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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0일 (토)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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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교부들의 신앙: 성경 -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

56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10-30

[교부들의 신앙 – 성경]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

 

 

인간과 함께하신 하느님의 여정이 교회의 역사라고 한다면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무엇을 말씀하셨고, 또 인간은 그 말씀에 어떻게 응답했는지에 관한 역사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과 그 성경을 읽어 온 역사가 신앙인들의 삶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이유입니다. 교부들에게 성경은 무엇이었고, 교부들은 성경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교부들이 말하는 성경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성경을 ‘하느님의 편지’라고 말하면서 성경을 가까이 하라고 권면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도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는 당대 신자들을 꼬집는 글을 남겼습니다.

 

“말해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누가 집에 있으면서 그리스도인의 책을 손에 들고 여러분을 향해 쓰인 것을 찾고 성경을 탐구합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 그들에게는 ‘책의 면들이 어떤가?’, 아니면 ‘글씨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쓰여 있는가?’와 같은 것이 중요하지 그것을 읽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쓸모나 이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와 특권을 과시하려고 그렇게 합니다. 이는 결국 허영입니다. 책의 쓸모는 어디에서 옵니까? 황금으로 쓰인 글자입니까, 그 책의 내용입니까? 성경은 책 속에만 남아 있으라고 주어진 게 아니라 우리 마음에 새겨지라고 주어진 것입니다”(「요한 복음 강해」, 32, PG 59, 186-187).

 

가톨릭 신자들은 유사 종교나 이단들에 현혹되기 쉽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상대적으로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우리 마음에 새겨지도록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기도와 성경 읽기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인 듯싶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나도 하느님께 말씀드린다면 그것이 바로 기도이고 그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은 나의 마음, 살로 된 심장에 새겨지게 됩니다.

 

 

하느님 말씀과 기도

 

치프리아노 성인은 기도로 이어지는 성경 독서의 성격을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하십시오. 또 열심히 성경을 읽으십시오. 기도할 때는 그대가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이고 성경을 읽을 때는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서간」, PL 4, 226).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그대의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대가 읽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대와 말씀하십니다”(「시편 상해」, PL 37, 1086).

 

이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라고 하는 교회의 전통을 말해 줍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읽기’, ‘묵상’, ‘기도’, ‘관상’의 순서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계속 기도하는 이는 결국 하느님을 닮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을 뵙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서로 닮는 만큼만 서로를 알아보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런 면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하느님의 것과 나의 것을 알아보고 닮지 않은 나의 모습을 그분의 모습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의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 정신의 눈앞에 놓여 있는 거울과 같아서 우리의 내적인 시각을 비추어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우리 앞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보고 성경에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봅니다. 성경은 거룩한 이들의 행실을 이야기해 주고 약한 자들의 영혼이 그것을 따르도록 이끌어 줍니다. 악덕에 맞선 싸움에서 승리할 때 우리의 약함을 북돋워 줍니다. 성경 말씀의 바탕 위에서, 힘 있는 많은 사람의 승리를 바라보는 만큼 싸움에서 정신이 약해지는 일이 적어지게 됩니다. 잘못된 것도 알아보게 해 줍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승리에서 본받아야 할 것들을 얻게 해 주고 그들의 실패에서 우리가 넘어질까 두려워해야 할 것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욥은 유혹으로 강해진 사람이라 적혀 있고 다윗은 유혹에 패배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옛사람들의 덕은 우리의 희망을 강하게 해 주고 그들의 실패는 우리에게 현명한 겸손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욥의 도덕」, PL 75, 553-555).

 

 

하느님의 말씀과 세상의 말

 

요즘 세상은 미디어의 홍수 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깨어 있는 동안은 늘 미디어에 노출되어 있지요. 엿새 내내 미디어가 퍼뜨리는 세상의 가치관 속에 있다가 주일 하루 성당에 가서 하느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우리 안에 더 크게 차지하는 가치관이 복음 말씀이 아닌 세상의 가치가 아닐는지요. 예로니모 성인의 이야기를 들어 봅니다.

 

“예언서들을 읽기 시작하자 예언서의 조잡한 문체가 내게 싫증을 불러일으켰다. 눈이 멀어 빛을 볼 수 없었음에도 나는 내 눈이 아니라 태양이 잘못된 탓이라 여겼다. 이렇게 오래된 뱀이 나를 가지고 장난을 침으로써 사순 시기가 반나마 지났을 무렵 내 몸 구석구석까지 파고드는 열이 내 육신을 쳐서 나는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 나는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영으로 붙들려 올라가 심판관이신 주님의 법정으로 끌려갔다. 그분을 둘러싼 광휘가 너무 찬란하여 땅에 엎드려 있던 나는 감히 눈을 들어 그분을 볼 수도 없었다. 그분께서 너는 누구냐고 물으시자 나는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답을 드렸다. 그러나 주재자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너는 키케로인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고 매질을 당하면서 뉘우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 이 말만 속으로 되풀이하였다. ‘저승에서 누가 당신을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시편 6,6) 뒤이어 나는 외치기 시작했다.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서간」, 22,30, PL 21,416-417).

 

세상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분을 닮아 가는 기도의 여정이 바로 성경 읽기라고 한다면 그 과정 자체를 귀하게 여기는 태도 또한 필요합니다. 바로 이해할 수 없다고 싫증을 내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이지요. 다마스커스의 요한 성인은 성경을 읽는 이들을 이렇게 격려합니다.

 

“게으름으로 두드리지 맙시다. 힘 있게 꾸준히 두드립시다. 두드리는 데 지치지 맙시다! 이렇게 하면 우리에게 열릴 것입니다. 한 번이나 두 번 읽고, 읽은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계속 읽고 묵상하며 여쭙시다. 모세는 말합니다. ‘아버지에게 물어보아라. 알려 주리라. 노인들에게 물어보아라. 말해 주리라’(신명 32,7). 누구나 다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정원의 샘에서 영원한 생명을 향해 흐르는 지극히 맑고 영원한 생명수를 길어 냅시다. 단순함으로 그것을 맛보고 즐깁시다. 다함 없는 은총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정통 신앙」, PG94, 1176-1177).

 

* 황인수 이냐시오 - 성바오로수도회 신부. 수원가톨릭대학교와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교 아우구스티노 교부학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성바오로출판사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9년 10월호, 황인수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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