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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일제강점기 한국천주교회와 만국전교박람회

1133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1-22

일제강점기 한국천주교회와 만국전교박람회

 

 

국치 이후 한국은 만국박람회에 참가할 수 없었는데, 1925년 바티칸의 전교박람회에 참가하였다. 선교를 목적으로 하였지만 전교박람회에는 전교지역의 많은 물건들이 전시되었다. 한국천주교회가 전교박람회에 참가한 이유는 교황 비오 11세의 칙령 때문이었다. 비오 11세는 1925년 성년대사를 반포할 때 바티칸에서 만국전교박람회도 개최하겠다고 하였다.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이 전교지역에 해당하고, 1925년에 많은 한국순교자들이 시복될 것이기에 전교박람회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한국천주교회는 출품할 물품을 60여 종으로 하고, 경성 · 대구 · 원산의 세 교구가 공동으로 큰 한국 전시실을 마련하며 나머지는 분담하기로 하였다. 원산교구는 한국의 주택 모형 · 형구들 · 사진들 · 앨범 등을, 서울교구와 대구교구는 교우촌 지도 · 금속활자판 · 천주교 책 등을 교구 차원에서 준비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30여 종은 신자들에게 요구하였다. 신자들의 기부 물품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한국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들, 한국인들의 의류였다. 이들은 파리박람회에서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것들이다. 이들 물품은 서구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전교지역 한국과 그곳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들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한국천주교회가 오랜 동안 준비하여 마련한 한국천주교회의 물품들은 우송 사고로 두 번의 준비를 거쳐 원래의 예정보다 늦게 바티칸에 도착되었다.

 

한국천주교회에서는 한국 순교자 시복식에 참가한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 한기근 신부, 장면 · 장발 형제, 그리고 기낭 신부 등 6명이 박람회장을 찾았다. 그런데 한국 물품들이 있어야 할 자리는 다른 것들로 채워져 있었고, 한국 물품들은 어떤 것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사무실에 있었다. 소홀히 취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천주교회는 일제 강점 하였지만 독립된 존재로서 전교박람회에 참가하였다. 그리하여 박람회장을 찾은 서구인들에게 한국을 알리고 이후 바티칸의 민족선교박물관에 한국실이 마련되는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1925년 한국천주교회의 전교박람회 참가는 한국교회사는 물론 한국사에서도 의의를 갖는다.

 

 

Ⅰ. 머리말

 

1883년 보빙사(報聘使)로 미국을 방문 중이던 민영익(閔泳翊)이 보스톤박람회(The American Exhibition of the Products, Arts and Manufactures of Foreign Nations)를 관람하고, 도자기·화병·주전자 등 갖고 있던 물건 몇 점을 비공식으로 출품하였다.1) 한국인의 첫 세계박람회 관람이었다. 그리고 1884년 2월 21일 자(음) 《한성순보》 제15호에 첫 번째 세계박람회라고 할 수 있는 1851년의 런던 만국박람회(The Great Exhibition of the Works of Industry of All Nations)가 소개되었다.2) 이어 콜럼버스의 미국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1893년의 시카고박람회(World Columbian Exposition, Chicago)에 조선정부가 공식으로 물품을 출품하였고,3) 1900년의 파리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 et Internationale de Paris)4)와 1902년의 하노이박람회(Exposition et Internationale)에는 대한제국정부가 공식으로 물건을 출품하고 참가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 한국의 세계박람회 참가는 중단되었다.5)

 

박람회란 온갖 물품을 전시, 진열하고 판매·선전·우열심사 등을 하여 생산물의 개량 발전 및 산업 진흥을 꾀하기 위해 여는 전람회를 말한다.6) 1922년 1월 6일에 교황으로 선출된 비오 11세(Pius, 1857-1939 : 1922-1939 재위)는 이듬해 4월, 1925년에 성년(聖年, Holy Year)과 더불어 ‘만국전교박람회’(이하 전교박람회로 약칭)를 개최하겠다는 칙령을 내렸다.7) 박람회는 산업혁명 이후에 산업계몽을 목적으로 시작되었고 표방하는 슬로건이 국제주의인데,8) 물질이 아닌 세계적인 ‘전교’를 목적으로 만국박람회를 개최하고자 한 것이다. 교황의 만국박람회 개최 칙령은 전교성성 장관의 통첩에 의하여 전세계의 전교지역들에 통지되었다.9) 기해 · 병오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한국천주교회는 만국전교박람회 참가를 결정하고, 박람회를 준비하였다.

 

국치 이후 일제가 강점한 동안 한국은 만국박람회에 참가할 수 없었는데, 교회 차원이기는 하지만 1925년의 만국박람회에 참가하였다. 1925년의 전교박람회는 선교를 목적으로 하였지만, 전교지역의 각종 물품들이 전시되었다. 따라서 1925년 한국천주교회의 전교박람회 참가는 한국교회사는 물론 한국사에서도 의미를 갖는다. 이에 본고는 한국천주교회가 1925년의 전교박람회에 참가한 이유, 출품 물건들을 준비하는 과정, 출품 물품들이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누가 전교박람회를 관람하였는지를 추적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전교박람회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통하여 한국천주교회 나아가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어떤 모습이었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하고자한다.

