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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6일 (금)부활 제4주간 금요일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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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풍수원 본당의 학교 운영: 강원 산간 지역의 근대교육

116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3-10

풍수원 본당의 학교 운영


- 강원 산간 지역의 근대교육 -*

 

 

국문초록

 

풍수원 본당은 강원도 횡성군에 자리잡고 있으며 1888년에 설립되었다. 강원도에 천주교신자들이 살게 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와 관련이 있다. 신유박해로 인하여 강원도 여러 지역으로 귀양을 오거나 박해를 피해 깊은 산이 많은 강원도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풍수원(豐水院)은 최양업 신부의 후손들이 모여살기도 하였다. 초대 주임신부인 르 메르 신부가 10년간 사목하였고, 2대 주임신부인 정규하 신부가 47년간 사목하였다. 정규하 신부는 1896년부터 1943년까지 47년간 풍수원에서 사목활동을 하였으며 그곳에서 선종하였다. 정규하 신부가 사목하던 시기는 한국근대사에서 격변기이다. 이 시기에 우리의 근대교육이 시작되었다. 근대교육은 식민지 지배 하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변화하였다. 풍수원 본당에서 운영한 학교도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있었으나 그 명맥을 60여년간 지켰다. 본고는 풍수원 본당에서 운영한 학교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그러나 자료가 매우 부족하여 같은 강원도 내의 성당인 이천(伊川)에 있던 두 개의 본당 즉 망답(望踏) 본당과 포내(浦內) 본당에서 운영하였던 학교와 관련된 자료를 비교하면서 고찰하였다.

 

강원도 이천의 망답 본당은 1883년에, 포내 본당은 1896년에 설립되었다. 두 곳에는 선교사 신부들이 부임하여 학교 설립에 적극적이었다. 이 지역의 신자들 역시 학교 설립에 적극적이어서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거나 교사를 초빙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 통감부에서 요구하는 기준에도 부합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그들이 뮈텔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본당에서 운영한 학교는 〈경향신문〉에도 실렸다. 그러나 식민통치를 받게 되면서 이천지역의 많은 신자들이 간도로 이민(移民)을 가, 인구가 감소하면서 학교 운영에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이들 학교는 1920년대에는 폐교된 것으로 확인된다.

 

정규하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서한은 약 400통에 이른다. 그 편지들 가운데 학교와 관련된 내용은 2~3편에 불과하다. 그리고 풍수원 본당에서 운영한 학교에 관한 기록은 〈경향신문〉에도 실리지 않았다. 다만 조카인 정원진(루카) 신부가 증언한 바에 의해 학교 이름이 ‘삼위(三爲)학당’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학교에서는 금서(禁書)로 지정된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를 가르쳤다고 한다. 일제의 감시를 받던 상황에서 행해진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 발각되어 담당교사는 징역을 살아야 했다. 정규하 신부는 이 사건에 관해 뮈텔 주교에게 보고하였다. 삼위학당은 1931년에 ‘성심(聖心)학원’으로 개칭하여 4년제로 인가받았다.

 

이후 정규하 신부가 1943년에 은퇴하자 2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김학용(시몬) 신부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6년제의 ‘광동(光東)국민학교’로 개칭하여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시작된 농촌의 이농(離農) 현상으로 인구가 감소되어 1971년 횡성군의 공립학교로 설립자를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2년에 설립자 변경 이양식을 거행하였다. ‘광동국민학교’라는 교명을 유지하였으나 공립학교로 운영되었고, 학생수가 계속 감소하여 1982년에는 공립인 유현국민학교의 ‘광동분교’로 격하되었다가 1995년에 끝내 폐교되어 역사 속에 남게 되었다. 풍수원 본당이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학교를 운영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니던 신자 자녀들은 이곳을 졸업하고 남학생들은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으며, 여학생들은 수녀원에 들어가 수도자의 길을 걸었다. 광동학교는 춘천교구와 원주교의 성소(聖召) 못자리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학교는 1965년 원주교구가 설립된 이후에는 교구에서 ‘진광(眞光)중학교’를 운영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매우 크다.

 

 

Ⅰ. 머리말

 

강원도 횡성군의 풍수원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직후 용인에 살던 신태보(베드로)가 순교자의 가족들을 이끌고 강원도로 왔다는 기록에 의해서 하나의 시점으로 이해하고 있다. 신태보는 4가구 40여 명을 이끌고 강원도에 와서 살다가 다시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으로 가서 살았다. 용인에서 온 신태보는 아마도 물길에 의지해서 왔다면 양수리를 거쳐 여주와 이천의 섬강을 따라서 풍수원 쪽으로 왔을 수 있다.

 

한편 《사학징의》에 의하면 황사영의 백서(帛書)를 북경에 전하기로 되어있던 황심(黃沁)이 춘천의 북산에 피신해 있다가 잡혔다고 하고, 춘천부 감옥에 수감되었다고 밝히고 있다.1) 황심은 가족을 이끌고 춘천 북산에 피난왔는데, 춘천의 북산은 춘천의 북쪽 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그곳에는 1801년 이전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유박해 당시 강원도로 유배왔던 사람들은 강릉, 이천(伊川), 양양, 고성, 횡성, 통천, 회양, 인제, 양구, 김화, 낭천(狼川, 화천), 평창 등지 인데 전주의 사도인 유항검과 관련된 사람들이 많다.

 

조선시대의 풍수원은 조선시대의 원(院)이 설치되어 있던 곳으로 깊은 산속이기는 하나 교통이 나쁘지는 않았다. 풍수원은 강원도의 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다. 강원도 영서에서 영동지역으로 이동하는 루트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박해를 피해 교우촌을 형성하고 옹기장수 등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동하는 데에도 불편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이 논문에서 함께 살펴볼 이천(伊川)은 강원도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북한 지역에 있으며 ‘침묵의 교회’로 남아있다. 이천에 언제 천주교가 전래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신유박해 이후 황차돌(黃次乭)이 이천으로 유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천은 황해도와 이웃해 있으며, 안변 등 함경도로 접근하는데 편리하다.

 

이천의 본당과 풍수원 본당은 역사가 오래인 만큼 성직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강원도가 산지(山地)가 많아 인구밀도가 높지 않고, 경제 수준도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지역은 천주교 신자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많고 신앙활동도 활발하였다. 이천에는 두 개의 본당이 19세기 말에 세워졌고, 풍수원도 행정적으로는 작은 곳이기는 하나 이미 본당이 1888년에 설립되었다.

 

이 글의 목적은 풍수원 본당이 근대시기에 학교를 운영한 것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나 자료가 부족하여 같은 강원도에 설립되었던 이천의 2개 본당과 비교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풍수원 본당이 학교를 운영한 것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으나, 그와 관련된 자료는 많지 않다. 반면에 강원도 이천의 본당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학교와 관련된 자료는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주임사제로 사목활동을 하면서 당시 조선대목구장인 뮈텔 주교에게 보고한 서한들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Ⅱ. 개항 · 일제강점기 강원 지역 본당의 학교 운영

- 이천(伊川) 망답(望踏) 본당과 포내(浦內) 본당의 사례

 

개항 이후 근대의 학교 설립 및 운영에 관해서 역사적으로 간략하게 살펴보면 천주교회와 관련이 깊다. 천주교회에서는 일반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에서 1865년에 교육 기관을 설치한 바 있었다. 황해도 신천(信川) 출신인 이덕보(李德甫, 마테오)는 조선대목구장인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의 부름을 받아 서울로 와서 청소년 교육을 위한 학교 설립이라는 어려운 일을 맡았다. 달레에 의하면 “그는 짧은 시일 안에 청소년 12명을 모아 과학과 인문을 가르치고, 교리학습과 종교의무 실천으로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단련하였다”고2) 한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로 말미암아 베르뇌 주교가 순교하여 곧 폐교되었다. 이후 1882년에 블랑(J. Blanc, 白圭三) 신부가 서울 종현 본당(명동) 관할 하에 인현(仁峴)서당3)을 세워 11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1886년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조불(朝佛)조약을 체결하기 전에 공식적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 학교의 명칭이 “서당”으로 되어 있지만 프랑스어 표기는 college로 되어 있다. 그런데 “학교”라는 명칭이 법제적 용어로 확정된 것은 1895년이었다. 그 이전 학교를 나타내는 용어로는 서당, 학당, 의숙, 학원, 학사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4)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근대화에 대한 의욕이 팽배해진 가운데, 이듬해인 1895년에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였다. 또 ‘소학교령(小學校令)’을 위시하여 여러 법규를 제정, 공포함으로써 근대적 교육 활동의 법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5) 《구한국관보(舊韓國官報)》 1895년 7월 22일자 칙령 ‘소학교령’에 의하면 수업연한은 3년이고, 교육 내용으로는 일반적으로 수신(修身) · 독서 · 작문 · 습자(習字) · 산술 · 체조와 한국지리 · 한국역사 · 도화(미술)가 있었다. 이러한 국가적 사회적 요구와 더불어 천주교회도 1900년을 전후하여 각지에서 학교를 설립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던 학교의 재정 상태는 대부분 어려움을 겪었다. 대체적으로 1900년대 초까지 천주교회에서 운영한 학교는 본당 신부인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가 설립하였다. 이때 학교 설립에 필요한 재정은 프랑스의 선교 단체나 모금 단체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1905년 정교(政敎)분리 정책으로 프랑스 교회가 극심한 피해를 입으면서 프랑스로부터 오던 선교자금이 대폭 삭감되자, 파리외방전교회 독자적으로 교육 사업을 전담할 수 없게 되었다.6) 한국인 사제가 주임신부로 있는 본당들은 학교를 운영하는 데 더 많은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에 일반적으로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여 국권을 수호할 목적으로 교육열이 매우 높았다. 학교 설립 취지는 대체로 애국애인(愛國愛人)으로, 교육사업의 목적에는 민족을 위한 구국운동의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1905년 11월 22일에 ‘통감부 및 이사청 설치에 관한 칙령 240호’를 발포하였다. 이후 통감은 외교에 관한 사항만 관리한다고 을사조약에 명시되었지만, 일본은 을사조약 이전에 한일 양국 간에 체결된 기존의 조약은 을사조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유효하다는 조약 내용에 근거하여 외교 이외에도 종래의 양국 간의 조약 시행을 담임할 수 있다는 해석을 제시하여 통감의 직권 확장을 도모하였다.

