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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6.25 특집: 전쟁의 땅, 교회에 닥친 수난

1829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6-22

[6.25 특집] 전쟁의 땅… 교회에 닥친 수난


피난 권유를 뿌리치고 총 앞에서 외쳤다 “어떻게 목자로서 양을 버릴 수 있습니까”

 

 

1999~2001년 본지에 연재했던 최인호 작가 소설 「영혼의 새벽」 중 ‘죽음의 행진’을 그린 이우범 화백의 삽화.참혹하다는 말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시기가 없었다. 한반도 전역에서 300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건물은 무너졌으며, 산은 불탔고, 땅은 피폐해졌다. 그리고 그 안에 교회도 있었다. 당시 교회가 겪었던 수난을 잘 보여주는 것이 현재 시복을 추진하고 있는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순교자다. 근·현대 순교자들인 이 하느님의 종 중 80명이 바로 6·25 한국전쟁 으로 순교했다. 그때 교회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순교자들의 이야기에서 한국전쟁 중 교회의 모습을 들여다보자.

 

 

박해, 그 이상의 박해

 

“너는 무엇 하는 사람이냐?”

“나는 이 성당 신부요.”(「모랫말 반세기:도림동성당 50년사」 중)

 

탕!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북한군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서울 도림동성당에서 아침미사를 드리고 나온 하느님의 종 이현종(야고보) 신부의 가슴에 총탄이 박혔다. 이 신부는 총을 맞았음에도 두려움 없이 “나를 죽이는 게 그렇게 원이라면 마저 쏘라”며 “너희가 내 육신을 죽일 순 있어도 영혼을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군은 “너는 남의 돈을 착취해 생활하는 자 중의 하나 아니냐”며 그 자리에서 권총 두 발을 더 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교회는 ‘착취하는 자’들이었다. 전쟁으로 인간성을 상실해버린 한반도 안에서 공산주의를 표방하던 북한군의 총구는 교회를 겨눴다. 그저 교회의 일원이라는 것, 그것으로 죽음의 이유는 충분했다. 대부분의 납북과 처형이 전쟁이 일어난 지 2~3달 안에 일어났다. 짧은 기간에 많은 인원이 피해를 입은 것도 큰일이었지만, 무엇보다 수많은 교회의 지도자를 잃었다. 성직자, 수도자, 신학생들은 전쟁 전후로 북한군에 체포되거나 처형됐는데, 그 수가 150명에 달한다. 그중에는 하느님의 종 홍용호 주교를 비롯한 5명의 주교와 각 교구의 지도자들이 포함됐다.

 

- 근·현대 순교자로 시복을 추진하고 있는 하느님의 종 홍용호 주교(앞줄 가운데). 평양교구 사제단과 함께 한 기념사진.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 평양교구 제공.

 

 

양 떼를 지킨 목자

 

“양을 버리고 목자로서 어떻게 먼저 피난을 갈 수 있습니까. 서울에서 양들이 피난을 다 한 다음에 피난을 갈 것입니다. 먼저 피난을 가십시오.”(「감곡본당 100년사」 중)

 

하느님의 종 유영근(요한 세례자) 신부는 숙부모가 수차례 찾아와 피난을 권유했지만, 한결 같이 뿌리쳤다. 서울대목구 당가(현 관리국장)로서 명동성당을 지키다 결국 7월 11일 북한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후 유 신부는 포로로서 ‘죽음의 행진’을 하던 중 순교하게 된다.

 

전쟁이 터지자 사목자들은 교회를 수호하고자 결의했다. 사목자들이 수호하려 했던 교회란 다름 아닌 ‘양 떼’, 바로 신자들이었다. 서울대목구는 전쟁이 발발한 다음날 긴급 교구 참사회를 열고 될 수 있는 대로 피난을 떠나되 “본당 신부들은 직장을 사수하고 교우들과 생사를 함께할 것”을 결정했다. 이 방침으로 교회의 기능은 상당기간 지속됐고 명동의 경우 적어도 8월 6일까지도 주일미사가 거행됐다. 가정방문과 성사집전을 비롯한 본당 신부의 활동도 계속됐다.

 

“물!, 물!, 아이고, 목말라!”

“아이고, 나 좀 살려주. 아이고, 아이고.”