 

 

II. 한국물품 준비

 

1923년 4월 24일 교황 비오 11세는 1925년 성년대사(聖年大赦)를 반포할 때 바티칸에서 만국전교박람회도 개최하겠다는 칙령을 전교성성장(傳敎聖省長) 반 로쑴(Van Rossum)에게 내렸다.10) 열흘 후인 5월 3일 반 로쑴 추기경은 전세계의 전교지역 주교들에게 전교박람회를 통첩하였다.

 

“이 박람회는 오주 예수 그리스도께와 성교회에게 특별한 영광이 될 뿐 아니라 또한 각 지방 전교사업에 새로운 용력과 유조함이 되리니 대저 성년대사 때에 로마에 오는 모든 교우와 및 다른 허다한 사람들이 바티칸 궁궐에 벌여 놓은 만국 전교지방의 기념물품을 목도할 때에는 마치 만국 전교사업의 일람표를 친히 봄과 같아 전교사들이 당한 바 수고와 환난과 국난 시에 치명승전한 것과 발한 바 열성과 복음을 전한 효험과 및 죽는 그늘 속에 앉아 있는 외교인들에게 구령의 은혜 베푼 것을 낱낱이 보고 전교사업을 더욱 사랑하며 더욱 귀중히 여겨 자연 도와줄 마음을 발하리로다. 이러므로 귀 주교 맡은 지방의 기후와 지방의 성질과 인민의 생활과 민족의 성질과 또한 복음을 전하기에 조당되는 이단과 그 지방 풍속과 전교사업의 성적과 효험에 관한 모든 각종 물품을 로마에 보내 모든 관람자들로 하여금 각하의 전교지방을 목도함같이 드러내기를 바라나이다.”11)

 

통첩에 의하면 전교박람회를 개최하는 이유는 1925년 성년에 대사(大赦)를 받으려는 천주교신자들은 물론 많은 일반인들이 로마를 방문할 것이니 그들에게 전세계 전교지방의 물건들을 관람케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 세계의 천주교 전교 상황, 순교하기까지 선교사들이 기울인 각 전교지역에서의 전교 활동을 보고 느끼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전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하고 후원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전교성성장의 통첩이 있은 지 4개월 후 한국천주교회는 《경향잡지》에 ‘만국 종교박람회’라는 제목으로 전교박람회 개최 소식을 다음과 같이 알렸다.12) 전교박람회를 1925년에 개최하는 이유는 미국 전례에 의하여 25년마다 성년으로 정하기에13) 바티칸을 찾는 이들이 많을 것이고, 또한 교황 비오 11세가 1925년에 만국 공교회의를 바티칸에서 개최할 것이기에 전 세계로부터 4,5천 명의 주교들(수행원 포함)이 참석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많은 이들이 바티칸을 방문할 것이니, 그들에게 전 세계의 천주교 전교 상황을 보게 함으로써 자긍심을 갖게 하고 전교에 더욱 힘을 기울이는 계기로 삼자는 것이었다.

 

전교박람회 개최 목적이 불교나 이슬람교 국가, 개신교신자들이 많은 국가에서 천주교 선교가 얼마나 진척되었는지를 보이기 위한 것이니 전교지역만이 출품할 수 있다고 하였다. 물품 진열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태리, 우라바 등 5개 지방으로 나누고, 아시아는 중국, 일본, 한국, 인도, 안남, 섬나,14) 면전15) 등으로 구분할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상업·공업·농업·군사 장려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므로 신기한 발명품이나 진기한 기계가 아니라 전교지역의 천주교회가 어떻게 발전하고 전교의 결실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교회와 직접 관계있는, 적어도 영향이 있는 것들을 출품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 세계 공용어에 능통하고 출품 물품에 충분한 지식을 가진 이가 바티칸에 와서 출품한 물품들을 설명하고 감독해야 한다고 하였다. 더불어 출품한 물품들은 출품자 자비로 하고 박람회가 끝난 후 팔거나 회수해 갈 수 있다고 하였다.

 

당시 한국천주교회는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천주교회는 1838년 말부터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수집을 시작하였고, 교황청 조사를 위한 교회재판이 1882년 5월부터 서울에서 시작되었으며,16) 1921년 교황청의 전(前) 예비회의, 1923년 5월 교황청의 예비회의가 개최되었다.17)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이 전교지역에 해당하고, 1925년에 많은 한국순교자들이 시복될 것이기에 전교박람회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18)

 

경복궁을 비롯하여 왕릉 그리고 박물관 관람을 자주 찾았던 뮈텔(Mutel, Gustave Charles Marie, 閔德孝 : 1854-1933) 주교는19) 1923년 10월 15일 드브레(Devred, Emile Alexandre Joseph, 兪 : 1877-1926) 부주교와 함께 근정전에서 거행된 조선부업공진회(朝鮮副業共進會) 개관식에 참석하였다.20) 전교성성장의 통첩을 받은 이후 한국천주교회도 전교박람회 준비를 해야 했기에 조선부업공진회 개관식 참석은 당시 두 주교에게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한국천주교회의 주교들은 전교박람회에 관한 것들을 협의하기 위해 서울에 모이기로 하였다.21) 1924년 1월 8일부터 11일까지 서울교구의 뮈텔 주교와 드브레 부주교, 대구교구의 드망즈(Demange, Florian, 安世華 : 1875-1938) 주교, 원산교구의 사우어(Sauer, Bonifatius, 1877-1950) 주교는 전교박람회 준비를 위한 회의를 여러 번 하였다.22) 그리하여 한국천주교회에서 출품할 물품을 60여 종으로 하고, 경성 · 대구 · 원산의 세 교구가 공동으로 큰 한국 전시실을 마련하며 나머지는 분담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각 교구에서 출품할 물품들 외의 물품의 구입과 포장 · 발송 등의 비용은 서울교구가 3, 대구교구가 2, 원산교구는 1의 비율로 정하되 5,600엔을 초과하지 않도록 결정한23) 후 전교박람회에 관한 주일교황사절의 회람에 회신하고, 한국천주교회의 프로그램도 발송하였다.24)

