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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새 번역 교본 읽기: 성모님께 대한 레지오 단원의 의무(제6장)

690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5-03

[새 번역 교본 읽기] 성모님께 대한 레지오 단원의 의무(제6장)

 

 

한국세나뚜스협의회는 ‘레지오 마리애 공인교본(2014년 영문판)’에 대해 광주대교구 소속 안세환 신부께 번역을 의뢰하였습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번역 교본은 1993년 영문판을 번역한 것으로 1993년 이후로 수차례 부분 수정이 있었습니다. 교본 전체를 새로운 시각으로 번역한 교본의 내용을 본 코너를 통해 계속 게재할 예정입니다.

 

단원들께서는 새로 번역된 교본의 내용을 검토하시고 내용에 대해 건의가 있을 경우 상급 평의회나 월간지 편집실로 의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보내주신 내용은 검토하도록 하겠으며, 타당한 의견이나 건의에 대해서는 추후 새로운 교본의 인쇄가 결정될 경우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1. 레지오 단원은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진지하게 묵상하고 열심히 실천함으로써 이 신심을 드높여야 할 엄숙한 의무가 있다. 이 의무는 본질적인 것이며, 단원이 지켜야 할 모든 의무 가운데 가장 앞서는 것이다.(제5장 [레지오 신심의 개요] 및 부록 5 [우리 마음의 여왕이신 마리아 신심회] 참조)

 

(중략) 그러나 이와 같은 세속 군대의 일치는 다만 정서적이고 기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영혼과 그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과의 관계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충실한 레지오 단원의 영혼 안에 성모님이 함께 계신다는 표현만으로는 실제로 그 단원과 성모님이 일치하는 모습을 제대로 나타낼 수가 없다. 교회는 이와 같은 일치의 본질을 ‘천상 은총의 어머니’ 또는 ‘모든 은총의 중재자’라는 호칭으로 집약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호칭들은 성모님이 우리 영혼의 생명을 장악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너무나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밀접한 어머니와 뱃속 아기 사이의 친밀함조차도 성모님과 우리 영혼의 일치를 충분히 묘사할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내리시는 과정에서 성모님이 차지하는 위치를 확실하게 이해하려면 다른 자연 현상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피는 심장을 통하지 않고는 온몸을 돌 수 없다. 눈은 우리가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우리와 세상을 연결시켜 준다. 또한 새는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공기가 떠받쳐 주지 않으면 스스로 날아오르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도 하느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따라 성모님 없이는 스스로를 하느님께 들어 올릴 수가 없고 하느님의 일을 할 수도 없다.

 

이처럼 우리가 성모님께 종속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이나 감정이 만들어 낸 산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이기에, 우리가 비록 의식하지 못하고 있더라도 성모님에 대한 종속은 그대로 존속된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섭리를 깨닫고 성모님께 의식적으로 다가간다면 성모님과의 일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굳건해질 것이며, 또한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보나벤투라 성인(St. Bonaventure)은 성모님을 ‘주님의 거룩한 피를 분배하시는 분’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성모님과 굳건히 일치하게 되면 놀라운 성화(聖化)의 은총을 얻게 되며, 다른 영혼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사도직 활동은 황금처럼 값진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죄의 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풀려나게 할 몸값으로 부족하다. 그러나 성모님이 이 단순한 황금 덩어리를 하느님에게서 선물로 받으신 ‘주님의 거룩한 피’라는 보석으로 장식해 주신다면 모든 사람들을 풀려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모님께 열렬히 봉헌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이 봉헌을 “저의 모후, 저의 어머니시여, 저는 오직 당신의 것이오며, 제가 가진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옵나이다.”와 같은 구체적인 기도로 자주 갱신하면서, 성모님이 우리 영혼 안에 항상 활동하고 계신다는 의식이 체계적이고 살아 있는 습관이 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 드 몽포르 성인의 말처럼 우리의 ‘몸이 공기를 마시듯 내 영혼은 성모님을 마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레지오 단원은 미사, 영성체, 성체 조배, 묵주기도, 십자가의 길 또는 그 외의 다른 모든 신심 행위를 실천할 때, 이를테면 자기 자신과 성모님을 그 안에서 동일시하려고 애쓰고, 비할 데 없이 높은 믿음을 지닌 성모님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 사업의 신비를 묵상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성모님은 그 신비를 구세주와 더불어 생활하셨고, 그 안에서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수행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레지오 단원은 성모님을 본받고, 성모님께 다정하게 감사드리며, 성모님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단테(Dante)의 말대로 성모님을 꾸준히 공부하고 성모님께 크나큰 사랑을 드리며, 기도와 활동과 영성 생활 안으로 성모님의 생각을 끌어들여와 자신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은 망각한 채 성모님께 의존한다. 이처럼 레지오 단원의 영혼이 성모님의 모습과 생각으로 가득 채워짐으로써 두 영혼은 단 한 영혼이 된다. 성모님의 영혼에 깊이 잠긴 레지오 단원은, 성모님의 믿음과 성모님의 겸손과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 그리고 그 성심에서 나오는 성모님의 기도의 힘을 나누어 가지고서, 모든 삶의 궁극 목표인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즉시 변모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성모님이 당신의 단원들 안에서 당신의 단원들을 통하여 레지오의 모든 임무에 참여하시고 영혼들을 어머니로서 돌보시기 때문에, 결국 단원들은 활동 대상자와 동료 단원들 영혼 하나하나에서 우리 주님을 뵙고 섬기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성모님이 하느님이신 당신 아드님의 실제 몸을 돌보시고 섬기셨던 바로 그 고귀한 사랑과 정성으로 활동 대상자와 단원들 영혼 하나하나에서 우리 주님을 보시면서 섬기시게 된다.

