니다. “서로를 돌보는 작은 몸짓”이 “사회적 정치적 사랑”이 되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으로 우리 모두 ‘특별 기념의 해’를 지냈으면 합니다(231항). 우리가 “역사상 가장 무책임한 세대”가 아니라 기꺼이 “자기의 막중한 책임”을 짊어진 세대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165항). [2020년 8월 9일 연중 제19주일 수원주보 6-7면, 조현철 프란치스코 신부(예수회, 서강대 교수, 녹색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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