 

일본은 헤이그 밀사 파견으로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고종의 퇴위를 단행했다. 1907년 7월 19일에 고종의 황태자 대리 조칙이 발표되었고, 일제는 7월 20일에 양위식을 진행하여 대리가 아닌 양위로 몰아갔다. 이와 함께 고종과 순종의 격리, 병력의 증강 등을 통해 정국의 경색을 가져왔고, 7월 24일에는 제3차 한일협약, 이른바 정미7조약의 체결을 강요했다. 정미7조약은 제1조에서 “한국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해 통감의 지도를 받는다”고 규정하여 통감의 내정 관여를 공식화했다. 또한 행정상 처분도 통감의 승인이 필요하도록 하였으며, 한국의 고등관리 임명 동의권 등을 통감에게 부여하여, 한국 내정의 최고 감독권자로 부각시켰다. 또한 고문 통치를 대신하여, 일본인을 직접 관리로 임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군대를 해산하고 국권을 순차적으로 해체시키는 데 합의하였다. 경찰권과 함께 사법권·행정권·군사권의 장악을 도모한 것이다. 통감부는 고종 폐위와 정미7조약 체결 등에 일본군부의 지원하에 활동하던 일진회를 이용하였으나, 의병 항쟁 등 전국적인 반일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천주교회들은 ‘보통학교령’에 의해서 서당에서 근대적인 학교를 설립하여 한문 위주의 수업에서 벗어나 다양한 과목을 개설하였다. 1906년에 창간한 경향신문의 기사 내용에 의하면 전국에서 자발적인 사립학교들을 세워서 교육을 통한 구국(救國)을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지방은 여러 곳에서 일제 통감부의 정치에 의해서 강제로 각종 제도가 변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예를 들면 대대적으로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였는데, 토지정리사업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유지를 정리하였으며, 삼림법(森林法)이나 어업법을 실시하였다. 호세(戶稅)와 지세(地稅)를 징수당하였다.

 

강원도 이천(伊川) 본당은 1883년 4월에 설립되었다.7) 이천은 황해도 신계 지방과 접해있는 험준한 지대이다. 이 때문에 1866년 병인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피난처를 구해 이곳으로 들어왔다. 1883년 4월 드게트(Deguette, 崔東鎭) 신부가 이천 섭골(섭가지)에 거주하면서 강원도 동북 지역과 함경도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였다. 뒤테르트르(Dutertre, 姜良) 신부는 1892년 5월 이천 본당에 부임하였다. 뒤테르트르 신부의 1893년 보고에 의하면 이미 이천 본당 3곳의 공소에 신자들이 운영하는 서당형태의 학교가 있었다.8) 뒤테르트르 신부는 이천 염산리에 성당을 신축하여 1894년 8월 15일에 첫미사를 드렸다. 차츰 입교자 수가 증가하여 교세가 확장되었다. 이에 1896년에 같은 이천 관내인 포내(浦內)에 본당을 분할하였다. 이천군 2곳에 본당이 설립된 것이다. 포내 본당은 관할 구역이 이천의 공소보다 황해도 신계, 수안 등에 공소가 더 많았다. 뒤테르트르 신부는 1898~1899년도 연말보고서에서 1899년에 학교를 지었다고 보고하였다.9) 염산리에 있던 이천 본당이 교장이 있는 학교를 운영하였다는 것은 사제와 신자들의 교육에 관한 열망이 표출된 것이었다.

 

1906년 당시 이천 본당(염산리)의 루케트 신부와 포내 본당의 부이수 신부는 이천에 학교를 세우는 문제를 가지고 많은 의견을 나눈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당시 이천에는 개신교에서 세운 학교가 이미 3개 있었고, 이천 군수는 한 개의 학교를 더 세우고 싶어하였으며, 신자들은 천주교회 학교를 세울 것을 원했다. 이천에 본당이 2곳이니 두 사제는 계속 협의를 해 나갔다. 이천 염산리의 루케트 신부는 자신이 이천 포내의 부이수 신부와 학교 문제를 계속 협의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부이수 신부와 저는 학교 문제가 매우 시급하다고 생각해 염산리에 학교를 세울 수 없다면 제가 직접 망답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염산리를 떠날 수 밖에 없을 것이지만 주교님께서 판단하시는 대로 충고와 지시는 물론이고 가장 소박한 의견까지 기꺼이 따르겠습니다.”10)

 

이에 뮈텔 주교는 학교를 세우는 문제에 관하여 좀 더 신중할 것을 권하는 답장을 보냈다. “학교 설립은 필요하지만 시급한 사안은 아니며, 불행한 일은 새로운 조류에 따라 새로운 교육만을 하려하면 많은 혼란을 야기한다”고11) 걱정하고 있다. 이어서 “우리도 새로운 흐름을 따라야겠지만 그렇게 따라가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따라오는 단점들도 있어 무엇이 되었든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망답이나 다른 곳에서 비신자들의 자금을 끌어들여 학교는 짓겠다는 것은 대단히 경계해야 한다”12)고 주의를 주고 있다.

 

루케트 신부가 뮈텔 주교와 주고 받은 편지에서 당시 학교 설립과 관련된 상황이나 문제가 무엇인지 드러나 있다. 즉 재정문제였다. 특히 비신자들의 자금을 사용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교사를 초빙하는 것도 어려움이 많았다.

 

드게트 신부가 학교를 설립하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포내 본당의 부이수 신부는 본당 안에 학교를 세웠다. 1907년 포내 본당 안에 삼애학교(三愛學校)를 설립하였고 이 사실이 〈경향신문〉에 실렸다. 이천 염산리에 있던 루케트 신부는 1908년에 망답(望踏)으로 이사하였다.13)

 

A-1) 지난 피정 때 주교님과 합의한 대로 금년(1908년) 6월 저는 망답으로 ‘이사’를 했고 10월초 학교 문을 열었습니다. 지금까지 학교는 매우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학생 수가 51명인데, 5~6명은 비신자입니다. 앞으로 비신자 학생들이 더 많아지리라 생각합니다. 교사는 기산(箕山)14)에서 영세를 받은 신자인데 과학 과목이 좀 약하지만 다른 과목들은 잘 가르치고 있고 여러 면에서 매우 흡족합니다. 망답에 거주하기 위해 토지와 가옥을 230엔에 구입했고, 그곳에 성당과 학교를 지었습니다. 염산리의 신자들을 위로하고자 그곳으로 가서 성탄 축일을 지냈고, 겨울 사목활동을 펼쳤습니다.15)

 

위 A-1)에 의하면 드게트 신부는 1908년 6월에 개하리(開下里) 망답으로 성당을 이전하고 10월에 학교를 개교했다고 서한을 보내고, 학교 설립허가를 받기 위해 필요한 절차를 받으려고 한다고 보고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당시 일제 통감부는 1908년 8월 26일에 ‘사립학교령’을 공포하였다. ‘사립학교령’은 사립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 필요한 전문 15개 조항과 부칙 2개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립학교를 설립할 때는 학부(學部, 지금의 교육부에 해당)의 승인을 얻도록 규정하였다. 또 성향이 불량한 자를 교사로 임용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으며, 교과서 가운데 통감부의 시책에 맞지 않는 것을 사용하지 않도록 규정하였다. 또 종교학교 운영자 중 통감부에 반감을 가진 자가 있다고 경고하는 규정도 명시하였다.16)

 

뮈텔 주교의 1909년 2월 22일자 일기에 의하면 주교가 직접 학부(學部)로 가서 관리를 만났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학교 인가를 신청하는데 신청 서류 사본 한 통이면 충분하지 만, 그것을 군수(郡守)를 통해서 내야 하는데 만일 군수가 이유없이 그 서류를 접수하거나 이송하는 것을 거부할 경우에는 거절하는 설명서와 함께 신청 서류를 직접 학부로 보낼 수 있다고 확인도 받았다고 하였다.17) 이천의 2개 학교만 인가를 받았다고 했다.18) 뮈텔 주교가 학부에 직접 가서 담당 관리를 만나고 학교 인가신청에 관한 절차를 자세히 알아본 것은 각 본당 사제들이 문의를 하였기 때문이다.

