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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남북의 기억을 모아 새로운 비상으로, 구 왜관 성당

128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9-09

[이 땅에 빛을] 남북의 기억을 모아 새로운 비상(飛翔)으로, 구 왜관 성당

 

 

왜관 수도원에 들어서면 입구에서 구 왜관 성당과 마주하게 된다. 이 성당은 ‘험난한 역사의 굴곡을 잇는 아름다운 형제애’의 상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6·25 전쟁은 남북한 양측 합하여 40여 개국이 관여된 전쟁이었고, 이때 사용된 폭탄의 양이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된 양과 맞먹는 전쟁이었다. 전쟁 중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12명이 순교했는데 그중 카다르(Joseph Cadars, 1878-1950, 姜達淳) 신부, 리샤르(Richard, 1900-1950, 李東憲) 신부, 를뢰(Leleu, 1909-1950, 盧) 신부와 코르데스(Cordesse, 1909-1950, 孔) 신부는 왜관 지역 신자들이 추억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각기 초대, 2대, 3대 주임 신부를 역임했고, 코르데스 신부는 리샤르 신부의 사목을 도우러 왜관에 왔었다.

 

이들은 수십 년간 대구 대목구에서 활동한 선교사였다. 일제 말 가택연금 되었다가 해방 이후 대전 지목구가 설정되어(1948년) 모두 그곳으로 재배치되었다. 이들의 새 출발은 곧바로 전쟁으로 멈추어 버렸으며 전쟁 중에 목숨마저 잃고 만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대구가 아닌 대전 교구의 순교자로 기억된다. 이외에 대구 대목구에서 사목했던 6·25 전쟁 순교자는 부산 본당의 뵐토 신부가 유일하다. 그러므로 구 왜관 성당은 대구 대교구에서 20세기 순교자를 기리는 중심지라 할만하다. 더욱이 구 왜관 성당을 감싸고 있는 베네딕도회는 6·25 전쟁 중에 순교자 38위를 배출했다. 함경도 일대에서 수도원, 신학교, 본당, 학교, 병원 등을 고루 갖춘 지역 교회를 일구어낸 이들은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내주고 내려와 이 자리에 정착했다.

 

 

복된 지방, 왜관 본당

 

왜관은 가실 본당 관할 공소였다. 당시로서는 새 본당을 분리할 만큼 떨어진 거리가 아니었으나 공소 회장 정재문 안드레아와 신자들이 성당 건축에 솔선했다. 이에 투르뇌(Tourneux, 1879-1944, 呂東宣) 주임 신부와 정재문 회장이 건축비를 반씩 부담하기로 했다. 실제 공사에는 1/3 정도의 비용이 더 소요되어 정재문 회장과 이웃 공소회장 두 명이 희사하고 모자란 부분은 신자들이 채웠다. 성당은 1928년에 완공되었다. 본당보다 더 큰 성당을 공소에 지은 이유는 왜관 신자들이 사제 서품 은경축을 맞은 주임 신부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려고 힘을 모았던 까닭도 있었지만, 성당 신축은 투르뇌 신부 개인의 단안이기도 했다. 결국 그의 혜안은 기차역이 들어와 성장일로에 있던 왜관에 본당을 신설하여 교세 확장에 기여했고, 오늘날 왜관 수도원과 연결되는 더 큰 미래를 만들어 내었다. 왜관 본당 초대 주임이 카다르 신부인데도 신자들이 투르뇌 신부를 초대로 기록하는 것은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인 것 같다.

 

왜관 성당 전경(1929년, 투르뇌 신부(좌)와 카다르 신부(우))

 

 

투르뇌 신부는 31년간 가실 본당 주임으로 있으면서도 왜관 본당에 적극 협조했다. 특히 건축에 재능을 지닌 그는 사제관, 소화학원 등을 설계하고 공사 감독도 했다. 창틀까지 쌓은 벽돌을 헐고 다시 쌓게 할 정도로 철저했고, 그 덕분에 성당과 사제관이 전쟁의 포화를 견뎌냈다. 성당은 지은 지 4년 후 리샤르 신부가 주임일 때 드망즈 주교가 축성했다.

