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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18일 (목)부활 제3주간 목요일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신학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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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천주교회 설립에 대한 평판: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자료집을 중심으로

1122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1-18

한국천주교회 설립에 대한 평판


-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자료집을 중심으로 -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특별한 섭리로 인류가 신앙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 교회를 세우도록 이끌어 가신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예지자들을 통하여 복음적 계시를 전달하신다. 우리 민족에 대한 복음 전달도 같은 양상으로 이루어졌고, 참다운 예지자를 부르시는 여정은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다양한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한국천주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은 오랫동안 준비하여 완성한 하느님의 계획이고, 성령께서 특별한 예지자들을 선택하여 역사 하시는 과정이며, 이에 응답하고 열성을 다한 이들의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해석하고 바라보려는 이들도 있다. 여기서 한국교회의 창설주역과 한국천주교회 설립에 관한 평판을 찾을 수 있다. 

 

평판에 긍정적인 이들은 조선교회는 하느님의 계시에 응답한 조선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증거자’로 표현하면서, 이들은 교회와 합체되기 위해 노력하였고, 합의체적으로 겸손하게 교회를 운영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북경에 와서 세례를 받은 윤 바오로 등의 신자들이 열심한 마음과 열정으로 성사를 받는 모습에 크게 감동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조선의 복음화는 아주 과장된 것이라는 아주 부정적인 평판이 있었다. 또한, 조선 신자들이 선교사를 영입하려는 것이 무슨 이익을 얻으려는 목적이 아닌지 의심을 품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조선 정부 또한 천주교를 사학으로 여기고, 신자들을 인륜과 법을 말살시키고 나라에 반기를 들려는 역적의 무리로 여겼다.

 

한민족의 복음화에 대해 긍정적 견해를 가진 이들은 ‘성교회가 매우 기뻐할 대단한 일’, ‘기적적인 사건’, ‘아주 흥미로운 소식’, ‘건설적이고 감동적인 사건’ 등으로 표현하였다. 특별히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교우들의 열성을 칭찬하며, 조선 선교의 앞날은 밝다고 전하였다. 그러나 부정적 견해를 가진 마르키니 신부는 조선의 복음화 소식에 대하여 ‘저의가 의심스러운 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또한, 조선 교회에 대한 구베아 주교의 판단은 잘못되었다고 하며, 조선의 복음화에 대해 조소(嘲笑)를 보이면서, 조선 교회를 도와주는 것을 꺼렸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 바라보는 입장, 해석하는 방향이 다르다. 하지만 역사는 바르게 밝혀지게 된다. 현재를 살아가는 ‘나’, ‘우리교회’는 역시 ‘역사의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어떤 자리에 있게 될 것인지를 성찰하는 것이, 바로 역사를 바로 읽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I. 서론

 

주님께서는 당신의 특별한 섭리로 한민족에게 신앙의 기적을 일으키도록 하시어, 신앙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 당신의 배우자이신 교회를 세우도록 이끌어주셨다. 이렇게 한민족에게 ‘천주교회’를 선물로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에 성실하게 응답한 이들,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한 이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선구자이며 예언자이고, 지도자이며 하느님의 사도들이었다. 그들을 현재의 교회는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자’, ‘한국천주교회 창설자’, ‘창설주역’ 등의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1)

 

이들에 대한 평판2)은 한편으로 한국천주교회 설립의 평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인품과 복음화(활동)의 평판, 덕행의 평판, 증거의 평판을 정리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명백하게 밝혀진 부분은 평판이 필요없다. 평신도에 의해 시작된 교회, 박해상황에서 목숨 바쳐 신앙을 증거한 행위 등은 평판이라기보다 일방적인 기술이나 서술로 정리될 수 있다.

 

한국천주교회의 설립과 관련된 평판들은 1780년대 중반부터 1790년대 초까지 이어진 사항들에 대한 교회 내외적인 자료, 그 이후 시기는 조선 정부의 문헌 기록과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편지와 역사서 등에 풍부히 담겨져 있다. 구체적으로 1790년대 전후로 연락을 주고받던 편지, 즉 북경교구의 구베아 주교 편지와 예수회의 쁘아로 신부의 편지3), 마르키니 신부의 편지, 라자로회의 로 신부의 편지, 조선왕실에서 중국에 보낸 〈토사주문〉4), 중국에서 보내온 답변 〈토사주복〉 등이 있다.

 

논자는 이러한 자료를 기본으로 하고, 후에 다블뤼 주교가 작성한 순교자 비망기를 바탕으로 집필한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박해자들이 작성한 다양한 자료들을 보충하여 그 평판을 접근하고자 한다. 그런데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비슷한 내용을 전하고 기록하는 것들이지만, 전하고 집필하는 이의 성향에 따라 다르게 뚜럿이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다른 모습과 특징이 바로 같은 사건을 두로 읽어낼 수 있는 평판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특별히 이러한 평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구베아 주교와 반대의 견해, 즉 한국에서 있었던 천주교회 설립과정을 하느님의 기적으로 바라보는 견해와 그에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던 ‘마르키니 신부의 편지’에 대한 분석도 이루어질 것이다. 구베아 주교와 마르키니 신부의 편지는 그 외에도 여러 통이 있는데, 두 인물의 관점과 방향이 참으로 다르다.

 

하나의 사건(조선 천주교회의 설립과정)을 ‘하느님의 섭리인 기적적인 사건’으로 바라보는 이의 입장과 ‘의심스럽고 지어낸 거짓의 사건’으로 바라보는 견해 차이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역사가 그 진실을 밝혀주었고, 한쪽 편은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마르키니 신부와 비슷한 견해를 가진 이들의 입장보다는 구베아 주교의 견해를 가진 이들의 입장에서 풀어가고자 한다.

 

특별히 논자는 하느님께서 어떤 민족이나 집단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때, 누군가를 세워 그로 하여금 당신의 계시를 전달하도록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본고를 전개하고자 한다. 하느님께서 선택한 ‘그 누군가’는 개인적인 존재이지만, 대표성을 지닐 수 있다. 한국천주교회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개인이 대표성을 갖고 한 공동의 일이 된다. 더욱이 하느님의 계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면, 그 결과는 하늘과 땅에 공적인 사건이 된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이 그렇다.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의 계시를 혼자 이루신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하는 작업이었다.

 

이렇듯 한국천주교회의 창설주역들이 신앙과 교회와 관련된 일을 행한 것들은 개인이 한 것 같지만,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일이고, 그 여파는 한국교회의 결과로 남았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 어떤 때는 공동(창설주역, 창립선조라는)의 이름으로, 어떤 때는 개인으로 이름5)으로 행해진 일들을 기술할 때가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개인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에 숨어 있는 대표성을 읽을 수 있을 때,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리라 본다.

 

 

II. 한민족 복음화를 위한 하느님의 계시 준비


1. 하느님과 한민족

 

우리 민족도 하느님의 창조경륜과 구원경륜에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하느님의 보편적 의지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민족의 구원을 향한 여정에 친히 개입하고자 준비하고 계셨다.6) 특별히 민족 안에 흐르는 선성[상선벌악(賞善罰惡)]과 순수성[백의민족(白衣民族)], 하늘을 우러르며 사람을 사랑하는 정신[경천애인(敬天愛人)], 어른존중[경로사상(敬老思想)], 어려운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동정심을 갖는 측은지심(惻隱地心), 어려움을 덕으로서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극기복례(克己復禮)], 무속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영혼에 대한 인식 및 달램, 불교를 통해 터득한 자비로운 마음과 삶[자비정신(慈悲精神)], 예의를 중히 여기며 삶의 기본 덕행을 강조한 유교 정신[삼강오륜(三綱五倫)], 성현들에 대한 존경과 애정, 나라를 보호하고 지키며 국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애국심과 충성심 등은 하느님과 하늘나라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요소들이었다.7)

 

더욱이 단일민족으로 동고동락하며 살아야 하는 특수성은 같은 어려움 앞에서 같은 소망과 희망을 간직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이었다. 조선에는 안팎으로 이어진 전쟁과 혼란 등이 있었다. 특별히 임진왜란에 이은 병자호란, 기존 유학의 흐름이 실학으로, 중국에서 서양세력의 확장, 가치질서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크고 작은 변화의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한민족에게 복음이 전달되는 “하느님의 때”를 열어주는 전조들이기도 하였다.

 

이 요소 모두는 우리 민족이 종교적 심성을 갖는데 도움을 주었다. 특별히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모두가 함께 느끼는 같은 어려움이고 아픔이었고, 그 부르짖음 또한 같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한목소리로 하늘을 향해 도움을 청했을 때,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는 ‘이스라엘 민족’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단일 민족 국가라는 특수성은 하느님을 만나기에 참으로 좋은 여건이자 선물이고, 하느님께서 준비시킨 민족이며 나라라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요소는 하느님의 창조 경륜을 통해 태어나 하느님의 피조물이자 자녀로서의 준비된 삶에서 출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 한민족에 대한 평판


1) 긍정적 평판

 

불교와 신도(神道) 등을 연구하였던 루이 프로에스(Louis Froës, 1532-1597) 신부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에 대한 평을 하면서, “이 민족은 크나큰 순박에 좋은 판단력을 겸하여 갖추었고, 일본 사람만 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천주께서 이번 전쟁을 계기로 하여 조선 사람들의 크나큰 영혼의 이익을 위하여 조선 나라의 첫 수확을 거두셨습니다.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니, 만일 조선에 복음이 들어가기만 한다면 조선은 아주 쉽게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고 또 그 나라에서 큰 발전을 이루리라는 것이 공통된 의견입니다.”라고 쓰고 있다.8)

 

북경 교구장 구베아(A. de Gouvea, 1751-1806) 주교는 조선은 중국에 매우 오랫동안 조공을 바치는 나라라고 보고하고 있다. 중국과 조선은 서로 불신하고 있으며, 정치적인 이유로 국경을 넘어 서로 왕래하는 것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전하고 있다.9)

 

구베아 주교는 자신의 편지에서 조선의 풍습과 생활양식은 중국과 비슷하다고 전하면서 가장 많은 종교는 무속이고, 공자도 다른 신령도 섬기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인의 외모와 성품 및 풍속은 중국인들과 조금 다르고, 새로운 임금이 등극할 때에는 중국 황제에게 인준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중국 이외에는 일본과만 교류와 무역을 하고, 중국 사람들과 같이 예술과 학문을 숭상하고, 발음은 다르지만 같은 책자와 문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중국인들과 한자를 써서 의사소통한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조선은 중국보다 더 가난하고 성실하기 때문에 교만스럽거나 자만하지 않으며 재물에 물들어 있지 않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기 쉽고, 성과도 더 많다고 한다.10)

 

쁘아로 신부11)는 조선에 대하여, “우상에 빠져 있는 중국과는 참으로 다른 나라입니다.”12)라고 표현하기까지 하였다.

 

2) 부정적 평판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였던 마르키니(Jean-B. Marchini, 1785-1823) 신부는 그의 편지에서 조선인은 중국 인접한 나라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중국에서 쓰는 것과 똑같은 한자를 사용한다고 전하면서, 읽을 때 발음이 달라서 서로의 감정을 교환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글을 통해서 서로의 감정을 교환할 수 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어를 모르던 조선의 신입 교우는 글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의 기초적인 것들을 배울 수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을 보면, 신자가 아닌 경우, 학자들조차 그리스도교에 대한 한문 서적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13) 1793년의 편지에서도 그렇게 쓰고 있다. “저는 제아무리 귀족학자들일지라도 때로는 한문으로 된 천주교 서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14)

 

마르키니 신부는 조선인에 대하여 보고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어쩌면 조선인들은 중국인들처럼 남을 아주 잘 속이고 허풍을 떠는 그러한 성품을 지녔을지도 모르니, 이 신입 교우(윤 바오로)가 하는 보고를 쉽게 그대로 모두 믿어서는 안 될 것”15)이라고 하는 이들의 평판도 함께 다루고 있다.16)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판도 가지고 있었다. 죽은 사람들에 대한 미신행위, 일부다처제, 고리대금 행위와 선교사의 입국이 어렵다는 점에서 조선에서 선교하는데 장애요인이 된다고 하였다. 이런 것으로 볼 때, 인간적으로 보면 복음이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했던 나라라고 결론을 지었다.17)

 

3) 객관적 평판

 

브뤼기에르 주교나 달레 신부의 자료들은 앞서 언급한 자료들과는 달리 객관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것들은 더욱 정확하고 자세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조선의 위치, 위도와 경도, 국경 현황, 일본과의 거리, 조선인의 품행과 관습, 예술과 학문, 글자와 언어, 의복과 두발상태, 농작물과 과일, 주식과 곡주, 기후와 날씨, 조선인의 모습과 성격, 여인들의 자유, 임금과 임금책봉, 신하와 백성, 국가권력, 일본의 조선 침입과 조선에 복음으로 멍에를 씌우려고 했던 일, 예수회 수사가 된 가이오 수사 이야기, 권 빈첸시오 가베에 수사, 오타 줄리아 동정녀 이야기 등에 관하여 정리하였기 때문이다.18) 이보다 약 40년 뒤에 샤를르 달레 신부도 《한국천주교회사》 상하 두 권을 집필하여 1874년에 간행하게 된다.19) 이 두 권의 역사서에 한국 초기교회의 평판이 잘 묘사되어 있다.

