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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신앙 선조의 불꽃 같은 삶: 하느님의 종 정종호

184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8-13

[신앙 선조의 불꽃 같은 삶] ‘하느님의 종’ 정종호

 

 

2017년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대한 시복자료집 제1집을 간행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종 133위는 모두 평신도입니다. 자발적 신앙 공동체를 세운 한국교회 초기 신자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 평신도에게는 언제나 모범 중의 모범입니다. 이에 자료집의 내용을 발췌 · 정리하여 게재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공부하고 순교 영성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활 대축일에 「희락경」 외우던 정종호

 

‘하느님의 종’ 정종호(鄭宗浩, 1751?~1801)의 세례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여주 고을 출신이었으며 성품이 너그럽고 진중한 사람이었다.”라는 기록과 함께 입교 후, 그의 신앙생활을 본 가족들이 모두 그를 따라 열심히, 또 변함없이 신앙을 실천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801년 봄, 정종호는 원경도, 최창주, 이중배와 함께 감사 앞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 신앙을 증거했다. 그곳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본래 살던 곳으로 옮겨진 후 참수당했다.”

 

다블뤼 주교는 그의 기록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 “1801년 음력 3월 원경도 요한, 이중배 마르티노 그리고 다른 3명의 교우가 부활절 축일을 보내기 위해 그(정종호)의 집으로 왔다. 그는 그 교우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들이 여느 때처럼 함께 기도를 바치고 성경 읽기를 마치자 느닷없이 포교들이 들이닥쳐 모두를 잡아갔다. 정 씨와 앞서 이름을 댄 두 교우는 관장 앞에서 똑같은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천주교인으로 죽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명하여 1801년 음력 3월 13일 여주읍에서 함께 참수되었다. 당시 정 씨의 나이는 50세였다.”라고 적었다.

 

안타깝게도 정종호의 믿음살이가 어땠으며 체포와 순교 당시의 정황이 어떠하였는지 자세하게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함께 잡혀 들어간 다른 교우들의 기록을 통해 그 정황을 알 수 있다. 교회 측 기록 가운데 황사영이 쓴 「백서」와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 및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이 특히 중요한 자료이다. 교우들은 1800년 부활 대축일 때 개를 잡고 술을 빚어 한 마을 교우들과 함께 길가(산골의 작은 길)에 모여 앉아 큰소리로 「희락경」(喜樂經, 지금의 부활 삼종기도)을 외우면서 바가지와 술통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며 온종일 흥겹게 지냈다. 하지만 교형자매들이 함께 모여 부활 삼종경을 외우는 기쁨을 누리던 것도 잠시, 원수처럼 지내는 한 가문의 고발로 정종호를 비롯하여 다수의 교우들이 잡혀가게 되었다. 교우들 중에는 마음이 약한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 여러 차례 독한 형벌을 겪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굳게 버텼으며 마침내 석방되지 않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옥에 갇힌 후의 행적은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여주 감옥에는 원경도 요한과 이중배 마르티노, 정종호만이 남았고 거기에 최창주 마르첼리노와 조용삼 베드로 그리고 천주교인으로 취급된 비신자 임희영이 추가되었다. 감옥 안에서 그들은 심심풀이로 글짓기에 전념하였으며 기도를 바치고 외교인들에게 전교하며 입교를 권하는 데에 열중하였다. 1800년 음력 10월에 수감된 교우들이 감사 앞에 호출되었는데 감사는 부드러운 말로 그들의 마음을 끌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즉시 그들을 석방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 그러나 모든 시도가 쓸데없음을 본 감사는 그들의 다리를 연속으로 때리게 하고 각자에게 서명시킨 그들의 사형판결을 선고하고, 그들을 옥으로 돌려보냈다.”

 

 

『일성록』과 『순조실록』에 실려 있는 정종호의 기록

 

『일성록』은 1760년부터 1910년까지 국왕의 동정과 국정에 관한 제반 사항을 수록한 정무일지이다. 여기에는 경기 감사 이익운(李益運, 1748~1817)의 상소가 실려 있는데 거기서 정종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신이 조사하여 다스린 자들 중에서 이미 판결이 난 자는 이중배, 유한숙, 임희영 세 명의 죄수입니다. 이 밖에 더욱 못된 자들은 원경도, 정종호, 최창주, 주운형, 윤유오, 장지의 여섯 명으로 모두 사형에 처하는 것을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이와 함께 비교해 볼 수 있는 내용이 『순조실록』에도 실려 있다. 마찬가지로 감사 이익운이 경기도 여주와 양근에서 18명을 잡아들여 문초를 하여 조사한 뒤 법률에 따라 처단하도록 문서로 왕에게 요청한 장계(狀啓)이다.

 

“경기 감사 이익운이 도내의 사학 죄인(邪學罪人)으로 여주(驪州)에서 11인, 양근(楊根)에서 7인을 취초(取招)하고 사문(査問)한 후에 율(律)에 의거하여 감단(勘斷)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이에 이중배(李中培) · 임희영(任喜永) · 유한숙(兪汗淑)은 신주(神主)를 세우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아니하여 사람의 윤리를 폐절(廢絶)하고 형륙(刑戮)도 마음속으로 달갑게 여긴 것으로 결안(結案)을 받아 부대시참(不待時斬)하도록 명하였다.

 

원경도(元景道) · 정종호(鄭宗浩) · 최창주(崔昌周) · 윤유오(尹有五)는 윤리를 멸절(滅絶)시키고 상도(常道)를 패몰(敗沒)시켜 인심을 현혹시켰으므로 일률(一律)에 관계되지만, 모두 의정부로 하여금 상세하게 복심(覆審)하여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사형선고를 받고 여주와 양근의 옥에 갇혀 있던 정종호와 다른 교우들은 같은 해 1월과 2월에 관장 앞으로 다시 호출되었다. 관장은 여러 차례 배교를 하라고 설득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마침내 형벌을 내렸다. 사형 판결문이 확증된 뒤 그는 의금부 재판소로 이송되었으며, 의금부에서 다시 해읍정법(該邑正法)에 따라 그가 살던 여주로 보내져 처형되었다. 해읍정법 또는 해도정법(該道正法)으로 처형된 것이다. 이러한 처벌 방법은 본래 거주하던 곳으로 죄수를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마을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여주로 돌아온 그들이 천상 하늘로 올라가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종호는 여주 관아의 문에서 남쪽으로 1리쯤 떨어진 큰길가에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당했다. 그와 더불어 땅에서의 순교와 하늘에서의 영광된 월계관을 함께 쓴 교우들은 이중배, 원경도, 최창주, 임희영이었다.

 

[평신도, 2019년 가을(계간 65호), 글 · 정리 송란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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