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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19일 (금)부활 제3주간 금요일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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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소곤소곤 교리: 죄

2282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8-17

[소곤소곤 교리] 죄

 

 

“신부님의 강론이나 특강에서 죄에 대한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혹시 신자들에게 부담을 주어 냉담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인가요?”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요한 16,9). 보내 주신 글을 읽을 때, 떠오른 성경 구절입니다. 문득 예수님께서 제 허술함을 지적하신 것인가 싶더군요. 그동안 주님의 양 떼를 잘 보살펴 이끌어야 할 사제의 직무를 소홀히 하며 “그들에게 악기를 잘 연주하고 목소리가 아름다운 사람이 부르는 사랑 노래”(에제 33,32) 같은 얘기만 들려주려 했던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죄’가 우리의 인식과 꽤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어졌습니다.

 


이 시대의 죄, 죄에 대한 감각의 상실

 

가톨릭 교회에는 지나칠 만큼 죄를 강조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 반대의 경향도 있습니다. 곧 영벌에 대한 공포를 지나치게 강조했던 지난날의 잘못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하려는 의지가 죄의 관념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낳게 한 셈입니다. 잘못된 양심을 교정해 주고 엄격함을 벗으려는 취지가 오히려 진실을 고백해야 하는 의무마저 말살하는 결과를 초래한 꼴입니다. 오로지 각자의 양심을 존중해야 한다는 쪽으로 치우쳐 있으니, 명백한 진리의 변질이며 왜곡입니다.

 

이 때문에 비오 12세 교황은 “이 시대의 죄는 죄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것이다.”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또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죄에 대한 감각의 상실을 거듭 언급하며 그 원인과 뿌리를 분석한 바 있습니다. 죄에 대한 감각과 윤리적 양심의 기능이 하느님께 대한 감각과 밀접하게 연관된 사실을 부각시킴으로써 바로 오늘 이 시대가 양심과 하느님을 잊은 어두운 시기를 살아가고 있음을 돌아보도록 한 것입니다.

 

 

세속주의의 위험성

 

현대인들이 제대로 복음을 살아 갈 수 없도록 하는 요인 가운데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을 완전히 배제시키는 세속주의의 영향입니다. 세속주의는 하느님을 역사의 현장에서 밀어내고 인간을 세계사의 주인공으로 추켜올립니다. 동시에 죄를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는 행위 정도의 것으로 희석시키고 죄를 언급하는 것마저 거북하게 느끼도록 만듭니다. 특히 인문 과학 분야의 영향이 막강한데, 일부 심리학은 인간이 죄의식을 갖는 것조차 묵살하도록 부추깁니다. 사회학은 모든 인간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사회에 전가시키며 개인의 무고함을 주장합니다. 일부 문화 인류학은 인간의 환경적 요인과 역사적 조건만을 강조하며, 인간다운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조차 지니지 못한 존재로 인간을 추락시킵니다.

 

이렇듯 현대 사회에서는 모든 윤리 규준이 상대화됩니다.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가치는 부인됩니다. 그렇게 죄에 대한 감각을 둔화시킵니다. 결국 죄는 단순히 병적 죄의식으로 간주되거나 법적 기준과 계명의 단순한 위반이라는 가벼운 인식의 흐름을 사회 곳곳에 번지도록 주도합니다. 모두, 상대주의 사상에 바탕을 둔 일부 윤리의 확산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이처럼 죄의 무서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외면한 결과는 모든 피조물의 선이 파괴되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며 죄가 얼마나 큰 윤리적 삶의 재앙인지를 일깨웁니다.

 

 

믿음과 회개

 

흔히 죄를 법과 계명이 ‘하지 마라.’고 금한 것을 ‘어기는 행위’로 여기는 데 반해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요한 16,9)이라고 이르셨습니다. 곧 당신을 먼저 믿어야만 죄를 이겨 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죄를 피하고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더 사랑할 힘을 얻고자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의미일 터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를 때에만 그분처럼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시고 사랑하시지만 그 사랑에서 벗어날 자유 의지도 주십니다. 인간의 악한 속성마저 없애지 않으시고 존중하시되 모든 죄인이 스스로 돌이켜, 화에서 복으로 건너 뛸 의지를 갖기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자유 의지는 하느님의 속 깊은 배려의 선물입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셨던 사울 임금은 자유 의지로 삶을 스스로 끊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1사무 19,23 참조). 주님 공생활의 동반자였던 유다 이스카리옷은 비참한 결말을 향해 치닫는 걸음을 자유 의지로 멈출 수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죄란 구원의 확신이 약한 곳, 바로 마귀의 영역에 자리한 마귀의 소유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로마 6,6)음을 밝힙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은 ‘그리스도의 피’로부터 선사된 하늘의 것임을 선포합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보호 아래 있을 때, 죄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어집니다. ‘죄’는 성령을 거부하는 자신의 ‘옛 본성’일 뿐입니다. 따라서 생명이신 하느님에 대한 화해의 몸짓이 바로 회개임을 깊이 새겨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참회로 새로워지는 삶이야말로 죄 값에 대한 진정한 정답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변치 않는 말씀에 오롯이 의탁하는 믿음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우리의 힘이며 무기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위는 다 죄입니다”(로마 14,23).

 

* 장재봉 스테파노 - 부산교구 선교사목국장으로 지낸 4년을 주님의 ‘개인 지도’ 기간이었다고 믿는다. 그 배움을 본당 사목에 실천하고자 ‘하느님의 눈’, ‘성모님의 눈’, ‘신자들의 눈’, ‘가난한 이웃의 눈’으로 월평본당을 꾸리려 애쓰는 주임 신부다.

 

[경향잡지, 2019년 8월호, 장재봉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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