 

망답 본당의 학생수는 51명이라고 하는데, 시골본당의 학생 수로는 많은 숫자이다. 그러나 당시의 추세와 관련하여 비신자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드게트 신부는 이것도 선교를 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보고 있다. 한편 망답 본당 관할 하에 있던 평강(平康)의 두 공소 즉 기산(箕山) 공소와 솔모루 공소도 학교를 세웠으며, 인가를 받기 위해 절차를 밟았다. 평강학교는 신자들이 설립 자금을 모아서 학교를 세웠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려움에 봉착하였다.19) 기산공소에 학교를 세우기 위해서 모금에 참여했던 신자들은 평강 군수에게 시달림을 당하고 있었다. 당시의 〈경향신문〉에 의하면 각 지방 군수들이 국가에서 정한 세금 외에 각종 세금을 부담시켜 원성이 높았다.

 

망답 본당의 루케트 신부는 장학관의 시찰에 대비해서 뮈텔 주교에게 자문를 구하고 부탁을 하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번 겨울에 학부 관리가 저희 학교로 시찰을 나온다고 합니다. 장학관의 시찰 평가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데 교사들은 장학관이 시찰 나올 때에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를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학관 시찰에 대비하도록 만들어진 책자를 서울에서 구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만일 서울에서 그 책을 구할 수 있다면 저희에게 그 책을 보내주실 것을 주교님께 부탁드리는 것이 결례가 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주교님께서 그 책을 구하시면 “명의학교”20)로 보내주십시오.”21)라고 하였다.

 

서한을 통해서 망답 본당에서 설립한 학교 이름이 ‘명의학교(明義學校)’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명의학교는 개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교사 문제로 일시적으로 문을 닫았다. 당시에 ‘교사’ 문제는 매우 심각하였다. ‘사립학교령’에 의해 자격을 갖춘 교사를 채용해야 하는 문제였다. 이를 어길 시에는 인가를 취소당하였다. 따라서 뮈텔 주교도 교사를 확보하는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으며22) 사범학교를 설립하려고 하였다.

 

평강의 기산 공소에 세운 기산학교는 재정도 크게 어렵지 않고 신자 학생 수가 많아 학교 운영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다. 그런데 군수가 이 학교를 공립학교로 전환하겠다는 통보를 해왔다는 것이다. 당시 천주교회에서 학교를 운영하는 문제는 재정, 교사 문제 뿐 아니라 군수 등의 관리와도 마찰을 겪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어려움에 관해서 드게트 신부가 서한을 보내 보고하였다.23) 결국 평강 기산공소의 학교는 일반학교로 넘어가게 되었다. “학교에 관해 말씀드리자면 망답학교24) 한 곳만 남고 나머지 학교들은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기산학교는 일반학교가 되었습니다. 기산학교와 일반 학교의 통합은 불필요하니 통합시키지말라고 했지만 신자들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일반학교와 통합하지 않은 학교는 지금까지 천주교 학교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요? 2년 동안 간신히 버텨오던 솔모루학교의 신자들은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솔모루학교는 일반학교와 통합되었고 관청의 관할로 넘어갔습니다.”25)

 

결국 평강의 두 학교는 공립학교로 전환된 것이다. 전환되었다기 보다 군수의 강요에 견디지 못하고 재정과 교사난으로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망답본당의 사제나 신자들은 자격을 갖춘 교사를 초빙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성취하지 못하였다. 자격을 갖춘 교사들은 공립학교나 도시의 사립학교에 가려고 원했을 뿐이었다.

 

포내 본당은 1896년 이천 본당(염산리)의 뒤테르트르 신부가 분할하여 설립한 본당이다. 강원도 이천군 낙양면 삼포리(三浦里)에 있었다. 관할 구역은 이천군 낙양면 2개 공소와 지리적으로 인접한 황해도 동북부의 신계(新溪), 곡산(谷山), 수안(遂安) 등지의 13개 공소가 있다. 부이수 신부는 1907년 포내에 삼애(三愛)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08년 황해도 수안군(遂安郡)에서 가장 큰 공소인 사창(社倉) 공소에 학교를 세웠는데 숭희학교(崇熙學校)이다. 숭희학교는 신자들이 2천냥을 모금하여 학교 설립기금으로 적립하였다. 재정을 절약하기 위하여 학교 건물은 신축하지 않고 사창공소 강당을 빌려 사용하였으며, 교장은 수안 군수를 추대하였다.26)

 

A-2) 학교를 설립하려고 하는 루케트 신부의 신자들로부터 자극을 받은 저의 신자들은 주교님께서 보내주신 답신에 고무되어 저희도 학교를 설립하고자 필요한 자금 3만냥을 모았습니다. 저는 신자들에게 제가 들어가 살 집을 마련해 주면 제 거처를 학교부지로 내놓겠다고 말했더니 신자들은 벌써 제 거처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오늘은 신자들이 저를 찾아와 교사를 구해 달라는 편지를 주교님께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꺼이 주교님께 보내는 편지를 그들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들은 학교를 설립하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관의 인가를 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인가를 받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합니다.27)

 

A-3) 텬쥬교에셔 학교 셜시: 강원도 이쳔군 락양면 샹포 텬주교에셔 음력 삼월초오일 학교 셜립엿 학원은 팔십여명이오 교과 한문과 일어요 한문교 김병집씨요 일어교 윤병두씨요 학교일홈은 삼학교(三愛學校)ㅣ니 텬쥬 랑과 나나할 랑과 사을 랑이란 이오 그교들이 열심히 교슈다더라28)

 

A-4) 신자들이 제 사제관에 세운 학교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신자들은 누구를 학교장으로 뽑아야 하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학교가 교회에 속한 것이므로 학교장은 주교님이나 신부 혹은 신자가 되어야겠지요? 학생 수는 벌써 53명이나 되고, 그중 2명은 비신자입니다. 비신자가 많이 오더라도 돌려보내지 않고 이들을 포용하며 좋은 선례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비신자 학생들이 기숙사비로 내야 하는 돈 100냥은 조금 비싸지 않을지요? 개신교도 자제가 입학하기를 원하면 비신자 자제들처럼 입학을 허용해야 하는지 아니면 거부해야 하는지요? 개신교도 자제 한 명이 입학 의사를 밝혀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희 학교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교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 근무하는 교사는 다른 지방 학교의 교사들처럼 휴가를 요구하며 그 기간에 서울을 가겠다고 휴가비를 선불해 달라고 해서 저는 거절했습니다. 그 교사는 다른 지방 학교에서는 다들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하며 퇴직할 때는 퇴직금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와 같은 교사는 찾기가 쉽지 않아 애석할 뿐입니다. 학생들은 교사에게 일본어 · 세계사 · 조선 역사 · 지리 · 산수 · 체육과 교리를 배웠습니다.29)

 

A-5) 저의 사제관에 마련된 학교는 다시 문을 열 것입니다. 신자 한 사람이 르 메르 신부의 신학생을 데려올 수 있다고 생각하여 평양까지 갔는데 그 교사를 데리고 올 수 없게 되자 그의 옛 친구인 성실한 비신자에게 가서 교사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정규 교사를 찾게 될 때까지 이 젊은이가 임시교사로 근무하게 될 것이지만 언제 정규교사를 구하게 될지요?30)

 

A-6) 마을의 학교는 힘든 점도 있지만 아주 조금씩 좋아져 가고 있고, 가장 큰 문제는 훌륭한 교사를 찾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지금 근무하는 교사는 훌륭한 젊은이로서 천주교 신자가 되고자 준비하고 있으며 학생들도 그 교사에게 만족해하고 마을 사람들도 그에 대해 좋게 말을 하는데 단지 수학을 잘 가르치지 못하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 수안의 사창 공소 신자들은 돈이 얼마가 들던지 학교를 세우길 원하여 벌써 학교 기초 공사를 시작했으며 이미 30여명의 학생들을 모집했고 돈도 2~3천냥 정도를 모았습니다. ... 신자들은 지난 해 포내(浦內) 학교를 짓기 위해 내기로 약속했던 돈을 내지 않으려 하고, 돈을 낸 사람은 돈을 냈다는 영수증을 받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포내 학교는 유지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수안의 사창 공소학교와 포내의 학교를 하나의 학교로 통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수안과 사창에 있는 두 채의 학교 건물은 이른바 학교의 부속 건물이 될 것입니다. 이 일의 실행이 불가능한 것일까요?31)

 