 

1929년 5월 카다르 신부가 주임으로 왜관 본당에 부임했다. 카다르 신부는 성당 동편에 현재의 사제관을 지었다. 건축 비용은 투르뇌 신부와 카다르 신부가 함께 대고 설계는 투르뇌 신부가 했다. 사제관 1층은 반 지하실로 겨울철 난방까지 고려한, 당시 자랑할 만한 문화주택이었으나 좁고 복잡한 방 구조와 여름철 더위는 비명을 울릴 지경이었다. 물론 사제관에는 화장실도 없었다.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지은 건물 중 계산 성당 사제관에 처음으로 화장실을 넣은 때가 1967년이었으니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2대 주임 리샤르 신부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를 초대했고, 현 순심학교의 근간이 되는 소화여자학원을 세웠다. 이도 투르뇌 신부가 설계했고, 비용은 리사르 신부의 부친이 원조했다. 리샤르 신부는 성당 서편의 본당 사무실에서 ‘천신유년부(유치원)’도 시작했다. 그는 한국어에 능했는데, 강론 후에는 우리말 문법에 대해 강평을 받곤 했다. 사제관 문 앞에는 ‘여자는 들어오지 마시오’라는 표찰을 달아놓았다. 3대 주임 를뢰 신부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 부임했다.

 

 

서부 ‘죽음의 행진’과 카다르 신부

 

인민군은 6·25 전쟁 중에 체포한 외국인을 전부 한 곳에 모으려 했다. 동부(자강도 전천군 별하면 쌍방리 옥사덕)에 이미 강제 수용한 독일인들을 제외한 외국인들을 모두 서부에 모았다. 이들은 군인 포로 700여 명과 민간인 74명의 두 부류였다. 이중 가톨릭 성직자와 수도자는 5개 국적의 18명이었다. 왜관 본당 주임 카다릐 신부는 1948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대전 지목구로 이적할 때 대구에 남아 백내장 수술을 받았으나 수술 결과가 좋지 않아서 한동안 더 대구에 머물렀다. 6·25 전쟁 당시 그는 프란치스코회가 운영하던 대전 목동 본당의 주임이었다. 인민군은 7월 21일 그를 체포하여 대전 형무소에 수감했다. 8월 19일 형무소를 탈출한 그는 본당으로 몰래 돌아와 미사를 집전했으나 이내 체포되어 재수감되었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서울과 평양에 수감되었다가 한 달 후에 압록강변 만포에서 먼저 잡혀온 동료들과 합류했다.

 

서부의 외국인 포로들은 인천상륙작전 이후부터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될 때까지 시설도 없는 숙영지를 여러 차례 바꾸며 끌려 다녔다. 국군과 연합군이 압록강에 이르고, 중공군이 들어오기 시작한 1950년 10월 31일부터 11월 9일까지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800명이 넘는 인원이 영하 20도에 여름 옷을 입고 신발도 없이 만포를 지나 고산, 초산, 중강진을 거쳐 하창리까지 험준한 산길을 280km나 걸었다.

 

중강진 체류 때부터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도 쓰러졌다. 11월 10일 비에모 신부가 81세로 숨을 거두어 선교사로서 58년 삶을 주님께 바쳤다. 이튿날은 형 공베르 신부. 그 다음날은 동생 공베르 신부가 선교사 생애 50년을 마감했다. 땅이 있어 무덤도 파지 못하고, 중강진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산위에 차례로 눕혀졌다.

 

이러한 동료들을 뒤로 하고, 카다르 신부는 죽음의 행진을 끝까지 해냈다. 그는 72세 고령이었지만, 늘 활기를 돋우는 생각과 기력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수술로 인해 한 눈을 잃었고 거의 장님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속으로는 이질과 살이 썩는 병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그는 어느 캄캄한 밤에 밖에 나갔다가 유리 조각 위에 넘어져서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12월 17일 카다르 신부는 평소처럼 활발하게 대화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날 밤 잠이 들고는 깨어나지 못했다. 뷜토 신부는 1월 6일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가운데 가장 연약했던 코요스 신부는 죽음의 행진 당시 몸무게가 45kg이었지만 홀로 살아남아 동료들의 순교 행적을 증언했다.

