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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35: 원죄와의 싸움(407~421항​)

2297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9-01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35. 원죄와의 싸움(「가톨릭 교회 교리서」 407~421항)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다면 구원을 확신해도 좋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들은 이 모든 책임이 아버지에게 있다고 믿었습니다. 모범생이었던 아들은 비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못된 친구들과 어울리며 경찰서까지 들락거렸습니다. 매번 아버지가 학교와 경찰서에 불려오셨지만 아들은 미안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조금 심각한 사고를 저질렀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훔친 것입니다.

 

아들은 유리창 너머로 교무실에서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젊은 선생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정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공부하여 일류대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됩니다. 라디오에서 들은 사연입니다.

 

아들이 진정 아버지의 아들이 되기 시작한 것은 비뚤어지고 싶은 마음과의 싸움을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은 처음부터 “자기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하느님을 거슬렀습니다.”(398항 참조) 이를 원죄(原罪)라 합니다. 원죄는 자기 자신의 뜻을 선택하는 본성적 성향입니다. 

 

인간은 원죄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쁜 행동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파라오 치하에서 종살이하던 때와 같습니다. 원죄에서 해방되지 못한 인간은 결국 “죽음의 지배력을 지닌 존재, 곧 ‘악마’의 권세에 예속됩니다.”(407항) 그 악마가 곧 파라오요, 우리 자신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를 파라오의 세상으로 들여보내십니다. 파라오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파라오는 물론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모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이에 모세는 혼자 힘으로 파라오와 맞섭니다. 10가지 재앙으로 파라오를 치지만 파라오는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고독한 싸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함께라면 자신들도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신약의 모세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의 세상으로 직접 들어오셔서 홀로 죄와 맞서 싸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싸움에 동참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원죄로부터 해방시키시기 위해 마련하신 도구가 ‘세례성사’입니다. 세례는 원죄를 없애고 인간을 하느님께 돌아서게 합니다.(405항 참조) 세례성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파라오를 적으로 여기고 파라오와 싸우기 시작하는 결단이 세례인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은 세례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 본성 안에 깊숙이 박힌 탐욕은 세례만으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원죄는 인간 본성을 약화시켜 인간이 악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성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나아가려고 할 때 “인간 안에 집요하게 남아서 영적인 싸움을 치르게 합니다.”(405항)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를 통해 원죄와의 싸움을 ‘시작’합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세례 때 시작한 ‘싸움을 멈추지 말아야’ 구원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세례를 받고 40년간의 광야의 수련을 해야만 했듯,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도 옛 자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평생 싸워야합니다. 아기가 두 발로 걷기 위해서 수천 번을 넘어지며 다리의 힘과 균형감각을 익혀야 하듯, 죄로 기우는 원죄의 본성과 끊임없이 싸우는 과정을 넘어서야만 새 본성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아와 싸우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구원이 시작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애벌레가 고치를 만들기 시작했다면 나비가 되기 시작한 것과 같습니다. 옛 자아의 본성과 싸우기 위해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서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가 이미 인간인 것과 같습니다. 신앙에서 다시 일어서는 방법은 ‘고해성사’를 통해서입니다. 고해성사는 죄와 다시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 다른 ‘세례’입니다.(980항 참조)

 

어두움만 있던 곳에 빛이 들어오면 반드시 어둠과 빛의 전쟁이 벌어집니다. 나의 뜻과 하느님의 뜻과의 사이에서 선택을 위한 싸움을 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 그 사람 안에 빛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심판 날에 주님을 만나게 될 때 내가 이 세상에서 꾸준히 보아온 고해성사는 그래도 끊임없이 빛을 선택하려 노력했다는 증거로 남습니다. 그것이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는 보증이 됩니다.

 

[가톨릭신문, 2019년 9월 1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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