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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행복을 찾아서: 인내 - 오래 참는다는 것

947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8-17

[행복을 찾아서 – 인내] 오래 참는다는 것

 

 

행복 강박증에 시달리는 현대인

 

행복이 삶의 목적이 된 지 오래다.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는 물론이고 대중 소설가나 뇌과학자 등도 행복에 대한 자기 나름의 이야기를 끝없이 써 내고 있다.

 

최근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든 책 가운데 아홉 권이 ‘심리 에세이’였다. 종교 기관도 마찬가지다. 강론과 설교는 일종의 심리강좌처럼 변해 간다.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는지 상담하고, 끝부분에 성경 구절이 양념처럼 살짝 얹힌다.

 

행복을 좋아하고 불행을 싫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일까?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점점 행복은 삶에서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그 어떤 것이 되고 있다. 직장에서는 정기적으로 설문지를 풀고 자신의 행복 점수를 통보받는다. 점수가 낮으면 승진도 어렵다.

 

행복하게 보이려고 자신을 속여야 한다. 성공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해야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다.

 

현대인은 점점 고통을 참고 견디는 일에 질색하게 되었다. 행복이 목표가 된 사회에서 묵묵히 인내한다는 것은 스스로 패배자임을 인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고통과 실패를 겪더라도 어떻게든 그 위험천만한 사실을 숨기려고 한다. 애써 미소 짓는다.

 

실패보다 두려운 것은, 불행을 남에게 들키는 일이다. 흔히 행복하려고 산다는데, 실제로는 ‘행복하게 보이려고’ 산다. 맛없는 음식은 뱉어 버리듯이, 행복하지 않은 삶은 ‘이미 망한’ 인생이다. 현대인의 행복 강박증이다.

 

 

인내라는 덕목의 추락

 

사실 지난 수천 년간 ‘인내’는 가장 위대한 덕목 가운데 하나였다. 그 반면 ‘행복’이라는 단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쓰이지도 않았다. 그 어원 자체가 ‘우연한 행운’에 가까운 말이다. 주로 뜻밖의 횡재를 했을 때 “행복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행복은 그 지배 영역을 크게 넓혔다.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기쁨, 사회적 존경과 경제적 안정, 고통에서 자유롭고 즐거운 느낌이 지속되는 상태를 모두 뭉뚱그린 상상의 거대 복합체가 되었다.

 

예전에는 불행과 이를 참고 견디는 인내는 삶의 꼭 필요한 경험이었다. 입에 쓰지만 꾹 삼키는 약이었다. 의료계에서는 정말 심각한 정신 장애가 아니면, 소소한 불행감은 병으로 치지도 않았다. 

 

정신과 의사는 ‘신경이 쇠약’하다는 사람에게 이른바 ‘행복’을 처방하지 않았다. 그들이 처방한 것은 ‘그래도 괜찮아, 당신은 문제없어.’라는 부류의 달달한 위로와 지지가 아니라, 사회적 격리와 요양, 동료와의 대화 금지와 장기간의 침묵, 금욕적인 식이 조절,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이었다. 절제와 인내가 주처방이었다.

 

종교계도 마찬가지였다. 고통스러운 일을 겪을 때는 오히려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했다. 금욕적인 삶과 절제된 노동, 깊은 기도와 긴 사색을 통해서 더 본질적인 영혼의 답을 찾으려고 했다. 삶의 쾌락과 편안한 안락은 오히려 배격해야만 하는 악덕이었다. 고생은 사서도 하는 것이었다. 과도하게 세상의 인정을 바라거나 지나친 부를 모으는 것도 옳지 않았다.

 

행복은 삶의 목표가 아니었고, 오히려 경계해야 할 유혹이었다. 미국의 작가이자 연설가인 에드윈 허벨 채핀은 이렇게 말했다. “영혼의 위대함 그리고 절대적 존재와 맺은 관계는, 이루어낸 업적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인내에서 드러난다.”

 

행복 심리학은 각광받는 신흥 사업이 되어 사회의 여러 영역을 잠식하고 있다. 분명 선조보다 더 풍요롭고 안전하며 자유로운 세상에 살지만, 현대인은 끝없는 행복에 목말라한다.

