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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교구 순교 선조들이 전한 말

193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9-21

[순교자 성월 특집] 교구 순교 선조들이 전한 말 (상)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게 천주신앙을 외치다

 

 

한국교회 선조들은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믿음으로 목숨까지 내어놓는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다. 어떤 타협에도 굴하지 않으며 혹독한 고문의 현장에서, 죽음의 순간에서도 단호하게 하느님 사람을 증거하며 신앙을 지키고 이를 현재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을 맞아 교구 순교자들이 남긴 주요 신앙어록을 살펴본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이런 군난 때는 성교회 영광을 더하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 됨을 증거하고”

 

용인 골배마실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신학생으로 선발됐던 한국교회 첫 사제 성 김대건 신부는 1842년부터 1846년까지 21통의 편지를 썼다. 교우들에게 보낸 옥중 서한, 21번째 편지는 하느님 안배에 대한 깊은 믿음과 하느님께 대한 항구한 신뢰심을 묵상토록 한다.

 

“세상은 온갖 일이 막비주명이요, 막비주상주벌이라, 고로 이런 군난도 역시 천주의 허락하신 바니 너희 감수 인내하여 위주하고 오직 주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고 모든 것을 그분께 의지하고 도움을 청하는 다음 편지글은 특히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등 어려운 시기를 겪는 현재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사주구령사에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성녀의 자취를 만만 수치 하여 성교회 영광을 더으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 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하실 때를 기다리라.(중략)”

 

“주의 성의를 따라오며 온갖 마음으로 천주 예수의 대장 편을 들어 이미 항복받은 세속 마귀를 칠지어다. 이런 황황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성 정하상 바오로


“목숨을 바친 순교로 천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본분”

 

성직자 영입 운동을 통해 한국교회 발전에 큰 공헌을 쌓았던 평신도 지도자 정하상 성인은 한국인 최초의 호교론서인 「상재상서」를 통해 천주교에 대해 밝혔다. 박해의 비합리성과 부당성을 지적하고 천주교를 변호하는 그의 글에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천주의 신앙을 느끼고 배울 수 있다.

 

임금에게 호소하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천주교가 올바른 종교임을 밝히는 절절함이 배어난다.

 

“목숨을 바쳐 순교함으로써 성교가 진실된 가르침을 증명하여, 천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들 본분으로 삼는 일이옵나이다. 죽음에 임하여 용감히 말해야 할 때에 한번 고개를 들고 크게 외쳐보지 못하고, 말없이 불쌍히 죽으면, 쌓이고 쌓인 회포를 백년 뒤에까지 스스로 밝힐 길이 없사오니, 엎디어 빌건대 밝히 굽어살피사, 도리의 참되고 거짓됨과 그르고 바름을 가리옵소서.”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세상에 태어나 천주를 위해 죽는 것은 마땅한 일”

 

정하상 성인의 부친으로 최초의 한글교리서 「주교요지」를 완성하고 평신도 단체 명도회 초대 회장이었던 복자 정약종은 ‘초기 한국교회 교부’로 일컬어진다. 그는 체포돼 혹독한 형벌을 받는 과정에서도 천주교 교리가 옳다는 것만 설명했다. 1801년 4월 8일 서소문 형장으로 끌려가며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우리를 비웃지 마십시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은 마땅한 일일 뿐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가 흘린 눈물은 진정한 기쁨으로 바뀌고, 당신들 기쁨과 웃음은 진정한 고통으로 변할 것입니다.”

 

참수형을 받는 순간에도 그는 “땅을 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보면서 죽는 것이 더 낫다” 하면서 하늘을 바라보고 칼을 받았다.

 

 

복자 윤유일 바오로


“예수를 모독하느니 천 번 만 번 죽을 각오”

 

복자 윤유오(야고보) 형이면서 복자 윤점혜(아가타), 윤운혜(루치아) 사촌오빠인 복자 윤유일(바오로)은 초기 교회 밀사이며 성직자 영입 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주문모 신부를 인도한 죄로 1795년 6월 28일 체포돼 그날로 옥중에서 참수돼 순교했다. 구베아 주교는 복자 최인길(마티아), 지황(사바)과 함께 순교한 윤유일의 굳건한 신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재판관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는지 질문하자 그들은 용감하게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모독하라고 하자, 그들은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면서 참된 하느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느니 차라리 천 번 만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호하게 대답하였습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9월 20일, 이주연 기자]

 

 

[순교자 성월 특집] 교구 순교 선조들이 전한 말 (하)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후회없는 믿음 고백

 

 

복자 주문모 신부


“본심은 진실로 백성과 같이 현세에서 행복을 얻고 후세에 복을 부르고자 하는 것”

 

조선에 들어온 첫 선교사 주문모(야고보) 신부는 1794년 12월 24일 입국해 복자 최인길(마티아)과 강완숙(골롬바) 등 신자들 집을 옮겨 다니며 비밀리에 사목 활동을 펼쳤다. 지방까지 순회하며 사목했던 주 신부는 신자들 교리 공부와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런 지도와 신자들 열성에 조선에 온 지 6년이 지나며 신자 수는 1만 명에 달하게 된다.