 

이어 세 주교는 공동 명의로 신자들의 협력을 요구하였다. 물품은 물론 많은 물건들을 바티칸으로 보내는 데 필요한 비용이 적지 않다며, 금전 · 물품의 기부 · 기증자 방명록을 작성하여 박람회에 진열하였다가 교황에게 드려 직접 보게 할 것이니 적극적으로 협조해 달라고 하였다. 박해 때 사용했던 물건, 박해를 기념하는 물건, 순교자들의 물건 등 천주교와 관련 있는 물건들, 그리고 일반 물건으로는 기이하고 특이한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기증할 의향이 있는 신자들은 먼저 각자의 본당신부나 드브레 부주교에게 문의서를 보내고 답장을 받은 후 문의서는 3월 15일까지, 물품은 5월 15일까지 서울로 보내라고 하였다. 기증자는 자기 주소와 이름, 기증 물품의 용도·생산 지방·제조 지방을 기록하여 보내라고 하였다.25)

 

전교박람회 물품 준비부터 발송 책임은 드브레 부주교에게 맡겨졌다. 뮈텔 · 드망즈 · 사우어 주교는 각각 서울 · 대구 · 원산 교구를 책임맡고 있었기에, 서울교구의 부주교였던 드브레 주교가 전교박람회의 한국책임자가 되었을 것이다. 1900년 한국에 입국하였으므로 20여 년의 한국 선교 경험은 전교박람회를 위한 한국 물품 준비에 충분한 것이었다. 드브레 부주교는 1924년 3월 3일부터 8일까지 대구교구를 방문하여 전교박람회에 출품할 물건들을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와 구체적으로 상의 · 점검하고,26) 드망즈 주교의 지시에 따라 대구교구의 모든 본당과 공소들이 수록된 한국지도를 직접 작성하였다.27) 그런데 드브레 부주교의 대구행에는 프와요(Poyaud, Gaston, 1877-1960) 신부가 동행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지쳤다는 이유로 함께 가지 않았다.28) 당시 한국천주교회에는 1903년에 입국한 프와요 신부보다 먼저 한국에 입국하여 활동하고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십여 명 있었다.29) 그런데 프와요 신부가 드브레 부주교를 도와 박람회 일을 하게 된 것은 각지에서 본당을 맡아 한국인 신자들을 사목하고 있던 선교사들과 달리 그는 서울에서 재한국 일본인 사목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3월 17일 드브레 부주교는 사우어 주교를 방문하여 원산교구에서 박람회에 출품할 물품을 구체적으로 상의하였다.30) 이후에도 드브레 부주교는 전교박람회 일로 백동의 베네딕도수도원을 여러 번 방문하였다.31)

 

전교박람회에 보낼 물품을 준비하고 있던 중 《동아일보》에 ‘종교박람회, 大赦祭를 機會’라는 제목으로 전교박람회가 소개되었다. 그리스도교 외에 종교가 없다고 생각하는 구미인들에게 불교·이슬람교 등 유력 종교를 비롯하여 많은 종교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그리스도교 선교 개척을 하고자 하는 것이 개최 목적이라고 하였다. 또한 ‘동경 전’(東京 電)이라며, 일본 천주교회가 박람회를 위하여 도쿄(東京)교구에서는 신도(神道), 오사카(大阪)교구에서는 불교에 관한 물품을 분담 수집하여 출품할 것이라 하였다.32)

 

한국천주교회는 전교박람회에 출품할 물품을 준비하면서 신자들의 관심과 참여를 독려하였다. 로마통신에 의한다면서 바티칸의 전교박람회장에 세계의 물품들을 진열할 건축물은 12개인데 그중 한 곳이 전교지방에서 가져온 책들로만 진열될 것이고, 박람회가 끝난 후 그 책들을 한 곳에 모아져 영원히 보존되리라 하였다. 또한 교황이 매 주일 오후 전교박람회 개최 예정 장소를 방문하여 의견을 피력하는 등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33)

 

