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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18일 (목)부활 제3주간 목요일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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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교부들의 신앙: 성체성사 - 세족례로 완성되는 최후의 만찬

579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4-15

[교부들의 신앙 - 성체성사] 세족례로 완성되는 최후의 만찬

 

 

공관 복음(마태오, 마르코, 루카)은 예수님의 출생과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 배경은 ‘땅’입니다. 반면에 요한 복음의 시작 배경은 ‘하늘’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 그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14).

 

최후의 만찬 장면도 공관 복음과 요한 복음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공관 복음에서는 최후의 만찬만 언급한 반면, 요한 복음에서는 “식탁에서 일어나시어”(요한 13,4)라고 짧게 언급하고, 예수님의 ‘발 씻김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이어갑니다. 그렇지만 요한이 최후의 만찬 내용을 모를 리 없습니다. 요한은 제자들과 함께하신 ‘식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허리를 굽히시어 무릎을 꿇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모습’에 주목한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당신의 자리는 바로 그렇게 낮은 곳이었습니다. 저 높은 ‘하늘’에서 시작한 요한 복음은 이제 가장 낮은 곳, ‘제자들의 발아래’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가장 높은 곳으로 오르실 준비를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

 

요한 복음이 증언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 만찬 성목요일 전례에서 기념하는 두 가지 큰 사건, 곧 ‘최후의 만찬’과 ‘세족례’는 별개의 것이 아닌, 따로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하나라는 점입니다. 최후의 만찬은 세족례를 통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신 최후의 만찬은 ‘성체성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당신의 허리를 굽히시고 무릎을 꿇으시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세족례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섬김’을 의미합니다. 성체성사는 겸손과 섬김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기에, 최후의 만찬과 세족례는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우리가 겸손해지도록 가르치시려는 뜻입니다. … 그리고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 주신 일만 아니라 다른 것으로도 겸손을 보여 주시는 것을 눈여겨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일어나신 것은 기대어 앉기 전이 아니라 그들이 모두 앉은 뒤였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그냥 씻어 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겉옷을 벗고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몸소 수건을 두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않으시고, 몸소 대야에 물을 부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시켜 부은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이 모든 일을 몸소 하심으로써, 어떤 좋은 일을 할 때면 겉으로 보이는 행동만 할 게 아니라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보여 주셨습니다.”(「요한 복음 강해」, 70,2).

 

 

오늘날에도 재현되는 예수님의 삶

 

둘이 아니라 하나인 최후의 만찬과 세족례는 2000년 전 단 한 번 행해진 뒤에 끝나 버린 유일무이한 사건이 아닙니다. 두 사건은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재현되어 왔습니다. 최후의 만찬은 성체성사를 통해 오늘도 재현됩니다. 그렇다면 세족례는 어떤 형태로 계승되었고, 우리는 어떻게 이를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프랑수와 바리용 신부는 아직 축성되지 않은 제병을 두고 이렇게 묵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빵을 돌멩이 보시듯 보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빵에는 인간의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빵을 손에 들기까지 씨 뿌린 사람, 밭을 간 사람의 노동이 필요했고 농기구를 만든 사람, 농약을 만든 사람들의 노력, 또한 밀을 수확한 사람들과 제빵업자들, 그들 모두의 수고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밀’을, ‘밀’이라는 ‘자연’을 ‘인간의 것’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 많은 이의 땀과 희생을 통해 얻어진 이 빵이 제대 위로 옮겨지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으로 만드십니다. ‘인간의 것’을 ‘하느님의 것’(그리스도의 것)으로 변화시키십니다”(「믿는 기쁨 사는 기쁨 4 –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기쁨」, 생활성서사).

 

인간의 희생이 쌓이고 쌓인 이 빵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희생을 통하여 당신의 몸인 성체로 변화시키십니다. 나아가 성체성사 안에서 당신의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를 ‘당신의 것’으로 변화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것을 주시려고 기꺼이 당신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세족례로 완성되는 성체성사

 

그렇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희생’이라는 나무에서 열린 열매를 얻으려면 우리도 희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따라서 성체를 거룩하게 받아 모시지만 겸손해지지 못하고 이웃을 섬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성사가 될 뿐입니다.

 

누군가의 발을 씻겨 주려면 발 아래에 자리해야 합니다. 그 가장 낮은 곳에 예수님께서 당신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반역자요 신성 모독자, 유다처럼 구제할 길 없는 자까지 발을 씻어 주시고 당신 식탁에 앉게 하셨습니다”(「요한 복음 강해」, 71,1).

 

그리고 그 자리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성인은 그런 예수님에 대해 말합니다.

 

“당신 스스로 먼저 본보기가 되심으로써 우리를 작은 빚을 진 채무자로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분께서 먼저 이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요한 복음 강해」, 71,1).

 

성체성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중요한 성사입니다. 하지만 세족례의 정신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성체성사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성목요일 전례가 끝나면, 감실이 비워지고 수난 감실로 성체를 모셔 갑니다. 그리고 파스카 성야까지 성체 조배가 이어집니다. 하지만 수난 감실 앞에서 예수님의 고통을 감상적으로 묵상하는 것으로 성체 조배를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과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얻은 ‘성체라는 열매’를 합당하게 받아 모시고자 나 자신이 얼마나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희생했는지 가슴을 치고 성찰해야 합니다.

 

제대 앞에서 세족례가 거행되는 순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가 상처를 주고 미워했던 이들의 발을 씻어 주는 ‘마음의 세족례’를 거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겸손과 섬김’을 통해 성체를 합당하게 받아 모실 수 있도록 늘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 김현웅 바오로 – 성아우구스티노수도회 신부로 착한의견의성모수도원 수련장을 맡고 있다. 교황청립 라테라노 대학교 아우구스티노 교부학 대학원에서 교부학을 전공하였다.

 

[경향잡지, 2020년 4월호, 윤종식 티모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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