 

이와 같이 레지오 단원들이 성모님을 생생하게 모방하게 되었을 때, 그 군단(즉 레지오)은 성모님의 사명에 온전히 일치하고 성모님의 승리를 보장받는 진정한 성모님의 군단 즉 레지오 마리애가 된다. 이 레지오는 세상 곳곳에 성모님을 모셔다 드리게 되고, 성모님께서는 이 세상에 빛을 주시어 이내 찬란히 빛나게 하실 것이다.

 

“성모님과 더불어 즐겁게 살고, 성모님과 더불어 모든 시련을 견디어 내며, 성모님과 더불어 일하고, 성모님과 더불어 기도하고, 성모님과 더불어 여가를 즐기고, 성모님과 더불어 쉬어라. 성모님과 더불어 예수님을 찾아 나서서 그대의 팔에 예수님을 감싸 안고, 예수님 성모님과 더불어 나자렛에서 살 집을 마련하라. 성모님과 더불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십자가 곁에 머무르며, 그대 자신을 예수님과 함께 묻어라. 예수님 성모님과 더불어 부활하고, 예수님 성모님과 더불어 하늘나라에 올라, 예수님과 더불어 살고 죽으라.” (토마스 아 캠피스 Thomas a Kempis : 수련자들에게 한 설교)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5월호, 편집실]

 

 

[새 번역 교본 읽기] 성모님께 대한 레지오 단원의 의무(제6장)

 

 

2. 성모님의 겸손을 본받음은 레지오 활동의 뿌리이며 수단이다

 

레지오는 단원들에게 말할 때 군대나 전투 용어를 자주 쓴다. 레지오는 모든 사람의 영혼을 얻기 위하여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계시는 진을 친 군대와 같은 성모님이 사용하시는 무기이자 눈으로 볼 수 있는 성모님의 활동이므로 그러한 용어가 잘 어울린다. 더욱이 군사적 개념은 사람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 레지오 단원들은 자신이 군대의 일원이라는 것을 의식함으로써, 활동할 때에 스스로 군인과 같은 굳센 정신을 보이라고 촉구된다. 그러나 레지오 단원들의 싸움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므로 하늘나라의 전략에 따라 수행되어야 한다. 참된 레지오 단원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길은 오로지 보잘것없고 순수한 잿더미와 같은 특성들에서 솟아오른다. 이러한 특성들 가운데 특히 겸손의 덕이 있는데, 세상은 이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경멸한다. 그러나 이러한 겸손의 덕은 고귀하고 굳세어, 이 덕을 구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흔치 않는 기품과 힘을 가져다준다.

 

레지오 조직에서는 겸손이 매우 독특한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도 겸손은 레지오 사도직 활동에 없어서는 안 될 도구이다. 레지오의 활동은 대인 접촉에 많이 의존하는데, 이 대인 접촉의 효과를 높이고 발전시키려면, 단원들이 활동 대상자들에게 부드럽고 소박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오로지 진정으로 겸손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다. 그러나 레지오에게 겸손은 단순히 외적 활동의 수단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진다. 겸손은 바로 외적 활동이 나오는 요람이라는 것이다. 겸손하지 않고서는 효과 있는 레지오 활동을 할 수가 없다.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성인의 말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겸손의 덕을 지니라고 당부하셨다. 겸손의 덕을 지닐 때, 인류 구원의 가장 큰 장애 요인이 제거되기 때문이다. 모든 다른 덕의 가치는 겸손의 덕을 바탕으로 한다. 하느님께서는 겸손이 있는 곳에 은혜를 베푸시며, 겸손이 사라지면 은혜를 모두 거두어 가신다. 모든 은총의 근원이신 주님의 강생도 겸손이 바탕이 되어 이루어졌다. 성모님은 ‘마니피캇(Magnificat, 마리아의 노래)’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팔의 큰 힘을 보여주셨다고 찬미하는데, 이 말은 하느님께서 동정녀 마리아 안에 권능을 떨치셨다는 뜻이다. 성모님은 그 이유를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관심을 이끌어 내고 하느님께서 세상에 내려오시도록 하여 낡은 세상이 막을 내리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도록 한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의 비천함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모님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완덕, 사실상 무한 경지에까지 이른 완덕을 갖추셨고, 당신 스스로도 그 점을 잘 알고 계셨다. 그런데도 왜 성모님은 겸손의 표본이 되실 수 있었을까? 성모님께서 겸손하셨던 것은 마찬가지로 당신이 어떠한 인간의 자손들보다도 더욱 완벽하게 구원되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자신이 지닌 상상할 수조차 없는 거룩한 빛 한 줄기 한 줄기가 당신 아드님의 공로임을 아시고, 또한 그러한 생각을 늘 마음속에 생생하게 간직하셨다. 성모님의 비할 데 없는 지성은 당신께서 누구보다도 많은 은혜를 받았으므로 하느님께 누구보다도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성모님의 고귀하고 우아한 겸손의 태도는 힘들지 않고 한결같았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이 성모님의 태도를 두루 살펴본다면, 참된 겸손의 본질은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진정으로 어떤 존재인가를 알고 이를 진심으로 인정하는 것임을 배우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단원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쓸모없음뿐이라는 것이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은혜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당신 홀로 주셨던 것처럼, 그것을 늘리거나 줄이거나 또는 완전히 거두어 가실 수 있다. 레지오 단원이 하느님께 자신이 종속되어 있음을 의식하게 되면, 사람들이 거의 추구하지 않는 보잘것없는 임무를 뚜렷이 선호하게 되고, 멸시와 거절을 참아낼 준비가 되어 있으며, 통상적으로는 하느님의 뜻이 표명되었을 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루카 1,38)라고 하신 성모님의 말씀을 투영하는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레지오 단원이 그의 모후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치는 이 일치를 갈망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 일치를 이루기 위한 능력도 요구한다. 훌륭한 군인이 되어 보겠다고 결심을 한 사람이라도 군 조직의 효율적인 톱니바퀴가 될 만한 자질을 아직 하나도 갖추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 그 결과 그는 지휘관과 효과적인 일치를 이루지 못하여, 군사 계획 수행에 방해가 되고 만다. 이와 마찬가지로, 레지오 단원이 그의 모후께서 세우신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를 열망하지만, 성모님이 그토록 열렬히 주시기를 바라는 역할을 받을 만한 능력이 아직 그에게 없을 수 있다. 세속 군대에서는 이러한 무능력이 용기·지식·신체 결함 등 때문일 수 있다. 레지오 단원의 경우 이러한 무능력은 겸손의 덕이 없다는 데에서 발생할 수 있다. 레지오의 목적은 단원들을 성화시켜, 그 성화의 빛이 영혼들의 세계에까지 발산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겸손하지 않고서는 성화될 수 없다. 더구나 레지오 사도직은 성모님을 통하여 작동된다. 그러나 성모님을 어느 정도 닮지 않고서는 성모님과 일치할 수 없으며, 성모님이 지니신 특별한 겸손의 덕을 갖추지 않고서는 성모님을 닮았다고 할 수 없다. 성모님과의 일치가 모든 레지오 활동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조건 즉 뿌리라면, 이 뿌리가 의존하고 있는 토양이 바로 겸손이다. 토양에 결함이 있다면 레지오의 생명은 시들고 만다.

