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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천주교와 한글: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와 한글, 한국어

1060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10-30

[경향 돋보기 – 한국 천주교와 한글]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와 한글, 한국어 (1)

 

 

조선 시대의 언어와 문자

 

1443년에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자모 스물여덟 자를 손수 창제하고 이를 1446년에 반포하면서 우리말, 곧 한국어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말의 말소리를 합리적으로 표기할 수 있는 문자가 비로소 세상에 나온 것이다. 

 

훗날 ‘한글’이라 불리게 되는 이 문자는 조선 시대에 사대부들에게 외면받아 왔다는 통념이 세간에 퍼져 있지만, 꼭 그렇게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 물론 당대 사회의 주류를 형성했던 사대부들이 공문서와 각종 문헌을 한문으로 작성했고 사서삼경을 위시한 당대의 필독서들 또한 한문 책들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한문을 쓰자니 글자 또한 한글이 아니라 한자를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문으로 글을 쓰던 사람들 또한 한국어로 수많은 글을 지었으며 한글 창제 이후 한국어로 쓴 글들은 한글로 기록되었다는 점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한글로 기록된 한국어 문학 작품들은 임진왜란 이후인 16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다. 예컨대 송강 정철(1536-93년)이 1580년에 지은 가사 「관동별곡」(關東別曲)은 한 세기가 지난 1690년부터 1696년 사이에 한글로 기록되었으며(현전하는 「송강가사」 판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황주본이 이때 나왔다.), 1728년에는 김천택(생몰 연대 미상)이 시조집 「청구영언」(靑丘永言)을 엮었는데 이 또한 한국어를 한글로 표기한 문헌이다.

 

 

가사 문학의 전통 속에서 탄생한 천주가사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 작품의 갈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앞에서도 언급한 가사(歌辭)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연원이 고려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가사는 그 내용 또한 어느 한 가지 범주로 묶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다. 「관동별곡」과 같이 여행 중의 감흥을 노래한 것들이 있는가 하면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들도 있고 유배 중의 어려움을 토로한 작품들도 있다. 그리고 이른바 ‘교훈 가사’라 불리는, 특정한 교훈이나 이념을 설파하는 가사 작품들도 전해진다.

 

그런데 조선 전기 이래 주로 사대부 계층의 남성들이 창작해 왔던 가사는 점차 그 향유 계층이 넓어져,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사대부 가문의 여성들은 물론 중인들과 서민들 또한 가사를 짓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러면서 그 내용의 범주 또한 더욱 다양해졌다. 특히 중인들과 서민들은 가사 문학의 형식을 빌어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가사는 길이 제한이 딱히 없고 4음보 율격을 갖추기만 하면 그 밖의 별다른 형식적 제약도 없기 때문에 누구나 쉽고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아리랑 가운데 그 역사가 가장 깊은 ‘정선 아리랑’이 조선 후기 이후 긴 노랫말을 4음보 율격에 맞추어 읊조리는 ‘엮음 아라리’의 형태로 발전한 것이나 사설시조가 나타난 것 또한 중인들과 서민들이 제법 긴 이야기를 운문으로 표현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이처럼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가사 작품을 손수 창작하고 기록하게 된 시기에 비로소 천주교가 이 땅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일찌감치 가사 문학의 형식을 빌어 교리를 전파했던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천주교 전래 이전부터 사대부들이 유학의 이념을 설교하는 가사를 지은 선례까지 있으니 천주교 교리 또한 가사에 담아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천주가사들은 이 땅의 신앙 선조들이 모진 박해 속에서도 꿋꿋이 복음을 지키고 전하는 데 큰 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라는 새로운 종교 사상의 정수를 오롯이 담은 교훈 가사라는 점에서 한국 문학의 지평을 한 단계 넓힌 문학 작품이라는 역사적 의의 또한 얻게 되었다.

 

천주가사는 구전되거나 필사본으로 전파되었는데,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천주가사 가첩(歌帖)들은 대부분 1890년대 이후에 필사된 것들이다. 그 이전에도 여러 필사본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이들은 박해를 거치면서 모두 소실되었다. 일부 천주가사 작품은 저자가 처음부터 글로 남겼을 가능성이 적지 않지만 그 최초 저술본 또한 소실된 까닭에, 이른 시기에 나온 천주가사들은 대부분 저자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기 어려운 실정이다. ‘김지완, 장아릑수, 금베두루’ 같은 이름이 적혀 있는 천주가사 가첩들도 더러 있기는 하나 이들은 천주가사를 지은 사람이 아니라 필사하고 소장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직자가 아니라 평신도들이었는데, 평신도가 천주가사를 필사하고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는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평신도 중심의 교회였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값진 증거이기도 하다.