대구교구는 대구교구에서 준비한 물품들을 1924년 5월 31일 서울로 발송하였다.34) 원산교구는 서울 백동의 베네딕도수도원에서 물품들을 준비하였다. 피정을 위해 서울에 왔던 퀴겔렌(Kogelgen, Canisus : 1884-1964) 신부와 다페르나스(d’Avernas, Kanut) 신부까지도 여러 주간 전적으로 전교박람회에 전시할 전시품을 완성하기 위해 헌신했다.35) 서울교구는 서울교구청에 모인 물품들을 6월 10일에 소달구지를 이용하여 백동의 베네딕도수도원으로 옮겼다. 6월 11일 드브레 부주교는 프와요 신부와 함께 베네딕도수도원을 방문하여, 그곳에 모인 서울 · 대구 · 원산 교구의 출품 물품들에 대한 목록을 작성하고 꼬리표 다는 작업을 시작하였다.36) 각 물건에는 이름, 용도, 생산 지역, 기증자의 주소 · 이름 등을 양서37)로 인쇄하여 붙이고, 각 물품을 각각 싸고 궤짝에 넣었는데 칠백여 종 천여 점이었다.38) 기증자의 방명록도 만들어져 바티칸으로 발송되었다.39) 그런데 한국천주교회에서 마련한 물품들의 목록 작성과 꼬리표 다는 작업은 거의 한 달의 시간이 걸려, 발송하였다는 《경향잡지》의 기사40)와는 달리, 7월 6일경 마무리되었다.41) 7월 7일 드브레 부주교가 포장된 물품의 확인작업을 마무리하였으니42) 발송은 그 이후였을 것이다. 그런데 7월 20일에 고베(神戶)를 출발하는, 무료로 바티칸에까지 운송해주겠다는 기선에 한국천주교회는 준비한 물품들을 실을 수 없었다.43) 드브레 부주교의 확인 작업 이후에도 고베에 도착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모든 것을 준비하여 발송한 한국천주교회는 이듬해에 개최될 시복식과 전교박람회를 기대하였다. 그런데 발송한 지 약 두 달 후인 9월 11일 고베의 심한 폭풍우로 한국천주교회에서 보낸 물품을 담은 14개 상자가 파손되었다는 9월 13일 자 기선회사의 전보가 한국에서의 물품 발송지인 베네딕도수도원에 9월 16일에 전해졌다.44) 같은 날 뮈텔 주교도 베네딕도수도원의 로머(Romer, Anselm, 1885-1951) 신부45)를 통하여 사정을 알게 되었다.46) 17일에 소식을 들은 드망즈 주교는 남은 것들을 건질 수 있다면, 22일에 서울에서 개최될 회의에서 반대 의견이 없는 한 다시 준비하여 보내자는 편지를 주교들에게 보냈다.47) 원산에서 사우어 주교도 드망즈 주교와 같은 내용의 전보를 받았다.48)

 

한국천주교회의 주교들은 1924년 9월 22일 주일교황사절 지아르디니(Giardini) 주교의 주재49)하에 회합을 하였다.50) 아마도 물품 훼손 상황이 보고되었을 것이고, 논의 결과 전교박람회 참가를 재확인하였을 것이다. 원산교구의 물품 준비에 함께하였던 크누트 신부가 고베로 가서 한국에서 보낸 상자들을 확인하였다. 바닷물에 5시간이나 잠겨 있었기 때문에 책, 의류, 인형 등은 완전히 훼손되었고 물품의 반 이상이 사용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다페르나스 신부는 훼손되지 않은 물품만 가려내어 한국으로 보내도록 하였다.51)

 

10월 21일 14개의 상자들이 백동의 베네딕도수도원에 도착하였고, 이튿날 보험회사의 대리인이 피해를 확인하였으며, 23일에는 드브레 부주교가 모든 것을 검사하고 사용할 수 있는 것과 바꾸어야 할 것들을 분류하였다.52) 그리고 이번에는 조제(Jaugey Joseph, 1884-1955) 신부와 함께53) 보험회사로부터 받은 3,200엔을54) 가지고 새로운 전시품을 만들고 훼손된 많은 물품들을 복구하거나 바꾸어 전교박람회에 보낼 준비를 다시 하였다.55) 12월 12일 드브레 부주교와 조제 신부는 복구 · 구입한 새 짐들에 꼬리표를 달고 7월에 했던 것처럼 상자에 모두 담았다.56) 이렇게 두 번째로 한국천주교회에서 보낸 전시품들은 원래의 예정보다 최소 3개월이 지연되어 바티칸에 도착하였다.57)

 

 

III. 출품한 한국 물품들

 

한국천주교회는 바티칸 전교박람회를 시카고박람회(World Columbian Exposition, Chicago)나 파리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 et Internationale de Paris)와 비교하였다.58) 콜럼버스의 미국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된 1893년의 시카고박람회는 한국이 공식적으로 물품을 처음 출품한 박람회였다. 시카고박람회의 공식 도록에는 ‘제조와 교양관’에 전시된 우리나라에서 출품한 모든 품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1893년 5월 3일 시카고에 도착한 하물은 68개가 아니라 83개였다.59) 따라서 전시된 68개 하물의 품목은 알 수 있지만 15개 하물의 품목은 무엇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시카고박람회의 공식 도록에 의하면, 한국60)에서는 농산물 · 원예물 · 수산물 · 광산물 · 교통과 운수 · 공예와 제조품 · 교육 · 임산물 등의 분야에 출품했으며, 가축 · 기계 · 전기 · 미술관 · 민족학 분야에는 출품하지 않았다. 미술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품목은 출품하지 않았고 곡물이나 식품 등이 상당수 있었고 주로 남녀 의복과 같은 일상용품이나 수공예품이 주를 이루었다. 조총, 무관의 투구나 옷, 400여 년이 된 호준포 등도 있었다.61) 박람회 사진을 보면 한국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가마, 찬장, 식기, 등으로 된 탁자, 짚신과 가죽 신발, 화로, 장기판, 연, 도자기류들이 있고, 전시실 안에 자수병풍, 장군의 의복, 남성의 관복과 무인복 등이 있다.62) 박람회가 끝난 후 한국 물품들은 여러 박물관으로 보내졌는데, 피바디 박물관(해금 · 대금 · 옥저 · 가야금 · 장구 등 악기 9점과 의자 1점),63) 스미소니언 박물관(화각함 · 주괴문 문갑 · 자수 보료 · 後緩 · 과거용 시권 5매 · 角帶 筆笠 · 십장생 무늬 · 나전 칠기장 · 활과 화살 · 발 · 목제 箭筒), 필드 뮤지엄(38점)64) 등이었다.65)