 

결과적으로 영혼들을 구하기 위한 레지오의 싸움은 반드시 각 단원의 마음 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만 한다. 각 단원은 자기 자신과 전투하면서 마음속에 있는 교만과 이기심을 단호하게 물리쳐야 한다.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 뿌리와 치르는 이 치열한 싸움, 이른바 순수한 의지를 얻기 위한 부단한 노력은 얼마나 힘겨운 일이겠는가! 이는 일생동안 치러야 할 싸움이다. 자신의 노력에만 의지한다면 평생 실패하게 될 것이다. 자신을 물리치려는 이 싸움에서마저 오히려 이기심이 파고들기 때문이다. 모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자신의 힘이 강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사람에게는 오직 단단한 발판이 필요할 뿐이다.

 

레지오 단원들이여, 여러분의 튼튼한 발판은 성모님이시다. 온전한 신뢰심으로 성모님께 의탁하라. 성모님은 여러분에게 반드시 필요한 겸손의 덕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성모님께 의탁하는 정신을 충실히 실천하는 중에 여러분은 가장 훌륭하고 단순하며 포괄적인 겸손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루도비코 마리아 성인은 이 길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은총의 비밀 통로로, 우리가 재빨리 아주 적은 노력만으로도 우리 자신을 비울 수 있게 해주어, 우리를 하느님으로 가득 채워주고 완전하게 해줍니다.”고 말하였다.

 

그 원리는 다음과 같다. 레지오 단원이 성모님께로 방향을 돌릴 때에는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등을 돌려야 한다. 이때 성모님은 이 움직임을 취하시어 높이 들어 올리신다. 그리고 이 움직임을 자기 자신에게서 죽는 초자연적인 죽음으로 만들어주신다. 이 죽음은 준엄하지만 많은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을 수행하는 일이다.(요한 12,24-25 참조) 겸손하신 동정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발꿈치로 ‘자아’라는 뱀이 지닌 다음과 같은 여러 형태의 머리들에 상처를 입히신다.

 

(가) ‘자기 현시’라는 뱀의 머리

 

교회가 ‘정의의 거울’이라고 부를 정도로 풍부한 완덕을 갖추신 성모님은 은총 왕국에서 무한한 힘을 부여받아 소유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가장 비천한 여종으로 무릎을 꿇으신다. 그렇다면 레지오 단원으로서의 우리의 위치와 태도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나) ‘이기심’이라는 뱀의 머리

 

레지오 단원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모든 영적, 현세적 소유물을 성모님께 드려 성모님 뜻대로 쓰시도록 하였으며, 계속해서 그와 똑같이 완전히 너그러운 마음으로 성모님을 섬긴다.

 

(다) ‘자만심’이라는 뱀의 머리

 

마리아께 의지하는 습관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의 보잘것없는 힘을 믿지 않게 한다.

 

(라) ‘자부심’이라는 뱀의 머리

 

성모님과 함께 일한다는 사실을 의식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러한 협력 관계에 부적당한 자임을 깨닫게 된다. 이 협력 관계에 레지오 단원은 자신의 골치 아픈 약점 말고는 무엇을 기여하였다는 말인가?

 

(마) ‘자기애’라는 뱀의 머리

 

무엇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인가! 모후께 대한 사랑과 찬미에 여념이 없는 레지오 단원이라면 모후로부터 돌아서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바) ‘자기만족’이라는 뱀의 머리

 

레지오 단원이 성모님과 맺은 그러한 동맹 관계에서는 더 고귀한 기준이 우세해야 한다. 레지오 단원은 성모님을 모범으로 삼고 성모님의 티 없이 순수한 지향을 열망한다.