 

 

III. 한민족 복음화를 위한 하느님의 계시


1. 기적적인 한민족의 복음화

 

하느님은 당신의 섭리를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이루신다. 특별히 하느님은 당신을 찾는 이들, 당신께 부르짖으며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당신을 알려주는 ‘계시’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이러한 계시를 통한 구원으로의 여정은 반드시 특별히 선택된 이들(아브라함, 모세, 예레미아)을 통해서 이루신다.

 

우리 민족에게 신앙이 전달된 것이 ‘오묘한 하느님의 섭리이며 기적’20)이라는 구베아 주교의 표현은,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헌장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하느님의 계시를 먼저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손수 우리 민족을 선택하신 것으로, 이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에서 출발한 것으로 바로보는 시각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선성과 지혜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당신 뜻의 신비를 기꺼이 알려주시려 하셨으 며, 이로써 사람들이 사람이 되신 말씀,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다가가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도록 하셨다.”21) 이러한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 신앙의 선조들에게 어떻게 다가오셨는지를 재해석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친구로 대하듯이 넘치는 사랑으로22) 속삭이며 사귀어23),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부르시고 받아들이셨는지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24)

 

 

2. 한민족 복음화를 위한 하느님 계시: 직접개입


1) 긍정적 평판

 

구베아 주교는 조선 교우들이 자신의 서한(편지)을 받고 하느님 은총의 힘으로 마음에 적지 않은 감동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전하고 있다.25) 무엇보다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서 복음이 전해지고 전파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지극히 기적적인 일로 보고 있다.26)

 

“조선에 복음이 새롭게 들어가 빠른 속도로 발전한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천주님께서 하시는 지극히 기적적인 일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천주님께서 기묘한 방법으로 시작하신 이 일을 당신께서 또한 기묘한 방법으로 완성하시리라고 판단했으며 또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아주 짧은 기간에 그렇게도 많은 외교인들이 교리를 부족하게 조금밖에 못 배운 한 신입 교우에 의하여 개종한 일이나, 겨우 천주교의 가장 초보적인 것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문을 받으면서도 아주 용감하게 끝까지 마음을 굽히지 않은 일, 그리고 감옥에 갇힌 교우들을 사면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명령하게끔 임금님의 마음이 빨리 변화된 일, 또한 마침내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 가며 사제들을 모셔가려고 온 밀사들이 보여준 열성, 더구나 때맞춰 조선 왕실의 한 사람이 북경에 와서 필요한 성물들을 주도면밀하게 직접 챙겨 가져갈 수 있게 된 일, 조선 교우들이 보낸 편지와 질문들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 그들의 신심 깊고 열성적인 정신들, 저는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노라면 복음이 단 한 번도 전해진 적이 없는 조선 백성에게 천주님께서 당신의 손길을 드러내 보이시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천주님께서 당신 일을 마무리해 주실 것이며, 선교사가 조선 왕국에 들어가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막힌 길을 열어주시리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자애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최근 몇 년 동안 당신의 자비하신 눈길을 이 조선 왕국으로 돌리시어, 이제껏 어둠 속에서만 지냈던 이 나라 백성 위에 빛을 던져 주시고, 사람들 눈에는 별로 신통치 않아 보이기에 그만큼 더욱더 놀랍기만 한 그런 방법을 통해서 그들을 평화와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저는 이 나라 백성이 참으로 특별한 방법으로 개종하게 된 사실과 거의 4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진리를 알게 된 과정들과 방법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들이 받아들인 종교를 수많은 반대와 충돌 속에서도 참으로 용감하게 그리고 진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영웅적이리만치 흔들리지 않은 마음으로 끝까지 지켜나간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즉시 ‘이것은 하느님이 친히 하시는 일입니다.’라고 한 출애굽기의 말씀과 ‘오! 하느님의 풍요한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라고 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생각나곤 합니다. … 또한, 성령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 누가 그토록 약하디 약한 도구를 이용하여, … 그토록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신앙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갖게 하는 놀라운 기적을 이루어 낼 수 있단 말입니까? 또한, 성령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면, … 육신과 세속의 유혹을 물리치고 온갖 끔찍한 고문을 받다가 죽게 할 수 있단 말입니 까?”27)

 

구베아 주교의 편지에 드러나는 바와 같이, 한국 교회가 하느님의 섭리로 기적적으로 설립되었다고 평가하는 이유가 잘 제시되고 있다. ① 아주 짧은 기간 안에 많은 외교인들이 교리를 조금밖에 못 배운 신입 교우들이 개종한 일, ② 초보적인 교리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문을 받으면서 아주 용감하게 끝까지 마음을 굽히지 않은 일, ③ 감옥에 갇힌 교우들을 사면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명령하게끔 임금의 마음이 빨리 변화된 일, ④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 가며 사제들을 영입하기 위해 온 밀사들이 보여준 열성, ⑤ 조선 왕실의 한 사람이 북경에 와서 필요한 성물들을 주도면밀하게 직접 챙겨 가져간 일, ⑥ 조선 교우들이 보낸 편지와 질문들, ⑦ 그 편지와 질문 속에 드러난 조선 교우들의 신심 깊고 열성적인 정신들, ⑧ 조선에 한 번도 복음이 전해진 적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조선 백성에게 천주님께서 당신의 손길을 드러내 보이시는 기적적인 일이라고 하였다.28) 구베아 주교는 이러한 자신의 의견을 보편 교회뿐만 아니라 조선 신자들에게도 전하였다. “지극히 위대하시고 선하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신앙으로 불러 주신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에 깊이 감사드릴 것을 먼저 권고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29)

 

또한, 구베아 주교는 북경에 살면서 성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이유가, “하느님의 섭리로 복음이 참으로 기묘한 방법으로 조선 왕국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30)라고 편지를 보내고 있다. 구베아 주교는 사천대목구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제껏 단 한 사람의 선교사도 들어간 적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한 번도 전해진 적도 없는 나라에 지금 천주교가 기적적으로 새로이 전파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북경 교회는 그야말로 뛸 듯이 기뻐하였습니다.”라고 전하였다.31)

 

이렇듯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된 것을 하느님께서 친히 하시는 섭리이며 기적적인 일이고 기묘한 방법이라고 하는 데는 구베아 주교의 신앙이 담겨 있다. 그에게는 하느님의 계시를 바라보는 ‘눈’과 하느님 앞에 충실하려는 자세가 있었다. 구베아 주교가 조선을 어느 선교단이 맡으면 좋을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교황청에 보낸 편지의 “천주님 앞에서 져야 할 책임”32)이라는 표현이 구베아 주교의 자세를 대변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라자로회의 로 신부33)는 한국의 복음화를 기적적인 사건으로 포교성 장관에게 보고하면서, 그 이유로 천 명도 넘는 조선 사람들이 개종한 사실을 들었다.34) 또한, 그는 윤 바오로와 함께 북경에 왔던 수행원 중 관리 한 사람이 세례를 받은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라고 포교성에 보고하고 있다.35) 특별히 윤 바오로가 1790년 조건부로 세례와 견진성사, 성체성사를 받는 감동적인 장면을 라자로회 빌라 신부가 전하면서, 그의 성사 수령의 모습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북경 신자들에게 내렸다는 증언과 더불어, 하느님께서 북경에 있는 신자들 영혼 위에, 그리고 복음이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는 조선 왕국 위에 특별한 축복을 특별한 방법으로 내리고 계시다고 포교성성 추기경 장관에게 보고하고 있다.36)

 

라자로회 빌라 신부는 조선에 선교사를 보낼 것을 로 신부와 진지하게 의논한 내용을 포교성 장관에게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렇게 위대한 사업을 시작하신 하느님께서, 큰 희망을 보이고 있는 이 묘목들을 구원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심으로써, 당신의 사업을 당신이 직접 잘 마무리 지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37) 또한, 빌라 신부는 조선에 성작과 미사 경본, 그리고 예절을 하는 데 필요한 제대의 성석을 비롯한 조선에 있지 않은 물건들을 보내면서, “하느님께서 참으로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시어 시작하신 일을 또한 기적적으로 매듭지으시리라 굳게 믿기 때문에 내년(1791년) 3월에 거룩한 파견을 시도하려고 합니다.”라고 편지를 쓰고 있다.38)

 

이들은 조선의 복음전파와 선교사 파견이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기적과 같은 것임을 확고하게 믿고 있다.

 

2) 부정적 평판

 

마르키니 신부는, 이승훈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한문서적들을 이해하지 못하여 세례를 서둘러 주는 것을 반대했던 선교사들의 입장을 전하면서, 한민족이 지혜롭지 못함을 드러내는 듯한 인상을 갖도록 하였다. 또한 하느님께서 조선에서 시작하시려는 복음화의 불을 약소 평가하였음이 드러난다. “주님께서는 아직 복음의 빛이 들어가지 못한 곳에 그 빛을 전하기 위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약해 보이는 도구를 이용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라고 편지를 쓰고 있다.39)

 

마르키니 신부는 자신이 1790년 12월 30일자로 포교성에 보낸 편지에서 ‘조선 선교가 아주 고무적이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 ‘조선 반도에 신앙이 아주 경이로운 방법으로 들어갔다’는 것에 대하여 의문과 새로운 시각을 갖고, 1793년 11월 3일자로 편지를 보낸다. 이와 유사한 마르키니 신부의 편지 세 편의 내용을 소개한다.

 

“어떤 사람들은 어쩌면 조선인들은 중국인들처럼 남을 아주 잘 속이고 허풍을 떠는 그러한 성품을 지녔을지도 모르니, 이 신입 교우가 하는 보고를 쉽게 말 그대로 모두 믿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이 어떻든 간에 이것은 천주교에 너무도 큰 관심이 있다는 것이므로 열심한 북경 주교는 무관심하게 그대로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40)

 

“이 특별한 사실에 대한 모든 정황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이 순전히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한 신입 교우가 가져온 편지와 그가 늘어놓은 보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북경 주교는 그 신입 교우가 말하는 여러 가지 내용을 듣고 심사숙고한 끝에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또한 거기에 대해서 포교성에 보고하였지만, 저는 그 신입 교우가 전한 내용이 모든 의혹을 말끔히 씻어 버릴 정도로 그리하여 유럽에서 그 사실들을 공론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비중 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럽에서는 지금 그리스도교 국가에서조차 천주교회가 그 빛을 잃어가고 있는 이때, 이러한 사실은 오히려 큰 잡음을 일으킬 소지가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바람과 일치하는 것들을 모두 무조건 믿어 버리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이런 사실이 수도회 사람들에게는 열심히 묵상하고 반성할 수 있는 소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보고해 오는 내용이 교회를 비판하는 자유주의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들의 조소거리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제가 기억하건대 파리의 교황대사 듀나니 주교가 했던 것처럼, 그런 사실을 퍼뜨리기 전에 좀 더 확실하고 권위 있는 소식들을 기다리는 것이 현명했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는 바입니다.”41)

 

“이상이 조선에서 보내온 편지의 내용이라고 하면서 북경 주교가 제게 보고한 내용입니다. 조선에 대한 이러한 소식을 듣고서 참으로 많은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더욱 위안이 되는 것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러한 소식들이 믿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소식들이 확실하다고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소식들이 확실하냐 아니냐 하는 문제보다는 그 저의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더 관심을 두고 싶습니다. 구베아 주교는 그러한 편지 자체가 기적이라든가 또는 그 이전에 보고된 사실들이 모두 믿을 만한 것이라는 것을 이 편지가 충분히 증명해주고도 남는다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 편지들에 대하여 많은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42)

 

이렇듯 마르키니 신부는 조선에서 전개되는 복음화가 하느님의 계시에 의해 진행되고 불붙고 있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이 드러난다.

 

조선 정부 측에서는 한층 더 부정적인 입장에 있었다. 하느님에 의한 기적적인 복음전파가 아니라, 악의 세력이나 반역의 집단에 의한 것이라고 언급할 정도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정도로 나라의 존망이 걱정스러운 상태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악의 뿌리를 제거하고 물리치기 위해서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상태”라고 중국에 보고하고 있다.43)

 

 

IV. 한민족 복음화에 대한 계시의 전달자


1. 하느님 계시에 초대받은 한민족

 

하느님은 당신의 계시를 성령을 통하여 하시지만, 복음적 계시를 전달함에 있어서는 당신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예지자들을 통하여 이루신다. 우리나라의 복음 전달도 같은 양상이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창세 12,2-3 참조), 성조들,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가르치시면서 당신만이 살아계신 참 하느님이심을 알게 하셨다. 당신께서는 약속된 구세주를 기다리게 하시어, 세기에 걸쳐 복음에 이르는 길을 미리 닦아 놓으셨다.44)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 민족에게까지 전달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는 하느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에게 복음이 전달되고 그것이 신앙의 열매 맺으며 아주 특수한 방법으로 복음화 과정은, 하느님이 우리 민족을 복음화로 초대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이러한 여정에서 위에서 언급했던 하느님은 우리민족의 특수성을 간직하도록 이끄시면서, 당신의 창조경륜과 구원경륜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하느님의 복음과 성교회의 가르침을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고, 하느님의 창조경륜과 구원경륜의 신비를 직감하면서, 참다운 천주신앙으로 승화하기 시작하도록 이끄셨다.