 

1801년 신유박해로 주요 교회 지도자들이 연이어 체포되고 처형됐다. 주 신부는 중국으로 돌아가려했으나 조선 신자들과 운명을 같이해 순교함으로써 박해를 멈춰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해 4월 23일 자수했다.

 

의금부 심문에서 주 신부는 조선에 온 목적을 “오로지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제 본성은 진실로 백성과 같이 현세에서 행복을 얻고 후세에서 복을 부르고자 하는 것일 따름”이라고 했다.

 

 

복자 손경윤 제르바시오


“천주교에 깊이 빠져 일상의 고질병처럼”

 

양근성지가 현양하고 있는 복자 손경윤(제르바시오)은 1790년 복자 최필공(토마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형조에 체포됐다가 풀려나기도 했으나 열심한 신앙생활로 주문모 신부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신자들을 위해 큰 집을 산 다음 술집으로 꾸며 밖으로는 술을 팔고 안으로는 신자들을 불러 가르치고 교리서를 베껴 나눴다.

 

1801년 ‘천주교 우두머리’로 밀고돼 양근(양평군 양근읍 일대), 교하(파주시 교하읍 일대), 양지(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일대) 등으로 피신하다가 가족이 체포됐다는 소식에 자수했다. 혹독한 심문에 한때 배교의 말을 했으나 형조로 이송 돼서는 굳은 신앙을 고백했다.

 

사형 선고를 받기 전 마지막 진술에서 그는 “일찍부터 천주교에 깊이 빠져 하루아침에 바꾸기가 어려워 일상 고질병처럼 됐다”면서 “천주교 때문에 여러 번 체포된 뒤에도 나라의 금지령을 무시하고 (천주교에) 빠져 마음을 바꿀 줄 몰랐고, 신자들과 같이 모여 깊게 교리를 공부했으며, 널리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복자 조용삼 베드로


“하늘에는 두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어”

 

현 경기도 양근 출신인 복자 조용삼(베드로)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보잘것없는 외모로 사람들에게 무시당했다. 혼인도 어려웠던 상황에서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을 스승으로 삼아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1800년 체포돼 혹독한 형벌에도 배교하지 않자, 관장은 조용삼이 보는 앞에서 부친에게 매질을 가했다. 이에 조용삼은 배교 의사를 밝혀 석방됐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만난 복자 이중배(마르티노)의 권유에 다시 신앙을 고백했다.

 

1801년 3월 27일 옥사한 조용삼은 죽기 전 심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에는 두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한 번 죽는 것 외에는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복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끝까지 (천주교 신앙)을 후회하지 않고”

 

교회 창설에 참여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아들이자 교회 창설 주역들 스승이요 학문으로 이름을 높였던 권철신(암브로시오)의 양자였던 복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은 아버지와 양부 영향으로 천주교 신앙을 이어받았다.

 

1791년 신해박해로 생부 권일신이 죽임을 당하자 한동안 교회를 멀리했으나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신앙을 회복했다. 주문모 신부가 피신 생활을 할 때 양근에 있는 그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

 

1800년 6월 양근에 일어난 박해로 권상문은 체포돼 양근과 경기 감영(포도청과 형조)을 오가며 심문을 받았다. 고문을 이기지 못해 배교한 적도 있으나 서울 법정에서 배교를 취소하고 신앙을 고백했다.

 

“끝까지 (천주교 신앙) 후회하지 않고 그대로 깊게 믿으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복자 조숙 베드로


“이 길은 예수 마리아가 계획하신 일을 이루게 하실 목적”

 

양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복자 조숙(베드로)은 조부와 숙부가 신유박해 희생자들일 만큼 어렸을 적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주변 환경 때문에 신앙생활을 등한시 하다가 17세 때 복자 권천례(데레사)와 혼인하며 신앙에 눈을 떴다. 혼인날 밤 ‘함께 정절을 지키며 살자’고 권하는 말에 동의하며 신앙심이 되살아났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아내와 함께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했던 조숙은 선교사 영입 운동에도 참여하고 정하상(바오로) 성인이 북경을 오갈 때마다 필요한 준비를 맡기도 했다. 1817년 북경으로 간 정하상 성인을 기다리던 중 붙잡힌 조숙은 ‘배교하고 동료들을 밀고하라’는 강요에도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했다. 감옥에서는 여러 차례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읽는 이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내가 들어선 이 길은 나로 하여금 예수와 마리아가 계획하신 일을 이루게 하실 목적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9월 27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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