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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 부르심이란 무엇인가

129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5-22

[경향 돋보기 -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 부르심이란 무엇인가

 

 

교회는 해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축제 가운데에서(부활 제4주일)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신앙인 각자가 생각해 보도록 초대한다. 일상에서 그분의 부르심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그분을 더 잘 따르고자 자신을 변화시키고 자유로이 투신하는 삶이야말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게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부활 신앙의 핵심은 그분을 모시고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7-28).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분의 부르심을 알지 못하고, 또한 부르심을 감지했다 하더라도 그 부르심에 따르지 않고서 나에게 영원한 생명과 참행복이 가능한 것일까?

 

 

성소, 부르심의 의미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 ‘성소’(聖召, vocatio, Beruf)와 ‘부르심’(call)이라는 말은 같은 듯하면서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성소는 성사적 신분으로의 초대로, 부르심은 일상에서의 내적 자각으로 구별하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어부나 세리였던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을 성소의 원형으로 생각하여 이를 통해 열두 제자로서 직분을 받게 된다는 의미로, 곧 오늘날 교회의 직분인 사제나 부제로 서품되는 의미로 성소를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부르심이라면 그분의 위대함 때문에 모두가 거룩하고 완전하여 ‘거룩한 부르심’(성소)이 된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1서 등에서 부르심(Klesis)을 이야기할 때, ‘부르심’이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해당하며 신앙으로 초대된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 ‘성소’(vocatio)는 고대 교회에서 특별히 ‘수도승으로의 부르심’을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오늘날에도 수도 성소는 그런 의미의 유효한 표현으로 복음적 삶의 모범을 가리킨다.

 

이처럼 ‘성소’라는 단어가 한편으로 수도자 신분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이면서도 다른 한편, 세상의 모든 신분이 창조주로부터 받은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는 신학적 성찰이 시작되면서 세상의 일(직업) 모두가 각기 존귀하다는 생각이 생겨났다. 루터는 일반 그리스도인(평신도)보다 우월한 지위로 대접받는 수도자의 성소를 오히려 비판하였고, 모든 신분과 지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과 실천 속에서 ‘성소’라는 종교적 의미가 발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점차 세속적인 직업, 일 모두를 ‘성소’(Beruf, vocation)로 불렀다.

 

오늘날 영어의 ‘vocation’이나 독일어의 ‘Beruf’는 직업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우리나라와 중국 등 한자 문화권에서는 ‘부르심’과 같은 의미로 ‘천명’(天命)이나 ‘하늘의 뜻’을 사용한다. 「중용」에서는 천명, “하늘이 하명하여 부여한 것을 본성”(天命之謂性)이라 한다. 여기서 본성은 현대어로 ‘양심’에 해당할 것이다.

 

정약용은 천명은 ‘본성’뿐 아니라 순간순간 ‘경고’로서도 주어진다고 가르쳤으며, 하늘의 뜻을 잘 알아들으려면 천 · 상제와의 인격적 관계가 관건이라 생각하였다. 안중근 의사가 일본의 침략에 맞서 독립 투쟁을 전개하고 마침내 적장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때도 ‘천명’을 따랐다고 자서전에 적고 있다.

 

하느님은 인간을 불러 자신의 계획을 말씀하시고 인간은 이를 알아듣고 그분의 뜻을 따른다. 자연 종교에서처럼 하느님의 뜻을 ‘본성’ 안에 담아서 주었다고 말을 하든, 계시 종교에서처럼 특별한 계기에 은밀한 부르심이 있다고 말을 하든, 부르심은 하느님에게서 연유한다. 하느님의 은혜로운 초대는 우리 삶 속에 가득하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알아차리느냐에 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언제나 하느님께서 나보다 먼저 주도권을 쥐고 계신다. 내가 그분을 까맣게 잊고 있어도 그분은 내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기다리신다. 내가 그분의 부르심, 문 두드림을 알아차리고 문을 연다면 그분은 내 운명에 들어와 삶의 모든 진실과 참행복을 나누어 주신다.

 

 

부르심에 잘 응답하려면

 

그분의 목소리를 잘 알아차리려면 무엇보다 세 가지 요소, 곧 기도, 일상에 대한 성찰, 그리고 자유가 중요하다.

 

첫째, 기도란 하느님과 소통하며 그분과 친교를 이루는 행위이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그분의 인격을 깊이 듣고 느끼며 응답하는 가운데 그분과 친교와 사랑이 생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둘째, 성찰이 부르심을 알아듣는 데 왜 중요한가? 우리가 사는 사회, 공동체, 세계 속에서 일상의 많은 사건과 경험들을 겪게 되는데 이런 사건과 체험이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피고 관찰한다. 우리 삶을 성찰하는 방법을 예수님은 기도로 가르쳐 주셨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 6,10-13).