 

이러한 하느님의 계시에 응답한 이들이 바로 우리 민족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달한 장본인이며 한국천주교의 설립에 주역을 담당한 이들이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독특한 방식으로 복음의 계시를 준비시키시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가르쳐주고 이끄셨다. 그 방식 가운데 하나로는 책을 통해서이다.45)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으로 하느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이해를 면면히 해오다가, 민족의 신앙 선조들은 책을 통하여 하느님을 완전히 계시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이분 안에서 인생의 답, 민족의 답을 찾았던 것이다. 혈육을 취하신 말씀이시며, 인간들에게 파견된 인간이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하시며 아버지께서 맡기신 구원의 임무를 완수하시는 분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46) 하느님께서는 기묘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과 함께 하시며 우리를 죄와 죽음의 암흑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한 삶으로 부활시키시기 위해 파견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책과 연구와 성찰을 통해 알아듣도록 진리의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47) 구베아 주교는 이런 섭리를 “그래서 저는 천주님께서 기묘한 방법으로 시작하신 이 일을 당신께서 기묘한 방법으로 완성하시리라고 판단했으며 또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달레 신부는 그의 역저 ‘조선천주교회사’에서 “1784년 마침내 조선을 위하여 구원의 날이 밝았다. 그때 인자하신 하느님께서는 천주교 신앙을 이 나라에 결정적으로 심으셨다. 영광스러운 조선 천주교회는 이때 시작되었고, 그 후 여러 차례의 박해와 변천을 겪어 가면서 성장하고 견고하여지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 감격스러운 역사를 이제 서술하려고 한다.”며 ‘조선 민족의 구원’과 ‘영광스러운 조선교회’, ‘감격스러운 역사’라는 표현을 하였다. 특별히 하느님의 섭리가 조선에 복음을 들여보내기 위하여 쓰신 주요한 연장은 이벽이었다고 이어서 쓰면서, 이벽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48) 이점에 있어 다른 선교사들과 다른 입장, 다른 평판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 복음이 새롭게 들어가 빠른 속도로 발전한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천주님께서 하시는 기적적인 일”이라는 표현을 한다. 이렇게 한국에 복음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된 기적적 사건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작품이라고 구베아 주교는 보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작품을 완성함에 있어, 인간의 협조를 구하시는데, 이런 입장에서 구베아 주교는 그 일에 첫 번째로 뽑은 이가 바로 이승훈 베드로라고 보았다. “새 신자가 베드로란 세례명을 받고 바로 그 해에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 사람은 천주님께서 은총을 주신 덕분에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하는 전교자가 되어, 여러 사람을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시킨 다음 그들에게 세례성사를 베풀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을 뽑아 회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런데 회장으로 뽑힌 사람들은 베드로보다 더 열심하게 되었기 때문에, 얼마 되지 않아서 남자 여자 합하여 거의 천 명도 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게 되어, 마침내 새로운 조선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답니다.”라고 포교성 장관에게 기쁜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있다. 즉 구베아 주교는 한국천주교회의 복음화 기초의 역군은 이승훈 베드로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라자로회의 로 신부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썼다.49)

 

“계묘년(1783)에 이승훈이 그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게 되자 이벽이 은밀히 부탁하여 말하기를 ‘북경에는 천주당이 있고 그 천주당에 서양 사람인 선교사가 있으니 자네가 가서 찾아보고 신경을 한 부만 구해달라고 하며, 아울러 영세받기를 청한다면 그 서양 선교사는 반드시 크게 사랑할 것일세. 그러므로 반드시 기이한 물건과 좋은 장난감50)[玩好]을 많이 얻어 가지고 오되 그냥 돌아오지 말게’ 하였습니다.”51) 아직 신앙을 공식적으로 접하지 않은 이벽이 ‘천주당’, ‘서양 선교사’, ‘신경’, ‘영세’, ‘영세를 청함’, ‘성상과 성물’ 등의 이야기를 함은 참으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이벽은 천주교에 대한 상당한 기초 지식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느님의 섭리의 시작을 ‘최초로 세례받은 이승훈’을 출발점으로 하느냐, ‘복음화의 연장으로 쓰여진 이벽’으로 하느냐에 따라 ‘복음화의 한국교회사’에 대한 해석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하다. 한국천주교회의 복음화 기초의 역군인 ‘이승훈은 누구한테 복음화의 영향을 받았는가?’에 대하여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는다면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한편으로 그 답은 〈토사주문〉에 자세히 나타난다. “정약종의 진술에 의하면, 처음에 이벽이란 자가 서양학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이승훈을 준비시켜 (북경으로) 보냈는데, 이승훈은 자기 아버지인 이동욱이 가는 조공 사신 일행에 끼어서 (북경으로) 갔다고 합니다.”52) 이는 황사영의 백서에도 나타난다.

 

 

2. 하느님 계시 전달의 주역들(신앙의 선조들)

 

기적적인 한국교회가 이벽을 통하여 어떻게 시작되고 전개되었는지 자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신앙의 선조들, 특히 이벽은 어떻게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이승훈이 1789년 말에 북당 선교사에게 보낸 편지53)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사람은 이미 예전에 우리 종교에 관한 책을 한 권 발견하고는 그 책을 여러 해 동안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으 니, 그는 천주교에 관한 문제 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까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신앙과 열정은 그가 알고 있는 지식보다 더욱 대단하였습니다.” 즉, 이벽은 천주교(종 교)에 관한 책을 연구하여 신앙에 대한 열정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과 그 열정은 그가 알고 있는 지식보다 큰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벽이 이렇게 천주교의 영향을 받은 것은 당시에 이미 천주교 서적과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가 소리소문 없이 번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54) 1631년 정두원이 북경에서 육 요한으로부터 서양 서적을 받았고, 이수광(1563~1628)이 지은 《지봉유설》에 이미 마테오 리치가 쓴 《천주실의》를 분석하면서, 교황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조직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55)

 

소현세자(1612~1645)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간 유수 생활을 하던 중, 북경에서 70여 일을 지내는 동안 아담 샬 신부와의 교분을 두텁게 갖게 되어, 서양과학 서적, 천주교 교리서, 천구의(天球儀), 성화상 등을 받아 1645년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서학서와 함께 천주학 서적이 학자들 간에 널리 유포되었다.56)

 

이이명(1658~1722)도 북경에서 여러 선교사와 만나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정도이며, 성호 이익(1681~1763)도 그의 저서에서 “천주교인들의 천주는 유교의 상제(上帝)와 다르지 아니하며, 천당과 지옥에 대한 교리는 불교에서 취하여 온 것같이 생각하였으며, 칠죄종에 대두하는 칠극에 대하여도 몇 마디 말하였다.”57)라고 자세히 기술하였다.

 

홍유한(1726~1785)은 이익에게 글을 배웠고, 1770년부터는 천주교에 관한 서적만을 읽으며 종교생활 실천에 전념하였다. “축일표도 없고 기도 책도 없이, 7일마다 축일이 온다는 것만 알고, 그는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에 경건하게 일을 쉬고, 이런 날에는 속세의 모든 일을 물리치고 기도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금육일을 몰랐으므로 그는 언제나 가장 좋은 음식은 먹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으며,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는 본성의 탐욕은 원래 나쁜 것이니 할 수 있는 대로 억제해야 한다는 이유를 댔다.”58) 이렇듯 주일과 금육일(소재날)에 대한 ‘날짜와 요일’은 몰랐지만,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하는 것과 금육재에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59) 그뿐만 아니라, 홍유한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기 위하여 13년 동안 소백산 고적한 곳에서 묵상과 기도에 전념하였다고 다블뤼 주교는 비망기에서 밝히고 있다.60)

 

이벽이 명오(明悟)가 열리는 1760년대 후반은 이미 천주교에 관한 서적과 다른 앞선 사람(성호 이익, 홍유한)들의 영향이 있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벽이 이러한 영향을 받아 신앙을 성숙시켰음이 틀림없다. 이미 《지봉유설》, 《천주실의》, 《칠극》과 같은 책들이 회자되었다. 이런 서적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부류가 성호좌파61)였는데, 이벽도 이 부류에 속하였다. 이 성호좌파의 주역을 맡고 있었던 이가 권철신(1736~1801)이었다.62) 이들이 함께 모여 연구하고 토의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63) 성호 이익이 죽은 뒤에 어른 역할을 하는 권철신이 학문의 장(場)을 열면, 이들은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였다.64) 이런 모임이나 나눔은 한 번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있었다.65)

 

이벽이 그동안 연구하고 닦아오던 바를 신앙으로 성숙시켜 승화하게 된 계기를, 달레는 1777년 ‘강학회’(講學會)로 보고 있다.66) 이 모임에서 i) 하늘, 세상, 인성 등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탐구하였고, ii) 예전 학자들의 의견을 끌어내어 토의하였으며, iii) 성현들의 윤리서를 연구하였고, iv) 끝으로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지은 철학, 수학, 종교에 관한 책들을 검토하고, 그 깊은 뜻을 해득하기 위하여 가능한 온 주의를 집중시켰다. 결국은 서학으로 강학을 정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모임에서 천주교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얻기에는 부족하였으나,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움직여, 아는 것을 모두 실천하기 시작하여, 홍유한이 1770년부터 실천한 주일 지내는 법과 금육재에 대한 것을 준수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강학회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천주교 교리를 깊이 연구하고 토론하면서67) 차츰 신앙으로 승화되었다. 그중 하나가 이벽과 정약전, 정약용이 1783년에 나누었던 유명한 ‘선상토론(船上討論)’68)이다.

 

이렇게 강학회를 통해 학문적 차원에서 신앙적 단계로 승화된 이들의 행보는 멈출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학문적인 연구와 토론의 단계를 거쳐, 초보적인 신앙의 실천에서 벗어나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한 작업으로 직접 천주교를 접할 수 있는 중국(북경)을 향해 눈을 돌리고, 그곳에서 천주교를 가르쳐주고 지도해줄 서양 선교사를 만날 기회를 엿보다가, 그 기회를 찾았다. 달레는 이를 “하느님께서는 그렇게도 열성으로 진리를 찾고 있던 이 정직한 영혼들의 뜨거운 소원이 실현되기를 마침내 허락하셨다.”69)라고 표현한다. 달레가 말하는 ‘이 영혼들’이란 누구인가? 그들은 1777년에 강학회를 통해 교리를 연구하고 토론하였던 이들이었고, 그들 가운데 이벽이 중심인물이었다.

 

 

3. 하느님 계시 전달자들의 노력

 

이미 나름대로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 이벽은 보다 나은 수준의 천주교를 믿고 있던 북경에 대한 열망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희망과 열망을 하느님은 어떻게든 채워주셨다. 이벽은 이승훈을 찾아가70)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가 북경에 가는 것은 참된 교리를 알라고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훌륭한 기회일세. 참 성인들의 교리와 만물의 창조주이신 천주를 공경하는 참다운 방식은 서양인들에게서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르렀네. 그 도리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것 없이는 자기 마음과 자기 성격을 바로 잡지 못하네. 그것이 아니면 임금과 백성의 서로 다른 본분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것이 없으면 생활의 기초가 되는 규칙도 없네. 그것이 아니면 천지창조며 남북극 원리며 천체의 규칙적 운행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그리고 천사와 악신의 구별이며,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이며,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며, 죄를 사하기 위한 천주성자의 강생이며, 선인은 천당에서 상을 받고 악인은 지옥에서 벌을 받는 것 등, 이 모든 것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이벽이 말하는 ‘그 도리’란, ‘성인들의 교리요 천주를 공경하는 참다운 방식’이었다. 이벽은 “그 도리가 아니면 ∼ 할(알) 수 없다.”라는 단언 명제로 표현하며, ‘천주교의 도리’를 ‘신경’으로 고백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고백을 들은 이승훈도 몇 권의 책을 읽고 본인이 해야 할 임무를 기쁘게 받아들인다. 이때 이벽은 “자네가 북경에 가게 된 것은 천주께서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코자 하시는 표적일세. 북경에 가거든 즉시 천주당을 찾아가서 서양인 학자들과 상의하며 모든 것을 물어보고, 그들과 교리를 깊이 파고들어, 그 종교의 모든 예배행위를 자세히 알아보고, 필요한 서적들을 가져오게. 삶과 죽음의 큰 문제와 영원의 큰 문제가 자네 손에 있으니, 가서 무엇보다도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라고 당부하였다.

 

이렇게 하느님의 섭리를 나름대로 알아들은 이승훈은 1783년 말경 북경을 향해 출발하여, 그다음 해에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리라는 희망으로 베드로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라몽 신부71)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천주님께서 그를 조선교회의 반석으로 예정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그가 신앙의 문을 처음 열었으므로 그에게 성 베드로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72)

 

이승훈 베드로는 조선에 돌아와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주었고, 이벽은 권철신에게 세례를 주면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복음화의 새로운 계기를 맞이하였다. 이들은 성호좌파에 속하는 학자들로서, 강학회에서부터 서학을 천주 신앙으로 승화시켜 나아갔던 이들이었다.