A-7) 포내(浦內) 학교에 관해 말씀드리자면, 아무도 진지하게 포내 학교에 관해 걱정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 생각에 포내 학교는 오래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재정난(財政難)으로 파산하거나 관(官)에서 빼앗아 갈 것입니다.......(하략)...32)

 

위의 A-2) ~ A-7)까지의 자료는 부이수 신부가 학교 운영 상황와 어려움에 관하여 보낸 서한이다. 주료 포내의 삼애학교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같은 본당 관할 하의 학교나 황해도 신계에 세운 숭희학교는 운영하는 데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부이수 신부가 포내 본당 안에 세운 삼애학교(三愛學校)는 교명(校名)에서도 알수 있는 바와 같이, 애주(愛主) 애국(愛國) 애인(愛人)하는 것은 가톨릭이 지향하는 가치관과 함께 근대시기에 있어서 계몽적인 것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서한을 통해서 교회학교가 안고 있는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학교 설립에 필요한 재정은 신자들이 모금을 약정하였는데,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것과, 사립학교를 ‘관’에 빼앗길 수 있다는 부이수 신부의 염려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결국 이 학교들은 오래지 않아 폐교되거나 공립학교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았다.33)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위 두 본당의 선교사 신부들은 학교 설립과 관련 하여 매우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천지역의 신자들은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 사제들에게 적극적으로 건의하고 자신들은 기금을 모았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도 1905년 통감정치가 시행됨에 따라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통감부에서 사립학교를 억제하기 위해서 인가를 까다롭게 하였으며 각종 규제 장치를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선교사의 서한을 통해서 1905년 이후 일제가 한국의 학교에 어떻게 간섭하고 통제하려고 하였는가를 엿볼 수 있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에는 더욱 노골적으로 간섭하고 탄압하였다. 특히 교과서 문제로 트집을 잡았다. 결국 이들 학교 역시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폐교되거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공립학교로 강제로 전환되어야만 했다. 선교사들은 종종 이천이나 평강 지역의 신자수가 감소되는 것을 우려하였다. 이들 지역의 사람들이 간도로 이민을 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관의 횡포도 있었으나 인구의 감소로 학교 운영에 더 어려움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Ⅲ. 횡성(橫城) 풍수원(豊水院) 본당의 학교 운영

 

횡성의 풍수원은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용인에 살던 신태보(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피난하면서 강원도 지역으로 이주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횡성의 풍수원을 찾았을 것이다. 또한 1866년 병인박해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천주교 신도들이 피난처로 삼아 모여 살던 곳이다. 1886년 조불조약 체결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자 1888년 조선 대목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신부를 파견하여 풍수원에 본당을 창설하게 하였다. 설립 당시 관할 지역은 춘천, 원주, 화천, 양구, 홍천, 횡성, 평창 등 강원도와 경기로 일부를 포함하였다. 르 메르 신부는 초가집 초가 20여 칸을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그는 풍수원에서 분할된 원주 본당[현재의 원동 본당]의 초대신부로 전임되었다.

 

1896년에 부임한 2대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1896~1943) 신부는 풍수원 본당에서 47년간 사목하였으며, 그의 처음 임지이자 마지막 임지였다. 1907년 중국인 기술자와 모든 신도들이 공사에 참여하여 현재의 교회를 완공하였다. 한국인 신부가 지은 한국 최초의 성당이고, 한국에서 네 번째로 지어진 서양식 성당이다. 풍수원 본당의 학교 운영에 관해서는 정규하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고한 서한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원주 본당을 분할한 후 풍수원 본당 관할구역은 춘천, 화천, 인제, 평창, 홍천, 양구 등지로 매우 넓은 지역이었다. 본당 주임신부가 한 차례 순방하려면 3개월 정도 걸렸다.

 

정규하 신부가 보낸 서한은 여러 가지 어려웠던 정치적인 상황, 사회적인 문제, 경제적인 어려움 등을 담담하게 보고하고 있다. 앞서 이천 본당과 포내 본당의 서한집이 학교 설립과 관련되어 보고하였다면, 정규하 신부는 자신의 관할 지역 상황이나 신자들이 겪는 고초, 어려움 등을 보고하였다. 1894년 이후의 동학농민운동으로 발생한 일본 헌병과 동학에 가담했던 농민들이 쫒고 쫒기면서 발생하는 폐해, 1907년 정미(丁未)7조약으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일본 통감부는 정치적 압박을 가해오고 있는 상황, 이에 반발해서 일어난 의병(義兵)들에게 피해를 입은 상황들을 보고 들은 대로 보고하였다.34)

 

이에 앞서 1900년 8월에 보고한 서한에서는 국내외 안팎으로 뒤숭숭한 정세 변화에 관해서 “중국 왕조에 이어서 한국 왕조도 없어질 것 같습니다.”라고35) 보고하였다. 이러한 비관적인 판단을 하면서 어려운 환경에서 성당을 새로 짓는 일을 준비하였다. “새 성당을 짓고 싶지만 금년에는 돈이 없어서 못하겠습니다.”36) “저희 신자들은 새 성전 짓기를 원해서 대략 엽전 만오천량 정도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 총액으로는 새성전을 짓기에 충분치 못해서 아직 시작할 엄두를 못내고 있습니다만 신자들은 새성전을 시작하라고 끊임없이 성화입니다.”라고37) 성당 건축의 시급함을 전하고 있다.

 

앞의 이천 지역 본당의 학교 운영에 관해서 살펴본 바와 같이 1895년 이래 근대 제도는 격변하였다. 1895년의 개혁도 친일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직 제도 개혁과 근대화에 대한 열망도 반영하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1905년의 을사조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되고 통감에 의한 내정 간섭적인 정책들이 공포(公布)되면서 대한제국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통감부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이 교육정책을 통해서 한국민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국권 상실 뒤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과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에서도 소학교를 보통학교라고 부르다가,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에서 보통학교를 다시 소학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교육 목적은 아동 신체의 건전한 발달에 유의하여 국민 도덕을 함양하고 국민생활에 필수적인 보통 지능을 얻게 함으로써 충실하고 선량한 황국신민을 만든다는데 두었다. 당시는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이 극에 달하여, 초등교육에서부터 우리의 민족정신을 없애고 일본화하려는 데 목표를 두었다. 그 당시 개편한 소학교에는 6년제 심상소학교와 2년제 고등소학교를 두었다. 다만 심상소학교는 당분간 4년으로 설치하도록 하였으며, 고등소학교는 3년으로 연장할 수 있었는데, 고등소학교는 제도적인 것일 뿐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심상소학교의 교과목은 수신 · 일본어 · 산술 · 국사 · 지리 · 이과 · 직업 · 도화 · 수공 · 창가 · 체조 등이었으며, 여학생을 위하여 가사와 재봉과목을 더할 수 있었다. 국어는 정규과목에서 제외되고 수의과목(隨意科目)으로 하였으나 과하지 않도록 권장하였으므로 실제로 없앤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등소학교는 심상소학교의 교과목 외에 기타 지역의 상황에 따라 필요한 교과목을 과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식민통치를 받게 된 이후 1938년 다시 소학교로 명칭이 개편되었다가 1941년에 국민학교로 바뀌었다. 풍수원 본당에서 운영하던 학교는 이러한 우리 근대사의 질곡 안에서 명맥을 유지하며 존재해왔다.

 

풍수원 본당에서 운영한 학교는 삼위학당38), 성심학원, 광동(光東)학교로 이름이 바뀌면서 변천하였다. 자료에 의하면 1909년부터 학교 운영과 관련한 자료를 볼 수 있는데, 식민통치 아래에서도 버티던 학교에 관한 문서자료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회고 등의 구전(口傳)에 의한 자료에 의존하여 풍수원 본당의 학교 운영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볼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정규하 신부가 본당 학교 운영과 관련해서 서한에서 언급한 것은 1908년부터 확인된다.

 

B-1) 주교님의 노심초사와 사목적 배려로 불초자에게, 학교들의 승인 신청서를 학부 대신에게 내보라고 격려해주시니 깊이 감사드립니다. 공무원의 중재를 통해서 대신으로부터 승인 신청서를 얻도록 앞으로 관심을 갖겠습니다. 저의 집에는 학동들이 21명 있는데, 아주 무식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고 게다가 그들을 부양할 필수품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공경하올 주교님, 주교님 편지에서 여건이 갖추어지면 학교 설립의 인가를 신청하라고 하셨는데, 교육 여건이 못갖추어져도, 학교라 할 수 있는지요? 왜냐하면 제 집에 마땅한 선생이라든가, 건물이나, 학교를 유지할 자금 등등의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계속 운영할 수 있을런지 걱정이 되옵니다. 어디선가 시골글방은 정식 학교가 아니라는 말도 들었습니다.39)

 

위의 서한 내용을 보면 이미 정규하 신부는 학동들 21명을 모아놓고 교육을 하고 있던 상황이다. 앞의 이천의 루케트 신부의 서한에서 보듯이 뮈텔 주교는 교회 안에 학교를 설립하는 문제로 절차와 규정에 관해서 알아보고 있었다. 이러한 내용을 정규하 신부에게도 알려준 것이다. 정규하 신부는 자신은 이미 학동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21명이나 된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뮈텔 주교가 알려준 학부에 서류를 제출하여 인가를 받아야 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질문하고 있다. 이 서한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혹시 학교운영의 여건이 인가를 받는데 적절하지 않을 것을 이유로 일제의 인가 기준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은 아닌가 한다. 후술하겠지만 풍수원 본당에서 운영하던 학교에서 《월남망국사》를 교재로 사용했다가 발각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정규하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는 동학과 관련된 신자들의 피해, 정미7조약을 때문에 일어난 의병들의 문제로 일본군병과 의병 양쪽으로부터 받는 피해에 관해 보고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선교사들의 서한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다. 그가 한국인 사제였기 때문에 당시에 겪은 상황은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뮈텔 주교의 서한에 대해 정규하 신부는 우선 급한 것이 성당을 짓는 것이기에 거기에 매진하겠다고 하였다.

