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자료실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19일 (금)부활 제3주간 금요일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신앙생활

sub_menu

7성사ㅣ 준성사
[성체성사]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성체성사

29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3-12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23) 성체성사 ①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를 완결 짓습니다. 세례성사로 왕다운 사제 품위에 올려지고, 견진성사로 그리스도를 더욱 더 닮게 된 사람들은 성찬례를 통하여 온 공동체와 함께 주님의 희생 제사에 참여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322항)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신자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신앙의 성숙을 도모하고 신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해 나갈 책임감을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인으로서의 삶에 있어서 힘과 원천이 되는 것이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예수님과 일치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사는 것이 어떠한 의미이며, 그 삶을 통해 얻게 될 구원의 희망과 영원한 생명을 미리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앞두시고,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며 친히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그 의미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6~28)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통에서 과월절과 무교절은 이집트에서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매우 중요하고 의미있는 축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것은, 구약의 “파스카” 사건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한 제물이 되었던 어린양처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의 구원을 위한 희생제물이 되실 것임을 매우 극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최후의 만찬에 함께 했던 사도들은 세상을 향한 지극히 완전하고 거룩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깨닫도록 초대된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하고 말씀하심으로써 오늘날 우리 역시도 그 거룩한 희생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우리 역시도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고 깨닫도록 초대받은 것이며, 동시에 그 사랑을 전하고 증거하는 이 시대의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019년 3월 10일 사순 제1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24) 성체성사 ②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미사를 통해서 성체성사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런데 간혹 ‘미사 분위기’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들을 이야기하는 신자분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청소년미사 분위기가 너무 산만하다든지 아니면 청년들 미사 때 밴드미사를 하는 것이 너무 소란스럽다든지 하는 의견들입니다.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미사가 기쁨의 ‘축제’여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고, 또 어떤 분들은 세상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제사’여야 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위기가 더 맞는 것이라고 판단하기에 앞서 성체성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더 현명하고 합당한 고민이 될 것입니다.

 

“성체성사의 무한한 풍요로움은 이 성사를 부르는 여러 가지의 이름에서 나타납니다. 이 이름들은 각기 성체성사의 어떤 측면들을 환기시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328항)

 

성체성사를 부르는 여러 가지 이름 가운데 “성찬례(Eucharistia)”가 있습니다. 이를 성체성사가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 행위라는 의미로 “감사제”라고도 합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 안에서 창조주이시며,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업적을 선포하는 감사 기도의 내용을 떠올리게 합니다.

 

성체성사를 또한 “주님의 만찬”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최후의 만찬과 관계되는 것으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참여하게 될 하느님 나라에서의 잔치를 떠올리게 해 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 자신을 구원을 위한 희생 제물로 바치신다는 의미에서 성체성사를 “거룩한 희생 제사”라고도 합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를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내어 주셨고, 우리는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의 몸과 피에 참여함으로써 예수님과의 “친교”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미사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사를 통해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고, 그 일치 안에서 신앙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성찰해야 한다는 중요한 의미에 대해서는 분명히 공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미사(Missa)라고 하는 이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원의 신비를 이루는 성체성사의 거룩한 전례가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도록 신자들을 파견(Missio)함으로써 끝나기 때문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332항) [2019년 3월 17일 사순 제2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25) 성체성사 ③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

 

 

지난 해 여름, 한국천주교회는 “성체 훼손 사건”이라는 큰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가톨릭교회의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빵 조각”에 낙서하고 불태운 것이 뭐가 그리 잘못한 일이냐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무지(無知)나 신앙심과는 관계없이 믿는 이에게도 믿지 않는 이에게도 성체는 분명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체는 믿는 이들에게는 지극한 공경의 대상으로서 주어져야 하며,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주어질 수 없는 아니 주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으로서 빵과 포도주가 “어떻게”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겠으나, 그 자체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하는 “성변화(聖變化)”의 원리를 인간에게서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라면, 예수님께서 세우신 성찬례가 지니는 ‘거룩한 희생제사’라는 의미를 간과한 채, 인간이 구원을 위해 예수님의 희생을 ‘요청’하는 일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인간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신 것은 결코 인간의 요구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자유로운 ‘자기희생’ 혹은 ‘자기 비움’에 의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하는 것은 예수님의 의지와 예수님의 능력으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 거룩한 변화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현존(現存)”하시고 함께 머무르십니다. 성체성사가 지니는 중요한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언젠가 만나게 될 예수님께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친밀하고도 인격적인 만남은 우리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그렇게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분으로서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심으로써 우리 가운데 계속 신비롭게 머물러 계시며, 이러한 사랑을 표현하고 전해 주는 표징 안에 계십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380항) [2019년 3월 24일 사순 제3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26) 성체성사 ④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 34)

