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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성사]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병자성사

30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5-20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33) 병자성사 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야고 5, 15)

 

 

질병의 고통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인간에게 있어서는 피하고 싶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그것을 피할 수 없을뿐더러, 그것이 언제 닥칠지 알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질병은 우리를 번뇌로 이끌기도 하고, 자신 안에 도피하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며, 때로는 하느님께 대한 실망과 반항으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질병은 사람을 더욱 성숙하게 할 수도 있고, 그의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분별하여 본질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도록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질병은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돌아오게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501항)

 

물론 다른 사람이 겪는 질병과 죽음의 고통에 대해 섣불리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 고통은 다른 사람이 대신 감당할 수 없는 외롭고 힘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병자성사를 통해서 질병과 죽음의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이 결코 그 고통 속에 홀로 버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치유와 위로의 은총이 그와 함께 있음을 알게 해 줍니다.

 

그 위로의 은총에 내포되어있는 것은 ‘인간이 겪는 고통에 대한 참되고 진실한 이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14,14) 이 외에도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인간이 겪는 질병의 고통을 동정하시고, 그들에게 치유의 기적을 베풀어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그 극심한 고통과 죽음 또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고통과 두려움이 모든 것을 허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치유와 위로의 은총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주어지리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모두 고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병자들에게 필요한 의사이십니다. (…) 병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은, 영혼과 육체의 고통을 겪는 모든 사람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매우 각별한 관심을 오랜 세월 동안 불러일으켜 왔습니다. 이러한 특별한 관심은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을 덜어 주고자 하는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의 근원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503항)

 

이처럼 병자성사는 인간의 고통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질병의 고통 중에 있을 때도, 죽음을 앞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도,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2019년 5월 19일 부활 제5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34) 병자성사 ②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13)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병든 이들을 고쳐 주는 권한을 주시고 그들을 파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마르 6,13) 따라서 이러한 성경의 증언에 따라, 병자성사에 있어서의 ‘도유(塗油)’는 예수님께서 신약의 성사로 세우신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병자성사에 있어서 종부성사 즉, “마지막 도유”라는 의미가 강조되었기 때문에, 병자성사를 죽기 전에 한 번 받는 성사로 생각하였지만, 사실 “병자성사는 생명이 위급한 지경에 놓인 사람들만을 위한 성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질병이나 노쇠로 죽을 위험이 엿보이면 이미 이 성사를 받기에 적절한 시기가 된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514항) 또한, “병자성사를 받은 병자가 건강을 회복했다가 다시 중병에 걸리게 되면 이 성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같은 병으로 앓다가 병이 더 중해지는 경우에도 이 성사를 다시 받을 수 있습니다. 중한 수술을 받기 전에 병자성사를 받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급격히 쇠약해지는 노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515항)

 

따라서, 병자성사를 미루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닙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위로가 주어지는 것을 미루는 것은 병자에게도, 병자를 간호하는 이들에게도 결코 유익한 고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간혹, 안타깝게도 병자성사를 받는 것이 삶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체념하듯 죽음을 받아들이는 의미라고 생각하여, 병자성사를 받거나 또는 환자에게 권하는 것을 기피하는 경우들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병자성사는 죽음을 선고하는 성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을 앞둔 환자가 병자성사를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완성’의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병자성사는 세례로 시작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화하는 일치를 완성합니다. 이 성사는 그리스도인의 일생 동안 이루어지는 거룩한 도유들을 완결 짓습니다. 세례 때의 도유는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새겨 주었고, 견진의 도유는 이 생명의 싸움을 위하여 우리를 굳건하게 해 주었습니다. 병자성사의 마지막 도유는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 있을 마지막 싸움에 대비하여 우리 지상 생활의 마지막에 튼튼한 방패를 마련해 줍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523항)

 