 

B-2) 저의 신자들이 여러 해 전부터 성당 하나를 짓기를 원했으나 실행할 수 없었는데, 올해들어 총력을 다해서 열심히 짓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과 성당 짓는데 필요한 계약을 했는데, 중국인 진 베드로는 주교좌 성당을 짓는 일을 해본 사람입니다. 저희 신자들이 계획한 바가 주교님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불초자에게 일러주시기를 간청하옵니다. 시기가 적절치 않다든지 무슨 지시를 내리시면 주교님 뜻에 온전히 순명하겠습니다. 성당의 규모는 넓이가 대략 30칸은 되는데, 모양은 두세 부주교님의 성당을 닮았습니다. 높이는 5m, 건축비는 유리, 못, 기와 등 모두 합쳐서 2,100파타카입니다.40)

 

B-2)은 1909년 1월 11일에 보낸 서한이다. 정규하 신부가 주도해서 지은 풍수원 본당 건물은 한국인 사제가 지은 첫 번째 서양식 건물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도시가 아닌 시골 본당에서 중국인 기술자를 불러다 성당을 짓는 일은 큰 일이었다. 풍수원 본당의 건축이 갖는 의미는 당시 상황에서는 엄두를 내기 힘은 일을 실행하였다는 점이다. 1910년 2월에 보내 서한에는 “제가 건축을 시작했던 성당은 지금 마무리되었지만, 자금이 부족해서 잘 되지는 못했습니다. 성당의 낙성식 날짜는 주교님 뜻을 따르기를 원합니다.”41) 라고 보고하고 있다. “주교님의 사목 방문을 준비하라는 양 신부님의 지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일정을 잡았습니다. 양근 능말과 풍수원에서 9일을 보내시고, 원주와 용소막에서도 9일을 보내시게 됩니다. 그런데 이 바르톨로메오 신부님이 당신 앞으로 6일을 잡아놓았으니, 제 구역을 위해서는 3일만 남은 셈인데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옵니다. 주교님 의향에 드신다면 제 구역에서도 4일은 머물러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주교님 뜻대로 되소서.......(하략)....”42)

 

당시 뮈텔 주교의 풍수원 방문은 성당 축성 뿐 아니라 견진성사를 집행하기 위한 사목방문을 겸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정을 조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다. 새 성당 공사를 끝낸 것은 2월경인 것 같은데 뮈텔 주교가 풍수원을 방문한 것은 그 해 11월이다. “(1910년 11월 7일)......(전략)... (정규하) 아오스딩 신부는 10리 거리까지 우리를 마중 나왔다. 1시 반쯤 풍수원에 도착했다. 작은 교우 집들이 그 앞에서 자취를 감춘 듯 계곡에 혼자 우뚝 솟아 있는 듯했다. 이 성당은 두세 신부 성당의 모방”43)이다.

 

풍수원 본당에서 운영하던 학교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자료가 뮈텔 주교의 일기이다. 뮈텔 주교는 “(1910년 11월 8일) 저녁 때 두 신부가 견진 지망자들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 고해를 주고 있는 동안 나는 견진 지망자 중 50여 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옛 성당은 현재 학교로 사용되고 있는데 거기서 남녀 교우 군중에 둘러싸여 식사를 했다.”44)고 기록하였다.

 

초가(草家)로 지은 옛 성당은 학교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1908년에 이미 학생들이 21명 정도이며, 그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은 최소한 이미 풍수원 본당에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삼위학당(三爲學堂)’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45) 그러나 ‘삼위학당’에 관한 자료는 〈경향신문〉 등 교회자료에 보이지 않는다. 이천의 망답이나 포내 본당에서 운영하던 학교들은 입학식 졸업식 등 자세히 나오는 데에 비해 풍수원의 소식은 거의 없다. 당시 〈경향신문〉은 각지의 통신원들이 보내는 기사를 싣고 있다. 풍수원 본당의 종(鐘)의 축성식을 전한 횡성 통신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관한 소식이 없는 것은 풍수원 본당에서 굳이 학교 소식을 알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46) 정규하 신부는 조선총독부에 보고 하는 자료에도 단 한차례 밖에 보고하지 않았다. 1915년 12월 15일과 25일에 제출한 보고에 의하면 이천 망답 본당에서는 관할 공소의 소재를 자세하게 밝히고 있는 반면에 정규하 신부가 사목하던 풍수원 본당에서는 본당인 풍수원만 보고하고 있다.47)

 

정규하 신부는 통감부 시절에는 삼위학당 인가를 신청하지 않고, 1910년 이후 강제병합 뒤에는 총독부에 신고해야 하는 의무도 최소한으로 하고 있다. 분명 학교를 운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매체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정규하 신부가 소극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뮈텔 주교는 자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910년 11월 9일) 성당 축성식 시간인 8시 조금전에 시어골에서48) 강(도영)(姜道永) 말구 신부가 도착했는데, 그는 여기서 40리 떨어진 곳에서 자고 왔다. 날씨는 아주 화창하고 따뜻했다. 성당 밖을 축성한 후, 우리가 도문을 노래하는 동안 교우들은 성당 밖에서 도문을 바쳤다. 성당은 대만원이었고 특히 앞줄들이 대단히 빽빽했다. 영성체자가 450명, 견진자는 어제 받은 66명을 제외하고도 150명이나 되었다. 견진예절은 10시 15분에 끝났다. (정규하) 아오스딩 신부는 횡성의 군수, 헌병대장, 경찰서장을 초청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지 않았다. 정오경에 보조원 한 사람이 평복을 하고 와서 초대된 사람들이 보내서 왔다고 했다.49)

 

풍수원 본당 축성식은 분명 이 일대 지역에서는 큰 행사였다. 정규하 신부는 횡성군수와 헌병대장, 경찰서장 등 이 지역의 유지들을 초대했다. 군수를 제외하고는 헌병대장이나 경찰서장은 일본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천주교의 장상인 뮈텔 주교와 왔음에도 불구하고 글은 대리인을 보냈을 뿐이다. 정규하 신부와 이들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일기의 내용으로 미루어 정규하 신부가 일제에 저항적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경향신문〉에 풍수원 기사가 실린 것은 단 1910년 12월 11일자에 실린 성당 종 축성에 관한 것이다.50)

 

앞에서 살핀 1909년~1911년 사이의 자료와 10여 년의 차이는 있으나 풍수원 본당의 학교 운영과 관련된 내용을 알 수 있다. 이는 1921~1922년의 통계보고서에 의하면 질문지 항목에 가운데 “보통 서당이라고 불리는 가톨릭 남학교는 몇입니까” 2라고 표기하였다.51) 또한 남자 교사가 2명, 남자학생은 23명, 외교인[비신자] 남자학생은 3명”으로 표기했다.52) 1922년 현재 천주교회 안에 ‘서당’이라고 불리는 비인가 학교와 관의 인가를 받은 학교가 병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규하 신부가 운영한 학교에서는 민족교육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음의 서한이 그러한 정황을 알려주고 있다.

