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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수녀원 창가에서: 수녀원의 부고

61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8-09-20

[수녀원 창가에서] 수녀원의 부고

 

 

수녀원에 살면서 매우 뜻깊고 소중하게 생각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돌아가신 수녀님들의 부고다. 국제 수녀회이다 보니 고령화된 외국 관구의 수녀님들의 부고를 가끔 받는다.

 

아직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한국 관구의 회원들은 대체로 젊기 때문에 부고가 그리 많지 않지만 파푸아 뉴기니, 독일, 미국, 호주, 페루 등 역사가 오래된 관구에서는 많은 편이다. 부고를 받은 본원과 분원 공동체는 함께 연도를 바친 뒤 돌아가신 수녀님의 생애가 담긴 부고를 읽는다.

 

 

어떤 영적 독서보다도

 

모든 부고의 첫머리에는 돌아가신 수녀님이 살아생전 좋아했던 성경 말씀이나 그 수녀님의 생애에 의미를 주었던 글이 얼굴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는 돌아가신 수녀님의 장례미사 일정이 나온다. 부고를 읽는 수녀들은 그 말씀과 함께 돌아가신 수녀님의 전 생애를 떠올리며 기도드린다.

 

돌아가신 수녀님의 긴 수도 여정을 매우 간결하게 요약한 것을 받으면 특별한 선물을 받는 기분이다. 어떤 분은 평균보다 조금 일찍, 또 어떤 분은 조금 늦게 하늘나라에 들어가지만 대개 50-70년 동안 수도 생활을 한 뒤 회원들에게 남겨 주는 것이라고는 짤막한 한두 장의 부고뿐이다.

 

그 짧은 부고가 그토록 소중한 이유는 한 수녀의 일생이 담긴 짧은 성인전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생애는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심지어 같은 수도회 회원들에게도 드러나지 않게 살다 간 이름 없는 성인들의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다.

 

부고를 통해 듣는 수녀님의 온 생애 이야기는 그 어떤 영적 독서보다도 진지하고 풍요로워 감동을 받는다. 그래서 세상을 떠난 수녀님들의 부고는 아직 지상에 남은 우리 수녀들에게 영적 정신적 유산이 된다.

 

국제 모임 등을 통해서 얼굴을 아는 수녀님도 있지만 대부분은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수녀님들의 생애를 부고로 접한다. 그럼에도 아주 다른 세상에서 살았던 그분들의 생애가 전혀 생소하지 않고 매우 친숙한 한 공동체 수녀님의 이야기처럼 다가오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같은 영성과 카리스마로 함께 살아온 한 수도회 회원이기 때문이다.

 

부고를 접할 때마다 예외 없이 고개가 숙여진다. 나의 삶을 돌아보고 쇄신하도록 더 자극을 받게 된다. 일생토록 하느님을 그리며 살다가 먼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간 수녀님의 삶이 가장 효력 있는 교훈인 셈이다.

 

 

그런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돌아가신 수녀님의 삶이 축복이었듯이 죽음도 은총이다. 서로 다른 자매들이 모여 사는 수녀원 공동체에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지만 부고를 읽을 때만큼은 일치감과 공동체에 대한 감사가 가슴깊이 우러난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깊은 기도와 숙고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돌아가신 회원을 위해 모든 회원이 함께 기도를 바칠 때 수도자의 진정한 은총과 공동체 삶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된다. 장례미사에 참석하는 많은 사람이 회심한다고 하는데 수녀원에서 회람되는 부고도 그런 구실을 한다.

 

얼마 전에는 한국에서 6년 동안 선교사로 사시다가 본국으로 돌아가신 미국 수녀님의 부고를 받았다. 부고에는 그 수녀님의 얼굴 사진과 함께 수녀님이 관구장으로 취임할 당시에 사용했던 성구가 적혀 있었다.

 

“지혜를 얻으려고 깨어 있는 이는 곧바로 근심이 없어진다. 지혜는 자기에게 맞갖은 이들을 스스로 찾아 돌아다니고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상냥하게 모습을 드러낸다”(지혜 6,15-16).

 

수도 생활에 대한 경험과 지혜가 풍부하셨던 그 수녀님은 일흔 살이 되시던 해에 한국으로 오셔서 한국 수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셨다. 수녀님은 큰 열정을 쏟으시며 영어를 더 잘 가르쳐 주려 하셨지만, ‘한국 수녀들은 늘 바빠서 영어 공부할 시간이 없다.’며 마음 아파하셨다.

 

수녀님은 우리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며 한국에 깊은 관심을 보이셨다. 특히 김장철에 수녀원에서 수백 포기나 되는 김치를 다 함께 담그는 일을 매우 흥미로워하셨다. 미국으로 되돌아가신 수녀님은 하늘나라로 떠나시기 몇 해 전부터는 한국에서 체험했던 일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게 되셨지만 생전에 한국을 마치 제2의 고향처럼 표현하셨다고 한다.

 

수녀님은 방을 온통 한국에서 찍은 사진들과 기념품들로 가득 채우실 정도로 한국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셨다. 그러신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큰 슬픔이다. 하지만 이제 하늘나라에서 시공간의 경계를 초월하여 계신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수녀회 내에 부고가 없다면 다른 관구 수녀님들이 언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지 알 수 없다. 부고 덕분에 우리 수녀들은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여행 일정과 살아온 날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게 된다.

 

 

산 이와 죽은 이들의 통공을 믿으며

 

수녀회 내부에서 회람되는 부고의 힘은 강력하다. 전 세계의 모든 관구 수녀가 같은 자매라는 강한 유대감을 갖게 한다. 삶을 나누는 것뿐만 아니라 죽음도 함께 나누면서 수도 가족들의 끈끈한 자매애를 키우며 큰 공동체의 일치감을 형성한다. 새로운 회원을 맞이할 때뿐만 아니라 한 수녀님을 하늘나라로 보낼 때도 공동체가 함께하는 것은 참으로 큰 위안이 된다.

 

산 이와 죽은 이들의 통공을 믿으며 수도 공동체에서는 돌아가신 모든 수녀의 기일을 기억하며 기도한다. 1900년 독일 뮌스터 힐트룹에 수녀회가 창립된 이래로 돌아가신 수많은 수녀님의 기일을 기억하다보니 1년 내내 거의 날마다 돌아가신 수녀님들을 기억하는 셈이다.

 

살아서뿐만 아니라 먼저 하늘나라로 간 수녀님들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린다고 생각하면, 그래서 그곳에서 선배나 동료 수녀님들을 만난다고 생각하면 하늘나라로 가는 여정이 그리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부고를 통해 같은 수도회 회원으로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정을 나누는 것도 지상에서 삶을 나누는 것만큼이나 아름답다. “당신의 뜻에 따라 저를 이끄시다가 훗날 저를 영광으로 받아들이시리이다”(시편 73,24).

 

* 전봉순 그레고리아 - 수녀. 예수성심전교수녀회 관구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8년 9월호, 전봉순 그레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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