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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19일 (금)부활 제3주간 금요일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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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소곤소곤 교리: 고통

234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10-30

[소곤소곤 교리] 고통

 

 

고통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선물하는 것이라고 인정합니다. 고통이 없으면 우리는 하느님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의지할 무엇을 찾지도 않을테니까요. 이렇게 제 나름대로 고통의 존재 이유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통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이시지만 고통은 분야가 다른 것도 같습니다. 고통과 관련되어 하느님에 대한 제 짧은 이해를 넓힐 수 있도록 설명해 주십시오.

 

반갑습니다. 보내 주신 질문이 심오해서 답이 늦어졌습니다. 어느 누구도 고통을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지혜는 세상이 갖지 못한 것입니다. 다만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 없으며 어떤 것이라고 가정하기조차 그 폭과 깊이가 너무 엄청나다는 사실을 느낄 뿐이지요. 그러기에 ‘신비’로 규정된 하느님의 것이라고 변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자매님이 생각하는 고통의 정의 또한 틀리지 않습니다. ‘고통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 우리는 그 고통을 견디고 그 뒤에 영광을 본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르신 믿음의 여정임에 틀림이 없으니까요. 아울러 책에서 읽었다는 다음과 같은 신부님의 설명도 옳습니다.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은 하느님한테서 온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기도 하신다. 욥 성인이나 프란치스코 성인, 또한 오상의 비오 성인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분들은 하느님께서 고통을 주셔도 오히려 이를 겸허히 받아들여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나는 우리와 같이 나약한 사람들에게는 하느님께서 고통을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만일 하느님께서 앞서 말한 성인들처럼 우리에게 그러한 고통을 주신다면 우리는 모두 다 그 고통 때문에 나자빠지고, 주님을 원망하고 미워할 수도 있다. 또 그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님을 원망하다가 마침내 주님과 멀어질 것이다.”

 

신부님은 신앙의 깊이로만 파악할 수 있는 고통의 신비를 성인들을 예로 들어 이해가 쉽도록 잘 설명해 주십니다. 고통은 개인적인 관점에 따라 다르게 작용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고통이란 직접 당하는 입장과 곁에서 바라보는 입장이 천지 차이로 다르기 마련입니다. 고통을 당하는 쪽의 아픔과 버거움은 본인만이 정확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란 뜻입니다. 때문에 ‘고통은 좋은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처지에서는 순순히 고통을 감사드리는 마음이나 ‘예’라고 순명하는 일이 몹시 거북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얻을 영광’을 생각하라는 권고마저 서운하고 억울하게 들릴 여지가 있습니다. 이렇듯 고통은 개개인의 삶 안에서 충분히 유동적일 수 있다는 점에 유념하여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고통을 기쁨으로 변화시키는 연금술을 익혀 나가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나아가 내 고통에 머물지 않고 이웃의 눈물을 닦아 줄 때 비로소 고통은 서로의 행복을 선물하는 신비의 도구로 변화됩니다.

 

참, 고통이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의 답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데요. 창세기는 인간의 고통이 아담의 원죄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의 삶에서 도출해 내는 답도 수두룩합니다. 성경은 고통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완벽한 표지라는 진리를 선포하는 셈입니다.

 

우리가 이 일도 안되고 저 일도 잘 안된다고 불평불만을 할 때, 그분께서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하고 부르짖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채워야 할 고통의 몫이 있으며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는 삶으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에게 고통을 없애 달라고 청하지 않으셨습니다. 닥쳐온 고난을 거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고통당할 것에 대비하라고 단단히 이르셨습니다. 이에 사도들은 믿음이 고통의 면제 조건이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1베드 1,6; 콜로 1,24 참조). 오히려 굳센 믿음으로 ‘금보다 훨씬 값진’ 고통을 목숨으로 증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임을 환기시킵니다. 그분의 고통을 기억하고 그분께서 언제나 함께하심을 믿는 일이야말로 모든 문제에서 평화를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탁월한 비법인 까닭입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고통이 사라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의 순간에도 주님을 기억하여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여 평화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고통을 넘어 그분의 나라를 희망하는 복된 사람입니다. 그분께서는 헤아릴 수 없이 큰 사랑으로 수고하며 고통에 짓눌린 사람을 부르십니다. 복음을 실천하는 사람이기에 지금 나의 아픔을 그분의 십자가 아래에 봉헌하며 “무겁고 힘겹다.”라고 고백하는 것도 아름답고 훌륭한 믿음의 모습이 되는 까닭입니다.

 

그 때문에 야고보 사도는 우리를 격려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고통을 견디는 인내를 통해서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야고 1,4)이라고 힘을 북돋웁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고통을 다스리는 것은 다른 이야기인지에 대한 자매님의 의문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사막의 성자 샤를 드 푸코 신부님의 글 한 토막을 옮깁니다.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그저 하느님을 믿는 일이며, 이유 모를 고통 앞에서도 묵묵히 하느님을 참아 주고 믿어 주는 일일 것입니다.”

 

* 장재봉 스테파노 - 부산교구 선교사목국장으로 지낸 4년을 주님의 ‘개인 지도’ 기간이었다고 믿는다. 그 배움을 본당 사목에 실천하고자 ‘하느님의 눈’, ‘성모님의 눈’, ‘신자들의 눈’, ‘가난한 이웃의 눈’으로 월평본당을 꾸리려 애쓰는 주임 신부다.

 

[경향잡지, 2019년 10월호, 장재봉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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