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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 그리스도인의 기도

144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6-07

“우리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청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5월 13일 교황청 사도궁 도서관에서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된 수요 일반알현에서 “너(Tu, 하느님)”를 찾는 작은 “나(io)”의 목소리인 그리스도인 기도의 특징들을 설명했다. 교황은 교리 교육을 마친 후 인사말을 통해 오는 5월 18일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탄생 백주년이라고 떠올리는 한편, 5월 14일에 있을 코로나19의 극복과 종식을 위한 ‘기도와 단식과 자선 실천의 날’에 자신도 동참한다고 말했다.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 : 2. 그리스도인의 기도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지난주부터 시작한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 여정의 두 번째 단계를 살펴봅시다. 

 

기도는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모든 종교인에게, 그리고 어쩌면 아무런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됩니다. 기도는 우리의 내밀한 곳, 곧 영성가들이 종종 “마음”이라고 부르는 내적 공간에서 솟아 나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562-2563항 참조). 그러므로 내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주변부의 어떤 것이 아니며, 우리의 이차적이고 부차적인 능력도 아닌, 우리의 가장 깊은 신비입니다. 기도하는 것이란 바로 이 신비입니다. (우리는) 감정으로 기도하지만, 기도가 한낱 감동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능으로 기도하지만, 기도하는 것이 한낱 지성적 행위는 아닙니다. (우리는) 몸으로 기도합니다. 심지어 가장 심각한 육체적 장애가 있어도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온 존재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열정이며,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탄원입니다. 우리 존재의 깊은 데서 솟아나는 무엇이며, 손을 뻗는 것입니다. 만남의 향수를 감지하기 때문입니다. 그 향수는 필요나 요구 그 이상이고, 필수적인 것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길’입니다. 기도는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어 “너(Tu, 하느님)”를 찾는 “나(io)”의 목소리입니다. “나”와 “너”의 만남은 계산기를 두드려서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인간적인 만남입니다. 종종 나의 “나”가 찾고 있는 “너”를 찾기 위해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기도는 계시에서 나옵니다. “너”는 신비로움에 싸여 있지 않고, 우리와 나누는 관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나타나심(manifestazione)”, 곧 하느님의 에피파니아(Epifanis, 公現)를 지속적으로 기념하는 종교입니다. 전례력의 첫 번째 축제들은 숨어 계시지만 사람들에게 당신의 우정을 베푸시는 하느님을 기념하는 것들입니다. 하느님은 베들레헴의 가난과 동방박사들의 묵상 안에서,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와 카나의 혼인 잔치의 기적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요한 복음서는 머리글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마무리합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우리에게 하느님을 알려주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사람들에게 그 어떤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자애로운 얼굴을 지니신 하느님과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기도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하느님께 다가가는 데 있어서 항상 일반 사람들은 약간 습관적으로 겁을 먹거나, 하느님의 매혹적이고 놀라운 신비에 약간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주인을 섬기는데 소홀하지 않으려는 종과 같은 복종적인 태도로 하느님을 섬기는 데 익숙합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친근하게 부르면서 그분께로 나아갑니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예수님은 다른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바로 “아빠”라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봉건적인” 관계를 없애버렸습니다. 우리 신앙의 유산 안에는 “예속”, “노예” 혹은 “신하” 같은 표현들이 없습니다. 대신 “계약”, “우정”, “약속”, “친교”, “친밀감” 같은 표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긴 고별사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5-16). 이는 백지수표와 같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은 친구, 동맹자, 신랑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께 일련의 청원을 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이 과연 참인 것처럼, 기도 안에서 우리는 그분과 신뢰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청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말입니다. 모든 것을 설명하고,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부족함을 느끼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좋은 친구도 아니고, 고마워할 줄 아는 자녀도 아니며, 충실한 배우자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우리를 계속 사랑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때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20). 이 행위로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십자가의 신비를 미리 예견하십니다. 하느님은 충실한 동맹자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하기를 멈춘다 하더라도, 사랑이 자신을 골고타로 이끌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 마음의 문 근처에 계시며, 우리가 당신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기를 기다리십니다. 때로는 우리 마음을 두드리시지만,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기다리십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인내심은 한 아빠의 인내심이며, 우리를 너무 사랑하는 사람의 인내심입니다. 말하자면, 아빠와 엄마의 인내심입니다. 항상 우리 마음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 마음을 두드릴 때는 자애로움과 지극한 사랑으로 두드리십니다. 

 

모두 함께 계약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서 기도하기를 시도합시다.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품 안에서 기도로 들어가 봅시다. 삼위일체의 삶인 행복의 신비에 싸여 있음을 느껴봅시다. 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손님처럼 느껴봅시다. 그리고 기도의 놀라움 안에서 하느님께 반복해서 말합시다. ‘당신이 사랑밖에 모르신다는 게 가능한 일입니까?’ 하느님은 미움을 모르십니다. 그분은 미움을 받았지만, 미움을 알지 못하셨습니다. 그분은 오직 사랑만 아십니다. 이러한 분이 바로 우리가 기도하는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 기도의 빛나는 핵심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바티칸 뉴스, 2020년 5월 13일, 번역 김호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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