 

일본은 시카고박람회가 열리기 전부터 기부금을 내기로 결정, 63만엔을 시카고에 전달했다. 박람회는 일본 물품의 해외 선전, 국가 이미지 홍보에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여러 국제박람회를 통해, 오랜 전통을 가진 섬세하고 미적 감각을 가진 나라, 그러면서도 서구의 산업 기술을 배워 발전하려는 나라라는 이미지로 자신을 인식시키는데 성공했다.66)

 

1900년의 파리박람회에는 시카고박람회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관67)이 설치되었다. 프랑스 건축가 페레(M. Ferret)가 지은 한국관은 박람회의 중심가인 상 드 마르스(Champ de Mars)에서 떨어진 슈프렌 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과 비슷한, 사각형에 기와를 이은 왕궁의 접견실 형태로 건립된 한국관에 전시된 물품들은 대부분 한국정부가 수집하여 보낸 것으로 다양한 인쇄물, 전통 악기, 금속과 목재가공, 4륜 마차 제조, 통상용 항해물품, 왕과 황제의 의상, 한국 장군의 투구, 검과 군복, 검, 화살통과, 도자기, 장롱, 자개장, 병풍, 금속제품, 금박을 입힌 목조불, 장식용 세공품 등 수공예품 중심이었다.68)

 

파리박람회가 끝난 후 목기, 악기, 의복, 군기, 사기, 유기 등은 여러 박물관에 기증되었다고 한다.69) 한국관에 대한 모든 책임을 맡았던 들르 드 글레옹 남작(Baron Delot de Gleon)은 한국의 주요 생산품을 모아 진열해 놓는 것 이외에 노점상, 공방, 술집, 장터 등 한국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제물포의 한 거리를 재현하고자 했는데70) 그가 죽고 후임자 미므렐 백작(Comte de Mimerel)은 민속 부문의 전시기획을 철회하고 공공부문의 전시만을 추진시켰다.71)

 

1925년의 전교박람회를 준비하면서 한국천주교회가 가장 참조로 한 것은 1900년의 파리박람회였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시 한국천주교회의 선교를 담당하고 있던 주교들이 프랑스를 모국으로 하는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였기 때문이다.72)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는 1880년과 1898년에 한국에 입국하였는데, 가끔 프랑스를 방문하였고 그들의 선교회가 위치한 프랑스를 비롯하여 세계의 정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20여 년 전에 개최되기는 했지만 파리박람회가 그들에게는 가장 친근한 박람회 사례였을 것이다.

 

한국천주교회는 전교박람회에 출품할 물품을 60여 종으로 정하였는데, 경성 · 대구 · 원산 3교구가 공동으로 큰 한국 전시실을 마련하고, 원산교구는 한국의 주택 모형 제작을 책임맡아73) 베네딕도수도원의 목공소에서 용호정(龍虎亭) · 양반의 여름집 · 농부의 집 등 4개의 모형을 만들었다.74) 또한 형구(形具)들과 수많은 사진들과 앨범들을 제작하였다.75) 서울교구와 대구교구에서는 교우촌 지도, 금속활자판, 천주교 책 등 30여 종을 교구 차원에서 준비하고,76) 다음과 같은 것들을 한국인 신자들에게 요구하였다.

 

“1. 신주, 신주독, 2. 각종 조선 의복, 4절 의복, 한국정부 때에 문관의 복장, 문관의 조복(사모, 등에 학 그려진 관대, 각대), 무관의 복장, 무관의 조복(등에 범 그린 관대), 외인들이 제할 때 입는 제복 그런 것, 3. 중의 복색, 승의 복색, 중의 갓, 송락 그런 것, 4. 조선 갓 각종, 제주 갓, 팽당이 혹 패랭이 그런 것, 5. 각종 조선 관, 정자 관, 건, 망건, 포망 그런 것, 6. 각종 조선 신, 가죽신, 발막, 목화, 집신, 메투리, 부둑신, 개가죽신 그런 것, 7. 면주, 배 각종, 모시, 무명 그런 것, 8. 각종 조선 자리, 돗자리, 화문석, 왕골자리, 로전(갈자리), 방석 각종, 네모진 방석, 왕골 껍질로 만든 둥근 방석 그런 것, 9. 키, 행담 각종, 고리짝 각종, 바구니 각종, 광주리, 채독, 채반, 용수 그런 것, 10. 대로 만든 그릇, 대바구니, 대로 만든 반나 질그릇 그런 것, 11. 담뱃대 각종, 담배합 각종, 담배쌈지, 쥘쌈지 그런 것, 12. 놋이나 유기로 만든 그릇 각종, 타구, 재떨이, 양푼, 재아유기광명대 그런 것, 13. 조선 소반 각종, 두리반 그런 것, 14. 조선 숟가락 각종, 젓가락 각종 그런 것, 15. 조선 가락지 각종, 16. 은으로 만든 그릇, 노리개, 패물 그런 것, 17. 조선 악기, 비파, 거문고, 퉁소, 저, 피리, 소고, 북, 장고 그런 것, 18. 조선인의 도장, 인 그런 것, 19. 조선 종이 각종, 장지, 대장지, 백지 그런 것, 20. 조선 서책, 구식 사서삼경 그런 책, 21. 벼루집, 벼루돌, 연적, 먹 각종, 대필 각종, 소필 각종, 22. 병풍 각종, 좋은 그림 그린 병풍, 글씨 병풍 그런 것, 23. 조선 활, 정양 활, 활의 부속품, 화살, 전통, 활깍지 그런 부속품 겸하여, 24. 조선 창 각종, 삼지창 그런 것, 25. 조선 환도 각종, 26. 조선 칼 각종, 식칼, 주머니칼 그런 것.77)

