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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순조(교회 재건기):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

1059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10-30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순조(교회 재건기)]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

 

 

박해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신자들은 교회를 재건하고자 했다. 신유박해 때 가장 열렬히 교회 재건을 외친 사람은 황사영이다. 그는 2월에 체포령이 내려지자, 배론 옹기굴로 피해 은신하면서 박해를 멈추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책을 구상하여 북경 주교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교황에게 알려서 조선 교우들을 구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세계 각국의 교회가

공동체 의식으로 조선 교회를 돕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평신도 한 명이 교회의 위기에 대해느끼는 철저한 책임감과 고민을 담은 이 편지는 세기를 넘어 동서양을 울렸다. 바로 황사영의 ‘백서’(帛書)이다.

 

그런데 ‘백서’는 주변의 참혹한 대가를 요구했다. ‘백서’는 사전에 탄로 나고, 황사영은 음력 9월 29일에 체포되었다. 특히 그가 현실을 타개하고자 제시했던 방안이 문제가 되었다. ‘백서’는 박해의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천주교 신자들은 다시 무자비하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황심과 옥천희는 물론 정광수, 홍익만 등 20여 명이 더 순교했으며, 여러 명이 유배를 갔다. 황사영은 11월 5일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의 재산과 노비는 몰수되었고, 숙부 황석필은 경흥, 모친 이윤혜는 거제도, 부인 정난주(정명련)는 제주도, 두 살배기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에 정배되었다.

 

 

정난주가 교회에 드러나기까지

 

황사영의 진지한 책임감은 시간에 녹슬지 않았다. ‘백서’는 1801년 황사영이 체포될 때 조정에서 압수하여 의금부 창고 속에 보관되었다. 그러다가 1894년 조정에서 의금부의 옛 문서들을 정리 소각할 때 이 ‘백서’가 관계관의 눈에 띄었다. 관계관은 이를 천주교인 이건영에게 넘겨주었고, 이건영은 ‘백서’를 뮈텔 주교에게 바쳤다. 주교는 그 감동으로 또 다른 감동을 생산했다.

 

한편, 이 무렵 황사영의 후손이 살아있음이 알려졌다. 1874년 출간된 달레의 「조선교회사」에는 황경한이 추자도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1909년 제주본당(현 중앙주교좌본당)의 라크루 신부가 추자도를 사목 방문했다가 황사영의 증손자를 만났다. 신부는 곧 파리에 있는 샤르즈뵈프 신부에게 순교자 황사영의 아들과 그 후손들의 비참한 생활을 알렸다. 샤르즈뵈프 신부는 이를 전교 잡지에 소개했고, 후원금이 답지했다.

 

이 후원금으로 라크루 신부는 황경한의 후손에게 집과 농토를 사 주었다. 이때 정난주가 유배 생활 중에 아들에게 보낸 서한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난주의 삶도 교회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본디 황사영이 처형된 직후, 그 식구들은 서울에서 가장 먼 유배지로 각기 떠났다. 황경한은 추자도 관노로 정해졌었다. 그러나 정난주는 추자도에 다다를 무렵, 나졸들에게 애원하여 젖먹이를 관에 정식 신고하지 않고 추자도 예초리 언덕 위에 내려놓았다고 한다. 아들이 평생 노비로 살지 않게 하려는 어머니의 바람이었다. 뱃사공 오씨의 부인이 이 아기를 발견하여 길렀다. 그들은 아기 저고리 동정에서 부모 이름과 아기 이름이 적힌 쪽지를 발견하고 아기 이름을 그대로 불러 주었다. 혼자 떨어진 아기는 이렇게 황사영의 아들로 살 수 있었다. 신양리 산 중턱에 황경한의 묘가 있다.