 

우리 삶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뜻은 바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건 안에서 드러난다.

 

셋째, 자유가 부르심을 알아듣는 데 중요하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어떤 사람에게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을수록 그분의 목소리를 더 잘 듣게 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마라.’ 다만 ‘하느님 나라를 먼저 구하라’(루카 12,22 이하 참조).

 

진리와 진실,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먼저 구하고 직업, 성공, 업적을 부수적으로 돌릴 줄 알면 자유로운 사람이다.

 

 

부르심은 신분에 있지 않고 관계에 있다

 

위에서 말한 것을 요약하자면, ‘세속적 욕망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진리), 또는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면서 삶의 현장, 곧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인간이 ‘하느님의 뜻’으로 알아듣는 행위’를 식별이라 말한다면, 이를 하느님 관점에서는 ‘부르심’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그것이 성직이든, 수도 생활이든, 평신도의 길이든 신분에 따라 ‘부르심’, ‘성소’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신앙 행위)의 질에 따라 구분되어야 한다.

 

문을 두드림과 문을 엶, 부르심과 알아차림은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발적 투신의 과정에서 발생한다. 사제나 주교, 수도자가 자신의 신분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그분의 부르심에 ‘예’ 하는 순명이 없다면 성소의 삶이 아니다. 평신도로서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세상의 ‘장터’에 살지만 장터 한가운데서 하느님과 일치하며 한계 속에서도 카이사르의 것에 휘둘리지 않고 당당히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천해 가는 길이면 이것이 성소의 길이다.

 

신앙적 진리를 증언하다 처형당한 순교자들,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험을 보면 생명을 내어 준다.)의 모범을 보인 안중근, 로레토 수녀로서 안정된 교사생활을 떠나 캘커타의 가난한 이들 속에서 새로운 부르심을 받고 ‘빈자들의 어머니’가 된 마더 데레사, 식민지 · 민주화 · 산업화 시대 등 역사의 흐름 속에서 늘 깨어 있으면서 정치 사회 운동과 농민 운동과 한살림 생명 운동으로 사회를 변혁시킨 장일순처럼, 이들이 세상 끝날까지 살아 계시며 세상을 완성하시고자 사람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응답한 이들이다.

 

이들을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많은 이가 걸었던 세상의 욕망을 추종하지 않고 이기적 삶을 거슬러 진리와 세상을 위해 생명을 바치거나 일생을 봉헌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동시대의 사람과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영웅적 삶이 아니라도 좋다. 하느님께서 주신 달란트에 따라 자신의 재능과 생명을 하느님 나라를 위해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한 사람들은 모두 ‘부르심’에 충실하고 ‘믿음의 싸움’을 잘한 사람들이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나를 부르신다

 

세상의 어떤 직분이나 어떤 직업의 사람도 하느님의 부르심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다 부르심을 받고 사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그저 세상의 유행이나 관행 속에 살면서 형식적으로 신자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잘 들리지 않는다. 어렴풋이 부르심을 들을 수 있을지라도 부르심에 응답한 삶으로 가기는 어렵다.

 

예수님을 찾아와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질 줄 알았던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지만, 그분의 뒤를 따르지 못했다. 자신이 소유한 재산에 미련이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0,17-22 참조). 그는 그분을 따르는 삶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부르심의 삶은 안정된 정서와 숙달된 일, 습관화된 제도에 놓여있지 않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을 포기할 때 어느 날 갑자기 영혼 깊은 곳에서 살짝 터져 나온다. 자신이 내외적 억압으로 신음하는 노예였음을 일순간 한 줄기 빛으로 조명받으면서 해방되고 새로운 비전을 얻게 된다. 그 변화는 갑작스러운 선물로 찾아오기에 은총이다. 은총은 나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그래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된다. 나만의 ‘탈출기’ 사건이고 미래의 ‘가나안’으로 떠나는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우리 인생 전체가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 하느님 부르심의 연속이다.

 

* 김용해 요셉 - 예수회 사제.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철학과 교수로 신학대학원장과 신학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독일 뮌헨 예수회 철학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주요 저서로 「종교 간의 대화를 통한 인권과 인간 존엄성의 근거」, 「젊은이의 행복학」, 「인간 존엄성의 철학」, 「일반윤리학」, 「알프레드 델프」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9년 5월호, 김용해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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