 

한글로 필사된 《羅馬 朴覽會 朝鮮 出品者 物品 뿠品 氏名簿》78)에는 서울교구, 대구교구, 원산교구 별로 기증한 물품과 기증자의 이름과 주소, 기부금 액수와 기부자의 이름과 주소가 59장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물품의 목록과 수납자는 19장 39면에, 금품 기부자의 이름과 주소, 기부금은 40장 80면에 기록되어 있다. 필사된 날짜 표시가 없으므로 이 명부가 1924년 7월에 첫 번째로 발송할 때의 것인지, 12월에 다시 발송할 때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필사자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첫 번째 발송 때의 것이라면 드브레 부주교나 프와요 신부, 두 번째 발송 때의 것이라면 드브레 부주교나 조제 신부일 것이고 그중에서도 드브레 부주교일 확률이 높다. 교황청 문서고나 박물관 어딘가에 이 필사본의 영문 인쇄본이 있을 것이라 예상되지만 현재로는 찾을 수가 없다. 필사본에 수록된 물품은 다음과 같다.

 

△ 경성교구79) : 돌 담배합, 대로 만든 바느질그릇, 실감는 실패, 천주십계 현판, 도장 인, 먹, 부시, 만세력, 동국문헌록, 규장전음, 의종 손익,80) 애암, 전북, 홍피, 치미로 만든 비, 소뿔 성수통, 조선 안경, 은제조 걸상, 홍패, 별돈, 장승, 제웅,81) 애암, 납지게, 칠가지 지게, 수묵 고의적삼, 수묵 버선, 수묵 족계,82) 수묵 중절모, 성경구전, 씨야물 네가락, 종이 승통이, 구한국 우표, 베 도포, 가죽신, 은장도 취아집, 풍잠,83) 먹통, 나무꾼 짚신, 소뿔로 만든 활깍지84), 놋쇠로 만든 숟가락, 은장도, 은 치아통, 은가락지, 뒤주식 허리띠, 부전85) 오쌍, 놋화로, 설면자,86) 잠견,87) 정승의 옥패, 문안 조복의 학, 학주렴, 석세배 바지, 망태, 시저, 시저통, 치룽,88) 용수, 고여시 숟깔, 풍잠, 당오시대 돈, 당백전, 당오, 은화, 엽전, 옛 도장, 밀집 당떡,89) 네모난 꼬깔관, 나무신 꺽두기,90) 뚜아리, 각정이, 바늘결의, 갑증세란비, 채보군이, 미투리, 곱돌대91), 치독, 중앙푼, 반병두리92), 포선93), 유건,94) 버들 동고리,95) 식도, 종대랭이, 중태기, 나무신, 묵기, 곱돌 담배대, 저고리, 유기 재떨이, 사기 담배대, 백동 담배대, 언문초보, 마릉알능, 도장, 각대, 도장, 엽전, 패물, 신주독, 장두,96) 참칼, 사또 신물, 연적, 옥패물, 연인패물, 엽전, 밀화단초, 당백, 백전, 반포 일필, 벼개모 한 쌍, 회신 한 켤레, 부툭신, 부채 한 개, 상투 동곳, 성주, 거문고, 보군이, 광주리, 관때.

 

△ 대구교구 : 견피주의, 견피 보선, 견피 발뇌, 장대 감투, 짚신, 사냥꾼 차는 칼, 사냥꾼 통, 토지, 수저, 태박, 망사리, 빗창, 속옷, 점복 껍질, 안경, 갈옷, 대펴리, 국수신, 정당벌입, 우장, 해풍관, 털벌입, 오기구덕, 죽물 속, 바느질 상자, 죽침, 패랭이, 방립,97) 바구니, 석작, 삿갓, 용수, 채반, 소쿠리, 죽석, 지남철, 당백전, 선생복종, 성찰기략, 죽치, 광주리, 조리, 함박, 주걱, 유과세석, 부쇠, 부쇠쌈이, 주머니, 돗자리, 수저, 저범, 제복, 상복, 두건, 포망, 굴건, 때, 포선, 엄신,98) 신식 여자 노리개, 구식 여자 노리개, 옥돌, 훈장, 비녀, 대병풍, 촛대, 구식 은지환, 세초석, 생자, 나무로 만든 칠첩 반상기, 자개반, 유기로 만든 칠첩 반상기, 유기 대야, 유기 요강, 유기 타기, 백동 촛대, 백동 수저, 구리 주전자, 유기(중합 소합), 백동(향합 향로), 연죽(각종 담배대), 초석(큰 것 작은 것 작은 것), 문발, 자개반, 서글씨, 산수 그림, 빗(월소, 진소, 세진소), 뿔로 만든 빗각통, 빗치기, 빗잠류, 부채(합죽선, 칠선, 아이들 것), 미선 각종, 고서, 옛 칼, 유기 타기, 연죽, 위패, 옛돈, 고물 요대, 고물 갓끈, 유기 수저, 유기 재떨이, 옛돈, 옛돈, 고물 비녀, 고물 유기 식기, 고물 초립, 문발, 고물 적은 칼, 옛돈, 고물 적은 칼, 고물 유기 여행숫, 선자, 옛돈, 옛돈, 백동 담배대, 유기 수저, 유기 담배합, 엽전, 고물(금관자 은관자), 표주박, 고물 군인화, 구식 주머니, 고물 비녀류, 엽전, 유기 요강, 날포(넣어두는 틀), 초석, 나무패(오십년 전 군난시 것), 옛돈, 짚신, 바디집,99) 비녀 세 개, 치통, 대필, 방석, 도복, 때, 건, 굴건, 토지촉대, 성찰기략, 고물의 철마, 수저, 고물 질그릇병, 유건, 엽전, 명주 마포, 백묵 짜는 바디, 부채, 묵기, 베짜는 북, 베 메는 솔, 베바지, 삼 쌈는 톱, 신골, 무명 잣는 가락, 합죽선, 정자관, 건, 망건, 포망,100) 옹기 연적, 옹기 벼루, 정자관,101) 상립,102) 수저, 방립, 지남철, 주머니 부쇠, 죽석, 상립 쓰는 제주, 용수, 죽침, 소고리, 함박, 채반, 평양자, 석작, 바구리, 바느질상자, 조리, 광주리.