 

(사) ‘출세욕’이라는 뱀의 머리

 

우리가 성모님의 방식대로 생각할 때, 오로지 하느님만을 알려고 노력하게 되므로, 자신의 앞날이나 보상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아) ‘아집’이라는 뱀의 머리

 

성모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레지오 단원은 자기 마음이 충동하는 바를 신뢰하지 않고, 모든 일에서 은총의 속삭임에 열심히 귀를 기울인다.

 

진정으로 자아를 잊어버리는 레지오 단원은 성모님이 베풀어 주시는 모성적 감화를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다. 성모님은 이러한 단원 안에 인간 본성을 초월하는 힘과 희생정신을 길러 주시고, 그를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로 만드시어(2티모 2,3 참조) 군인 직업이 요청하는 바를 열심히 수행하기에 적합한 자가 되게 해주신다.

 

“하느님께서는 무(無)에서 일하시는 것을 즐기신다. 그리고 바로 그 깊은 바닥으로부터 당신의 전능으로 지으신 창조물들을 이끌어 올리신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열정으로 충만하여야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영광을 드높일 만한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임을 깊이 받아들여 그 심연 속에 잠겨 보도록 하자. 비천함이라는 짙은 그늘 아래 피신해보자. 전능하신 분께서 우리의 의욕에 넘친 노력을 당신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삼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실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보자. 이 목적을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흔히 기대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방법을 사용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다음으로는 복되신 성모님만큼 하느님의 영광에 이바지하신 분은 없었다. 그럼에도 성모님이 의식적으로 추구한 유일한 목표는 자신을 무로 돌리는 일이었다. 성모님의 겸손은 하느님의 계획에 장애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로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모든 계획이 쉽게 성취되도록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성모님의 겸손이었다.”(그루 Grou : 예수와 마리아의 영성 생활)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6월호, 편집실]

 

 

[새 번역 교본 읽기] 성모님께 대한 레지오 단원의 의무(제6장)

 

 

3.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은 사도직의 의무를 요구한다

 

이 교본의 다른 곳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것도 우리의 임의대로 취사선택(取捨選擇) 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고통과 박해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 안에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오로지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맞아들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나뉘어질 수 없는 오직 하나의 실체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평화와 행복을 찾아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다 보면 때때로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일을 겪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는 이처럼 서로 반대되는 요소가 섞여 있어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고통 없이 승리가 없고, 가시관 없이는 왕좌가 없으며, 쓰라림 없는 영광이 없고, 십자가 없이는 왕관이 있을 수 없다. 하나를 얻고자 손을 뻗으면 다른 하나도 함께 딸려 오게 된다.

 

이 원리는 우리의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성모님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놓고, 그중 우리 마음에 드는 부분만을 골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모님이 겪으시는 고통을 함께 하지 않으면서 성모님이 누리시는 기쁨만을 함께 나눌 수는 없는 일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요한 성인이 했던 것처럼 성모님을 우리 집에 모시고자 한다면(요한 19,27 참조), 성모님의 모든 면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성모님의 어느 한 면만을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성모님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성모 신심이란 성모님의 고귀한 성품과 사명의 온갖 측면을 재현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주된 관심을 두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성모님을 고귀한 모범으로 여기고 그분의 덕목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일은 값진 일이다. 그러나 그분의 덕목만 받아들이고 그 이상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모님에 대한 부분적인 신심이자 참으로 인색한 신심이 될 것이다. 성모님께 아무리 많은 기도를 바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삼위께서 성모님을 맞아 그느르시고, 성모님에 의지하시고, 성모님으로 하여금 성삼위의 속성들을 드러내도록 하신 깜짝 놀랄 수많은 방법들을 이해하고 기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모님은 이 모든 공경의 찬사를 받아 마땅한 분이시고 실제로 그러한 찬사를 받으셔야 하시지만, 그러한 찬사는 전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성모님에 대한 맞갖은 신심은 오로지 성모님과의 일치를 통해서만 완성된다. 일치란 필연적으로 성모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의미하며, 성모님의 삶은 주로 찬미를 받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전달하는 것에 있다.

 

성모님의 한평생과 사명은 먼저 그리스도의 어머니, 그 다음으로는 인류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St. Augustine)의 말처럼, 성삼위께서는 영원으로부터 깊이 생각하신 끝에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쓰시려고 성모님을 준비하시고 창조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을 잉태하게 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날 성모님은 당신의 놀라운 활동에 발을 들여놓으셨고, 그 후로 줄곧 집안 살림을 맡아 돌보는 바쁜 어머니가 되셨다. 성모님이 맡으신 이 일은 처음 얼마 동안은 나자렛 마을에 국한되어 수행되었다. 그러나 나자렛의 이 작은 집은 온 세상을 아우르는 집이 되었고, 성모님의 아드님은 전 인류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집안 살림을 돌보는 성모님의 일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고, 나자렛으로부터 크게 번창한 그 일은 성모님 없이는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주님의 몸을 돌보아 드리는 것은 성모님이 하시는 돌봄을 보충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사도는 성모님이 하시는 어머니로서의 직분을 거들어 드릴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모님은 “나는 원죄 없는 잉태로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사도직이로다.”라고 선언하실 수 있을 것이다.

