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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성사]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세례성사

29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3-04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13) 세례성사 ①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가톨릭교회의 신자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받아야 하는 것이 바로 “세례성사”입니다. 그래서 세례성사를 견진성사, 성체성사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입문(入門) 성사라고 합니다.

 

“세례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기초이며, 성령 안에 사는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다른 성사들로 가는 길을 여는 문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교회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그 사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세례는 물로써 그리고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는 성사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13항)

 

세례성사를 표현할 때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바로 “다시 태어나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자신의 탄생을 자기 마음대로 반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성사에 있어서의 “다시 태어남”은 모태(母胎)를 열고 나오는 일이 반복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세례성사에서 말하는 ‘다시 태어남’의 의미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탄생’과 반대되는 ‘죽음’을 먼저 떠올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태초의 인간이 저질렀던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해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하지만, 만일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고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시 태어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고 인간은 결국 죄의 지배하에 놓이는 운명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기에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믿는 이들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다가 함께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성사의 가장 큰 은총은 이처럼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 사람’이 되어 ‘새롭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받은 이들의 삶은 이미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삶이며, ‘지상에서 천국처럼’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3~4) [2018년 12월 30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백석동 협력 사목)]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14) 세례성사 ②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가톨릭교회의 성사들은 그 성사들을 통해 주어지는 은총을 가시적으로 표현해 주는 일종의 재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세례성사에서 그 은총을 드러내주는 재료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물”입니다. ‘세례를 베풀다(Baptize)’는 말의 어원도 그리스어의 ‘βαπτιζω’ 곧, “물에 담그다.” 또는 “잠기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물”은 정결예식에 사용되는 것으로 더러워지고 부정해진 것을 깨끗하게 하는 ‘정화’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레위기 11장, 15장)

 

또한, 창세기 7장에 등장하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 죄에 물든 인간세상을 쓸어버리실 때에 큰 물, 즉 홍수로서 세상의 ‘정의’를 바로 세우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홍해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여주시고, 이집트 병사들은 그 바닷물로 삼켜버리심으로써 더 이상 위협을 받지 않는 ‘해방’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셨습니다.(탈출기 14장)

 

끝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요르단 강을 건넘으로써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선물로 받게 되는데, 이는 곧 하느님 백성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여호수아 1장)

 

그리고 마침내 이러한 세례에 관한 구약의 예표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기에 이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파스카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위해 세례의 샘을 열어 주셨습니다. (…)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 새로운 생명의 성사들인 세례와 성체성사의 예형입니다. 그 때부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25항)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깨끗하게 하셨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새롭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자격을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세례성사 때 이마에 부어지는 물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묻힌 모든 이가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하게 되리라는 약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분명 우리는 세례를 통해 깨끗해졌고,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기회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 오늘, 이 순간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2019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백석동 협력 사목)]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15) 세례성사 ③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세례 받은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불리는 또 다른 이름은 “세례명”입니다.

 

“세례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인간을 성화시키며,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부르는 자기의 이름을 세례 때 받습니다. 그것은 어떤 성인의 이름, 곧 자기의 주님께 모범적으로 충성을 다 바친 한 제자의 이름일 수 있습니다. 수호 성인은 사랑의 모범을 보여 주며 전구를 보장해 줍니다. ‘세례명’은 그리스도교의 신비나 덕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156항)

 

세례명이 지니는 이러한 의미에 따라 세례를 준비하는 예비신자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 자신의 세례명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어떤 세례명이 앞으로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모범과 도움이 될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도, 수많은 성인들의 삶을 다 알 수 없으니 세례명을 선택하는 것이 예비신자들에게 있어서는 막막하고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교리반 봉사자의 ‘추천’에 따라 생일과 비슷한 날짜에 축일을 지내는 성인들의 이름 가운데 하나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례성사 때에 세례명을 붙이기 시작한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3세기 중엽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성인들이나 순교자들의 이름을 붙이는 관례가 있었다는 것과, 4세기 이후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자리 잡게 되면서 신앙과 교의의 의미를 지닌 이름들이 신자들의 이름으로 지어진 기록들이 알려져 있습니다.