 

이벽과 함께 했던 영혼들은 교회법에서 말하는 ‘예비신자’73)로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완벽하고 영웅적으로 응답함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예비신자였지만, 성령의 감도를 받아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민족 복음화의 지도자이며 선구자로서, 복음화의 역군으로서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천주교회가 기초를 놓고 형성되는 과정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로서, 오랫동안 준비하여 완성한 하느님의 계획이고, 이를 위해 성령께서 특별한 예지자들을 선택하여 역사 하시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74) 이렇게 부르심을 받아 영웅적으로 충실하게 자기의 열성과 노력을 다한 이들을 한국천주교회의 Fondatori(창립자, 설립자, 창설자, 창설주역)라고 할 수 있다.

 

 

Ⅴ. 하느님 계시에 응답하는 한민족


1. 긍정적 평판


1) 그리스도를 증거함

 

구베아 주교는 1790년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증거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온갖 고문과 박해와 형벌 속에서도 마음을 굽히지 않고 외교인들을 감화시키는 모습, 용감하게 복음을 전하며 뜨거운 열정으로 친척과 친구들을 회개시키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75) 그뿐만 아니라 조선 교우들은 꿋꿋한 신앙을 가졌다고 보고하고 있다.76) 구베아 주교는 사천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윤 바오로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는 천주교에 대한 사랑에 불타오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들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의 신입 교우들은 온갖 두려움을 말끔히 씻어버릴 수 있게 되었으며, 어떤 위험 속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라고 전하고 있다.77) 실제로 많은 조선 신자들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온갖 고문들을 견디어 냈으며, 자신의 신앙생활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 없도록 인적이 드문 곳이나 산속으로 피난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신앙심이 깊은 처녀들과 과부들은 좋은 자리로 시집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혼사를 꺼리기도 하였으며, 복음 때문에 귀양 갔던 사람들도 귀양지에서 예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열정적으로 그리스도와 신앙을 설파하였다고 전하였다.78)

 

쁘아로 신부도 이점에 대하여 “조선 천주교인들의 항구함과 꿋꿋함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몽둥이로 맞다가 숨짐으로써 참으로 훌륭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79)라고 보고하고 있다. 라자로회 로 신부는 이렇게 신자가 된 이들은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는데, 이들은 그 이전 6년 동안 꾸준히 그리스도교에 대해 많은 토론을 해왔다고 보고하고 있다.80) 1784년 세례를 받았으니, 그 이전 6년 동안 준비하였다는 점으로 보아, 그 연도는 1779년부터임을 표현하고 있다. 이를 1784년 이후 6년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쁘아로 신부는 또한 천주교를 배우기 위하여 애쓰는 조선 교우들의 부지런함과 성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살려고 하는 열성적인 모습은 가히 ‘기적’이라고 하였다.81) 구베아 주교는 마르키니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국황제 생일 때 온 예비신자가 깊은 신심과 신앙에서 세례를 청하여 세례성사와 견진성사와 고해성사 및 성체성사를 받았다는 것을 보고하였다.82) 라자로회의 빌라 신부는 1790년 1월에 조선 신자들이 보낸 장문의 편지를 언급하면서, 그 편지는 하느님의 특별한 손길과 은총이 물씬 풍기는 내용이라고 전하고 있다.83)

 

구베아 주교는 성교회를 향한 조선 신자들의 열성과 활동은 초기 교회 신자들과 많이 닮았기에, 조선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더 크게 확장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밝다고 하였다.84)

 

라자로회 빌라 신부는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들은 또 다른 선교사가 되어 세례를 주어 신입 교우가 천 명이 넘었으며, 그중에서 남자 12명과 여자 12명을 회장으로 임명하였다고 전하고 있다.85) 이에 대해 마르키니 신부도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86)

 

2) 합의체적으로 겸손하게 교회 운영

 

구베아 주교는 조선 교우들이 한자리에 모여 복음 전파 과정에서 일어난 일과 교회에 필요한 사항들을 묻고 요청하는 바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87) 특별히 조선 교우들은 구베아 주교가 보낸 서한88)을 감동으로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무지와 한계를 깨달아 한자리에 모여 사제를 모셔오기 위해 모든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기로 했음을 전하고 있다.89)

 

쁘아로 신부는 ‘윤’씨 성을 가진 사람이 조선의 작은 교회가 갖가지 의문점들90)에 대하여 답을 얻기 위하여 교회의 이름으로 계획을 세우고 모든 경비를 마련하여 파견된 사람이라고 전하고 있 다. 라자로회 로 신부는 조선 사신의 수행원으로 온 이는 이승훈과 그 밖의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문제를 상의하기 위하여 북경에 파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91) 또한, 쁘아로 신부는 조선 사람들은 누군가 선교사로 가기를 원하면 입고 갈 수 있는 옷을 가지고 와서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청하기까지 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92) 라자로회의 빌라 신부는 윤 바오로가 가지고 온 편지에서 조선 천주교회의 발전 과정을 처음부터 낱낱이 보고하고, 성사를 볼 수 있도록 사제를 보내달라는 내용과 다른 지침도 청하는 내용을 제시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93) 마르키니 신부도 같은 내용으로 포교성에 보고하였다.94) 라자로회 빌라 신부는 1791년 초에 윤 바오로가 가지고 온 편지는 “조선 왕국에 사제들을 파견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의논하고 모든 일을 맡긴다는 뜻에서 조선의 새 교회가 발행한 위임장도 함께 갖고 왔다.”라고 전하고 있다.95) 1797년 구베아 주교의 편지에 의하면, 조선의 교우들은 그 편지에 자신들의 영혼을 돌보아 줄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하였다고 전하고 있다.96)

 

3) 교회와 합체하려던 노력

 

조선 교우들의 활동을 보면 그들은 교회와 합체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에 대한 교회법적 이해는 다음과 같다. 교회법은 교회에 속한 사람을 전제로 한다. 교회에 속한 이들은, 교회와 합체97)되고 친교 안에 있는 이들로서,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거나 이 교회에 수용된 자들”98)이다. 하지만 교회법은 한편으로 모든 사람이 교회법의 적용을 받도록 지향하고 있다. 교회의 모든 신자의 의무 중 하나가 전 인류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99) 이 복음 전파의 현세적 결실은 가톨릭 신자가 되어 교회와 합체하는 것이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합체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하느님 백성을 구성하며 교회에 합체하여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을 걷게 된다.100)

 

이처럼 그리스도와 합체되고 하느님 백성이 되며 교회와 합체되는 것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 교회법은 “세례로 사람들은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며 불멸의 인호로써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교회에 합체된다(Christo configurati Ecclesiae incorporantur).”101)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합체는 ‘결합’(configuratio)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교회와는 ‘합 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보이는 조직체와의 합체임을 분명히 구별하기 위함이라 볼 수 있다. 세례, 그리스도와 합체, 하느님의 백성이 됨은 세례로써 이루어지지만 보이지 않는 영역이다. 그러나 교회와의 합체는 보이지 않는 영역을 가시적인 영역으로 전환해 주는 구체적인 용어이기도 하다.102)

 

이벽이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면서 세례를 받고 돌아오기를 바랐던 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합체되고, 교회와 합체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의 행동은 성령에 감도되어 교회에 합체되기를 명백한 의지로 소망하고 행동에 옮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103)

 

4) 성사 수령에 정성을 다함

 

구베아 주교는 매우 열심한 마음과 열정으로 성사를 받는 조선 교우의 모습을 보며 중국 사람들과 유럽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104) 구베아 주교는 또한 중국황제의 만수(萬壽) 때에 북경에 온 사신 일행으로 온 예비신자 한 사람이 조선의 신자들이 보낸 편지들을 안전하게 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성무(聖務)를 집전하는 데 꼭 필요한 성물들을 조선으로 안전하게 가져갔음을 보고하고 있다.105) 라자로회 로 신부는 윤 바오로가 세례받을 때, 참석했던 사람들이 거룩한 기쁨에 북받쳐 눈물을 흘릴 정도로 매우 열심한 마음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106) 이를 직접 집전한 빌라 신부도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빌라 신부는 윤 바오로가 성사를 받는 모습에 완전히 압도되어 버렸으며, 며칠 동안 하느님의 은총이 북경의 천주교 신자들 위에 내렸다고 증언하고 있다.107) 또한, 빌라 신부의 편지에 의하면, 결코 흔치 않은 올바른 열정으로 세례 성사와 견진 성사,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모두 9월 한 달 동안 서로 다른 날에 각각 받았다고 증언하고 있다.108)

 

또한, 구베아 주교는 조선 교우들이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위안을 받고는, 그를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 양 맞이해서 공경하였다고 전하고 있다.109)

 

5) 철저한 교리 준비

 

구베아 주교는 조신 교우들은 신앙은 꿋꿋하지만 책이나 교리에 정통한 사람이 부족하기에, 피상적으로만 그리스도 교리를 알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110) 이에 대해 예수회 쁘아로 신부는 이승훈을 지칭하며, 북경에 체류하면서 선교사들로부터 많이 배우지 못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많은 책을 읽으며 준비한 다음, 사도로 활동하였다고 전하면서, 교리 수준이 피상적인 수준을 넘어서 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111)하면서, 중국에 사신 가운데 일행으로 온 윤 바오로에 대하여, “그 사람은 나이가 많은 이곳의 회장들만큼이나 성교회에 대하여 많이 배워 알고 있었습니다.”112)라고 전하고 있다. 라자로회 로 신부가 중국에 사신의 수행원으로 온 ‘윤’씨 성을 가진 이는 재주도 많고, 여러 가지 신앙의 원리들과 한문을 대단히 잘 아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신자들의 교리 지식이 낮은 수준은 아니었음이 드러난다.113) 라자로회의 빌라 신부는 많은 이가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이들은 즉시 다른 선교사가 되어 하느님을 진심으로 믿고 교리를 배우는 사람들이 통회할 수 있도록 한 다음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전하고 있다.114) 또, 그는 조선에서 신입 교우들이 편지로 가져온 내용을 종합하여 보면, 1790년 이전에 이미 “교회를 제대로 충실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115)

 

그런데도 조선 교우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의 교리 지식이 부족하다는 겸손함이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한국의 예법(禮法)[동방예의지국]이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구베아 주교가 사천대목구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들은 여러 책을 읽는 동안에 천주교에는 자기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과 실행에 옮기기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 신자들은 여기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과 그 밖의 다른 기본적인 것들을 북경 교회에서 알아오기 위하여 자기들이 쓴 편지들을 북경 교회에 전달할 한 사람을 북경으로 파견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116)

 

조선 교우들은 구베아 주교가 보낸 서한을 읽고 자신들이 성교회의 교리를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 그리고 성사와 그 밖의 성교회의 양식들을 받기 위해서는 사제가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음을 전하고 있다.117)

 

라자로회 빌라 신부의 편지에 의하면, 1790년 북경에 왔던 윤 바오로가 자신이 받은 세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며 조건부 세례를 받는 것을 보면 철저히 자신의 행한 신앙 행위들에 관하여 점검을 받고자 하는 면이 있었음이 드러난다.118)

 

6) 한민족의 지혜

 

구베아 주교는 조선 교우들이 북경교회와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사신들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 틈에 교우 몇 명을 몰래 끼어 북경에 파견했음을 전하고 있다.119) 쁘아로 신부는 중국 황제에게 새해 인사차 북경에 온 조선 사람들 일행에 끼여 조선 신자 한 명이 찾아왔는데, 그 사람의 성은 ‘윤’120)씨로, 그는 조선 교회가 갖는 의문점을 명주 천에 써서, 옷의 안감에 숨겨 왔다고 전하고 있다.121) 이 사람은 중국에서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 상인의 자격을 조선에서 돈을 주고 산 다음 조선 사신의 수행원으로 북경에 왔다고 라자로회 로 신부는 전하고 있다.122) 이외에도 쁘아로 신부는 중국황제 80회 생일에 조선 사신 가운데 한 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123) 이 사람은 조선 임금이 쓸 여러 가지 물품들을 사오는 임무를 맡은 사람으로서, 중국 세관의 검열을 받지 않는 특혜가 있었기 때문에, 교회서적들과 상본들 그리고 미사 봉헌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무사히 조선에 가지고 갈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124) 1791년 라자로회 빌라 신부의 편지에 의하면, “조선 교우들은 조선에 사제들을 파견하는 일을 실행에 옮기는 일에서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라고만 생각되어 왔던 갖가지 어려움을 다소 수월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성교회를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소식들을 가져왔으며 아울러 성교회의 자녀들이 4천 명이 될 것이라는 소식도 가져왔습니다.”라고 전하고 있다.125)

 

 

2. 부정적 평판

 

위와 같은 한국천주교회 초창기에 대한 긍정적인 평판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평판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이가 마르키니 신부였다. 그는 조선의 복음화가 아주 과장된 것이었으며,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지 않으면 복음화는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하는 등, 조선의 복음화에 관한 그의 평판은 아주 부정적이다. 그는 이러한 부정적 견해를 갖고 교황청에 조선 교회에 대해 보고하였다.126)

 

“추기경님께 보내드렸던 또 다른 편지에서 상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조선 선교에 대하여 했던 이야기들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3년 전에 가졌던 희망을 잃고 말았다고 전하면서, “북경 주교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조선 사람들에게 철저히 속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라고 쓰고 있다.127) 그 이유는 사전에 미리 선교사를 맞이할 시간이나 방법에 대하여 조선 교우들과 합의한 후, 북경 주교가 조선에 선교사를 보냈지만, 조선 교우들이 선교사를 모셔가지 않았다는 것과 북경에 오는 조선 사람들 가운데 교우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128) 이와는 달리 구베아 주교는 같은 상황에 대해, “조선이 광란에 휩싸여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한다.129)