 

영혼들을 돌보는 어머니 역할은 성모님의 본질적 임무이고 성모님의 삶 자체이다. 그 결과 우리가 성모님의 어머니 역할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성모님과 참으로 일치했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다시 한 번 밝히고자 하는 것은,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에는 영혼들을 위한 봉사가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성모님이 어머니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리스도교 신자가 사도직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유사한 생각을 드러낸다. 전자든 후자든 둘 다 불완전하고 비현실적이고 실체가 없으며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레지오는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성모님과 사도직이라는 두 원리를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성모님이라는 단일 원리 위에 세워져 있으며, 이 원리는 사도직과 (올바로 이해된)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를 아우른다.

 

어떠한 일을 이루고자 할 때 행동은 전혀 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바라기만 한다면, 이러한 생각은 아무 가치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모님께 말로만 봉사를 드리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사도직 임무가 ‘내게도 일이 주어지겠지’ 하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하늘로부터 저절로 내려올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렇게 태만한 신자들은 아무 일도 맡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가 사도가 되는 단 하나의 효과적인 방법은 사도직 활동을 맡아 착수하는 것이다. 사도직 활동을 맡아 시작하게 되면 성모님은 즉시 우리의 활동을 당신 품에 받아들이시고 당신의 어머니 역할 안에 넣어 주신다.

 

더욱이 성모님은 우리가 도와 드리지 않으면 어머니 역할을 수행하실 수가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성모님처럼 큰 힘을 지니신 분이 나약한 우리 인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인간의 협력을 필요로 하고, 인간을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사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하느님 섭리의 한 부분이다. 성모님이 간직하고 계시는 은총의 보고(寶庫)가 넘쳐흐른다는 것은 사실이나, 우리가 도와 드리지 않으면 성모님은 그 은총을 나누어 주지 못하신다. 만일 성모님이 바라시는 대로 당신의 능력을 행사하신다면 온 세상은 눈 깜짝할 사이에 회두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성모님은 우리가 당신께 협력할 때까지 기다리셔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가 도와 드리지 않으면 성모님이 어머니의 역할을 다할 수 없게 되어, 결국 영혼들은 굶주려 죽게 된다. 그러므로 성모님이 마음대로 쓰실 수 있도록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성모님은 열렬히 환영하시며, 거룩하고 알맞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미약하고 부적절한 사람들까지도 하나하나 모두 다 활용하실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떠한 사람들이라도 모두 다 필요하기 때문에 성모님으로부터 거절당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가장 미약한 사람이라도 성모님이 지니신 힘을 영혼들에게 전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좀 더 나은 사람을 통하여 성모님은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신다. 이는 맑은 유리창으로는 햇빛이 눈부시게 들어오지만, 때가 잔뜩 낀 유리창으로는 힘겹게 들어오는 이치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과 성모님은 에덴동산에서 우리의 조상이 범한 죄를 기워 갚기 위해서 고통과 사랑 속에 십자가 나무를 함께 지고 가신 새로운 아담과 하와가 아니신가? 예수님은 샘이시고, 성모님은 그 수로이시다. 이 은총으로 우리는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고, 우리의 천상 보금자리를 되찾게 된다.”(교황 비오 12세의 1940년 4월 21일 담화)

 

“주님께서는 성모님을 자비로우신 어머니, 우리의 모후,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 하느님 은총의 중재자, 하느님 보화의 분배자로 높이 들어 올리셨다. 주님과 함께 우리도 성모님을 높이 받들자. 성자께서는 당신 나라의 영광과 위엄과 권능으로 당신의 어머니를 빛나게 해주신다. 인류 구원의 위대한 사업에서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와 협조자로서 순교자의 왕이신 예수님과 일치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은 영원토록 예수님과 일치해 계시면서, 구원에서 흘러나오는 은총을 분배하는 일에서 무한한 힘을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계신다. 성모님의 왕국은 성자의 왕국처럼 참으로 넓기에 성모님의 지배를 벗어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교황 비오 12세의 1940년 5월 13일 담화)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7월호, 편집실]

 

 

[새 번역 교본 읽기] 제6장 성모님께 대한 레지오 단원의 의무

 

 

4. 성모님께 봉사할 때는 온 힘을 다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성모님께 전적으로 의탁한다는 구실로 노력을 게을리 하거나 조직에 결함이 생기도록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반대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레지오 단원은 성모님과 더불어 그리고 성모님을 위하여 가장 완벽하게 활동해야 하므로, 그가 성모님께 드리는 선물은 봉헌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최고의 품질이어야 한다. 그는 언제나 힘차고 능숙하며 꼼꼼하게 활동해야 한다. 그런데 가끔 통상적인 레지오 활동이나 확장 사업 또는 단원 모집 등에서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쁘레시디움이나 단원들에게서 잘못이 발견되곤 한다.

