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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홍) 2019년 10월 18일 (금)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가톨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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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일치 순례기 붓다의 길, 예수의 길3: 첫 설법지 녹야원

1813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4-22

[김소일 위원의 일치 순례기 붓다의 길, 예수의 길] (3) 첫 설법지 녹야원


예수는 인간의 나약함을, 붓다는 인간의 위대함을 보다

 

 

- 깨달음을 얻은 붓다는 다섯 제자를 상대로 첫 설법을 펼쳤다. 사성제와 팔정도를 가르친 첫 설법을 초전법륜이라 한다. 그 현장인 사르나트는 사슴이 뛰놀았다고 해서 녹야원으로도 불린다. 사르나트의 탑과 주변에서 발굴된 사원 터.

 

 

첫 설법의 현장 사르나트

 

붓다가 고행림에서 수행할 때 곁에 다섯 제자가 있었다. 그들은 붓다가 여인으로부터 유미죽을 공양받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하며 떠나갔다. 홀로 남은 붓다는 곧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이루고 제자들을 찾아가 첫 설법을 펼친다. 제자들이 옮겨간 곳은 사르나트, 사슴이 뛰놀았다고 해서 녹야원으로도 불리는 곳이다. 

 

부다가야에서 사르나트까지는 구글 지도에서 247㎞로 나온다. 순례단 일행이 탄 버스로는 8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그나마 현지 경찰이 길을 뚫어 준 덕분이었다. 화물차로 뒤덮인 고속도로는 14억 인구의 인도 경제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붓다는 이 길을 걸어서 갔을 테니 아마 일주일 정도는 족히 걸렸을 것이다. 그 거룩한 길을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지루해 한다면 순례자의 마음이 아니다.

 

사르나트는 강렬한 태양 아래 아름다운 녹지가 펼쳐진 곳이다. 설법 장소로 추정되는 곳에 높이 43.6m의 탑이 있다. 주위로는 발굴된 사원터 같은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바로 옆에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불상 등 대부분의 출토품을 전시하고 있다. 다행히 사진 촬영에 제한이 없다.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된 초전법륜상.

 

 

산 위에서 가르친 여덟 가지 참행복

 

세례를 받은 예수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며’ 복음을 선포했다.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때 예수는 가파르나움 근처의 산 위에 올라가 인상적인 가르침을 펼친다. 산상설교 또는 산상수훈의 핵심은 ‘참행복’ 선언이다. 여덟 가지 행복을 설파한 이 가르침을 흔히 진복팔단이라고도 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12)

 

 

붓다의 첫 가르침 사성제와 팔정도

 

붓다의 첫 설법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불법의 바퀴를 처음 굴렸다는 뜻이다. 이로써 불, 법, 승, 삼보가 완성된다. 붓다와 그 가르침, 그리고 승려를 말한다. 초전법륜의 핵심은 사성제와 팔정도로 설명된다. 

 

붓다는 삶을 관통하는 근본 진리로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를 제시한다. 고(苦)는 생로병사를 비롯한 현실 세계의 고통이다. 집(集)은 그 고통을 낳는 애욕과 집착이다. 멸(滅)은 고통과 번뇌의 소멸을 뜻하는 해탈이다. 도(道)는 열반에 이르는 올바른 수행법이다.

 

그 수행 방법이 팔정도이다. 미혹의 세상을 건너는 여덟 가지 올바른 길이다. 곧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사성제가 진리라면 팔정도는 그 진리를 향한 실천적 수행법이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붓다가 깨우친 길을 중도(中道)로 설명했다. 쾌락과 고행의 두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와 중정의 길이라는 것이다. 팔정도가 바로 중도라는 의미였다.

 

- 첫 설법 장소로 추정되는 곳에서 기도하고 있는 순례자들.

 

 

인간, 위대하면서 동시에 약한 존재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산상수훈이 강조하는 것은 결국 마음이다. 슬퍼함, 온유함, 자비로움, 의로움, 평화로움이 다 마음이다.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 

 

불교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온갖 생각들을 일컬어 번뇌라 한다. 근심 걱정 불안 초조 슬픔 우울 분노 울분이 다 번뇌다. 번뇌는 실체가 없다. 다 마음이 지어낸 허상일 뿐이다. 이를 깨달아야 번뇌에서 벗어난다. 어느 제자가 물었다. “제 마음이 너무 어지럽습니다.” 선승이 말했다. “네 마음을 가져와 봐라. 고쳐주마.” 마음은 실체가 있는 듯해도 결국 일었다 스러지는 한 조각 구름일 뿐이다.

 

가난한 마음은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는 순종이며 겸손이다. 번뇌를 알고도 버릴 수 없는 우리는 그분께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기도는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처절한 고백이다. 움켜쥔 손으로는 기도할 수 없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온전히 마음을 비운 사람만이 진심 어린 기도를 올린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 37,5) 진실로 가난한 기도는 성령의 은총을 얻는다. 그의 영혼은 기쁨과 평화, 온유와 사랑으로 환하게 빛날 것이다.

 

불교는 스스로 깨달음을 향해 용맹정진하라고 한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위대한 가능성을 열어 둔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나약함을 먼저 보아야 한다. 온전히 그분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해야 한다. 오직 은총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창조의 신비 앞에 우리는 한없이 미약한 존재다. 다만 그분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에 또한 존엄하다. 

 

두 종교의 가르침은 끝내 평행선일까. 위대함과 미약함은 사실 같은 말일지 모른다. 우리는 위대하면서 동시에 미약하다. 강하면서 약하고, 거룩하면서 또한 비천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4월 21일, 인도=김소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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