 

구베아 주교는 “조선 선교사 주문모 신부가 체포되어 심문과 고문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매우 잔혹하게 처형되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는 매우 영광스럽고 매우 아름답게 신앙을 고백하면서 마지막 생명의 숨이 다할 때까지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130)

 

조선에서는 1791년 진산 사건으로 윤지충과 권상연이 체포되어 고문과 협박 및 회유를 당하면서도 자신들의 온몸을 바쳐 천주교를 포기하지 않고 목숨을 바쳐 참수를 당하였다. 마르키니 신부는 그들은 천상 구원자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과 항구함과 사랑을 증거해 보였다는 구베아 주교의 편지를 인용하여 포교성에 보고하는 듯하고131), 조선에서 보내온 편지나 구베아 주교의 편지에 대하여 믿을 만하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편지의 내용을 의심하며 조선 사람들의 저의, 즉 선교사를 영입하려는 것이 무슨 이익을 얻으려는 목적이 아닌지 의심을 품고 있다. 그 이유는 어디나 사기꾼이 있고, 아시아 사람들은 아주 쉽게 기만하고 위선적인 행동을 하고 허풍을 떠는 습관이 있으며, 특별히 사기를 치는 일에 각별한 재주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중국이 그 본거지라고 전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에 사제를 보내어 복음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지금까지의 정황을 보아 아직 실망상태라고 전하고 있다.132)

 

한편, 조선 정부는 박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평판을 갖는 것은 당연하였으며, 이를 합리화하고 설득하고, 국제적으로도 이를 드러내려고 하였다. 그래서 조선 정부에서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이라 여기고, 흉악한 무리가 공부하는 것으로서 하늘을 모독하고, 성현(공자와 맹자)들을 업신여길 뿐 아니라, 임금과 부모를 업신여기고, 제사를 없애며 사당과 신주를 치워 버리며 천당이다 지옥이다 하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을 속이고 얼을 빼 판단력을 흐리는 집단으로 여겼다. 천주교 신자들은 세례를 통하여 집단을 이루고, 책들을 몰래 숨기고 다니며 부적(符籍)이나 참어(讖語)처럼 믿으며, 여자들을 모아 짐승 같은 짓을 한다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같은 집단 내에서 ‘신부’나 ‘교우’라고 부르고 ‘세례명’을 지어 부르면서 서로 찾아다니거나 비밀리에 선동하는 이들로 생각했다.133)

 

초기의 신자(창립주역)들은 부모를 버리고 못된 무리와 손을 잡고, 자기들이 배운 술책으로 나라의 풍속을 바꾸려 하였다고 하면서, 천주교 금지령을 더욱 강화하자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으며 반역을 꾀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즉 정부 측에서는 천주교도를 차츰 반역자로 몰아갔던 것이다.134) 기존에 전해지던 바와 달리, <토사주문>에서는 이승훈이 들여온 천주교 서적들을 이가환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퍼뜨렸다고 지적하면서, 이가환은 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고 2품의 벼슬도 지낸 경력이 있다는 것도 전하고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135)

 

또한, 신자들을 인륜과 법을 말살시키고 나라에 반기를 들려고 하는 역적의 무리라고 중국에 보고하고 있다. 그러면서 조선 신자들이 겉과 속이 다르며 오랑캐 같은 자들로서 사악한 천주학을 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엉뚱한 생각을 품고서 호시탐탐 변란을 일으킬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보고하였다.136)

 

조선 정부는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 특별히 황사영의 대박청래(大舶請來) 사건을 나라를 전복시키려는 대반역죄로 간주하면서, 천주교 신자들을 반역의 무리라 확신하게 되었다.137)

 

 

Ⅵ. 하느님의 계시를 신앙의 증거로 완성하는 한민족


1. 박해상황에서도 신앙증거

 

조선에서의 박해에 대한 부정적인 평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에 누구나 인지하던 바이기 때문이다. 그 실상을 어떻게 보고하고 전하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토사주문〉에 조선 정부가 어떻게 박해가 시작되었는지 나타난다. “한성부에서 사악한 무리가 주고받은 편지들과 책들을 찾아내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증거로 해서 비로소 국문(鞠問)을 하며 사건의 진상을 조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의정 대신이 의금부와 사헌부와 사간원의 여러 신하와 함께 모여 그들을 심하게 꾸짖고 책망하면서 사실을 꼬치꼬치 캐어 물었다.”라고 중국에 보고하고 있다.138) 브뤼기에르 주교는 1788년에 조선의 형조판서가 김범우를 외국 종교를 전파했다는 이유로 체포했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김범우가 체포되었을 때 여러 신입 교우들이 자신들도 천주교를 전파했노라고 자수했다고 전했다. 이것이 조선 박해의 시초인데 천주교 신자들은 겁을 먹기는 고사하고 더욱 용감해졌다고 전하였다.139)

 

구베아 주교는 1790년 편지에서 조선에서 신자 수가 증가하자, 조선 임금과 대신들이 알게 되었고, 결국 박해가 일어나 신입 교우들이 체포되었으며, 조선 임금은 새로운 종교인 천주교를 금지한다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포교성성에 보고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박해자들을 지옥의 모든 세력이라고 표현하며, 이들이 갓 태어난 조선 교회가 피어나지 못하도록 길길이 날뛰었다고 보고하였다.140)

 

예수회의 쁘아로 신부는 조선의 소식을 포교성에 전하면서, 이승훈이 천 명도 넘는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세례를 베풀었을 때, ‘환상 속에 살고 있던 지옥의 원수들’이 박해를 일으켰다고 표현하고 있다.141) 라자로회 빌라 신부는 조선의 임금(정조)이 천주교 신자들의 용기를 알고는 새로운 종교를 연구하는 일을 더는 말라고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천주교회를 금하고 조선의 전통 종교를 장려하는 포고문을 반포하는 것으로 첫 번째 박해를 마무리 지었다고 보고하고 있다.142)

 

북경교회와 보편교회는 조선에서 일어난 박해로 말미암아 연락이 끊기면서 혼란을 겪었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서 일어난 광란 때문일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의 예상은 적중하였다. 1794년 11월 편지에서 1791년 진산 사건으로 인한 두 순교자(윤지충, 권상연)의 피가 더 많은 신자를 불러 모으며 풍성한 결실을 보았다고 전하면서, 절절한 시기에 두 순교자의 고귀한 신앙심과 법정에서 대답한 내용, 순교 상황이 초대 교회의 상황과 얼마나 비슷한지를 정리하여 보내기로 약속하며 편지를 마감하고 있다.143) 한편으로 마르키니 신부는 구베아 주교로부터 받은 내용144)을 바탕으로 조선의 박해를 자세하게 포교성에 전하고 있다. 조선의 신입 교우 두 명(지황과 박 요한)이 조선 교우들이 보낸 편지를 갖고 북경에 왔는데, 그동안 극심한 박해로 2년 동안 어떤 교류도 서신 왕래도 할 수 없었다고 전하면서, 박해의 원인은 조선 교우들이 제사를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1791년 북경 주교가 정해준 방침대로 죽은 선조들의 신주를 불사르고 부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에서 많은 이가 체포되고 잔인한 고문을 당하였다고 전하였다.145)

 

구베아 주교는 1796년 편지에서 그해 1월에 사신으로 온 조선인을 통해서 조선의 심한 박해로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한 사람도 북경교회를 방문하지 못했다고 전하면서, 조선의 임금이 대신들에게 천주교를 반대하라고 명령했다고 보고하였다.146) 구베아 주교는 또한 박해자들이 회유와 협박의 방법으로 배교를 시키도록 지시하였다고도 전하였다.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천주교 신자들은 자기들이 믿는 종교를 위하여 죽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것은 천주교에서는 그렇게 죽은 사람들을 나중에 성인으로 찬양하고 받들어 모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주교 책들을 보면, 천주교 신자들을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천주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만큼 더 많아지게 된다고 하더라.” 이런 회유도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배반하게 하려고 잔혹한 고문 방법을 썼으며, 지방에서는 수도보다 더 가혹하게 천주교 신자들을 다루었다고 전하고 있다.147)

 

 

2. 순교로 신앙증거

 

쁘아로 신부는 조선 천주교인들의 항구함과 꿋꿋함에 경탄하며, 그들 가운데 기쁜 마음으로 몽둥이로 맞다가 숨짐으로써 참으로 훌륭한 순교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보고하였다.148) 라자로회 빌라 신부는 조선에 박해가 있었다고 전하면서, 조선 신자 60명이 배교하느니 차라리 무시무시한 형벌을 받기를 원하였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은 형벌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 사람은 자신이 죽기 열흘 전에 자기가 죽을 날을 미리 알려주었다고 한다.149) 마르키니 신부는 조선에 박해가 일어났는데, 박해 동안 두 사람이 고문을 받다가 목숨을 잃었으며, 그들은 죽기 전에 자신들의 죽음을 예언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예순 명의 신자들은 신앙을 부인하기보다는 차라리 주리를 틀리는 등의 갖가지 형벌들을 받는 것을 기뻐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마르키니 신부는 조선 임금이 포고령을 내려 조선에서 천주교를 금하는 것과 조상에 대한 제사 의무를 충실히 지켜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고 전하였다.150)

 

1791년에 두 명의 조선 신자가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사르고 부수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여러 가지 회유의 제안을 받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목숨을 바치는 쪽을 선택하여 참수당하였다는 구베아 주교의 보고를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에 전하였다.151) 구베아 주교는 두 명의 순교자가 흘린 피는 갓 태어난 조선 교회에 신자들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152) 구베아 주교는 특별히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에 대하여 1797년 사천대목구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어떻게 박해가 이루어졌으며, 어떤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는지, 특별히 그들의 순교 뒤의 기적적인 일들, 그리고 그들의 순교 평판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설명하였다.153)

 

그리고 1791년 12월 7일에 그리스도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은 조선 신자들 명단이 이어진다. 외사촌 간이었던 권 야고보(41세)와 윤지충 바오로(33세)에 대한 사형 선고문은 매우 장황하였다. 그들은 외래 종교를 신봉하는 자들, 자기 나라 종교를 멸시한 자들, 조상 제사를 거부하는 것을 방조한 자들로 취급되어 죽음을 당하였다고 보고되었다.

 

그리고 1795년 6월 28일에 고문과 형벌을 받다가 세상을 떠난 이로 윤 바오로(36세)154), 지 사바(29세)155), 최 마티아(35세)156), 그리고 똑같은 그리스도 신앙 때문에 귀양을 간 사람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로 김범우 토마스157), 이승훈 베드로158)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159) 브뤼기에르 주교는 1801년 신유박해는 조선 왕국 개국 이래 가장 큰 참상이었다고 전하며, 이때에 고관들, 궁인들과 궁녀들, 선비들, 양반들, 부자들, 장인들, 노동자들, 장사꾼들, 잡화상들, 여자들, 어린이들을 가릴 것 없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목으로 형벌과 죽음을 당하였으며, 모든 백성이 수군거렸고 모두 고통을 겪었으며 끝이 안 보이는 무자비한 폭거를 비난했다고 전하고 있다.160)

 

브뤼기에르 주교는 또한 주문모 신부와 관련된 자세한 박해상황과 순교의 장면소개, 순교에 대한 평판, 신유박해 때 140여 명의 순교자와 400명의 유배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며, 그 이후에도 여러 박해가 있었지만 확실한 정보는 없다고 전하고 있다.161)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교회가 짧지만, 가장 위대한 교회들의 영광을 이미 압도했으며, 신자 1만 명의 조선교회가 한 해 동안에 배출한 순교자들과 증거자들의 숫자는 여러 나라 교회가 한 세기 동안 배출한 숫자보다 많다고 칭송하였다.162)

 

그리고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신자들은 스스로 동족의 순교에 관해서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겼다고 하면서, 1811년 조선 교우들이 교황님께 올린 편지를 그 근거로 들었다. 그리고는 자세한 내용을 프랑스 후원회원들에게 전해주었다.163)

 

 

Ⅶ. 하느님의 계시로 기적적으로 세워진 한국천주교회


1. 하느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한국교회

 

신앙의 선조들이 신앙을 갖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있지만, 가장 큰 동기는 성령의 감도에 의해서이다. 누가 가르쳐주거나 전해준 신앙이 아니라, 스스로 서학을 공부하다가 천주학을 발견하였고, 그 안에서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그 신앙은 세례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신앙을 혼자서 누리지 않고, 다른 이에게 전하고 나누며 성장시켜 갔다. 이러한 모습을 구베아 주교는 ‘하느님의 섭리’이며, ‘하느님께서 기적적으로 하신 일’이라고 표현하였다.