 

이에 대해서 단원들은 “나는 나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복되신 성모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며, 성모님이 뜻하시는 대로 좋은 성과가 나오기만을 기다립니다.”라고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기도 한다. 이러한 변명은 대개 자신들의 소극적인 태도를 일종의 미덕으로 돌리려고 하는 열성적인 신자들로부터 듣는다. 이들은 단체가 세운 방법에 따라 자신의 노력을 바치는 일이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 또한 우리가 큰 힘을 지니신 성모님의 도구로 쓰이고 있으므로 우리 인간이 기울이는 노력의 정도는 크든 작든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추론하면서 인간적인 생각을 레지오의 사업에 적용하려는 위험도 존재한다. 이는 마치 백만장자와 동업을 하는 가난한 사람이 “무엇 때문에 내가 이미 넘쳐흐르는 공동 기금에 몇 푼 더 보태려고 기를 써야 하느냐?”고 따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제 레지오 단원들이 활동에 나설 때 그들의 자세를 좌우하는 기본 원리를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그 기본 원리란, 레지오 단원들은 성모님이 당신의 활동에 쓰시는 단순한 도구만이 아니라, 인류의 영혼을 영신적으로 풍부하게 하고 구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성모님과 함께 일하는 참된 협력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협력 관계에서는 한쪽에서 모자라는 것을 다른 쪽이 보충해 준다. 단원은 자신의 활동과 능력 즉 자신의 모든 것을 성모님께 내어 드리고, 성모님은 당신 자신을 당신의 모든 순결과 능력과 함께 단원에게 내어 주신다. 각자 아낌없이 기여해야 한다. 단원 쪽에서 이러한 동반자 정신을 준수한다면, 성모님은 결코 부족함 없이 내어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활동 사업의 성패는 오로지 레지오 단원 쪽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단원은 자신의 모든 지성과 능력을 세심한 방법과 인내심으로 완성시켜 이 활동 사업에 쏟아야 할 것이다.

 

가령 단원들이 활동에 쏟는 노력과는 별도로 성모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성과를 이루고자 하심을 알게 되었다 할지라도, 레지오 단원들은 모든 일이 전적으로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처럼 여기며 활동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성모님의 도우심을 끝없이 신뢰하면서도, 언제나 최고도의 노력을 쏟아야 한다. 성모님을 신뢰하는 만큼, 기꺼이 내어놓는 단원들의 마음도 커져야 한다. 가없는 믿음은 열성적이고 체계적인 노력과 반드시 상호 작용해야 한다는 이 원리는 성인들이 한 다음과 같은 말로도 표현될 수 있다. 즉 기도할 때에는 자신의 활동에는 아무 것도 달려있지 않고 마치 모든 것이 그 기도에 달려있는 것처럼 기도해야 하고, 마찬가지로 싸울 때에는 만사가 절대적으로 그 싸움에 달려 있는 것처럼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활동의 쉽고 어려움을 스스로 가늠하여 어느 정도의 노력을 기울일 것인가를 판단하거나 ‘얼마나 적게 노력해야 저기 보이는 것을 얻을 수 있지?’ 라는 등의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세속의 일에서도 그런 타산적인 정신으로는 거듭 실패하기 마련이다. 영적인 사업에서는 그런 약삭빠른 정신이 스며들면 활동의 성패를 좌우하는 은총을 잃게 되므로 언제나 실패하고 만다. 더욱이 인간의 판단은 믿을 수가 없다. 겉으로는 불가능해보였던 일이 일시에 성취되는가 하면, 손만 뻗으면 잡힐 것 같은 열매를 끝내 손안에 넣지 못하고 결국에는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마는 경우도 있다. 영신 세계에서 이기적인 영혼은 점점 보잘것없이 작아져서 마침내는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확실한 해결책은 끝없는 노력뿐이다. 레지오 단원은 하찮든 중요하든 모든 임무에 최선의 노력을 쏟아야 한다. 최선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 때도 있을 수 있다.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어떤 일을 완수할 수 있고 그 일을 완수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인 경우이다. 이때에는 필요한 만큼의 노력만 기울이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 시인 바이론(Byron)의 말처럼 ‘나비 한 마리를 부수거나 모기 한 마리 잡는 데에 헤라클레스의 몽둥이를 휘두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레지오 단원들은 그들이 활동하는 직접적인 이유가 결과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단원들은 임무의 쉽고 어려움과는 전적으로 무관하게 성모님을 위하여 일한다. 그리고 임무를 수행할 때마다 미약하든지 위대하든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쏟아 부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모님의 전폭적인 협력을 얻어내어, 필요한 곳에서는 기적까지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해도 마음을 다하여 그것을 행한다면, 성모님은 큰 힘을 보태 주시어 우리의 미약한 활동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만일 단원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였는데도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면, 성모님은 그 남은 부분을 채워 주시어 단원과의 공동 사업이 이상적으로 끝나도록 해주실 것이다.

 

레지오 단원이 임무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열 배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더라도 그 노력은 조금도 허비된 것이 아니다. 단원들의 모든 활동은 성모님을 위하여 또한 성모님의 거대한 계획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바치는 것이 아닌가? 성모님은 이렇게 남는 노력을 기꺼이 받아들이시고 크게 불리시어, 주님의 가족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곳에 공급해 주신다. 나자렛의 성실하신 주부의 손에 맡겨진 것은 무엇이든 조금도 유실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레지오 단원의 노력이 성모님께 마땅히 바쳐야 하는 정도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아낌없이 나누어 주시고자 하시는 성모님의 손은 묶이고 만다. 그리하여 공동 재산에 관하여 성모님과 맺은 계약이 놀랄만한 가능성들을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원의 태만으로 말미암아 파기된다. 오! 영혼들에게도 그리고 자기 힘에만 의존해야 하는 단원 자신에게도 얼마나 안타까운 손실인가!

 

그러므로 어떤 단원이 자기는 성모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있다고 우겨대면서 자신의 불충분한 노력이나 어설픈 활동을 합리화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성모님께 의탁한다고 하면서 그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노력을 피할 수 있었다면 그러한 의탁은 틀림없이 설득력이 없고 비열한 것이다. 그러한 단원은 자신이 충분히 짊어질 수 있는 짐을 성모님의 어깨에 떠넘기려 애쓴다. 기사도 정신을 올바로 갖춘 기사라면 어느 누가 그런 이상한 태도로 귀부인을 모시겠는가!