 

 

초창기의 한국어 교리서

 

이 땅에 천주교회를 세운 사람들은 실학자와 역관 등 당대의 지식인이자 전문가 집단이었기에 한문도 잘 알았고 한국어를 한글로 기록할 줄도 알았다. 이에 이들은 한문 교리서 내용을 한국어로 번역하거나 그 내용을 충실히 소화해 한국어 교리서를 지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0월 9일 자에서 최용택 기자가 언급한 대로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 지 16년 뒤인 1801년에는 우리나라에 전파되었던 120종 177권의 한문 천주교 서적 가운데 83종 111권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정약종(1760-1801년)이 지은 「주교요지」(主敎要旨)는 한국어로 집필한 최초의 천주교 교리서인데,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참고하되 조선 사람이 알기 쉽게 조선의 말과 글로 집필한 책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주교요지」 판본은 모두 1864년 이후에 인쇄되거나 필사된 것들이지만, 이는 오히려 이 책이 그 이전부터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필사본으로 전해지고 읽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프랑스인 사제들이 조선 땅에 입국한 뒤로 한국어 교리서들은 더욱 활발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베르뇌 주교는 1861년에 인쇄소를 만들어 한국어 교리서들을 간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책들은 병인양요 이전 천주교 박해가 잠시 주춤했던 사이에 전국 각지의 교우촌으로 퍼져 나갔다.

 

1800년쯤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교요지」부터 개화기까지 나온 한국어 교리서들은 모두 한글 전용으로 간행되었다. 그런 만큼 한자를 아예 모르는 사람들도 한글만 읽을 수 있다면 이 책들을 어렵지 않게 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한글은 이미 민중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쓰이던 글자였으므로 교리 지도자들도 신자들에게 글자를 따로 가르쳐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박해 시기의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이는 한국어 교리서를 읽고 공부했을 것이고, 한글을 모르는 이는 한국어 교리서를 읽은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거나 천주가사를 듣고 외면서 복음을 접했을 것이다.

 

 

유럽인 선교사들과 한국어

 

한편 박해 시기부터 조선 땅에서 활동했던 유럽인 사제들은 한국어 교리서를 출간하는 데만 힘을 기울인 것이 아니라 동료들을 위한 한국어 교재를 집필하기도 했고 조선의 문물을 본국에 알리면서 한국어와 한글을 소개하기도 했다. 

 

한글이라는 문자의 존재를 최초로 유럽에 소개한 이는 1832년 일본에 관한 책을 펴내면서 조선의 언어와 문자를 함께 언급한 독일인 의사 지볼트(1796-1866년)였지만, 한국어와 한글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관련 서적들을 펴낸 이들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사제들이었다. 

 

달레 신부(1829-78년)는 「조선교회사」(1874년.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조선 천주교회는 물론 한국어와 한글에 대해서도 소개했으며, 리델 주교(1830-84년)는 사전인 「한불자전」(1880년)과 문법서인 「한어문전」(1881년) 등을 집필했다. 이 책들은 각각 파리(조선교회사)와 요코하마(한불자전, 한어문전)에서 간행되어 프랑스인들을 비롯한 유럽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특히 「한어문전」은 최초로 한국어의 문법을 서구의 문법 이론에 근거해서 분석한 언어학 책이기도 하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성베네딕도회 오틸리엔수도원 출신의 독일인 사제들도 한반도에 입국해 활동했다. 그러면서 1922년에는 로머 신부가, 1923년에는 에카르트 신부가 각각 한국어 문법서를 간행했다. 로머 신부의 책은 초판이 소실된 대신 1927년에 제2판이 나왔으나, 이 제2판은 손으로 쓴 글을 등사한 것에 불과했으므로 조선 땅에서 활동하던 동료 사제들 이외에는 접한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에카르트 신부가 1923년에 펴낸 「조선어 교제 문전」(朝鮮語交際文典)은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활판 인쇄본으로 출판한 책이다. 이 책의 원어 제목은 Koreanische Konversations-Grammatik으로서 ‘한국어 대화 문법’으로 직역되지만, 부록으로 나온 주해편에 ‘朝鮮語交際文典’이라는 제목이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1928년에 환속하고 독일로 돌아간 에카르트는 이후 뮌헨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새로운 한국어 교재들을 펴내기도 했다.

 

이처럼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 출신의 사제들이 한국어에 관해 저술한 책들은 유럽에 한국어가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후대 사람들이 한국어 문법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데도 밑거름이 되었다.