 

B-3) 지극히 경애하올 주교님,

서울에서 저의 집에 내려와 보니 마을에 큰 소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몇몇 신자들이 너무 지혜롭지 못하게 처신하여, 총독부에서 금한 책들을 소년들에게 무리하게 가르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아직 서울에 있을 때 군에서 많은 조사관들이 저의 집에 내려와 온갖 수색을 다 했습니다만,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들은 아무 잘못도 찾아내지 못 하였습니다. 대신 저는 군청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았는데, 제가 아무리 이미 압수된 금서(禁書)에 대한 사정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교장으로서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가 연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정중하게 대해주며 예의까지 갖추어, 이제는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청년 셋이 옥에 갇혔는데 그들 중 한 명은 한문 선생입니다. 취조 결과 많은 소년들이 용산 신학생들로 밝혀졌는데, 이름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고, 다만 많은 수가 고소당했다는 것만을 알뿐입니다. 이제는 책뿐만이 아니라 노래하는 것까지도 금지되었습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저는 주인이 없는데도 집에 들어와서 조사할 수 있느냐고 일본인들에게 따졌습니다. 그들은 대답하기를 어떤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는 그 집의 친척들이나 그 마을의 어른들을 동행하고 들어가서 조사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53)

 

B-3) 서한은 1918년 6월 9일자이다. 학교를 운영하던 교장의 입장에서 위의 사안은 꽤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안에 관해서 《월남망국사》를 교재로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54)

 

풍수원 본당에서 민족교육을 강조한 것은 정규하 신부의 평소 철학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으며, 당시 정세와도 맞물려 있었다. 일제 통감부 정치와 강제병합등을 겪으면서 애국과 애족의 의미에 관해서 절실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삼위학당은 1931년에 4년제 성심학원(聖心學院)으로 개칭하여 인가를 받았다.55) 1938년에는 5년제 심상과로 개편하였다. 이후 정규하 신부가 1943년에 은퇴하고 김학용(시몬) 신부가 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김학용 신부는 해방 후 1946년 학교 이름을 6년제인 광동(光東)국민학교로 개칭하여 인가를 받았다. 1963년에 4대 주임으로 이응현(테오도르) 신부가 부임하여 인보성체수도회 소속의 수녀 3명을 초청하여 교사로 근무하도록 하였다. 1969년 관할구역이 재조정되어 풍수원 본당이 원주교구에 소속되면서 광동국민학교는 원주교구 학교 법인 진광학원으로 이양되었다. 그러나 학생수의 감소등으로 말미암아 원주교구는 광동국민학교를 횡성군 공립학교로 설립자 변경을 하였다. 이후 광동국민학교는 유현국민학교의 분교로 격하되었다가, 1997년에 폐교되었다.

 

1972년에 원주교구가 광동국민학교를 횡성군에 이관한 것은 사회적인 변화와 맞물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62년부터 정부주도 인구 증가 억제정책이 시행되었으며, 1960년대 중반부터 경제개발계획으로 인해 농촌을 떠나는 이농(離農) 현상이 나타났다. 농촌인구는 196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감소하였다. 1960~70년대에 집중적인 이농현상이 일어났다. 전형적인 농촌 마을인 풍수원 일대의 신자들도 도시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배경하에 더 이상 학교를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광동국민학교는 오랫동안 신앙의 못자리 역할을 해왔다. 주로 신자의 자녀들이 다녔으며, 이 학교 출신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사제가 되거나 수도자가 되었다. 광동국민학교 학생들은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학교생활을 하였다. 교장은 주임신부가 맡았다. 1920년 이래 해마다 열리는 성체현양대회 행사에 광동국민학교 학생들도 참여하기도 하였다. 우리의 근현대역사의 아픔과 함께 존재하던 광동국민학교는 산업화에 따라 전통문화가 와해되거나 변화되는 격랑 속에서 ‘역사적인 존재’로 남게 되었다.

 


Ⅳ. 풍수원 본당 학교 운영의 역사적 의미

- 원주교구 진광중학교와 관련하여

 

1962년 3월 10일 한국천주교회는 교계제도(敎階制度)가 수립되었다. 교계제도의 설정은 자립교회의 형성을 의미하며 한국인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교계제도의 설정으로 1965년 3월 원주교구가 설정되었다.56) 그리고 초대 교구장으로 지학순(다니엘) 주교가 임명되었다. 지학순 주교는 그해 6월29일 주교좌인 원동성당에서 착좌식을 가졌다. 지학순 주교는 ‘빛이 되라’를 사목표어로 삼았다. 지학순 주교는 그의 취임사 ‘신설 원주교구장의 중책을 맡으며’에서 원주교구를 ‘바위틈에 피어나는 꽃순과 같은 원주교구’라고57) 표현하였다. 이 표현은 신설교구인 원주교구의 상황을 잘 드러냈다. 지학순 주교는 원주교구를 기도와 함께 물질적으로도 도와줄 것을 청하였다.

 

1967년도 사목교서 ‘의욕적이고 적극적으로 신앙을 행동화하자’에서는 자녀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였다. ‘자식들의 종교적 교육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는데,58) 앞서 지학순 주교는 같은해인 1967년에 재단법인 천주교 원주교구 유지재단을 설립하였다.

 

신설 교구로서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1967년에 원주 시내에 있던 육민관중학교를 인수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풍수원 본당은 이민족에 의한 강제병합으로 인하여 식민지 시기를 겪어내면서도 학교를 운영해왔다. 이는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역사적으로나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60여년 동안 교육사업을 해왔다는 것은 기억해야 할 일이다.

 

새로 설정된 교구, 넉넉한 형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구장이 청소년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교육사업을 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었다. 원주교구는 지역적으로 보았을 때 소도시, 농촌, 어촌, 광산촌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느 것 하나 선교를 위해 급선무가 아닌 것이 없었다. 그 가운데 교육은 시간이 가장 오래 걸렸다.

 

지학순 주교가 착좌하면서 먼저 관심을 기울인 것이 학교 설립과 관련된 것이었다. 풍수원 본당에서 운영하고 있던 광동국민학교도 이농 현상으로 학생 수가 감소하고 있었다. 원주교구는 학교를 새로 설립하기 보다 기존에 있던 학교를 인수하였다. 원주교구는 당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던 원주의 육민관 중학교를 인수하였다. 인수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으나 당시 재학하고 있던 육민관 중학교 재학생들의 입장을 생각해서 교회가 인수하기로 했다. 다른 당사자들이었다면 협상 당사자들의 입장만을 고려했겠지만, 우선 학생들을 우선 고려한 것이다. 또 학교 부지가 너무 작고 학급 수도 너무 적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이러한 좋지 않은 여건은 차츰 개선해 나가자는 지학순 주교의 결단이 작용하였다. 당시 지학순 주교는 최창규(바르톨로메오) 신부에게 인수작업의 총괄하도록 위임하였다. 어려운 조건에서도 인수 협의를 거쳐 1967년 8월에 원주시 단구동에 소재하고 있던 육민관 중학교를 인수하게 되었다. 인수 당시 학생수는 4학급에 235명, 교직원은 13명이었다. 건물은 판자 교실 1개동과 골조공사만 끝낸 미완성 2층 건물 1동이었다.59)

 

진광중학교는 강원도에서는 최초로 설립된 천주교 계통의 정식 중학교였다. 학교를 인수하고 교장을 확정하면서 제일 먼저 논의해야 할 것은 교명(校名)을 정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교명은 해당학교의 교육이념과 철학,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중하게 많은 논의를 하였다. 그리스도교적 설립 정신과 교구장이자 설립자인 지학순 주교의 문장 “빛이 되어라”를 염두에 두고 논의하였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眞光’으로 정하였다. 그 의미는 빛(光)은 진실을 상징하며, 정의를 상징한다. 진실한 빛, 참된 빛은 이 학교의 설립 정신을 압축적으로 나타낸다.60) 1967년 8월에 인수하여 준비과정을 거쳐 진광중학교는 1968년 3월에 개교하였다.

 

진광중학교는 개교하였으나 주변 환경은 매우 열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부모들과 지역사회 주민들은 많은 지원을 하였다. 천주교 원주교구에서 설립하였고 교구장인 지학순 주교가 이사장이었기 때문에 신자는 물론이고 신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이 학교의 설립 정신은 바티칸 공의회 문헌 그리스도교적 교육에 관한 선언 8항의 정신과 지학순 주교의 뜻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타냈다.

 

“그리스도교적 정신에 입각한 도덕교육을 통하여 하느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는 높은 진리를 깨달아 자기의 생활과 이웃의 문제를 올바로 해결할 수 있는 높은 지성과 인격을 갖추어 국가민족과 인류 문화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인간을 양성한다”는 것이었다.61) 이 정신에 기초하여 교훈을 ‘참을 살자. 옳게 살자. 사랑하자’로 정하였다. 교훈은 매우 쉬운 말이지만 성경에 기초하여 깊이 되새기게 한다.62)

 

진광중학교가 진행했던 이 학교만의 특색있는 교육이 있다.63) 수업 전에 묵상하고, 수업 후에는 교사와 학생이 함께 노래를 불렀다. 감독교사 없이 시험을 치루는 ‘무감독 시험’을 시행하였다. 이는 양심적인 생활을 통하여 정직하고 참된 생활을 하게 하려는 것이다. 또 양심적이고 정직한 생활 태도를 육성하여 건전한 사회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하여 각종 학용품을 일정한 장소에 진열해 놓고 ‘무인판매’를 한다. 무인판매는 학생회가 주관하여 운영하였다.

 

한편 1973년에는 진광고등학교를 설립·개교하였다. 이는 중학교 개교 후 5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로써 중학교는 11개 학급, 고등학교는 3개 학급이 되었으며, 재학생 수는 중학교 700명, 고등학교 183명이었다.

