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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균형 잡힌 개방성을 가르쳐 준 대스승 알베르토

51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4-21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균형 잡힌 개방성을 가르쳐 준 대스승 알베르토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의 경향들

 

토마스 아퀴나스가 파리대학에 도착했을 때는 서슬이 시퍼런 ‘아리스토텔레스 강의 금지령’이 내려져 있었다. 파리대학의 주도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아우구스티노 전통에 따라 교육을 받은 학자들이었다.

 

이른바 ‘보수적 아우구스티노주의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이 새롭게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과 직면했을 때 보인 반응은 비판적 망설임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부 저술에 대한 강의 금지령은 제외하더라도 전통적인 노선을 걷는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속에서 그리스도교와 일치될 수 없는 여러 가지 위험 요인을 발견하고 비판했다.

 

예컨대 그들은 세계가 영원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이 세계를 무로부터 자유롭게 창조했다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이런 위협에 공감한 프란치스코회를 중심으로 한 학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정통 가르침이 들어 있다고 믿는 아우구스티노의 학설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이 경향의 대표자인 보나벤투라(프란치스코회, 1221-1274년) 수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연 과학자로서는 존경했다. 하지만, 신앙의 안내를 받지 못한 그를 참된 형이상학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전통을 따르던 아우구스티노주의, 보나벤투라학파, 프란치스코회학파 등은 아우구스티노 사상 안에 들어 있다고 판단했던 정통적인 그리스도교 세계관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말미암아 이질화될 것을 두려워했다.

 

이러한 반대에도 급속하게 커지는 각 대학의 인문학부를 중심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더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부 저술에 대한 강의 금지령이 반복되는 동안 라틴 세계에는 앞으로의 큰 변화를 예고하는 아베로에스(1126-1198년)의 주해들이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당대 가장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주해자’로 인정받은 아랍 철학자 아베로에스는 생애 대부분을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해석에 바쳐 「소(小)주해서」, 「중(中)주해서」, 「대(大)주해서」 등의 방대한 주해를 남겼다. 지성적이고 이론적인 경향을 지녔으며, 확신에 찬 철학자였던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야말로 지성의 화신, 진리를 가르치는 최고의 ‘멘토’(인생 길잡이)라고 전제했다.

 

그의 주해서를 읽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매료되는 경향은 ‘라틴 아베로에스주의’ 또는 ‘극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라고 불렀다. 아베로에스의 책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널리 소개되었을 때, 그의 주해서는 학문적으로 치밀하고 명확하여 파리대학의 인문학부 교수 같은 젊은 연구자들에게 열광적인 환호와 존경을 받았다.

 

이 경향을 대표하는 브라방의 시제(1235?-1284년)는 신학으로부터 독립적인 순수 아리스토텔레스를 주장하였다. 그의 젊은 동료들은 신앙과의 일치 여부와 관계없이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을 ‘재인용’하는 것 자체에 크게 만족했다. 이런 입장이 파리대학의 인문학부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면서 서방 세계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 도입 이후 최대의 학문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여러 대학의 신학부 교수와 종교 지도자들은 아베로에스를 그리스도교를 위협하는 적으로 여기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에 대처하고자 1270년과 1277년, 두 차례에 걸쳐 여러 명제가 단죄되었으나, 이는 위기를 해결하는 현명하거나 적절한 대처 방안이 되지 못했다.

 

 

온건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한편 앞의 두 부류가 보여 준, 심정적인 거부감이나 무비판적인 수용의 태도를 넘어 오류로부터 진리를 가려내고, 이 새롭게 발견된 보물들을 그리스도교 사상의 핵심에 결합하고 수용하려는 온건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도 나타났다. 이 과정에는 교황권의 지도로, 특히 도미니코회 소속의 학자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학자는 대 알베르토(1193?-1280년)였다. 알베르토는 당시 ‘보편 박사’라고 불릴 만큼 박학했으며, 학자로서는 예외적으로 ‘위대한’(大, Magnus)이란 칭호를 들을 만큼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멀리할 경우 시대의 학문적인 흐름으로부터 교회가 격리될 것을 염려하여 1240년부터 1248년까지, 당시 내려진 강의 금지령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작품들을 강의했다. 그가 명시적으로 제시한 목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라틴 세계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1245년 가을에 본격적으로 신학 공부를 하려고 파리에 왔을 때 그는 같은 수도회 소속 수사이자 멘토가 될 대 알베르토의 강의를 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을 자유롭게 접하거나 연구하는 데 제한을 받던 파리대학의 다른 학생과 달리,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던 도미니코회 수도원 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더욱더 빠르게 발전시켜 나갔다.