 

 

예수님의 몸, 곧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을 “영성체(領聖體)”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주신 지극한 사랑의 가장 극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위대하고 거룩한 영성체를 할 때에는, 미사에 참여하였으므로 으레 그 순서에 따라 성체를 받아 모시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알고 깊이 묵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영성체는 우리와 그리스도의 일치를 증진시켜 줍니다.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얻는 주요한 효과는 예수 그리스도와 긴밀하게 일치하는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391항)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받아먹음”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마련해주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여 세례성사 때 받은 은총의 생명을 보존하고 성장시키고 또한 새롭게 합니다.

 

또한 “영성체는 우리를 죄에서 떼어 놓습니다. 영성체로 받아 모시는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것이며, 우리가 마시는 피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시키는 동시에, 우리가 전에 지은 죄를 정화하고 앞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줍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393항)

 

이처럼 성체성사는 우리 자신의 영신적인 이익을 위해 매우 유익하고 더 나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영성체가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영성체를 통해 이루는 예수님과의 일치는 동시에 우리 모두의 일치이기도 합니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따라서, 영성체는 자기 자신과 더불어 이웃 사랑에 대한 사명 또한 확인시켜 줌으로써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투신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참되게 받기 위해서는 그분의 형제들인 가장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아야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397항)

 

성체성사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성장시켜 완전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따라서 성체를 받아 모시며 살아가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분명 달라야 하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도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루카 6,32) [2019년 3월 31일 사순 제4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27) 성체성사 ⑤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 5)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현존(現存)을 체험하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곧 나와 함께 머무신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 성사입니다. 영성체를 통해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모시는 것이 그 행위로만 놓고 본다면, 내가 예수님의 몸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구원의 영광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으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초대에 응하기 위해서, 이 위대하고도 거룩한 순간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양심 성찰을 권고합니다.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신을 살피고 나서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1코린 11,27~28)’ 그러므로 중한 죄를 지었다고 느끼는 사람은 성체를 모시기 전에 고해성사를 받아야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385항)

 

죄를 사하여 주려고 “많은 이”를 위해 피를 흘리신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구원의 초대’는 당연히 억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최대한 ‘많은 이들이’ 그 초대에 응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고해성사는 회개와 용서를 통해 우리가 죄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을 향할 수 있게 해주며, 깨끗한 마음으로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게 해줍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알고 있으면서도 하느님과 화해하려는 노력 없이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은 성체성사의 의미를 훼손시키는 것이 되므로, 영성체를 위한 합당한 마음가짐에 있어서 고해성사는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성체를 받아 모시기 위한 준비로 “신자들은 자신들의 교회가 정한 공복재(空腹齋)를 지켜야 합니다. 몸가짐(행동, 복장)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손님이 되시는 그 순간에 걸맞은 존경과 정중함과 기쁨을 나타내야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387항)

 

이러한 마음가짐과 몸가짐은 우리가 받아 모시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신비가 무엇인지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하며, 그 의미를 분명히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로 이루어지는 미사(Missa)는 “영성체”라는 매우 극적이고 중요한 순간을 향해 우리를 준비시켜 주고 이끌어 줍니다. 어느 한 부분에만 집중하여 미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미사 전부터 시작하여 미사 후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성체성사에 참여하기 위한 합당한 준비는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다.” [2019년 3월 31일 사순 제4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0 5,464 0

추천  0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