 

북경 주교 구베아 주교가 1790년 포교성성에 보낸 편지와 1797년 8월 15일에 사천 감목대리 디디에르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에 복음이 새롭게 들어가 빠른 속도로 발전한 것을 보면, 그것은 전적으로 천주님께서 하시는 지극히 기적적인 일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천주님께서 기묘한 방법으로 시작하신 이 일을 당신께서 또한 기묘한 방법으로 완성하시리라고 판단했으며 또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164), “지극히 자애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최근 몇 년 동안 당신의 자비하신 눈길을 이 조선 왕국으로 돌리시어, 이제껏 어둠 속에서만 지냈던 이 나라 백성 위에 빛을 던져 주시고, 사람들 눈에는 별로 신통치 않아 보이기에 그만큼 더욱더 놀랍기만 한 그런 방법을 통해서 그들을 평화와 구원의 길로 이끌어주셨습니다.”라고 조선 교회에 복음이 확산되고 있음을 감동적으로 전하면서, 이는 ‘하느님의 섭리’이며, 이 섭리가 기적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165)

 

이처럼 구베아 주교는 분명히 조선교회가 정착·발전되어 가는 과정이 ‘하느님의 기묘한 방법’이며 ‘하느님께서 하시는 기적’이라고 밝히고 있다.166) 이는 신앙의 선조들이 성령의 감도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기적적으로 한국교회를 설립하는 기반을 놓았음을 밝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파리외방전교회에서도 하느님의 섭리와 이에 응답한 한국인의 모습에 놀라워하였다. 윤민구 신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다블뤼를 조선에 파견하였던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한 번도 선교사들이 들어가 천주교 신앙을 전한 적이 없는데도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 와서 영세한 사실에 크게 놀라워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역시 선교사의 도움이 전혀 없는 가운데서도 조선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생겨나 마침내 천주교회까지 탄생한 것과 조선 천주교회 신자들 스스로 결단을 내려 그들의 대표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한 사실, 그리고 그 이후 5년 동안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줄기차게 간청하고 노력한 끝에 마침내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모셔갈 수 있었던 것과 끊임없이 일어나는 박해에도 조선 천주교 신자들이 끈질기게 신앙의 맥을 이어가는 사실 등을 매우 놀라워했던 것 같다.”167)

 

이렇게 많은 이가 한국교회가 기적적으로 설립되어 발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을 ‘놀라운 하느님의 섭리’에서 찾은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이는 하느님 섭리(사랑)에 대한 신앙고백이며 증거이다. 이러한 신앙 고백과 증거 뒤에는 두 가지 원리가 있다. 하나는 이 모든 섭리를 이루시고 기적을 베푸시는 하느님이며, 다른 하나는 이러한 하느님의 섭리에 응답하는 인간의 존재이다.

 

 

2. 한민족 복음화에 대한 평판


1) 긍정적 평판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 복음이 처음 들어간 것은 “성교회가 매우 기뻐할 대단한 일”이라고 하면서 교황청에 보고하고 있다.168) 그리고 예수회의 쁘아로 신부는 조선의 복음화를 ‘반가운 소식’으로 평하면서, “아마도 포교성은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위로를 받으리라 생각한다.”169)라고 하였다. 라자로회 로 신부는 조선에서 천 명도 넘는 사람이 개종한 소식을 접하고는 “저는 올해에 있었던 기적적인 사건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교황청에 보고하고 있다.170) 그리고 라자로회 빌라 신부는 조선에 복음이 들어간 것은 아주 흥미로운 소식171)이라고 평하고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프랑스 리옹 《전교후원회 월보》 편집자와 전교후원회원들에게 보낸 편지 추신에서 조선 천주교회 현황을 알리는 정확하고 자세한 보고서를 접하고 그중에서 흥미진진한 사건을 간추렸다고 하면서, 조선교회 초창기를 ‘건설적이고 감동적인 사건’이라 표현하였다.172) 또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의 편지에서 경이로운 방법으로 그리스도교가 조선에 전파된 이야기를 전하였다.173)

 

브뤼기에르 주교는 하느님의 섭리로 사랑스러운 자녀가 된 조선 교우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조선 신입 교우들은 말씀의 빵을 받아 먹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174) 그러면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경이로운 열성으로 선교사를 모시려는 조선 교우들을 칭찬하면서, 조선 선교의 앞날은 밝다고 전하였다.175)

 

2) 부정적 평판

 

마르키니 신부는 조선의 복음화 소식을 단순히 ‘보내온 소식’이라고 하면서, “유일하게 흥미를 끄는 것은 주님께서 중국과 인접한 왕국 조선 반도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어떤 기묘한 방법을 쓰시기를 원하고 계시는가에 관한 것입니다.”라고 편지를 시작하고 있다.176) 그는 조선에 대해 언급하면서 아무런 느낌이나 수식어 없는 글을 전개하고 있다. 마르키니 신부는 하느님의 기묘한 방법이나 사건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어떤 기묘한 방법을 쓰시기를 원하는가를 ‘확인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느님의 섭리나 기묘한 방법을 믿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려는 것으로, 아직 믿음이나 신뢰가 부족한 심리상태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르키니 신부가 조선의 복음화에 대하여 1793년도에 교황청에 보고하는데 부정적이다. 신입 교우가 전한 내용이 모든 의혹을 말끔히 씻어버릴 정도는 아니라고 포교성에 보고하였다. 조선에서 일어난 사건을 유럽에서 공론화시킬 만큼 비중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조선에서 시작된 의심스러운 소식이 천주교회가 빛을 잃어가는 유럽에서 오히려 큰 잡음의 소지가 있다고 전하였다. 또 한, 조선에서의 복음화는 수도회 사람들에게 열심히 묵상하고 반성할 수 있는 소재라고 평하였다. 더욱이 조선의 복음화에 대한 보고가 조소거리난 비웃음 거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처음에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포교성에 보낸 편지에 대하여 반성하며, 좀 더 확실한 권위 있는 소식을 기다리는 현명함이 필요했었다고 후회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있다.177)

 

마르키니 신부는 또한 북경 주교가 ‘조선’에 목자(사제)를 보내려고 노력한 것을 “상상 속의 양들”에게 보내주기 위한 것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구베아 주교의 판단이 잘못되었으며, 조선의 복음화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 이유로 조선에서 아무런 편지를 받지 못한 점과 조선 사신들과 함께 온 조선 사람들에게서 조선 신입 교우들의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전하였다. 그러면서 본인은 조선 사람들이 개종하였다는 모든 일은 ‘지어낸 이야기’ 혹은 ‘추측으로 빚어낸 이야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앞뒤 편지 내용은 지어낸 이야기 혹은 추측으로 빚어낸 이야기인 것처럼 전개하고 있다.178)

 

마르키니 신부는 자신의 의견을 객관화시키려는 듯한 인상을 주려고, 자신이 조선의 복음화의 전모와 본질을 따져보며 검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분별하려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조선 복음화의 전모와 본질에 대하여 의혹을 지니고 있음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어지는 그의 편지 내용에서 “이제 저는 그 사건의 내용이 아주 과장된 것이었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 한편으로 우리가 즐겨 상상하는 것처럼, 조선에 많은 신입 교우들이 있고 또한 조선의 교우들과 자유롭게 자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조선에 선교사를 보낼 수 없게 된다면, 모든 것은 연기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고 우리가 품었던 모든 아름다운 희망도 절망으로 바뀌고 말 것입니다.”라고 쓰고 있다.179)

 

반면에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크게 기뻐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고 전하며, 1791년에 조선에서 두 순교자가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고 전하였다.180) 마르키니 신부는 1794년 3월 22일자 구베아 주교의 편지와 조선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고, 여러 정황을 보아 조선에서 온 소식들은 믿을 만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편지에서 ‘조선인들의 저의’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다.181)

 

특별히 마르키니 신부는 조선 선교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에 거룩한 물품들을 마련해서 보내기 위한 돈 금화 500냥을 지금 당장 북경 주교에게 넘겨줄 필요가 없다고 포교성에 보고하면서 실질적으로 조선 교회를 도와주는 것을 꺼리고 있다.182)

 

 

Ⅷ. 결론

 

이상에서 한국천주교회 설립의 평판에 대해 초기 교황청 자료를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천주교회는 하느님의 섭리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로 고백하고 있다. 특별히 유럽 선교사들 대부분은 한국교회는 ‘하느님께서 기묘한 방법으로 기적적으로 이룩하신 교회’라고 평하고 있다. 이에 반대하는 입장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한국교회의 설립 과정은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감동적이며 기적적인 사건으로 길이 남아 있다. 이 과정에 함께 했던 즉, 하느님 섭리와 계시에 함께 했던 이들의 역할은 다양하고 대단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천주교회의 설립에 대한 평판은 특별히 ‘순교’로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 되었다. 이로써 한민족을 복음화하려는 하느님의 섭리와 계시는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본 논고에서는 마카오 포교성 대표부 대표를 맡았던 마르키니 신부만이 반대의 견해를 지닌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 정황상 마르키니 신부와 같은 입장에 있던 이들도 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마르키니 신부도 분명히 하느님 섭리의 일부분이었을 것이다. 그의 부정적인 견해는 또 다른 견고함을 위한 준비였고, 어머니이신 교회가 흔들리지 않기 위한 방법론이었다.

 

그러나 마르키니 신부와 같은 입장을 취한 것이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역사를 통해 다시금 알게 되었다. 그가 잘못 판단한 것에 대해서는 비난받을 만하다. 이 비난은 하느님 앞에서의 심판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그러한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한 ‘자아 반성적 비난’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마르키니 신부와 같은 견해나 입장을 지금도 견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은 현재의 판단과 미래에 대한 조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역사를 더욱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하느님의 섭리와 계시를 읽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키니 신부가 아주 신중하고 분별력 있게 결정하는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개인적인 선입견이 있었고, 한 사람이나 다른 사람, 다른 민족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배척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나름대로 하느님의 계시와 섭리를 읽는다고 하면서 말이다.

 

하느님의 섭리나 계시를 쉽게 알아낼 수 없다고 해서, 상황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거나, 무조건 하느님의 계시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늦지 않은 판단을 하면서도 역사, 특히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심판을 염두에 두면서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친히 하신 일을 인간의 잣대로 해석하는 태도는 반성의 여지가 있다. 그렇다고 역사를 신앙적인 차원으로만 접근한다면, 그 결과는 학적인 위치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심리적 또는 윤리적 접근을 통해서 역사사실을 추론하여 해석한다면, 문제의 여지가 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종합적인 성찰이 필요하다고 본다.183)

 

 

[참고문헌]

 

《추안급국안》 (한국학문헌연구소 영인본, 1978)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가톨릭출판사, 2000

정양모 윤종국 역,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가톨릭출판사, 2007

김영수 역, 《황사영 백서》, 성황석두루가 서원, 2007

김성태,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I, 천주교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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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천주교회사》 1, 한국교회사연구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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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각, 〈교회법에 나타난 인간, 그리스도교 인간 이해〉, 《이성과 신앙》 45호, 수원가톨릭대학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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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것에 대한 합당성이나 그에 대한 규명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기에, 단지 이들의 역할, 덕행과 그 영웅성, 성덕의 평판에 대한 부분만을 집중하여 다루기로 한다. 분명한 것은 요한 바오로 2세가 공식 발표한 문헌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실상 진리 탐구에 충실한 한국의 저 평신도들, 즉 한국의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모임인 한 단체는 중대한 위험을 무릅쓰면서, 당시 북경 천주교회와의 접촉을 과감히 시도하였고, 특히 새로운 교리 서적들을 읽고, 그들 스스로가 알기 시작한 생소한 신앙에 관하여, 자기들을 밝혀줄 수 있을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 평신도들을 마땅히 한국천주교 창립자(fondatori)라고 해야 하며,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저들은 사제들의 도움없이 - 비록 2명의 중국인 사제들이 잠시 있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 자기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1836년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성직자 없이 자기들끼리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L'Osservatore Romano 1984.10.15.: 변기영 역).

 

2) 명성은 일반적으로 평판이라고 하는데,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느냐에 따라 의미와 뜻이 다르게 전달된다. 명성(名聲)은 ‘세상에 널리 퍼져 평판 높은 이름’이라는 뜻이고, 평판(評判)은 ‘세상 사람들의 비평’, ‘비평하여 시비를 판정함’이라는 뜻이다. 시복시성 과정에서 요구되는 ‘fama’는 한자어의 ‘평판’과 ‘명성’ 단어가 합쳐진 뜻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에 대한 명성은 평판을 거쳐야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고, 어떤 사람에 대한 평판은 명성을 얻어야 존경과 사랑 및 영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평판 없는 명성은 곧 떨어질 수 있고, 명성 없는 평판은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3) 예수회 쁘아로(1735-1814)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18일자 편지 발췌문(역주: 윤민구,《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가톨릭출판사, 2000, pp.59-63).