 

세례명이 공식적으로 수여된 것은 ‘어린이들의 세례’에서도 ‘어른들의 세례’와 마찬가지의 은총과 덕행이 주어진다는 것을 명확히 밝힌 비엔 공의회(1311~1312)의 결정이 반영된 다음부터이고, 이후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는 세례명으로서 이교도의 이름이나 우상 숭배적인 이름이 아닌 그리스도교식의 이름을 짓도록 강조하였습니다.(참조: 한국가톨릭대사전 7권 “세례명”)

 

이러한 세례명의 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례명을 갖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자신의 신원의식을 분명히 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의 순간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명을 정하는 것이 단순히 특별한 애칭이나 별칭 또는 그럴듯한 영어이름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세례를 준비하는 당사자도, 아이의 세례명을 정하는 부모님들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을 제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모든 사람의 이름은 거룩합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표상입니다.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존엄성의 표시로 존중되어야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158항) [2019년 1월 13일 주님 세례 축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백석동 협력 사목)]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16) 세례성사 ④ “그때에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는 구원을 받으리라.”(사도 2,21)

 

 

‘세례를 받지 않고 세상을 떠난 영혼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영혼의 구원에 있어서 세례성사가 지니는 중요성은 매우 크다는 것을 이미 세례 받은 신자들은 잘 알고 있고, 체험하고 있으며, 그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받지 않고 세상을 떠난 영혼들의 구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를 받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자칫 현세에서 굳이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고, 세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면 세례성사를 알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 의롭게 살았던 사람들조차 구원 받을 수 없다고 단정 짓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구원을 위한 세례성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지 않고 세상을 떠난 영혼들의 구원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또 인간의 궁극 소명도 참으로 하나 곧 신적인 소명이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 파스카 신비에 동참할 가능성을 주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른다고 해도, 진리를 찾고 자신이 아는 대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례의 필요성을 알았더라면 분명히 세례를 받고자 했을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60항)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는 세례성사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의롭고 선한 이들과 회개한 이들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또한 같은 이유로, 세례성사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는 세례 받은 신자들은 더 많은 이들이 세례성사의 은총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가톨릭교회의 신앙과 교리를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세 또는 비상세례라고 하는 예외적 세례 방식 또한 임종을 앞둔 이가 세례성사에 대한 원의(願意)를 가지고 있을 때, 시간의 촉박함으로 인해 그 기회를 얻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교회의 세심한 배려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세(비상세례)는 신중하게 교회와 상의해야 하며, 개인의 판단으로 남용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다만 죽은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이 더 많은 이들에게 주어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모든 성인의 통공’에 힘입어 죽은 이들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 드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특히 미사성제를 드립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055항) [2019년 1월 20일 연중 제2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백석동 협력 사목)]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17) 세례성사 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마태 19,14)

 

 

“(…) 구원의 은총이 완전히 무상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특히 어린이 세례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출생 후 가까운 시일에 아이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는다면, 교회와 부모는 그 아이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무한한 은총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50항)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 은총은 어른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부모들은 세례성사는 아이가 자라서 스스로 종교를 ‘선택’할 수 있을 때가 되면 자녀의 ‘의사’를 존중하여 자녀가 ‘원한다면’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물론 종교의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신앙을 지니고 있는 부모로서 자녀에게 알려주어야 할 종교의 자유는 하느님을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의 자유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 자유는 하느님을 믿고 있음을 떳떳하게 드러내고, 하느님의 은총 속에 머물고 있음을 자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거룩하고 위대한 ‘유산’인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자녀가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을 넘어서서 자녀들이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해나갈 수 있도록 교회와 더불어 ‘신앙양육’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인 것입니다.

 

“세례의 은총이 효력을 내기 위해서는 부모의 도움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대부나 대모의 역할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 · 대모는, 어린이든 어른이든 새로 세례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도록 도와줄 능력과 의향이 있는 견실한 신자라야 합니다. 그들의 임무는 참다운 교회적 의무입니다. 교회 공동체 전체는 세례에서 받은 은총을 키워 주고 지켜 줄 책임이 있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55항)

 

부모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은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은총이란, 부모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얻은 새 생명을 낳고, 키우며, 사랑해 주어야 하는 신성한 의무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세례성사의 은총을 알고 있고, 그 은총 속에 머물고 있는 부모라면 자녀가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반드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 부모는 어린이 세례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생명을 양육하는 역할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51항) [2019년 1월 27일 연중 제3주일(해외 원조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백석동 협력 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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