 

따라서 레지오 단원이 성모님과 맺은 협력의 근본 원리에 대해서, 마치 새로운 주제를 다루듯이, 한 번 더 설명하고자 한다. 레지오 단원은 자기 능력의 최대한도를 성모님께 바쳐야 한다. 단원이 바치기를 거부한 것을 보충하는 일은 성모님이 해야 할 몫이 아니다. 레지오 단원이 제공할 수 있으며 또 하느님의 보고(寶庫)에 그가 응당 바쳐야 할 노력과 방법과 인내심과 생각을 덜어주는 일은 성모님에게 맞갖은 일이 아닐 것이다.

 

성모님은 아낌없이 베풀고자 하시지만 오직 너그럽게 베푸는 영혼들에게만 그렇게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성모님은 레지오의 자녀들이 당신이 간직하고 계신 무진장한 은총의 보화를 마음껏 꺼내 가기를 바라시면서, 당신의 아드님의 말씀을 빌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30) 봉사하라고 단원들에게 간절히 호소하신다.

 

레지오 단원은 오로지 성모님만을 바라보면서, 자연적으로 타고난 것을 보충하고 정화하고 완전하게 하고 초자연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하며, 미약한 인간의 노력으로 불가능한 것을 그 미약한 인간의 노력이 성취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는 엄청난 일들이다. 이 엄청난 일들은 산을 송두리째 들어내어 바다를 메우고, 땅을 평탄하게 고르며, 굽은 길을 바르게 펴서 하느님의 나라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쓸모없는 종들이지만 매우 알뜰하신 주인님을 섬기고 있다.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슬 한 방울로부터 우리 이마에 흐르는 땀 한 방울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낭비하시는 일이 없다. 나는 이 책이 어떤 운명에 놓이게 될지 알지 못한다. 내가 이 책을 다 마칠 수 있을는지, 아니면 나의 펜 밑에 펼쳐져 있는 이 한쪽만이라도 끝까지 다 쓰게 될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남은 힘과 여생을 많든 적든 이 책을 마치는 데 바쳐야 한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프레데릭 오자남 Frederick Ozanam)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8월호, 편집실]

 

 

[새 번역 교본 읽기] 제6장 성모님께 대한 레지오 단원의 의무

 

 

5. 레지오 단원들은 루도비코 마리아 성인의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을 실천해야 한다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실천하는 레지오 단원들은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 드 몽포르 성인이 가르쳐 준 신심의 독특한 내용을 완전히 터득하고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성인은 ‘참된 신심’ 또는 ‘마리아의 종’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성모 신심을 가르치고 있는데,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과 ‘마리아의 비밀’이라는 두 저서를 통해서 그 내용을 더욱 알차게 설명하고 있다(부록 5 참조).

 

이 신심은 성모님과 정식 계약을 맺을 것을 요구한다. 레지오 단원은 이 계약을 통해 영적이거나 현세적이거나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모든 생각과 행실과 소유물과 더불어 자신의 전부를 아무리 적고 사소한 것이라도 아낌없이 성모님께 바쳐드린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신의 소유물은 아무것도 없는 노예와 같은 상태가 되어, 전적으로 성모님께 의탁하고 성모님이 쓰시도록 자신을 철저히 내맡기는 것이다.

 

그러나 세속의 노예는 성모님의 노예보다는 훨씬 자유롭다. 세속 노예의 경우, 자신의 생각과 내면생활은 스스로 다스리므로 자신에 관한 일에서는 자유로울 수가 있다. 그러나 성모님께 무릎을 꿇는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 영혼의 움직임, 숨겨놓은 재산, 그리고 가장 깊숙한 자신의 속마음까지도 모두 성모님께 내어 드려야 한다. 마지막 숨을 쉬는 순간까지 모든 것을 성모님께 드려서 성모님이 하느님을 위해 쓰시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중략)

 

유의할 점은 ‘참된 신심’은 열정이나 감상에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모든 고층 건물들이 그러하듯이 ‘참된 신심’은 햇볕을 받아 빛날 수는 있지만, 그 신심의 깊은 기초는 고층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바위처럼 차갑다.

 

이성은 보통 냉철하다. 가장 단호한 결심은 얼음장같이 차가울 수 있다. 신앙 그 자체도 때로는 다이아몬드처럼 냉랭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요소가 바로 ‘참된 신심’의 기초를 이룬다. ‘참된 신심’은 이 세 가지 기초 위에 세워졌을 때 지속된다. 그리고 산을 허물어뜨리는 된서리와 폭풍이 닥쳐오더라도 ‘참된 신심’을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다.