 

4) 1801년 신유(辛酉) 박해를 일으킨 조선정부가 신유박해의 전말과 청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처형에 대한 변명을 적어 청의 인종(仁宗)에게 보낸 일종의 진정서. 대제학 이만수(李晩秀)가 작성하였다. 1800년 7월 순조(純祖) 즉위 후 수렴청정으로 정권을 잡은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는 1801년 1월 11일(음) 공식적으로 천주교 금압령을 내리고 이후 300여명의 천주교인을 처형했는데 그 가운데는 청국인 주문모 신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대왕대비는 청국과의 상의없이 주문모 신부를 처형했기 때문에 청국과의 마찰이 생길까 두려워 이해 10월(음) 이만수로 하여금 〈토사주문〉을 짓게 하고 10월 27일 동지사(冬至使) 겸 진주사(陳奏使) 조윤대(趙允大)를 청국에 파견, 〈토사주문〉과 황사영 백서를 고친 가백서(假帛書)를 청의 인종에게 전달하여 주문모 신부의 처형을 변명하였다. 〈토사주문〉의 내용은 조선은 개국 이래 중국에 대해 충성을 다하고, 안으로 유교를 높이 받들어 왔으나 수십년 전부터 사학(邪學, 천주교를 가리킴)이 널리 퍼지게 되어 그 폐해가 크므로 이에 사학을 엄금하고 그 주동이 되는 이승훈(李承薰), 황사영(黃嗣永)을 처형했으며, 주문모는 조선사람인 줄 알고 처형했으나 후에 청국인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이를 청국에 보고하는 내용이다(방상근, 〈토사주문〉, 《한국가톨릭대사전》 11, 한국교회사연구소, pp.8695-8696)

 

5) 만약 혼자서 천주교회를 독자적으로 깨닫고 받아들이고 전파한 것으로 남는다면, 그것은 천주교를 창립하여 ‘교주’로서 행한 것이지, 가톨릭교회와 온전한 일치에 있었다고 할 수 없다.

 

6)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요한 1,3 참조) 보존하시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에 관한 영원한 증거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시고(로마 1,19-20 참조) 천상적 구원의 질서를 터주시고자 하셨을 뿐 아니라, 원조들에게 처음부터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다.”(계시헌장 3항)

 

7) 구베아 주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조선 왕국은 중국보다 더 가난하고 더 성실하기 때문에 교만스럽거나 자만하지 않으며 재물에 물들어 있지 않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만큼 더 복음을 전하기도 쉽고, 성과도 많으리라 봅니다.” 조선왕실에서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 〈토사주문〉에서 한국민족의 정서와 삶의 태도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8) Letter annuelle du Japon pour 1595, Rome, 1599, p.136 이하(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p.284).

 

9) 구베아 주교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6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49)

 

10) 구베아 주교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6일자 편지(윤민구,《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51-52)

 

11) 쁘아로(Louis de Poirot, 1735-1814)는 프랑스 태생이나 아주 어려서 이탈리아로 건너가 그곳에서 자라난 예수회 소속 신부였다. 1771년 북경에 도착하여 궁정화가로 활동하였다. 또한 언어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어 궁정 통역관으로도 일하였다.

 

12) 예수회 쁘아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 보낸 1790년 10월 18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60-61)

 

13)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2월 24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77)

 

14)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3년 11월 3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96).

 

15)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2월 24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77-78).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3년 11월 3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94).

 

16)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2월 24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77-78).

 

17) 구베아 주교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6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51-52)

 

18) 1832년 12월 14일 브뤼기에르 주교가 프랑스 리옹 《전교후원회 월보》 편집자와 전교후원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정양모 윤종국 역,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가톨릭출판사, 2007, pp.197-198).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천주교회의 약사는 대부분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19) 여기서 조선의 자연지리, 조선의 역사, 조선의 왕실, 정부조직, 사법제도, 과거와 교육제도, 조선어, 사회신분, 여성의 지위, 가족제도, 종교, 조선인의 성격, 오락, 주거와 풍습, 산업과 국제관계 등을 서설로 다루고, 제1편에서 초기의 천주교회를 다루면서 천주교의 수용,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신유박해, 신유박해 후기의 양상,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을, 제2편에서는 조선교구의 설정과 기해박해,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 철종시대의 천주교회, 병인박해를 다루면서 조선시대의 한국교회를 통사 형식으로 집필하였다.

 

20) 이 표현을 라자로회 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1월 14일자 편지에서 사용한다. “금년에 있었던 기적적인 사건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21) 계시헌장 2항.

22) 참조: 탈출 33,11; 요한 15,14-15.

23) 참조: 바룩 3,38.

24) 계시 헌장 2항 참조. 25) 1790년 10월 6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47).

 

26) 마르키노 신부의 글에 의하면, 북경주교는 조선 신입 교우들의 편지를 라자로회 신부들을 통하여 전달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3년 1월 14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91)

 

27) 구베아 주교가 사천 대리 감목 디디에르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150-151).

 

28) 구베아 주교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6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49-50).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3년 1월 14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90) 참조.

 

29) 구베아 주교가 사천 대리 감목 디디에르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118-119).

 

30) 구베아 주교가 마카오 주재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에게 보낸 1790년 10월 20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p.64)

 

31) 구베아 주교가 사천 대리 감목 디디에르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18).

 

32) 이 말은 구베아 주교가 조선을 어느 선교단이 맡으면 좋을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1790년 10월 6일자 편지로 교황청에 보내면서 했던 말이다(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58).

 

33) 로(Nicolas-Joseph Raux, 1754-1801) 신부는 프랑스 출신으로 라자로회 소속으로서, 프랑스 선교단 단장이 되어 1785년 북경에 도착하여서는 궁정 수학자로 활동하였으며 북당의 책임자였다.

 

34) 라자로회 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1월 14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66)

 

35) 라자로회 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1월 14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68)

 

36) 라자로회 빌라(Giovanni Agostino Villa, 1752~1803) 신부는 북경에 오는 조선 신자들을 직접 사목하였다고 전하면서, “조선 신자들이 하느님의 특별한 축복이 자기들에게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계속해서 끝까지 신앙에 충실하라고 격려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믿어야 하고 또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아울러 하느님께서 당신의 섭리로 조선 신자들에게 사제들을 보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실 때까지 조선 신자들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비롯한 여러 문제에 대해서 한자로 8천 자를 쓴 사목 서한을 보냈다고 하였다(라자로회 빌라 신부의 1791년 2월 11일자 편지: 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73)

 

37) 라자로회 빌라 신부의 1791년 2월 11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74)

38) 라자로회 빌라 신부의 1791년 2월 11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76)

 

39)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2월 24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77-78)

 

40)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2월 24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80-81).

 

41)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3년 11월 3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93-94).

 

42)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4년 12월 1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05).

 

43) 〈토사주문〉(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68)

44) 계시헌장 제3항.

 

45) 라자로회 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내는 편지(1790년 11월 14일자)에서 이승훈이 세례를 받기 전에 6년 동안 꾸준히 그리스도교에 대해 많은 연구와 토론을 해왔다고 전하고 있다.

 

46) 계시헌장 4항.

47) 계시헌장 4항.

48) 샤를르 달레, 1979,《한국천주교회사》 상, p.299.

49) “이들은 모두 이 베드로라는 사람한테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1790년 11월 14일자 포교성 장관에게 보내는 편지)

 

50) “기이한 물건과 좋은 장난감”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전후 문맥상 천주교와 신앙에 관계된 이야기를 하다가, 다른 화제나 주제를 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본 문장과 연결되어 전후의 황사영 백서에서 ‘기이한 물건이나 장난감 혹은 노리갯감’의 필요성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 기물(奇物)과 완호(玩好)는 성물을 이야기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구베아 주교가 1797년 사천 디디에르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난다. “그리고 나서 같은 해 조선으로 돌아갔는데, 그 때 천주교에 관한 책들을 상당히 많이 갖고 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제자가 된 이 젊은이는 가족들과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북경에서 보고 들었던 천주교 신앙의 원리들과 여러 가지 성상들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갖고 온 책들을 그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달레는 기술한 역사서에서 “북경에 가거든 즉시 천주당을 찾아가서 서양인 학자들과 상의하며 모든 것을 물어 보고, 그들과 교리를 깊이 파고들어, 그 종교의 모든 예배행위를 자세히 알아보고, 필요한 서적들을 가져 오게.”라고 표현하고 있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 사》 상, p.304). 달레는 또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784년 봄에 이승훈 베드로는 북경에서 많은 책과 십자가상과 상본과 몇 가지 이상한 물건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샤를르 달레, 같은 책, p.307)

 

51) 김영수 역, 2007, 《황사영 백서》, 성황석두루가 서원, pp.56-57.

52) 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162-164.

53) 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34.

 

54) 달레는 “이 책들은 조선 사절들이 여러 차례에 걸려 북경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실은 당시 조선의 많은 학자들이 그러한 책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니 그 까닭은 연례적인 사신(使臣) 행차 때에 조선 선비들이 따라가서 서양의 과학과 종교에 대해 중국인과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 p.301)라고 표현하고 있다.

 

55) 샤를르 달레, 같은 책, p.295 참조.

56) 주재용, 《한국 가톨릭사의 옹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p.27-31, p.36 참조.

57)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pp.295-296.

58) 샤를르 달레, 같은 책, p.296.

59) 윤민구, 2002,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 국학자료원, pp.251-252 참조.

60) 윤민구, 같은 책, pp.71-72.

 

61) 서학(천주학)에 포함된 긍정적인 요소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수용하려는 친화성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한역 서학서의 사상적 · 교리적 내용을 성리학적 가치와 배치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유교 경전의 유사한 부분과 일치시켜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에 속했던 이들은 권철신, 권일신, 이기양, 정약전, 정약용, 이벽 등이었다(참조: 노길명, 《민족사와 천주교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5, p.36).

 

62) 한국교회사연구소, 2009, 《한국천주교회사》 1, 한국교회사연구소, p.227.

 

63) 조선 중기 이후 사림유학이 활발해지면서 유학 지식인들은 동색계(同色系)의 서원을 중심으로 강학의 모임을 가지고 유학 연구에 힘쓰는 한편, 공동 관심사나 문제의식을 지닌 선비들끼리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의 토론과 의견 교환을 위하여 격식을 갖추어야 했던 서원보다는 누정(樓亭)이나 별장 또는 산사에서 학문적 회합을 가지는 예가 많았다(이원순, 2004, 《한국천주교회사연구(續)》, 한국교회사연구소, p.102).

 

64) 달레는 그의 책에서, 이벽이 강학에 참여하기 위하여 어려움을 무릅쓰고 한 밤중에 산을 넘고 참석하여 기쁨을 나누는 모습을 잘 묘사해주고 있다(참조: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 pp.300-301).

 

65) 달레는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실망하지 않고 기회 있을 때마다 천주교 교리를 깊이 연구하고 토론하기를 그치지 않았다.”(샤를르 달레, 같은 책, p.302), “이런 연구회가 자주 반복되었을 것은 매우 있음직한 일이지만, 그 자세한 내용이 우리에게까지 전하여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샤를르 달레, 같은 책, p.303).

 

66) 샤를르 달레, 같은 책, p.300.

67) 샤를르 달레, 같은 책, p.302.

 

68) 달레는 “이 토론을 지켜본 승객들은 그렇게 아름답고 위로되는 진리를 처음 듣고 놀라고 황홀해졌다.”라고 기술할 정도였다(샤를르 달레, 같은 책, p.303).

 

69) 샤를르 달레, 같은 책, p.303.

 

70) “이벽은 이승훈이 북경 사절단에 자기 아버지를 따라가게 되었다는 것을 듣고 몹시 기뻐하며, 즉시 그를 찾아 갔다.”라고 다블뤼와 달레는 전한다(샤를르 달레, 같은 책, p.303).

 

71) 그라몽(Jean-Jpseph De Grammont, 1736-1812?) 신부는 프랑스 출신으로 예수회 소속으로서, 1768년 북경에 도착하여 이승훈에게 세례를 준 신부였다.

 

72) 그라몽 신부가 1790년 6월 23일자로 쓴 편지. 〈추안급국안〉 신유년 2월 18일자 이승훈 공초에서도 입증된다.

 

73) 교회법에서 예비신자라 함은 ‘성령으로 감도되어 교회에 합체되기를 명백한 의지로 소망하고, 따라서 바로 이 원의와 함께 실행하는 신덕과 망덕과 애덕의 삶으로써 교회와 결합되기를 원하는 자’이다(교회법 제206조 1항).

 

74) 구베아 주교가 1797년 사천대목구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령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 누가 그토록 약하디 약한 도구를 이용하여, 즉 세례성사를 받는데 꼭 필요한 것들만을 겨우 배운 한 젊은이가 자기 나라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파자이자 사도가 되어, 그토록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신앙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갖게 하는 놀라운 기적을 이루어낼 수 있단 말입니까?”(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51).

 

75) “체포된 60명의 신입 교우들은 감옥에 갇힌 채 그리스도를 배반하느니 차라리 혹독한 고문을 받는 것이 낫겠다고 하였으며, 이것을 본 외교인들은 너무도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였고, 그런 외교인들 가운데 몇몇 사람은 교우들이 온갖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마음을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자기들도 천주교로 개종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 그리스도의 증거자인 이 조선의 신입 교우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용감하게 되어 복음을 전하였으며, 예전보다 더 뜨거운 열정으로 친척과 친구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켰습니다.”(구베아 주교가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6일자 편지).

 

76) 구베아 주교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내는 1790년 10월 6일자 편지(윤민구,《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47)

 

77) 구베아 주교가 사천 대리 감목 디디에르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19).

 

78) 구베아 주교가 사천 대리 감목 디디에르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34).