이처럼 병자성사는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해 줍니다. 힘들고, 고통스럽고, 두려운 그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2019년 5월 26일 부활 제6주일(청소년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35) 병자성사 ③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로마 6,9)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미지(未知)의 영역이고 두려움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죽음은 체험할 수 없는 것이고, 죽음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임사체험(臨死體驗)이라고 하면서 저승의 모습을 보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주관적인 이야기이고, 개인의 인생과 심리상태가 반영된 것이므로 그 이야기가 정말로 하늘나라에 관한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는 두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극심한 외로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하는 천국, 지옥 그리고 연옥에 관한 교리는 죽음과 동시에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의 내용을 담고 있기에 죽음을 마냥 자연스럽고 편안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되어오신 하느님,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죽음을 겪으심으로써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의 죽음의 의미는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자유로이 순명함으로써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순명은 죽음이라고 하는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켰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009항)

 

분명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음을 겪으셨습니다. 그 죽음은 죽음을 가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죽음을 분명히 이해하고 계시고, 인간이 겪는 그 극심한 두려움과 외로움의 순간에 진심으로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는 의심을 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지으며, 죽음을 예수님께 돌아가는 것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여깁니다. 교회는 죽음을 앞둔 그리스도인에게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죄 말씀을 마지막으로 들려주고, 힘을 북돋우는 도유(塗油)로 날인하며, 여행을 위한 양식인 노자성체로 그리스도를 모시게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020항)

 

이처럼 가톨릭교회는 병자성사를 통해 인간에게 있어서 극도의 두려움과 외로움의 순간이라고 하는 죽음의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죽음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심판의 의미 또한 마찬가지로 죽음의 공포를 더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지옥에 가기를 바라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달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죽음의 신비에 대해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2019년 6월 2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36) 병자성사 ④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야고 5,14)


‘이 늦은 시간에 신부님께 병자성사를 청해도 될까?’

 

 

병자성사를 청하는 이에게 일분일초는 대단히 긴박한 순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긴박한 순간이 낮이 될지, 한밤중이 될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만일, 한밤중에 병자성사를 청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지체할 이유 없이 사제에게 병자성사를 청하는 것이 맞습니다. 병자성사는 오직 “사제들만이 거행합니다. 신자들에게 이 성사의 선익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사목자들의 의무입니다. 신자들은 이 성사를 받기 위해 사제를 청하도록 병자들을 격려해야 합니다. 병자들은 그들의 목자와 온 교회 공동체의 도움을 받아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이 성사를 받도록 준비하여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전체는 병자들을 특별히 기도와 형제적인 사랑으로 감싸 주어야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516항)

 

이처럼, 병자성사는 사제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사명입니다. 이러한 사명에 대해서는 성경에서도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 5,14~15)

 

병자성사를 베푸는 일이 사제들에게만 주어져 있는 것은 병자성사가 고해성사 그리고 성체성사와도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병의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하느님을 간절히 찾는 이에게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과의 화해를 이루어주며,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야말로 병자성사를 청하는 이에게 가장 필요한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깨닫게 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든 병자성사를 청하는 이들을 사제가 찾아가는 일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하는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다만,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병자성사와 고해성사 그리고 성체성사가 지니는 매우 긴밀한 관계를 생각한다면, 적어도 환자가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에 참여할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병자성사를 받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아울러 병자성사가 아픈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 공동체 전체의 사랑과 일치를 드러내는 것임을 기억한다면, 사제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 공동체의 일원들이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병자성사를 반드시 죽음과 연관 지어 생각하다가 계속해서 미루거나 피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2019년 6월 9일 성령 강림 대축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37) 병자성사 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복음 말씀 가운데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가 있습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예수님께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예리코로 내려가던 어떤 이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되었는데 사제도, 레위인도 그를 그냥 지나쳐갔지만, 여행을 하던 사마리아인이 그를 가엾게 여겨 치료해준 다음, 여관까지 데려다주고는 여관 주인에게 비용을 지불하며 그를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하고 떠났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들려주시고 율법교사에게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율법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을 통해 우리는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포함하여 당시의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겪는 고통이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만나게 되는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요한 9,2) 이 질문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

 

인간이 겪는 고통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은 연민과 애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병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14,14)

 

병자성사는 예수님께서 그러하셨고, 또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할 사랑과 자비의 사명을 수행하는 적극적인 행위로서의 성사입니다.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그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병자성사를 집전하는 사제에게만 주어진 사명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2019년 6월 16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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