 

‘참된 신심’을 실천하는 데서 얻는 은총이나 이 신심이 교회의 신심 생활 안에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미루어 보면, 이 신심이 분명히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메시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점이 바로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 드 몽포르 성인이 주장한 내용이다. 성인에 의하면, 이 신심을 실천하는 이들에게는 많은 은총이 약속되어 있으며, 약속에 결부된 조건이 충족되기만 한다면 이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이제 일상의 체험에 관하여 말해보자. 피상적인 관심사 이상으로 이 신심을 깊이 실천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고, 이 신심이 가져다 준 은총에 대해서 그들이 얼마나 큰 확신에 차 있는지를 살펴보라. 그들이 혹시 감정이나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라. 그들은 한결같이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단언할 할 것이다. 기만당했다고 여기기에는 이 신심이 가져다준 열매가 너무도 뚜렷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참된 신심’을 가르치고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경험한 은총이 모두 믿을 만하다고 볼 때, 이 신심이 우리의 내면생활을 더욱 깊이 있게 하고 이를 이타적이고 순수한 지향이라는 특별한 ‘인호’로 봉인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리하여 자신이 올바로 인도되고 보호받고 있음을 느끼며, 자신의 삶이 가장 유익한 일에 쓰이고 있다는 흐뭇한 확신을 갖게 된다. 초자연적인 관점과 단호한 용기와 더 확고한 믿음을 지니게 되어 어떠한 일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유연함과 지혜를 지니게 되어 자신의 고유한 자리에서 강점을 유지하게 된다. 더욱이 이 모든 은총과 덕행을 보호해주는 달콤한 겸손의 덕을 지니게 된다. 이 모든 은총은 비범한 것으로서, 우리는 이 은총이 ‘우리에게 오는구나!’라고 알아차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종종 자신의 공로나 타고난 능력을 명백히 뛰어넘는 중대한 일을 하라는 부르심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부르심과 함께, 영광스러우면서도 막중한 짐을 주저하지 않고 짊어질 수 있게 해주는 도움의 손길도 받는다.

 

한마디로, ‘참된 신심’을 실천하며 자신을 성모님의 노예 신분으로 낮추는 값진 희생을 바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이 더욱 크게 드러나도록 자신을 버린 사람들에게 약속된 수백 배의 상급을 그 대가로 받게 된다. 우리가 섬길 때 다스리게 되고, 베풀 때 받게 되며, 무릎을 꿇을 때 승리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영신 생활을 순전히 개인적 이득이나 손실에 관련된 문제로 격하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가진 보화를 영혼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도 맡겨 드려야 한다고 권하면 당황해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성모님께 모든 것을 드린다면 내가 이 세상을 떠나 심판대에 설 때 빈손이 될 터이니, 연옥에서 더욱 오래 머무르게 되지 않겠는가?” 이처럼 질문하는 이들에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대가 심판받는 바로 그 자리에 성모님도 함께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흔쾌히 대답할 수 있다. 이 대답에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성모님께 대한 봉헌을 반대하는 이유는 이기적인 생각에서보다는 대개 당혹감에서 나온다. 우리가 지닌 영신적 보화를 남김없이 성모님께 바친다면, 우리가 의무적으로 바치는 기도 즉 가족과 친구, 국가와 교황 등을 위한 기도는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염려는 모두 떨쳐 버리고 과감히 자신을 봉헌하자. 성모님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안전하다. 성모님은 하느님 그 자신의 보화를 수호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관심사를 수호하는 분이 되실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모은 자산과 부채 즉 채권과 채무를 저 지고하신 성모 성심에 맡겨 드리자. 성모님은 그대를 대할 때, 마치 그대 외에는 다른 자녀를 두지 않으신 것처럼 대하실 것이다. 그대의 구원과 성화, 그대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전적으로 성모님의 관심사이다. 그대가 성모님의 지향을 위하여 기도 바칠 때, 바로 그대 자신이 성모님의 첫 번째 지향이 된다.

 

우리는 지금 레지오 단원에게 희생하라는 촉구를 하고 있다. 따라서 이곳은 매매에서는 전혀 손해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자리가 아니다. 매매에서 손해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서는 봉헌 행위의 근본 자체를 없애버리고 봉헌의 가치를 좌우하는 희생의 특성을 없애버려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옛적 광야에서 굶주리고 있던 만 명이 훨씬 넘는 군중을 모두 배불리 먹인 성경 이야기(요한 6,1-14 참조)를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음식을 가져왔다. 그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공동선을 위하여 포기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는 기꺼이 내놓았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 몇 개 안 되는 보리빵과 물고기를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쪼개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마침내 그 엄청난 수의 군중이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때까지 배불리 먹었고 그 가운데는 보리빵과 물고기를 선뜻 내놓은 바로 그 사람도 들어 있었다.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를 차고 넘치게 채웠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보리빵 몇 개와 물고기 몇 마리가 무슨 소용 있겠어요? 더구나 여기 함께 와 있는 제 가족들도 배고플 테니 이 음식을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았고 그와 그의 가족들은 자신들이 바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음식을 놀라운 기적을 통하여 받았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들은 열두 광주리에 대한 일종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그것을 주장하고자 하였다면 말이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아무런 조건 없이 기꺼이 바치는 후한 영혼들을 항상 이와 같은 방식으로 대해 주신다. 우리가 드리는 선물은 수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데 쓰인다. 게다가 우리가 바치는 희생 때문에 막상 우리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과 뜻하는 바가 손해를 입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우리는 넘쳐나도록 되돌려 받으며,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하느님의 은총을 얻게 된다.

 

이제 우리의 보잘것없는 보리빵과 물고기를 가지고 성모님께 달려가 그 팔에 안겨 드리자. 그리하여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그것을 더욱 크게 불리시어 이 세상 메마른 광야에서 굶주리고 있는 무수한 영혼들을 먹여 기르시도록 해 드리자.

 

자신을 봉헌한다 해서 평소에 바치는 기도나 하던 행동을 바꿀 필요는 없다. 평소의 생활은 그대로 이어지고, 통상적인 지향과 모든 특별한 목적을 위한 기도도 그대로 계속 바칠 수 있다. 다만 이제부터는 성모님이 즐겨 받으시도록 마음을 향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9월호,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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