 

위에서 진광중학교에 관해서 살펴본 이유는 정규하 신부가 풍수원 본당에서 운영하던 학교의 역사성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많은 기관과 뜻있는 사람들은 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급변하는 정치 사회의 변화 속에서 학교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재정적인 문제가 큰 이유였다. 정규하 신부 역시 그의 서한문에서 교회 안에서 냉담자가 영세자보다 많다고 걱정하였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운영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믿음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1923년 12월에 보낸 서한문에 의하면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 ...... 오래전부터 저는 남학교 하나를 세우고 싶었는데, 올해에 그것을 시작합니다. 신자들은 큰 호의를 가지고 있어서, 만일 금전적으로 도울 수 없으며 적어도 부역으로라도 저를 도울 것입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아마 십팔칸되는 한옥을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자신의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 이미 삼위학당(三爲學堂)을 운영하고 있는 입장에서 또 다른 소망을 밝히고 있는 것은 더 나은 시설과 더 나은 교육 내용으로 남학교를 세우고 싶어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애초에 삼위학당을 설립했을 때부터 그런 계획을 가졌을 수 있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에서 성당을 짓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그 계획을 뒤로 미루었을 것이다.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은 것은 이러한 소망과 계획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부응하면서도 학교는 유지되었다. 그가 세운 삼위학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다른 형태로 존재하게 된 것이 진광중학교라고 생각된다. 풍수원 본당 출신과 광동학교 출신의 사제들 뿐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광동학교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설 교구에서 우선적으로 중학교를 운영하려는 계획을 세웠을 수 있다. 어려운 교구 실정을 감안해 볼 때 50년 동안 중고등학교를 운영하면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풍수원 본당이 일제 강점기라는 어려운 시기에도 불구하고 학교 운영을 중단하지 않은 역사가 현재 진광중학교 안에서 살아있다고 생각된다.

 

 

Ⅴ. 맺음말

 

이 글의 목적은 풍수원 본당의 학교 설립 및 운영, 변천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문헌자료는 많지 않았다. 반면에 동시대에 존재했던 강원도 이천의 두 본당에서 사목했던 선교사 사제들의 서한 덕분에 학교 설립에 관한 과정 및 상황 등을 알 수 있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천 포내 본당은 1907년 학교를 설립하였다. 망답 본당도 그 뒤를 이었다. 공소였던 평강 지역도 적극적이어서 공소 차원의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그렇지만 그 학교들은 계속되지 못하였고, 현재는 침묵의 교회로 남아 있어 흔적을 추적하기 조차 어렵다. 특히 포내 본당은 황해도 지역을 관할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급격하게 교세가 약화되어 포내 본당은 기록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이와 달리 풍수원 본당은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 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교육의 끈을 놓지 않았다. 비록 광동학교가 폐교되었을지라도 그 정신은 진광학교에 남아 전해진다고 생각한다. 본당 차원에서 운영하느라 어려웠을 광동학교 보다는 교구에서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좀 더 안정적일 수 있다.

 

* 이 논문은 2019년 10월 4일에 천주교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에서 개최된 ‘풍수원 성당을 바라보는 일곱 개의 시선 ’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발표문을 수정 · 보완한 글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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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학징의》 ‘邪學罪人嗣永等推案’ 10월 10일 황심 진술.

 

2) 샤를르 달레 저(안응렬 최석우 역주), 1980, 《韓國天主敎會史》 下, 한국교회사연구소, 411~412쪽.

 

3) 지금의 서울 계성학교를 말한다.

 

4) 조광, 〈개항기 천주교의 교육운동 - 개항 직후부터 갑오경장까지를 중심으로〉, 《교회와 역사》 205, 1992, 196~197쪽.

 

5) 이원순, 〈한국 천주교회의 교육 사업과 그 의의〉, 《한국 교회사의 산책》, 한국교회사연구소, 1988, 310쪽.

 

6) 김진소, 〈일제하 한국 천주교회의 선교 방침과 민족 의식〉, 《교회사연구》 11, 1996, 18쪽~26쪽.

 

7) “드게트(Deguette) 신부는 강원도를 맡고 있습니다.” 명동천주교회, 〈1884년도 보고서〉, 《서울교구 연보-1878~1903-》 Ⅰ, 1984, 35쪽.

 

8) 세림 공소 학생 4명, 만산이 공소 5명, 냉골 공소 5명의 학생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곳은 이미 1893년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강원도 프랑스 선교사 서한집-뒤테르트르, 루케트-》 Ⅰ, 31쪽(1893. 5. 20 보고, 이후 간략하여 《서한집》으로 표시한다.)

 

9) “올해 저희 마을(염산리)에 학교용 가옥을 한 채 지었습니다. 학생 수는 12명에 불과한데 신자들이 너무 가난하여 교장에게 줄 돈이 없어 제가 학교장에게 매달 엽전 5냥을 주기로 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서한집》 Ⅰ, 101쪽, (1899. 6.24))

 

10) 《서한집》 Ⅰ, 201쪽, ‘학교설립 문제’(1906. 12. 30)

 

11) 《서한집》 Ⅰ, 201쪽, ‘학교설립 문제’(1906. 12. 30)

 

12) 《서한집》 1, 202~203쪽, ‘학교설립 再考’(1907. 1. 11)

 

13) 이천 개하리에서 망답으로 이전한 본당을 포내본당과 구별하기 위해서 망답본당이라고 지칭하기로 한다.

 

14) 이천본당 관할 내 평강(平康)의 기산(箕山) 공소를 말한다.

 

15) 《서한집》 Ⅰ, 213~214쪽, ‘망답으로의 이사와 10월에 개교한 학교’ (1908. 12. 26)

 

16) 900년대의 사립학교 현황을 이해하는 데에는 1910년 ‘한일합병’ 전후에 발간된 학부나 조선총독부 등의 기관에서 작성한 통계자료들을 활용한다. 예를 들면 1911년에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學事統計》(明治 43年度)나 《統監府統計年報》, 《朝鮮總督府統計年報》의 〈敎育〉 그리고 《舊韓國官報》 1910년 8월 13일자 〈學事〉에 소개된 통계자료가 사립학교의 현황을 알련준다. 또 일본에서 발행한 《日本植民地敎育政策史料集成》(조선편)을 분석해야 한다. (최기영, 1992, 〈韓末 서울 소재 사립학교의 교육 규모에 관한 一考察〉, 《韓國學報》 70, 26쪽의 각주 6을 재인용) 한국 근대학교의 성립과 과정에 관한 연구에서 최기영이 1990년대 들어 새로운 자료를 섭렵하여 시도하였다. 일제 통감부와 총독부는 신고제가 아닌 허가제를 실시하여 철저하게 조선사회를 통제하였다. 이 논문은 당시 〈경향신문〉이나 《경향잡지》을 인용하는 단계에서 진일보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17)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일기》 4 (1906~1910), 1998, 356쪽.

 

18)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일기》 4 (1906~1910), 1998, 356쪽. 《뮈텔 주교일기》 4에서는 이 항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역주하였다. “江原道 伊川 浦內 本堂의 부이수 신부가 설립한 三愛學校와 崇熙學校. 삼애학교는 1907년에 설립되었다가 이듬해 明義學校로 개명되었고, 숭희학교는 1908년에 설립되어 遂安 공소에서 운영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역주자의 착오로 보인다. 명의학교(明義學校)는 삼애학교를 개명한 것이 아니라 루케트 신부가 1908년 6월에 개하리 망답으로 성당을 이전하고 10월에 세운 학교의 이름이다. 즉 이천본당 학교의 이름이다.

 

19) “(평강) 기산의 두 신자 맹 바오로와 김 프란치스코가 학교 문제로 주교님을 뵙고 조언을 구하고자 서울로 올라갑니다. 두 가지 문제가 있어서인데 아래와 같은 내용입니다. 첫째, 평강의 군수가 지난해(1908)부터 지금까지 평강에 학교를 짓겠다며 강제로 돈을 내도록 요구해 왔는데, 이미 기산에 학교를 세운 신자들에게도 돈을 내라고 한 것입니다. 둘째, 저의 생각으로는 매우 예민하고 곤란해질 수도 있는 문제라서 보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조언한 문제입니다. 기산 사람들이 관청에는 돈을 내지 않고 기산공소에 돈을 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서한집》 Ⅰ, 224쪽, ‘기산의 신자들이 학교문제로 주교의 조언을 듣고자 상경함’(1909.3.4.))

 

20) 루케트 신부가 이천본당을 망답으로 이전한 후에 세운 학교 이름을 처음으로 언급하였는데, 이름이 ‘명의학교’이다. 명의학교 개교식에 관해서는 〈경향신문〉 1908년 10월 23일자에 언급되어 있다.

 

21) 《서한집》 1, 225~226쪽, ‘다시 개교한 망답학교, 장학관의 학교시찰을 대비한 준비’(1909.9.19.) 