 

고통과 슬픔을 겪으면 어떻게든 ‘가해자’를 찾아서 ‘항의’하고 ‘적절한 보상’을 요구한다. ‘나 님’이 누려야 할 행복을 감히 방해한 죄다. 마땅한 대상이 없으면 세상 전체에 화살을 돌리고, ‘이게 나라냐!’며 더 큰 안락과 부와 편안과 자유를 달라고 끝없이 외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종교를 찾는다. 그러나 종교 활동의 목적이 크게 바뀌고 있다. 이제 죄를 고백하고, 삶의 진리를 찾으며, 영혼의 구원을 얻는 공간이 아닌, 부부 갈등이나 대인 간의 불화가 있을 때 찾는 상담소가 되기도 한다.

 

우울하거나 불안하면 성가를 명상 음악처럼 틀어 놓고, 마음을 달래는 종교 심리 에세이를 읽으며 스스로 위로한다. 수요가 공급을 낳듯이 종교 기관이 점점 행복 산업의 말단 대리점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오래 참음’을 말하는 성직자는 도무지 인기가 없다. 대중의 바람대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편집자 주)과 ‘욜로’(You Live Only Once의 첫 글자를 딴 신조어로, 한 번뿐인 인생을 충분히 즐기며 살라는 뜻 - 편집자 주)를 이야기해야 ‘트렌디’(trendy)한 성직자로 인정받는다. 영원함을 희구하는 성직자가 ‘한 번 뿐인 인생 마음대로 즐기라!’고 하는 괴상한 현상이다.

 

‘자칫하면 열심히 노력할 뻔했다.’는 식의 책은 더 이상 보답 없는 고생은 하지 말라고, 다시는 성실할 필요 없다고, 다 세상이 너를 이용하려 꾀는 것이라고 말한다.

 

요즘 현대인이 얼마나 힘들면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나 싶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인류 역사상 지금의 우리 사회가 최악의 세상 같지는 않다. 그저 고릿적부터 사람들을 유혹하던 달콤한 이야기일 뿐이다. 성경에도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야 ‘내일이면 죽을 몸 먹고 마십시다.’”(1코린 15,32)라고 하지 않는가.

 

 

오래 참음의 가치

 

행복 추구권은 헌법상의 권리라고 하지만, 사실 헌법에 행복 추구권을 규정한 나라는 한국과 일본밖에 없다. 1980년 8차 개헌 때 처음 들어간 것인데 아마 미국 독립 선언문의 ‘행복의 추구’(the pursuit of happiness)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왜 행복권이 아니라 행복 추구권일까? 행복은 결코 손에 잡을 수 없는 무지개와 같기 때문이다. 행복 자체는 영원한 목적이 될 수 없다. 얻을 수도, 줄 수도 없다. 좇으면 좇을수록 도망간다. 쾌락도, 부유함도, 명예도, 인정도, 건강도 마찬가지다. 다만 행복을 추구하며 겪는 시련과 인내로 오히려 진짜 의미를 찾는 것이다.

 

“세상 그 어떤 것도 다 참을 수 있지만, 단 하나 참을 수 없는 것은, 바로 행복한 날이 계속되는 것이다.” 독일의 극작가 괴테가 한 말이다.

 

인내는 눈에 보이는 영광을 위해 잠시 꾹 참는 것이 아니다. 확실하게 보장된 미래를 위해서라면 누군들 참지 못할까? 뜻밖의 고통과 이해할 수 없는 불운,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억울한 일도 견뎌 내는 것이다. 굴복도 아니고 용기 없음도 아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영혼은 점점 아름답게 빚어지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이렇게 썼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5,3-4).

 

* 박한선 - 정신과 전문의. 신경 인류학자.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강사로 지내며, 서울대학교 비교무화연구소에서 인간의 정신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목동병원, 서울대학교 병원, 성안드레아병원에서 일했다.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 「토닥토닥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를 펴냈다.

 

[경향잡지, 2019년 2월호, 글 박한선 · 그림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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