 

△ 원산교구 : 놋주발, 대접, 장옷, 마화, 초화,103) 가죽 마른신, 장고, 백동 담배대.

 

서울교구에서 120개, 대구교구에서 207개 이상,104) 원산교구에서 8개 등 324개의 물품을 기증하였다. 기증한 물품을 보면 《경향잡지》 534호에 제시한 물품들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신주독(神主 )은 있지만 신주는 없고, 문관의 옷은 있지만 무관의 옷, 승려의 옷은 없다. 조선 악기들도 목록에 상세히 제시되었지만 정작 기증한 품목에는 없고, 조선서책도 교회 책자인 《선생복종》(善生福終)과 《성찰기략》(省察記略)을 포함하여 《만세력》, 《동국문헌록》, 《의종손익》, 《언문초보》, 《고서》105)가 전부이다. 천주교가 선교를 시작하면서 조선정부와 부딪친 가장 큰 이유가 유교와의 마찰이었다. 그런 만큼 유교 제사와 관련된, 유교 복색 즉 양반유생들의 의복과 관련된 물품들도 상당수 보인다. 신주독은 제사와 직접 관련되는 중요한 상징물이고, 포선 · 방립 · 엄신 · 포망 등은 상주(喪主)가 착용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유건 · 풍잠 · 정자관 등은 유생들이 사용하는 물건이다.

 

명부에 수록된 물품은 대부분 신자들에게 물품 수집을 공고하면서 제시한 것들이다. 그런데 같은 명칭의 물건들이 상당수 보인다. 엽전 · 숟가락 · 담뱃대 등은 두 개 이상 보이는데 명칭은 같지만 모양이 다른 때문에, 그리고 이미 신자들이 제출한 물품이기에 수록한 것이라 생각된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물품은 치룽 · 반병두리 · 동고리와 같은 한국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들, 설면자 · 꺽두기 · 장두와 같은 한국인들의 의류들로 이들은 파리박람회에서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것들이다. 특히 담배대가 많다. 따라서 이들 일상 생활용품과 의류들은 유럽인을 포함하여 서구인들에게 전교지역 한국과 그곳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들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다. 이러한 물품들은 전교지역 한국에서 한국인들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물건들을 사용하며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들은 한국인을 이해하고 그 이해 위에서 더욱 활발한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이다.

 

이상의 물품들을 기증한 이들은 교구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 경성교구 : 장레오(인천부 산수정), 리왕익(이천군 낙양면 행율), 신유철(〃), 가정교육회(신천군 옹진면 월정리), 박요안(청주군 강외면 봉산리), 리도밍고(경성 의주통), 우야고보(평강군 고삽면 북평리), 이안드레아(인천부 화정), 하니고나오(인천부 사정), 장네오(인천부 산수정), 김바오로(파주군 천현면 갈악리), 한 스더왕(평양부 전구리), 리스테파노(용인군 포악면 전대리), 박야고보(안성읍), 남요왕 · 안요셉(이상 부천군 영종면 중산리), 리비오 · 최스테파노(이상 이천군 산내면 송정리), 리마리아 · 손데레사 · 손야고보(이상 양평군 용문면 마룡리), 박성철(이천군 용포면 용두리), 삼초동 청년회(신계군 고면 퇴율리), 손바오로(광주군 광주면 본당), 황중삼(강릉군 남양리), 조야고보 · 정말딩 · 리베드로 · 손로벨토 · 곽로벨토(강동군 만달면 대성리), 홍요안(수선군 수선면 신풍리), 김덕연(강서군 포리면 송호리), 민요안(양평군 갈산면 양근리), 김본시아노(이천군 낙양면 내락리), 은장동 공소(곽산군 도화면 현암리), 한요셉(인천부 내리), 김방지거(경성부 중림동), 리막달레나(고양군 지도면 행주외리), 김세시리아(개성읍), 리요셉·리발바라(〃), 김마리아 · 김안드레아(이상 경성부 약현), 현동명(수원군 양감면 용소리), 최요왕 · 리안나(이상 곽산군 도화면 현암리), 김골롬바 · 김로사리아(평양부 관후리), 리막달레나(평양부 진향리), 김마리아(평양부 상수구리), 한루시아(평양부 관후리), 김요셉(평양부 경저리), 정마리아(평양부 전구리), 부인회 일동(평양천주당 내), 김비리버 신부106)(춘천 고은리), 매신부107)(서산 가재).