 

1248년에 대 알베르토가 수도원 학교를 세우려고 독일 쾰른으로 옮겨 갈 때, 그는 다른 선배들과 함께 토마스를 동행할 학생으로 선발하였다. 쾰른에서 토마스는 스승인 대 알베르토 밑에서 1248년부터 1252년까지 계속하여 공부하였고, 그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꽃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뛰어난 재능

 

하루는 토마스가 예습하려고 책을 읽다가 중요한 내용을 메모해 놓은 양피지 조각을 도서관에서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조각을 주운 학생들이 살펴보자, 거기에는 아직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학생들은 알베르토가 강의를 위해 준비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에게 가져갔다.

 

그러나 이 조각을 받아 든 알베르토는 그 내용에 놀라고 말았다. 거기에는 실제로 자신이 다음에 강의해야겠다고 생각하던 내용이 매우 높은 수준으로 상세히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알베르토는 ‘이 메모를 적은 학생이 누구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 순간, 알베르토는 그 메모가 ‘읽을 수 없는 문자’(littera illegibilis)로 불릴 정도로 유명한 악필 토마스의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알베르토는 토마스의 뛰어난 재능과 성실함에 감탄하여 그를 자신의 조교로 삼았다.

 

매우 박식하고 개방적인 사상가였던 알베르토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과 아랍 해석가들의 참된 가치를 깨달았다. 토마스는 이 훌륭한 멘토인 대 알베르토 밑에서 공부하며, 그에게서 자신의 평생을 좌우할 개방적인 정신을 물려받았다.

 

1252년 파리대학의 요하네스 총장은 알베르토에게, 신학 박사 학위를 준비시킬 우수한 학생을 파리로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알베르토는 토마스가 「명제집」을 강독할 수 있는 29세에 미치지 못하는 나이임에도 그의 학문과 생활 태도, 그리고 성품을 설명하면서 그를 열렬히 추천했다. 당시 토마스의 나이는 27세였다.

 

결국 알베르토는 재속 교수들의 반대에도 토마스가 파리에서 강의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했다. 스승의 기대대로 토마스의 강의는 파리대학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국왕의 자문관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균형 잡힌 열린 사상가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배척하려는 경향을 지녔던 보수적 아우구스티노주의자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과 학문적 방법론을 신학적인 설명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러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무조건 추종하려던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자들과 달리, 자신이 진리라고 믿던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충돌을 일으킬 때마다, 해석자들의 처지를 수정하거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자체도 교정하려고 시도했다.

 

토마스는 이러한 종합 작업을 단순히 다른 의견을 나열하거나 절충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사상들의 근원에까지 파고들어 비교했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변형시키는 작업으로 이루어냈다.

 

토마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핵심적인 사상을 심도 있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만년에 저술한 여러 권의 아리스토텔레스 주해서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를 넘어서는 그의 사상적 독창성과 신학을 위한 변형의 성과는 다양한 신학 저술들, 특히 「신학대전」에 매우 잘 나타나 있다.

 

* 박승찬 엘리야 - 가톨릭대학교 철학 전공 교수. 성심대학원장과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가톨릭철학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라틴어 중세 철학 원전에 담긴 보화를 번역과 연구를 통해 적극 소개하고, 다양한 강연과 방송을 통해 그리스도교 문화의 소중함을 널리 알린다. 한국중세철학회 회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9년 4월호, 박승찬 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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