 

다른 이들은 남한에서 이미 총살되었다. 인민군은 8월에 접어들면서 성직자들을 일시에 체포했다. 3일에는 예산 본당 리샤르 신부와 온양 본당 를뢰 신부, 14일에는 당진 본당 코르데스 신부가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프란치스코회 목동 수도원으로 이송되었다. 목동에는 대전형무소가 있었고, 대전 지역을 관할하는 정치보위부 본부가 수도원과 성당을 차지했다. 인민군은 북으로 쫓기면서 9월 23일에서 26일 사이에 체포한 사람들을 모두 그곳에서 처형했다.

 

 

동부 옥사덕 수용소와 베네딕도회의 남하

 

옥사덕에 수용되었던 동부의 독일인 포로들도 국군과 연합군이 북쪽으로 진격하자 서부와 똑같이 이동하며 ‘죽음의 행진’에 합류했다. 그들은 10월 25일 만포에 도착했다. 그 무렵, 서부 포로들도 만포로 향했다. 인민군은 외국인 포로들을 한 곳에 모아 중국으로 보내려고 했다.

 

한편, 덕원 수도원과 원산 수녀원이 폐쇄될 당시 체포를 모면한 한국인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연락이 닿는 대로 각각 남쪽으로 떠나 마침내 부산에 모였다. 다행히도 그들은 6·25 전쟁 중에 유일하게 점령당하지 않은 대구 대목구에 정착했다. 메리놀회 그레이그 신부의 주선으로 베네딕도회 수사들은 대구 대목구장 최덕홍 요한 주교의 초대를 받았다. 1951년 6월 6일 미국 베네딕도회 성 안셀모 수도원 소속으로 미군에서 군종 신부로 복무 중인 제랄드 맥카시 신부의 도움을 받아 성직 지망 수사 5명과 평수사 6명이 대구로 이사했다. 맥카시 신부는 최덕홍 주교에게 베네딕도회 수녀들 역시 대구 대목구로 초청하도록 중재했다. 원산 수녀원 출신 수녀들은 1951년 10월 23일 대구 주교관 내 한옥에 도착했다.

 

왜관 수도원 전경(1961년 왜관)

 

 

이어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디모테오 비테를리(Timotheo Bitterli, 1905-1990, 李聖道) 신부를 피난 공동체의 장상으로 임명했고, 이후 수도공동체는 왜관에 정착했다. 비테를리 몬시뇰은 1952년 5년 9일 함흥 대목구와 덕원 자치 수도원구의 교구장 서리로 발령을 받았으며, 1953년 12월 20일 최덕홍 주교로부터 왜관 인근 지역의 사목을 관할하는 교구장 대리로 임명되었다. 이에 왜관 감목 대리구가 설정되었고 왜관 본당은 베네딕도회에서 사목을 맡게 되었다. 노규채 아우구스티노(盧奎彩, 1923-2017) 신부가 첫 주임으로 부임했다. 왜관 본당은 디모테오 원장 신부의 교구장 착좌식, 이듬해 사제서품식 등 본당으로서는 드문 기회들을 누렸다. 그 덕분인지 신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5천 명을 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되자, 11대 주임 엘마르 랑(Emmar Lang, 張輝, 1933-2015) 신부는 모든 비용을 스스로 마련하여 현재 자리에 현대식 새 성당을 지었다. 알빈 슈미트(Alwin Schmid, 安, 1904-1978) 신부의 설계로 지어진 성당은 1966년 4월에 착공하여 연말에 완공되었고, 1967년 5월 14일에 축성되었다.

 

6·25 전쟁은 북한 교회가 남한 교회로 합쳐지는 결과를 초래했고 구 왜관 성당은 그 상징적 중심이 되었다. 최덕홍 주교에게 초대받은 이들은 이 일터에서 자신의 몫을 다할 뿐 아니라 민족이 할 몫까지 해나갔다. 선교사의 삶이 이어지며 새 탄생을 만들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0년 여름(Vol. 50), 김정숙 소화 데레사(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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