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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행복을 찾아서: 절제 - 딱 필요한 만큼

95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8-17

[행복을 찾아서 – 절제] 딱 필요한 만큼

 

 

‘블랙홀’은 사실 뻥 뚫린 구멍이 아니다. 중력이 너무 강해 빛을 포함한 어떤 것도 빠져나갈 수 없는 시공간의 영역이다. 아무것도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에,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 외부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 경계를 흔히 ‘사건의 지평선’이라고 한다. 우리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사람에게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할까

 

바흠은 농부다. 땅을 원했지만 가진 것이 없다. 어느 날 악마가 제안했다. 해가 지기 전에 가장 먼 곳까지 가면 그 땅을 모두 주겠다는 것이다. 바흠은 흥분했다. 걷기만 하면 모두 자신의 땅이 된다니.

 

다만 제안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 출발한 곳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바흠은 악마와 계약을 맺고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아무리 가도 지평선 너머로 여전히 비옥한 땅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끝없이 멀리 걷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돌아오려 했지만 결국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지쳐서 쓰러져 죽었다. 그에게 필요한 땅은 자신이 묻힐 만큼의 땅뿐이었다.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할까’라는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의 내용이다.

 

 

삶의 지평선

 

우리는 지평선 너머를 볼 수 없다. 이는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다. 블랙홀과 외부 세계의 경계를 사건의 지평선이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이른바 ‘시간의 지평선’으로 경계가 그어진다. 시간의 지평선 너머의 일은 지금 있는 곳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완전히 미지의 세계다.

 

너무 어려운 개념일까? 우리는 날마다 시간의 지평선을 넘는다. 오늘 먹은 밥으로 어제의 내가 배부를 수 없다. 경계에서 뒤로 돌아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시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 있다. 그는 자신의 공부량이 부족한 것을 알았기에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시험일이 한참 지난 뒤에야 ‘이제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누구보다 많은 지식을 가졌지만 시험에 합격할 수는 없었다. 시간의 지평을 넘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쌓고 배우고 모으고 집착하는 모든 것이 다 그렇다.

 

 

무조건 참는 절제?

 

흔히 식탐과 반대되는 선을 절제라고 하지만, 비단 식탐만 다스리는 것이 절제는 아니다. 물욕과 색욕, 권력욕 등 절제가 다스려야 하는 원초적 욕망은 수없이 많다. 절제되지 않은 욕망은 불행과 슬픔의 씨앗이 되기 때문에 동서양의 현자들은 늘 절제와 중용을 강조했다.

 

하지만 단지 욕심을 잠재우려고 절제해야 한다면 참 난감한 일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딱 필요한 만큼’만 욕심을 내도록 빚어졌다면 되었을 것이 아닌가? ‘가장 적절한 수준의 욕심’을 가졌다면 절제도 필요 없다. 원하는 만큼이 가장 적당한 수준이니까.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다른 이가 먹던 라면을 한 젓가락만 먹겠다고 하다 곧 새로 라면 봉지를 뜯는 자신을 발견한다. 백만 원만 벌면 좋겠다고 하던 사람은 곧 천만 원을 바란다. 아늑한 원룸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사람이 펜트하우스를 마다할까? 그러니 수많은 경전이 한목소리로 ‘절제’를 부르짖어도 도무지 와닿지 않는다. 손만 내밀면 얻을 수 있는데, 다만 ‘절제는 좋은 것’이라는 믿음으로 내민 손을 도로 넣을 수는 없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사실은 ‘절제하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세간의 평판을 욕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절제를 욕심내는 지혜

 

‘시간의 지평’은 경제학에서 많이 사용하는 개념이다. 아무리 수익률이 좋은 주식을 가지고 있어도 차익을 실현하지 않으면, 곧 주식을 팔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해마다 두 배씩 오르는 주식이 있다면 신날 것이다. 재산을 모두 주식에 몰아넣는다. 무조건 두 배씩 오르니 도무지 다른 곳에 돈을 쓸 수가 없다. 길거리에서 노숙하면서 백 원만 생겨도 모두 주식을 사둘 것이다. 그러면 금방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삶이 끝나면 모든 것은 사라진다. 평생 노숙자로 살다 죽은 것이다. 죽음 뒤에는 무슨 일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지평선 밖의 일이다.

 

우격다짐으로 욕심을 억누르는 절제는 오래가기 어렵다. 욕심은 늘 절제심을 이긴다. 만약 가혹하게 자신을 연단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저 ‘욕심을 참는다.’는 자기만족에 중독된 것인지도 모른다. 욕망은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어떡하란 말인가? 밤마다 치맥의 유혹에 넘어가고, 필요도 없는 물건을 충동적으로 구매하며, 쓰지도 못할 돈을 죽어라 모으는 것도 그냥 받아들여야 할까?

 

절제는 바로 시간의 지평선을 고려하여 지혜롭게 욕심내는 것이다. 삶의 과정은 끊임없는 작은 지평으로 이어져 있다. 시간은 뒤로 흐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지평선 뒤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10대는 20대에 무슨 일을 겪을지, 중년은 노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리고 결국 죽음 뒤에는 어떤 일이 있을지 알지 못한다. 주어진 시간의 지평 안에서 지혜롭게 욕심을 부려야 한다. 절제를 욕심내는 것이다.

 

 

지평선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삶의 신비 가운데 하나는 바로 시간의 유한성에서 시작한다. 누구도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대략은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 가운데 누구도 50년 이후를 기약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남은 시간의 가치는 지수 함수의 그래프를 그리며 점점 무한대로 치솟는다. 그 끝에 최종적인 시간의 지평선이 있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내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삶의 지평선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일이다. 당장 내일 죽는다는 확신만 있다면 전 재산과 맞바꾸어 가장 소중한 일을 하려고 할 것이다. 지평을 넘어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혹시 지금 지평선의 끝에 다다른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욕심내고 무엇을 포기해야 할까? 그 답은 모두 다르겠지만, 아마 요즘 욕심내고 있는 그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무언가를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적이 있는가? 미끈한 스포츠카도 좋고, 아름다운 외모나 세상의 칭찬도 좋다.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돈도, 가족들과 안락하게 지낼 수 있는 집도 좋다. 그것을 이루고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할 요량인지 헤아려 보고, 남아 있는 불확실한 시간의 지평과 무게를 달아보자. 주상 복합 아파트를 사려고 30년 동안 죽도록 일만 해야 한다면, 50세 중년이 선택할 일은 분명 아니다.

 

절제는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분명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시간의 지평 안에서 지혜롭게 시간을 쓰는 것이다.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는 순간, 무엇이든 그것이 딱 필요한 만큼만 원하게 될 것이다. 딱 필요한 만큼만.

 

* 박한선 - 정신과 전문의. 신경 인류학자.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강사로 지내며, 서울대학교 비교무화연구소에서 인간의 정신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목동병원, 서울대학교 병원, 성안드레아병원에서 일했다.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 「토닥토닥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를 펴냈다.

 

[경향잡지, 2019년 6월호, 글 박한선 · 그림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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