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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대림절의 임박한 기다림

480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12-12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대림절의 임박한 기다림(Adventliche Naherwartung)

 

 

대림절은 ‘기다림’의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기다리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만이 아닙니다. 이때는 종말에 있을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성탄 이전의 주간들은 베들레헴에서의 메시아 탄생을 기쁜 마음으로 고대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 주간들에 우리는 마찬가지의 열성으로 영광 가운데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때문에 우리는 대림절의 주일에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는 이 말은 사실 “그분이 곧 오신다”는 재림의 약속과는 분명히 어긋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기대는 신약성경의 많은 텍스트에 스며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소수 분파가 이 문제를 두고 씨름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매번 이 임박한 종말 기대를 거듭 새롭게 부추기며, 그때마다 세상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선전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주 특정한 시간을 제시하곤 했지요. 하지만 그 추종자들은 매번 실망과 좌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때마다 그런 실망과 좌절이 이단 분파들의 몰락을 가져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한 분파를 이끄는 이른바 예언자라고 칭하는 자들은, 아직 오지 않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늘 다시 이런저런 이유를 가져다 댈 줄을 알았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그들의 계산법이 여러 방해 요소들로 혼란을 빚었다는 주장을 펴곤 했습니다.

 

또 하나의 해결책이 아주 이른 시기에 정통 교회에서 나왔습니다. 곧 세대를 거치면서 계속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나는 반면에 예수님의 재림은 여전히 일어나지 않자, 임박한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복음서의 텍스트들은 신앙인들의 생생한 의식에서 점차 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임박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는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잊힌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시간적으로 멀리멀리 뒤로, 언젠가 올 먼 세상 끝으로 미루었습니다.

 

 

임박한 재림의 재발견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성서학자들은 뜻밖에도,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가 얼마나 종말론적인 특성을 지닌 것이었는지, 그분의 선포가 얼마나 임박한 재림으로 채워진 것이었는지를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그 이후로 신학자들은 이 ‘임박한 종말 기대’라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 진력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문제를 두고 곧바로 우아한 해결책을 하나 찾아냈습니다. 곧 임박한 종말 기대를 윤리 문제로 축소해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대표적으로 독일 개신교 신약성서학자인 헤르베르트 브라운Herbert Braun의 주장을 들어보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종말 선포에 담긴 본래 의도는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책임성에 대한 전례 없는 훈계이다.”

 

말하자면 그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곧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시간적인’ 가까움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그 말씀은 은유적인 의미로 ‘책임성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선포와 초대 교회의 선포는 비역사적인 것으로 뒤바뀝니다. 생생한 희망이 ‘책임성에 대한 훈계’로 전락합니다. 모든 사람이 기다리는 미래, 이미 충만하게 채워진 약속된 미래에서 오는 구원은 더 이상 없습니다. 대림의 희망이 사라졌다고나 할까요.

헤르베르트 브라운 외에도, 무엇보다 개신교 쪽에서 수많은 신학자들이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을 ‘실존론적’으로 해석합니다. 인간의 실존과 결부시켜 읽는 것입니다. 특히 개신교 성서학자 한스 콘첼만Hans Conzelmann의 주장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는 시간 자체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다림을 엄밀하게 이해한다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도래의 시간이 멀리 있다거나 가까이 있다는 점을 확정하려는 중립적인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을 겨냥한다. 곧 인간에게 자신을 위해서는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인간은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 나라에 투신해야 한다. 아직은 그 나라가 현존하지는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그러한 투신과 준비, 회심의 기회는 지나가 버리고 만 게 될 것이다. 게다가 그 나라에 대한 선포도 필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회심을 뒤로 미룰 만한 시간이 여전히 얼마나 남아 있는지 더 이상 물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 와 있다. 그럴 여유는 더 이상 없다. 그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는 지금이 마지막 순간이다. 그러니 시간의 문제를 결코 중립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 시간의 문제에 여전히 매달리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좋은 말입니다. 이 실존주의적 신학의 해석은 예수님의 선포에 담긴 중요한 요소들을 잘 드러내줍니다. 특히 이러한 해석은, 종말이 곧 온다는 예수님의 선포가 여전히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왜 초대 교회에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변을 들려줍니다. 초대 교회는 회심 안에서 늘 거듭 ‘종말의 순간’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실존주의적 해석은 커다란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개신교적’으로 기운 측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곧 하느님 나라를 다만 ‘개인’의 차원에서만 바라본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교회와 공동체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역사도 배제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임박한 기대를 더 잘 설명할 수는 없을까요?