 

22) ‘금일 오젼 열시에 텬쥬교 쥬교 민덕효ㅅ시가 덕국셔 새로 아논 션이인과 동반야 통감부에 가셔 부통감을 방문후 오후두시에 학부에 가셔 관 표손일ㅅ시를 방문고 대학교 일을 대강 셜명즉 관이 찬조며 그일을 힘대로 돕겟노라 엿답데다’ (〈경향신문〉, 1909년 4월 2일자)

 

23) 《서한집》 Ⅰ, 242~243쪽, ‘조선의 전통 혼례와 기산학교의 공립학교 전환에 대해서’(1911. 12. 27)

 

24) 명의학교를 가리킨다.

 

25) 《서한집》 Ⅱ, 293쪽, ‘연말보고서(폐교소식과 주교 사목방문에 대한 감사)’ (1914. 4월) 

 

26)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84, 《황해도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398쪽.

 

27) 《서한집》 Ⅱ, 152쪽, ‘학교 설립에 필요한 행정절차에 대한 문의’(1907. 3. 6)

 

28) 〈경향신문〉, 1907년 5월 3일자.

 

29) 《서한집》 Ⅱ, 154~155쪽,‘ 학교 설립에 따른 제반 사항에 대한 보고와 교사 채용의 어려움’(1907. 7. 2)

 

30) 《서한집》 Ⅱ, 156~157쪽,‘꿈에 나타난 영혼이 요구한 것을 이행해야 하는지를 문의, 일본 병사들의 횡포’ (1907. 9. 24)

 

31) 《서한집》 Ⅱ, 160~161쪽, ‘교사 확보난, 수안과 포내 두 학교의 통합에 대하여’(1909. 1. 9)

 

32) 《서한집》 Ⅱ, 244쪽, ‘사목활동 보고서, 포내학교와 각 공소별 현황보고’(1916. 3. 1)

 

33) 포내 본당은 이천에 있는 공소는 겨우 현상 유지를 하고 있었던 반면에 황해도 지역의 공소들은 신계에 8개, 곡산에 5개, 수안에 5개로 증가하였다. 이에 부이수 신부는 포내 본당에서 수안의 사창 공소에 사창 본당을 설립하여 분할하였으며, 1928년에는 신계 고면 삼차동(三次洞) 공소에 삼차동 본당을 분할하여 설립하였다. 포내 본당은 황해도 지역에 두 개 본당을 분할한 직후 이천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다. 포내 본당이 공소가 되자 부이수 신부는 32년간 사목을 해왔던 포내 본당을 떠나 1928년 5월에 경기도 광주 청계산의 하우현 본당으로 전임되었다. 삼차동 본당은 나중에 1935년 정봉(丁峰)으로 이전하는데, 이전하면서 성당을 새로 지을 때 포내 본당의 건축자재를 그대로 사용하였다.(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황해도천주교회사》, 1984)

 

34) 정규하, 《풍수원에서 온 편지: 정규하 아우구수티노 신부 서한집》, 천주교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 2019, 88~89쪽; 105쪽~106쪽; 108쪽~109쪽; 111쪽~113쪽.

 

35) 《풍수원에서 온 편지》, 76쪽.

 

36) 《풍수원에서 온 편지》, 114쪽.

 

37) 《풍수원에서 온 편지》, 105쪽.

 

38) 삼위학당에 관한 증언은 대부분의 교회 자료가 정원진(루카) 신부의 증언에 의한 것이다. 삼위학당의 이름에 대해서는 삼위(三爲)와 삼위(三位) 사이에 논란이 있다. 본고에서는 ‘삼위(三爲)’를 사용하려고 한다. 《경향잡지》(1972년 1월호)에 실린 ‘복음의 증인들’ 풍수원 50년 편에서 정규하 신부의 일대기를 정원진(루카) 신부가 증언하였다. 삼위학당과 관련해서 관련해서는 괄호로 ‘三爲學堂’이라고 기재하였다. 이는 증언을 들으면서 정원진 신부에게 확인을 받았기 때문에 특별히 한자로 기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원주교구에서 편찬한 《원주교구 30사》에는 ‘三位學堂’으로 기재하였다. 이 가능성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1차적으로 게재한 내용을 존중해서 필자도 ‘三爲學堂’으로 표기한다.

 

39) 《풍수원에서 온 편지》, 113쪽. 

 

40) 《풍수원에서 온 편지》, 114쪽.

 

41) 《풍수원에서 온 편지》, 117쪽.

 

42) 《풍수원에서 온 편지》, 125쪽.

 

43) 서울의 약현(중림동)성당을 말한다.(《뮈텔 주교 일기》 4(1906~1910)의 각주 76 재인용, 496쪽)

 

44) 한국교회사연구소, 《뮈텔 주교 일기》 4(1906~1910),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497쪽.

 

45) 정규하 신부가 쓴 서한문에는 학교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이 역시 정원진 신부의 증언에 기초하고 있다.

 

46) 〈경향신문〉은 천주교회에서 설립한 학교에 관해서는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는데, 유독 풍수원 본당에 관해서는 학교 설립이나 운영에 관한 내용이 없다는 것은 특이하다.

 

47) 이원희, 〈풍수원 본당의 교우촌에 대하여〉, 《풍수원성당 재발견 심포지움 자료집》, 1909, 86쪽. 정규하 신부가 1922년 3월 31일 주교에게 보고한 풍수원 본당 관할 공소 일람표에 의하면 17개 공소를 열거하고 있는데, 관청에 등록된 교회는 풍수원만 기록하고 있다.(《풍수원에서 온 편지》, 205쪽)

 

48) 京畿道 廣州郡 都尺面 桑林里 (《뮈텔 주교 일기》 4(1906~1910), 497쪽)

 

49)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4(1906~1910), 1998, 497~498쪽.

 

50) 풍슈원에 즐거운 일 : 횡셩 풍슈원에 셩당을 건츅후 죵이 업서 교우들이 죵소 듯기를 원고 라더니 홍쳔군 결운사 김베드루ㅅ시가 원을 내여 쓸만 죵을 사셔 일반교우의 원욕을 노니 이런 상쾌고 후은혜를 표고 쳐야 김베드루로써 죵츅셩의 부로 뎡고 죵의 일홈은 베드루라 엿 그에 베드루ㅅ시가 즈거운 으로와 례졀에 참예매 사마다 ㅅ시를 찬미며 덕을 숑양데다 (횡셩 본샤통신원) 〈경향신문〉 1910년 12월 11일자.

 

51) 서당이라고 불리는 학교가 둘이었다고 표기한 것은 본당 직할의 삼위학당과 횡성에 있는 검두공소에서 운영하던 교리학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52) 《풍수원에서 온 편지》, 208쪽.

 

53) 《풍수원에서 온 편지》, 177쪽.

 

54) 이 사안에 관해서 정원진 신부는 증언에서 《월남망국사》라고 언급하였다. 《월남망국사》 1905년 일본의 요코하마(橫濱)에서 월남(越南,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판보이쩌우(潘佩珠, 1867~1940)와 중국의 개혁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가 나눈 대담을, 같은 해 10월에 중국 상하이(上海)의 광지서국(廣智書局)에서 펴낸 책이다. 1883년 이후 프랑스의 식민지 보호국이 된 월남의 망국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는 이 책은 발간 직후 소개되었고, 1906년 8~9월에 〈황성신문〉에 발췌 · 번역하여 연재하기도 하였다. 1906년 11월 현채가 국한문체로 번역한 《월남망국사》가 보성관(普成館)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경향신문〉도 1908년4월 10일(78호)부터 1908년 7월 31일(94호)에 17번에 걸쳐 게재하였다. 현채는 월남 망국의 사실을 거울로 삼아, 일본의 국권 침탈을 경계하자는 목적에서 번역본을 발간했다. 간행된 지 6개월 만에 재출간되었다. 일제 통감부는 1909년 5월 5일부터 판매와 배포를 금지하였다.(최기영, 〈國譯 《越南亡國史》에 관한 一考察〉, 《東亞硏究》 6,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1983)

 

55) 최양업 신부 조카인 최상종(빈첸시오)가 쓴 <최 신부 일가의 이력서>에 의하면 풍수원 성당을 풍수원 '성심성당'이라고 표현하였다.

 

56) 교황청령 제2196-66호에 의해 춘천교구로부터 분리되어 원주교구가 설정되다. 《원주교구 30년사》, 932쪽.

 

57) 천주교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 지학순 주교님 말씀 : 바위틈에 피어난 꽃순과 같은 원주교구》, 12쪽.

 

58) 천주교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 지학순 주교님 말씀 : 바위틈에 피어난 꽃순과 같은 원주교구》, 원주교구, 2003, 25쪽.

 

59) 진광 중·고등학교, 《眞光 二十年史》, 1988, 진광 중·고등학교, 53~56쪽.

 

60) 《眞光 二十年史》, 58쪽.

 

61) 《眞光 二十年史》, 72쪽.

 

62) 《眞光 二十年史》, 75쪽.

 

63) 《眞光 二十年史》에 실린 내용으로 학교 설립 초창기에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학술지 교회사학 vol 16, 2019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금경숙(삼인역사연구소 소장)]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368707&Page=1&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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