 

79) 예수회 쁘아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 보낸 1790년 10월 18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p.59)

 

80) 라자로회 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1월 14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66)

 

81) 예수회 쁘아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 보낸 1790년 10월 18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60)

 

82) 구베아 주교가 마카오 주재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에게 보낸 1790년 10월 20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65)

 

83) 라자로회 빌라 신부의 1791년 2월 11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71)

 

84) 구베아 주교가 마카오 주재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에게 보낸 1790년 10월 20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65)

 

85) 라자로회 빌라 신부의 1791년 2월 11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72)

 

86)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2월 24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79)

 

87) “1789년에 이르러 조선 교우들이 한자리에 모여 의논을 한 결과, 탁월한 능력이 있는 신입 교우 한 사람을 선발하여 몰래 북경에 파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편에 편지를 보내 왔는데, 조선의 교우들은 한편으로 위에서 모두 말씀드린 복음이 전파된 과정을 자세하게 보고하고, … 자기들에게 영적인 도움은 물론 사제들과 서적들 및 이 새 교회에 필요한 여러 가지 양식들을 보내달라고 간곡히 요청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구베아 주교가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6일자 편지).

 

88) 구베아 주교가 조선으로 보낸 서한은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구베아 주교가 포교성 장관에 보낸 편지에 대략적으로 그 내용이 나타난다. “이 사목 서한에서 저는 조선 교우들이 지극히 위대하고 선하신 천주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것과 앞으로도 계속 믿음을 지켜 나가면서 천주님의 계명을 지킬 것, 그리고 신자로서 반드시 믿고 실천해야 할 모든 도리와 사제가 없을 때 신앙생활을 하는 요령을 간단히 요약해서 가르쳐 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제들이 조선에 들어갈 수 있는 길과 방법을 찾아보거나 아니면 적어도 젊은이 몇 사람을 북경으로 보내어 신학교에서 장차 신부로 양성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찾아보는데 최선을 다하도록 명하였습니다.”

 

89) 1790년 10월 6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48)

 

90) “조선 교회에서 지난 1790년 자신들이 궁금해 하는 여러 가지 의문점들과 질문 사항들을 저에게 보내왔는데, 그중에는 조상들의 신주를 만들어 모셔도 되는지 또한 이미 모시고 있던 조상들의 신주들을 계속 모셔도 되는지에 대한 질문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황청에서는 교황 베네딕도의 칙서인 ‘엑스 쿠오’(Ex quo)와 교황 클레멘스의 칙서인 ‘엑스 일라 디에’(Ex illa die)를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하여 아주 단호한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이 대답은 조선의 많은 양반 계급 천주교 신자들이 배교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구베아 주교가 사천 대리 감목 디디에르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편지: 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123-124).

 

91) 라자로회 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1월 14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66)

 

92) 예수회 쁘아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 보낸 1790년 10월 18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60-61)

 

93) 라자로회 빌라 신부의 1791년 2월 11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71)

 

94)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2월 24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79)

 

95) 라자로회 빌라 신부의 1791년 2월 11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75)

 

96) 구베아 주교가 사천 대리 감목 디디에르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20).

 

97) ‘그리스도와 합체’, ‘교회와의 합체’라는 용어를 교회법전에서 사용하고 있다. ‘합 체’(incorporatio)라는 용어는 in과 corporo(육체를 만들다, 형체를 만들다, 육체를 취하다)라는 동사가 결합한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corporatio는 단체, 조합, 법인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어떤 조직체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런 단어에 in이 첨가되어 ‘어떤 조직체를 이루는 것’, 혹은 ‘어떤 조직체에 들어가는 것’, ‘어떤 조직체와 하나가 되는 것’, ‘어떤 조직체에 속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 형성된 것이다(최인각, 2010, 〈교회법에 나타난 인간〉, 《이성과 신앙》 45호, pp.195-196).

 

98) 2009년에 수정된 교회법 제1086조, 1117조, 1124조 참조.

99) 교회법 제211조 참조.

100) 교회법 제96조, 제204조 1항 참조.

101) 교회법 제849조.

102) 최인각, 〈교회법에 나타난 인간, 그리스도교 인간 이해〉, 《이성과 신앙》 45호, 수원가톨릭대학교, 2010, p.380 참조.

103) 교회법 제206조 1항 참조

104) 구베아 주교가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6일자 편지.

 

105) 구베아 주교가 마카오 주재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에게 보낸 1790년 10월 20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64)

 

106) 라자로회 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1월 14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67); 라자로회 빌라 신부의 1791년 2월 11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75).

 

107) 라자로회 빌라 신부의 1791년 2월 11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73)

108) 라자로회 빌라 신부의 1791년 2월 11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75)

 

109) 구베아 주교가 사천 대리 감목 디디에르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36).

 

110) 1790년 10월 6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47)

 

111) 예수회 쁘아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18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59). 라자로회 빌라 신부는 “북경에서 처음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된 이 베드로란 사람은 조선 왕국으로 돌아가서는 교회에 대해서 충분히 교육받지 못한 자신의 부족함을 책을 읽음으로써 보충한 다음, 조선의 선교사가 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 베드로는 많은 학자들을 회개시켰습니다.”(라자로회 빌라 신부의 1791년 2월 11일자 편지: 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72)

 

112) 예수회 쁘아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 보낸 1790년 10월 18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60)

 

113) 라자로회 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1월 14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66)

 

114) 라자로회 빌라 신부의 1791년 2월 11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72)

115) 라자로회 빌라 신부의 1791년 2월 11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72)

 

116) 구베아 주교가 사천 대리 감목 디디에르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118-119).

 

117) 구베아 주교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6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48)

 

118) 라자로회 빌라 신부의 1791년 2월 11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72-73)

 

119) 구베아 주교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6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48)

 

120) 라자로회 로 신부는 윤 바오로라고 지칭하고 있다. 윤 바오로는 1790년 1월과 9월에 두차례 북경을 방문한 것이었다(라자로회 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1월 14일자 편지: 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67-68)

 

121) 로 신부는 “이 베드로가 쓴 편지들을 자기 옷 속에 꿰매어 갖고 왔었습니다. 그 편지는 많은 흰 명주천 조각 위에다 성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들을 한자로 쓴 것이었습니다(모두 37개항). 그리고는 옷 속에 비슷한 천 조각을 넣어 밖에서 다른 사람이 손으로 만졌을 때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도록 하였답니다. … 저희들은 이 모든 것을 윤 바오로의 옷 속에 꿰매어 주었습니다(라자로회 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1월 14일자 편지: 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67)

 

122) 라자로회 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1월 14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66)

 

123) 예수회 쁘아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 보낸 1790년 10월 18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60)

 

124) 라자로회 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1월 14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68). 구베아 주교가 사천 대리감목 디디에르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19).

 

125) 라자로회 빌라 신부의 1791년 2월 11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75)

 

126)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3년 11월 3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95).

 

127)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4년 1월 17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98).

 

128)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4년 1월 17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98-99).

 

129) 구베아 주교가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 전교회 대표부 레똥달 신부에게 보낸 1794년 10월 20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01)

 

130) 구베아 주교가 마카오 주재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에게 보낸 1796년 10월 9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11).

 

131) 마카오 주재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4년 12월 1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04).

 

132) 마카오 주재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4년 12월 1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06).

 

133) 〈토사주문〉(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61).

134) 〈토사주문〉(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64).

135) 〈토사주문〉(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164-165).

136) 〈토사주문〉(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65).

137) 〈토사주문〉(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169-173).

138) 〈토사주문〉(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62)

 

139) 1832년 12월 14일 브뤼기에르 주교가 프랑스 리옹 《전교후원회 월보》 편집자와 전교후원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서한집, pp.206-207)

 

140) 1790년 10월 6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45).

 

141) 예수회 쁘아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18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59)

 

142) 라자로회 빌라 신부의 1791년 2월 11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72)

 

143) 구베아 주교가 마카오 주재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에게 보낸 1794년 11월 25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02).

 

144) 구베아 주교가 3월 22일에 쓴 편지, 조선에서 북경에 보낸 편지. 145) 마카오 주재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4년 12월 1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03).

 

146) 구베아 주교가 마카오 주재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에게 보낸 1796년 10월 9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11).

 

147) 구베아 주교가 사천 대리 감목 디디에르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132-133).

 

148) 예수회 쁘아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18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59)

 

149) 라자로회 빌라 신부의 1791년 2월 11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72)

 

150)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2월 24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80)

 

151) 마카오 주재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4년 12월 1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04).

 

152) 구베아 주교가 마르키니 신부에게 보낸 1795년 10월 13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09).

 

153) 구베아 주교가 사천 대리 감목 디디에르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124-132).

 

154) 두 번이나 북경에 다녀오고, 1794년 조선에 선교사를 영입하는 일을 주도했던 사람으로 죽음을 당했다고 보고되고 있다.

155) 1793년에 북경에 다녀온 자이며, 그 이듬해에 윤 바오로와 함께 선교사를 영입한 자로 보고되고 있다.

156) 열심한 회장으로 자기 집에 선교사(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였던 사람으로 보고 되고 있다.

 

157) 조선에서 제일 먼저 체포되어 외래 종교를 전파한 사람이라는 죄목으로 매질을 당한 후 귀양을 갔다가 유배지에서 영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보고되어 있다(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112-113; 구베아 주교가 사천 대리 감목 디디에르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17 참조).

 

158) 1784년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조선에 천주교회를 소개하였는데, 천주교를 들여왔다는 이유로 벼슬을 박탈당하였으며, 1795년 1월에 귀양 갔다고 보고 되어 있다.

 

159) 윤민구, 한국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pp.112-113; 구베아 주교가 사천 대리 감목 디디에르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138-144).

 

160) 1832년 12월 14일 브뤼기에르 주교가 프랑스 리옹 《전교후원회 월보》 편집자와 전교후원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서한집, p.213)

 

161) 1832년 12월 14일 브뤼기에르 주교가 프랑스 리옹 《전교후원회 월보》 편집자와 전교후원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서한집, p.216)

 

162) 1832년 12월 14일 브뤼기에르 주교가 프랑스 리옹 《전교후원회 월보》 편집자와 전교후원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서한집, p.216)

 

163) 1832년 12월 14일 브뤼기에르 주교가 프랑스 리옹 《전교후원회 월보》 편집자와 전교후원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서한집, pp.217-228)

 

164) 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가톨릭출판사, 2000, pp.49-50 참조.

165) 윤민구,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 pp.150-152 참조.

 

166)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 그렇게도 많은 외교인들이 교리를 부족하게 조금 밖에 못 배운 한 신입 교우에 의하여 개종한 일이나, 겨우 천주교의 가장 초보적인 것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문을 받으면서도 아주 용감하게 끝까지 마음을 굽히지 않은 일, 그리고 감옥에 갇힌 교우들을 사면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명령하게끔 임금의 마음이 빨리 변화된 일, 또한 마침내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 가며 사제들을 모셔가려고 온 밀사들이 보여준 열성, 더구나 때맞춰 조선 왕실의 한 사람이 북경에 와서 필요한 성물들을 주도면밀하게 직접 챙겨 가져갈 수 있게 된 일, 조선 교우들이 보낸 편지와 질문들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 그들의 신심 깊고 열성적인 정신들, 저는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노라면 복음이 단 한 번도 전해진 적이 없는 조선 백성들에게 천주님께서 당신의 손길을 드러내 보이시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천주님께서 당신 일을 마무리해 주실 것이며, 선교사가 조선 왕국에 들어가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막힌 길을 열어주실 것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167) 윤민구, 2002,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 p.60.

 

168) 구베아 주교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6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44).

 

169) 쁘아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18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59).

 

170) 라자로회 로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1월 14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66).

 

171) 라자로회 빌라 신부의 1791년 2월 11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74)

 

172) 1832년 12월 14일 브뤼기에르 주교가 프랑스 리옹 《전교후원회 월보》 편집자와 전교후원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서한집, p.196.)

 

173) 1832년 12월 14일 브뤼기에르 주교가 프랑스 리옹 《전교후원회 월보》 편집자와 전교후원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서한집, p.206)

 

174) 1832년 12월 14일 브뤼기에르 주교가 프랑스 리옹 《전교후원회 월보》 편집자와 전교후원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서한집, pp.216-217)

 

175) 1832년 12월 14일 브뤼기에르 주교가 프랑스 리옹 《전교후원회 월보》 편집자와 전교후원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서한집, p.229)

 

176)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2월 24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77)

 

177)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3년 11월 3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93-94)

 

178)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3년 1월 14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p.77-78)

 

179)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3년 11월 3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95).

 

180) 구베아 주교가 마카오 주재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에게 보낸 1794년 11월 25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02).

 

181) “저는 그 소식들이 확실하냐 아니냐 하는 문제보다는 그 저의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더 관심을 갖고 싶습니다.”(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4년 12월 1일자 편지: 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05).

 

182) 마카오 주재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794년 12월 1일자 편지(윤민구,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p.107).

 

183) 이점에 대하여 김성태 신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역사사실에 대한 해석에는 문헌이 필요하지만, 문헌이 없는 경우에는 다른 역사사실을 통해서 어느 정도 추리에 의해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역사 사실들은 서로 관련되어 있어 추리를 통해서 문헌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역사 사실이 다른 역사 사실로 입증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연관 사실이 없는 경우, 해석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며 이는 다른 방법으로 해결될 가망이 없는 경우에는 가능하지만 남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역사 사실에 대한 추리에 개인의 주관적인 색채가 짙은 추론을 극복함이 필요합니다.”(김성태, 2011,《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I, 천주교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p.468).

 

[학술지 교회사학 vol 8, 2011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최인각 신부(수원가톨릭대 교수)]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163835&Page=15&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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