 

정난주는 훨씬 늦게 교회의 관심을 받았다. 제주의 첫 번째 신앙인이라 불리는 정난주는 남제주군 대정에서 37년간 관비로 살았다. 그는 진사 시험에 장원 급제한 황사영의 부인일 뿐 아니라, 정약종의 조카였다. 게다가 당시 나주 정씨 집안은 평판있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정난주가 관비라 하더라도 함부로 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교육을 중시하는 우리나라는 노비라 하더라도 자신의 지식으로 다른 대우를 받고 살 수 있었다. 심지어 주인의 글을 대신 지어 주는 노비도 있었다. 정난주도 그의 실력과 빼어난 인품으로 품격을 잃지 않고 생활했던 것 같다. 관비를 담당하던 김씨 집안에서는 그를 높이 평가하여 아들을 맡겼다.

 

김씨 집안에서는 정난주를 ‘한양 할망’이라고 부르면서 양어머니로 봉양했다. 이러한 생활은 서울 문화의 지방 확산, 신분의 경계 허물기 등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정난주는 신앙으로 그 삶을 버텼을 것이다. 남편은 사지가 찢겨 죽고, 숙부들은 처형되거나 유배되었고, 가족은 온 천지에 흩어져 있으며, 자신은 하늘 나라로 가는 그날까지 노비로 약정된 삶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숙부 정약용이 1818년 유배가 풀렸고, 사촌 정하상은 신부를 모시려고 온몸으로 뛰고 있었다. 1831년에는 드디어 조선교구가 설정되었다. 게다가 남편 황사영이 애타게 그리던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왔다. 교회의 재건 소식이 제주도까지 전해졌다면, 그 소식 자체가 정난주의 고단한 삶에 대한 보답이 되었을 것이다.

 

정난주는 1838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기 직전에 죽었다. 김씨 집안에서는 모슬봉 북쪽에 묘를 조성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해 왔다. 정난주의 묘는 그가 죽은 지 130년이 지난 뒤에야 교회에 알려졌다. 1970년 황사영의 4대 손 황찬수가 대구로 교회 사학자 김구정을 찾아와 관련 자료를 전했다. 3년 뒤 김구정은 김병준 신부의 도움으로 정난주의 묘를 확인했다. 이 무덤은 1977년에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되었고, 이후 ‘대정 성지’로 조성되었다.

 

 

교회 메시지 전달자의 역할

 

황사영의 순교의 길은 처참했다. 그렇지만 그는 죽어서도 한국 교회를 도왔다. 1925년 한국 교회 첫 시복식 때, 황사영이 교황께 전해 달라고 애원했던 장문의 ‘백서’는 드디어 원(願)을 풀었다. 시복식에 참여한 뮈텔, 드망즈 두 주교는 124년 전 고운 명주포에 깨알처럼 쓴 ‘백서’를 비오 11세 교황에게 직접 전했다. 그리고 주교들은 ‘백서’의 실물 크기 사본 2백여 장과 불어 번역본을 세계의 주요 교회에 선물했다. ‘백서’는 그들로부터 한국 교회에 대한 커다란 관심과 후원을 이끌어 냈다.

 

황사영은 순교자들이 흘린 피는 ‘성교의 씨’라고 믿고, 치명한 이들의 행적을 기록해 놓았다. 2014년 8월 16일, 황사영이 증언해 준 많은 순교자가 광화문에서 시복되었다. 우리가 ‘백서’에서 발견하는 용기와 응원은 별도이다.

 

황사영의 연좌된 죄인 가운데 아들은 유배된 뒤 60여 년, 후손은 100여 년, 부인은 대략 170년이 지나서야 교회에 알려졌다.

 

그들은 정말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들은 시간 앞에서 정의는 반드시 드러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교회는 순교자의 피 위에서 성장하지만, 연좌제에 걸렸던 사람들은 그 거름이 되어 주었다. 묻힌 거름들을 찾으면서 우리는 시간의 진리를 절감한다.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이며 대구 문화재 위원과 경북여성개발정책연구원 인사 위원을 맡고 있다.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 연구원이다. 한국가톨릭아카데미 겸임 교수를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9년 10월호,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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