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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신앙 선조의 불꽃 같은 삶: 하느님의 종 임희영

188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12-13

[신앙 선조의 불꽃 같은 삶] ‘하느님의 종’ 임희영

 

 

2017년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대한 시복자료집 제1집을 간행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종 133위’는 모두 평신도입니다. 자발적 신앙 공동체를 세운 한국교회 초기 신자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 평신도에게는 언제나 모범 중에 모범입니다. 이에 자료집의 내용을 발췌 · 정리하여 게재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공부하고 순교 영성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순교자 임희영과 동료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여주 천주교 순교자 치명 기념비」. “여주 관아의 문에서 남쪽으로 1리쯤 떨어진 큰길가”라는 『벽위편』의 기록을 바탕으로 2009년에 세웠다(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홍문리 48-7).

 

 

사학(邪學)을 준수하여, 신주(神主)를 세우지 않고…

 

“사학을 준수하여, 신주를 세우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遵守邪術 不立主 不設祭).” ‘하느님의 종’ 임희영(任喜永, ?~1801)의 사형 선고문이다. 그는 1801년 음력 3월 13일(양력 4월 25일)에 여주에서 참수되었다. 이 선고문은 그가 순교한 신유박해(1801년) 직후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학징의』에 남아 있다. 임희영의 세례명은 전해지지 않으나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감옥에서 대세를 받았다. 임희영은 여주군 금사면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금사리)에 살던 풍천 임씨 가문의 양반으로 본관은 황해도 풍천(豐川)이다.

 

임희영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은 모두 교리를 믿었으나 그는 도무지 성교 믿기를 거부했다. 아버지가 무섭게, 때로는 타이르듯 여러 차례 입교를 권했으나 대답을 피하며 “천주교를 신봉하기 위해서는 눈도 귀도 또 다른 어떤 감각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여러 해가 지나 병이 든 아버지는 병세가 심해졌고 죽을 때가 되어 아들을 불렀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신앙생활하는 것을 본다면 아무 여한 없이 이 세상을 떠나겠구나.’ 했다. 그럼에도 아들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후 아버지는 또 그를 불렀다. “나는 내일이면 죽을 것 같다. 그런데 너의 태도는 하나도 변하지 않는구나. 보기에 내가 죽은 후에 너는 오히려 내 제사를 지내려 할 것 같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너는 내 말을 도대체 듣지 않았으니 내가 죽은 후에 상복도 입지 말거라. 만일 제사를 지내면 난 너를 아들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채 선종하였다. 임희영은 상복을 입고 지극한 예를 모두 갖추어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였으나 제사는 지내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그의 친척들과 지인들은 모두 수근거렸다.

 

「여주목」, 『해동지도』, 18세기 중엽 여주 관아와 관아 내에 있던 청심루의 모습이 보인다.

 

 

마치 한 마리 순한 양처럼 혹독한 형벌을 받다

 

1800년 봄, 아버지의 첫 기일에도 제사를 지내지 않자 임희영을 감시하고 있던 관장이 그를 잡아들였다. “분명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는데 어찌하여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 하고 묻는 관장의 질문에도 아버지 앞에서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관장은 “계속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면 천주교인처럼 죽이리라.” 하면서 그를 옥에 가두었다. 임희영은 근 한 달에 두 차례씩 죄수들과 함께 신문을 당하였고, 혹독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마치 순한 양처럼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의 한결같은 태도에 놀란 관장이 “네가 제사를 지낸다고 약속하고 재물을 바치면 풀어줄 것이나 계속 이대로이면 죽일 것이다.” 하고 엄포를 놓았다. 그럼에도 임희영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옥 안의 교우들이 오히려 “천주교인도 아니면서 왜 우리와 같은 형벌을 받느냐.”고 답답해하며 “빨리 제사를 지낸다 하고 목숨을 부지하라.”고 재촉하였다. 그제서야 임희영은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을 말하며 아버지의 마지막 당부대로 제사를 지내지 않을 것임을 재차 말하였다. 그의 단호한 뜻을 알고 난 교우들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함께 천주를 섬기고 공경하자.”고 설득했다. 마침내 임희영은 기도문을 배우고 주일과 축일을 지키기 시작했다.

 

 

그의 믿음을 증명하는 기록들

 

 

 

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과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 순교자 임희영의 마지막을 소상하게 적었다.

 

“1801년 봄, 그는 4명의 교우와 함께 감사 앞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 신앙을 증거했고 거기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들처럼 결안에서 명을 한 임희영은 여주로 옮겨졌다. 1801년 3월 13일 함께 참수되었다. 이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없지만 그가 옥 안에서 교우들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믿어진다. 이 약전을 제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증거들을 기다려야 한다. 처음에 우리는 순교자 명단에서 임희영을 뺄 생각이었으나 마지막에 그가 신앙생활을 했고 또 감사 앞에서 신앙을 증거했다고 사람들이 보증하니 그렇다면 그는 순교자로 간주될 수 있지 않을까? 만일 의혹이 있다면 뺄 것.”

 

“우리가 앞서 본대로 신앙을 실천하기 시작한 비신자 임희영은 진지하게 수계(守誡)를 계속하여 감사의 법정에서 자신이 교우임을 밝히고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고 또 그를 위해 죽기로 결심하였다고 밝혔음이 확실하다. 또한 우리는 임희영이 감옥에서 대세를 받았다고 믿는다. 여주로 돌아온 이 증거자들은 그들의 고통의 결말과 항구심에 대한 보상을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음력 3월 13일 5명 모두 여주 성 밖에서 참수되었다. 최 마르첼리노는 53세, 원 요한은 28세 혹은 29세, 이 마르티노와 정종호는 약 50세, 임희영의 나이는 알려지지 않았다.”

 

교회 기록은 물론이거니와 『순조실록』과 『벽위편』에도 임희영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주님을 위해 죽기로 결심하고 순교하였음이 드러나 있다.

 

“경기 감사 이익운(李益運)이 도내의 사학 죄인(邪學罪人)으로 여주(驪州)에서 11인, 양근(楊根)에서 7인을 취초(取招)하고 사문(査問)한 후에 율(律)에 의거하여 감단(勘斷)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이에 이중배(李中培) · 임희영(任喜永) · 유한숙(兪汗淑)은 신주(神主)를 세우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아니하여 사람의 윤리를 폐절(廢絶)하고 형륙(刑戮)도 마음속으로 달갑게 여긴 것으로 결안(結案)을 받아 부대시참(不待時斬)하도록 명하였다.”

 

“죄인은 부친의 뜻을 받들어 신주를 세우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 여주 관아의 문에서 남쪽으로 1리쯤 떨어진 큰 길가에서 백성들을 많이 모아 놓고 죄인 중배, 희영, 경도, 종호, 창주 등을 법률에 따라 참수하였습니다.”

 

순교자 임희영은 모든 의혹을 떨쳐 내고 2011년 2월 시복 추진 대상자로 선정되었고 2013년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가 되어 우리 신앙의 후손 앞에 하느님의 종으로 우뚝 섰다. 그의 믿음을 본받아 죽기까지 복음을 실천하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8).”

 

[평신도, 2019년 겨울(계간 66호), 글 · 정리 송란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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