 

 

맺음말

 

한글은 15세기에 창제된 이래로 조선 시대부터 한국어를 표기하는 데 널리 사용되어 왔다. 그럼에도 문학 작품을 제외하면 한글로 기록된 문헌이 많이 나오지 못했던 것은 조선 시대 사람들이 적어도 사상과 학문을 논할 때는 늘 한문으로만 글을 써 왔기 때문이었다. 한글이 창제된 지 300년하고도 수십 년이 지나서야 이러한 관행이 처음으로 깨지게 되었는데, 그 계기를 마련한 이들이 바로 이 땅의 천주교 신앙 선조들이었다.

 

천주교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한글로 기록된 한국어 문헌을 통해 전파된 종교’다. 이것은 종교사적 측면뿐만 아니라 언어사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천주교 신자들이 한국어로 교리서를 쓰고 천주가사를 지음으로써 비로소 고차원적인 사상과 사유를 한문 없이 한국어로 논하고 공유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경향잡지, 2019년 10월호, 조원형 보나벤투라]

 

 

[경향 돋보기 – 한국 천주교와 한글]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와 한글, 한국어 (2)

 

 

필자는 「경향잡지」 2019년 10월 호 ‘경향 돋보기(초창기 한국 천주교회와 한글, 한국어)’에서 “박해 시기의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이는 한국어 교리서를 읽고 공부했을 것이고, 한글을 모르는 이는 한국어 교리서를 읽은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거나 천주가사를 듣고 외면서 복음을 접했을 것이다.”라는 글을 기고한 바 있다.

 

그런데 편집 과정에서 ‘읽은’이 ‘읽으며’로 잘못 인쇄되어 나오게 되었다. 이에 조판 과정상의 오류가 있었음을 독자들께 알려 드리고, 그와 관련하여 한글에 관한 이야기를 몇 자 덧붙이고자 한다. 귀중한 지면을 통해 두 달 동안 독자들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신 「경향잡지」 편집부에 감사를 드린다.

 

글을 쓰고 책을 만들다 보면 이와 같이 누군가의 실수나 착오로 글자가 잘못 인쇄되는 일이 생기곤 한다. 특히 한글은 낱글자를 음절 단위로 모아 쓰는 특성 때문에 글자 모양이 정밀하고 복잡한 편이라 오표기가 나올 가능성도 높다.

 

쉬운 듯하면서도 결코 쉽지만은 않기에 외국인들에게는 더욱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이 글자를 초창기 한국(조선) 천주교회에서 활동했던 유럽인들은 과연 어떻게 공부했을까?

 

비록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지난달 ‘경향 돋보기’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는 독일인 의사 지볼트는 ‘가갸거겨, 나냐너녀’ 식의 자모 조합 표를 자신의 저서(1832년 초판, 1897년 재판)에서 소개했다. 이는 이러한 방식의 한글 공부법이 이미 외국인들에게도 알려져 있었으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지볼트의 책에 나온 자모 순서는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가나다순, 곧 ‘ㄱㄴㄷㄹ, ㅏㅑㅓㅕ’ 순서와 일치한다.

 

그리고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달레 신부는 1874년작 「조선교회사」(「한국 천주교회사」로 번역 출간)에서 한글 모음과 자음을 각각 따로 나열하고 각 자모의 발음을 프랑스어 철자로 표기해 놓았다. 같은 수도회의 프랑스인 리델 신부의 1881년작 「조선어 문법」은 한글 모음과 자음을 각각 따로 나열해 놓은 점에서는 달레 신부의 책과 비슷한 면모를 보이지만 가나다순을 따른 달레 신부와 달리 ‘ㄱㅁㄴㅂㄹㅅㄷㅈㅇㅋㅍㅌㅊㅎ’라는 독특한 자음 순서를 제시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독일인 에카르트 신부는 「조선어 교제 문전」(1923년) 본문에서 한글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한국어 발음을 모두 독일어 철자로만 옮겨 적어 놓았다. 로머 신부는 1927년작 문법서에서 프랑스인 신부들과 비슷하게 한글 자모 낱글자를 나열하고 독일어 철자로 발음을 병기해 두었는데, 모음은 ‘ㅏㅑㅓㅕ’ 순서를 따랐지만 자음은 리델 신부의 문법서와 같은 순서를 따랐다.

 

순교를 무릅쓰고 조선 땅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전했던 유럽인 선교사들은 한글과 한국어를 서방 세계에 알리는 데도 남다른 공을 세운 분들이었다. 그런 만큼 국어학계에서도 이분들의 피와 땀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조원형 보나벤투라 -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사.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와 같은 학과 대학원에서 언어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만하임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상명대학교 강사를 지냈다. [경향잡지, 2019년 11월호, 조원형 보나벤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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