 

1950년 10월 9일 원산 와우동형무소의 방공호에서 신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북한군이 수많은 포로들을 방공호에 몰아넣고 학살한 것이다. 시체와 시체 사이에는 아직 숨이 붙은 이들이 신음하고 있었다. 그 수많은 신음에 “응- 내가- 물 떠- 주지. 음- 내가- 가서- 구해 주지”라는 응답이 수십 차례 돌아왔다. 바로 당시 춘천지목구 양양본당 주임이었던 하느님의 종 이광재(티모테오) 신부였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한준명 목사가 이 신부의 목소리를 듣고 이 신부를 찾았다. 그러나 이 신부는 자신도 죽어가고 있었다. 이 신부는 운명의 그 순간까지 정신력을 모아 신음하는 사람들의 소리에 응답한 것이었다.

 

이 신부는 전쟁 이전부터 핍박을 받는 북한의 신자들을 남한으로 피신시켜 왔다. 신자들은 이 신부에게 월남을 권했지만 “북한에 있는 신자 한 사람이라도 빠짐없이 앞장서면 나는 그를 몰고 뒤따르마. 목자는 양을 버릴 수 없다”고 말하며 전쟁이 나던 해에도 활동을 계속하다 북한군에 붙잡혔다.

 

서울뿐 아니라 이광재 신부를 비롯한 춘천·대전 등 여러 교구의 신부들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피난을 가지 않고 본당을, 신자들을 지켰다. 그래서 신자들을 지키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던 숱한 신부들이 붙잡히거나 죽음을 맞이했다.

 

- ‘죽음의 행진’을 겪은 으제니 수녀(앞줄 가운데).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죽음의 행진, 주님 따르는 십자가 길

 

“앞으로 가라. 그렇지 않으면 죽일 테다.”

“죽이시오. 나는 죽음을 겁내지 않아요.”(「나의 북한 포로기-‘죽음의 행진’에서 아버지의 집으로-」(코요스 신부 지음) 중)

 

북한군은 80세가 넘은 몸으로 비인간적인 포로생활을 하며 쇠약해진 힘든 하느님의 종 폴 비예모 신부를 총으로 위협했다. 그러나 비예모 신부는 의연했다. 

 

북한군에 포로로 잡힌 사람들은 수용소까지 이른바 ‘죽음의 행진’을 해야 했다. ‘죽음의 행진’은 포로들을 강제로 이동시키는 행군이다. 포로들은 추위와 질병, 배고픔에 시달리며 행군을 강행해야 했다. 수많은 이들이 비위생적이고 혹사당하는 환경에서 병으로 죽었고, 조금이라도 대열에서 이탈하면 총살당했다.

 

서울에서 잡힌 이들은 1950년 11월에서 다음해 3월까지 평양에서 중강진을 거쳐 하창리 수용소로 이동했고, 덕원·함흥대목구의 성직자·수도자들은 10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만포를 거쳐 옥사독 수용소로 죽음의 행진을 했다. 교황대사였던 하느님의 종 패트릭 번 주교를 비롯한 많은 성직자·수도자들이 이 길에서 순교했다.

 

“코요스 신부, 나하고 같이 로사리오 기도를 바칠까? 나는 아직 세 단의 묵주신공을 더 바쳐야 하는데, 신부는? 신부는 환희의 신비를 하고 있어? 나는 고통의 신비를 하고 있어.”(「한 수녀가 겪은 3년간의 북한 포로기」(성심의 으제니 수녀) 중)

 

하느님의 종 조제프 카다르 신부는 함께 ‘죽음의 행진’을 하던 셀레스텡 코요스 신부(한국이름 구인덕, 1993년 선종)에게 말했다. 고통 밖에 없는 ‘죽음의 행진’에 성모송이 끝없이 울려 퍼졌다. 성직자·수도자들은 죽음의 행진을 순례의 길로, 십자가의 길로 승화시켰다. 죽음의 행진에서 생존한 코요스 신부는 「나의 북한 포로기」에서 카다르 신부가 쇠약해지고 상처가 곪아 고통을 겪으면서도 “산 저쪽 비탈에 떨어진 자들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하자”고 말하는 등 함께 묵주기도를 하며 걸었다고 회고했다.

 

죽음의 행진에서 생존한 으제니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997년 선종)는 포로시기를 회고한 「동토에서 하늘까지」에서 “간수들은 우리에게 사상교육을 해보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면서 “그들은 우리의 처신, 참을성, 서로에 대한 애덕 실천, 영웅적인 죽음 등 모든 것에서 더 많은 감명을 받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가톨릭신문, 2019년 6월 23일,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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