 

 

끊임없이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


세상이 창조된 이래로 하느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시는 행동을 통해 세상을 떠받치지 않으신 순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배려와 사랑으로, 당신의 오심으로 하느님은 세상을 품으십니다. 하느님은 끊임없이 오십니다. 세상을 향해 늘 오시는 이 하느님의 은총은 이스라엘 안에서, 무엇보다 예수님 안에서 결정적으로 그 목적에 도달했습니다. 곧 종말에 도달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 나라가 아직도 아무 제약 없이 온전히 현존하지 않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여전히 머뭇거리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신앙이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여전히 온전한 현실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활 이래로 그분 안에 이미 근본적으로 현존하는 것이 아직은 어디서나 관철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하느님에게 있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회심하지 않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느님 편에서 보면 이미 모든 것이 주어졌고 모든 것이 현존합니다. 우리 사이에 한 아기가 태어났고, 아들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보면, 콘첼만과 같은 이들의 실존주의적 해석이 이 지점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매 순간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이 지닌 역사적 차원이 배제된다는 점에서만 그러한 해석에 허점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은 회심하든 회심하지 않든 어떤 한 개인으로만 구성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 개인의 결정은 그와 연결된 다른 수많은 이들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각 개인은 다른 이들의 발자취를 따릅니다. 그리고 각 개인의 결정 자체는 또다시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냅니다. 다른 이들에게 문을 열거나 닫습니다.

 

달리 말해, 우리는 모두 구원의 역사와 비구원의 역사에 연루되어 있고, 본질적으로 그 역사는 교회인 우리가 믿음의 공동체로 사느냐 또는 그러지 않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교회 안에서, 교회의 전례와 삶 안에서 하느님의 종말론적 구원이 우리에게 오고, 세상을 변모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니 이때 우리는 임박한 종말의 시간을 삽니다. 하느님의 약속들이 끊임없이 성취되는 공간 속에서 삽니다. 우리는 이 공간에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되면 하느님의 약속들은 우리를 비켜 가고, 하느님 나라의 완성도 뒤로 미루어질 것입니다.

 

 

모든 순간마다


이미 성취되는 구원의 역사와 늘 또다시 뒤로 미루어지는 구원의 역사 사이에 놓인 이 긴장 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임박한 종말에 관한 신약성경의 텍스트들을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임박한 종말이란, 모든 순간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길을 보여주시려는 때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순간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문을 열어주시려는 때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순간이 하느님께서 비구원을 구원으로 바꾸시는 때입니다. 모든 순간이 불가능이 가능하게 되는 때입니다. 임박한 종말이란, 우리가 결코 ‘나중에!’라고 말하지 않고 ‘지금!’이라고 말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늘 다만 그런 순간이고, 그런 순간이야말로 이미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때입니다.

 

물론 언젠가는, 이미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신 수많은 순간들을 하나로 모으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다 모아서 수확을 할 시간이 올 것입니다. 그 시간은 그분이 오시는 최종적 때입니다. 바로 우리 각자의 죽음이 그때입니다. 죽음의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지상의 모든 시간과 지상의 모든 역사는 우리 각자에게서 끝이 납니다. 그때에는 우리 자신의 모든 순간과 세상 역사의 모든 순간을 세상 심판자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다 합산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있습니다.

 

그러니 임박한 종말에 관한 신약성경의 텍스트들은 두렵고 곤혹스러운 말씀이거나 우리가 무시해도 좋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말씀들은 그리스도교적인 것의 핵심에 속합니다. 때문에 그 말씀들이 새 전례주년의 시작마다 늘 다시 봉독됩니다. 그 말씀들은 우리가 지금 어떤 시간에 살고 있는지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말의 시간에 살고 있고, 이 시간에는 “나의 회심을 뒤로 미루어도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겠지!”라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럴 시간은 전혀 없습니다. 늘 마지막 시간입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 Gemeind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주님의 기도 바로 알기』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이 칼럼은 저명한 성서신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보내오는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9년 12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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