 

△ 대구교구 : 이안드레아 신부108)(제주 홍로), 주바오로 신부,109) 유 신부110)(김제군 수류면 화율리), 성모회원 일동(대구본당), 이막달레나(대구부), 김스더왕(달성 화원), 정바오로 · 이마티아 · 서베드로(이상 대구부), 박비오 · 리바울라 · 리아오스딩(이상 대구), 서발바라(달성 원대), 오누시아 · 리도로테아 · 리요왕 · 김오딜라(이상 대구부), 최마리아(달성 원대), 신네오 · 김요안(이상 대구부), 김바오로(달성 원대), 리누갈다 · 김요안 · 서말다 · 정노렌조 · 안다두(이상 대구부), 유모니카(경산읍), 최안당(대구부), 박야고보(달성 조암), 최다두 · 전요안 · 리마리아(이상 대구부), 구누시아(달성 비산), 한다두(언양), 손두식(양산 금산), 김베드로(금산군 진산면 지방리), 허가오로(통영군 광도면 황리), 최바오로(함양군 함양면 교산리), 최아오스딩(예천군 풍양면 풍신동), 박도마(금천군 대항면 항천리), 김누가(진안군 부리면 오산리), 박방지거(익산군 성당면 두동리), 리베드로(의성군 안계면 양구동), 최학림(마산부 완월동), 김베드로(금산군 진산면 지방리), 박루수(나주군 봉황면 옥산리), 리바오로(부안군 백산면 죽림리), 베드로(전주군 노돈면 내동리), 윤갑열(정읍 매대), 김바오로(전주 요동장리), 박바오로(정읍 구장리), 박아오스딩(순창 오룡촌), 김베드로(정읍 구장리), 조요안(김제), 조방지거(김제 시묵동), 김안드레아(순창 홀검이), 김마디아(정읍 구장리), 조요안(전주 마군리), 조방지거(김제 시묵동), 김안드레아(순창 홀검이), 박요안(정읍 녹골), 김안드레아(순창 홀검이), 조요안(전주 마군리), 서아오스딩(순창 아천리).

 

△ 원산교구 : 정헬레나(원산부 명석동), 박마리아(〃), 전락풍(원산부 산제동).

 

이상이 필사본에 수록된 내용이다. 서울교구, 대구교구, 원산교구의 순서는 알 수 있지만, 각 교구 안에서 기증자 표기는 어떤 순서로 하였는지 알 수 없다. 서울교구 기증자들의 명단을 보면 기증자의 주소가 인천, 이천, 신천 순이다. 물품이 도착한 순서대로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구교구를 보면 대구본당, 대구부, 달성 화원, 대구부, 대구, 달성 원대, 그리고 다시 대구부 등으로 수록되어 일관성이 없다. 이는 곧 물품이 도착된 순서대로 기록한 때문이라 여겨진다.

 

서울교구에서는 가정교육회, 삼초동청년회, (평양천주당) 부인회 등 3개 단체, 은장동공소, 그리고 40명의 개인(신부 2명)이, 대구교구에서는 (대구본당)성모회원 일동과 63명(신부 3명)이, 원산교구에서는 3명이 물품을 기증하였다. 전체적으로 4개 단체, 109명(신부 5명)이 물품 모집에 힘을 합하였다. 서울교구보다 신자수가 적었음에도111) 대구교구에서의 물품 기부가 많은 이유는, 한국천주교회 차원에서 준비해야 할 물품들, 규모가 크거나 구하기 어려운 물품들을 책임맡은 때문이라 여겨진다. 또한 원산교구는 경성이나 대구보다 신자수가 적고 교구로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베네딕도수도원 내의 목공소에서 한국 주택 모델, 각종 형구들을 제작하는 책임을 맡은 때문에 상대적으로 물품 기부가 적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서울교구에서 황중삼 · 김덕연 · 현동명, 대구교구에서 손두식 · 최학림, 원산교구에서 전락풍은 천주교 세례명으로 표기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천주교신자가 아니거나 아직 천주교 세례를 받지 않은 때문이라 여겨진다. 전교박람회에 출품할 물건들을 수집한다는 소식에, 또는 천주교 성직자나 신자들의 권유나 부탁으로 기증한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금품 기부 상황을 보면, 서울교구에서는 120명, 대구교구에서는 995명, 그리고 원산교구에서는 1명 등 1,116명이 기부하였다. 서울교구의 기부 총액이 279원 52전이니 1인 평균 2원 3전 기부한 셈인데, 대구교구의 경우도 비슷하다. 물품 기부 상황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대구교구가 서울교구보다 기부금도 많고, 원산교구는 서울교구 · 대구교구보다 적다고 추측된다. 1인 기부 액수로는 원산교구의 김요안이 100원으로 가장 많고, 최소의 기부액은 2전이다.

 

전체적으로 최소 1,230명 이상의 신자들이 전교박람회를 위하여 물품이나 금품을 기부하였으니 한국천주교회 신자의 1% 이상이 전교박람회에 직접 참여한 것이다.

 

 

IV. 한국물품 전시

 

1924년 12월 21일 바티칸에서 전교박람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교황이 전교박람회에 참석하였다는 소식이 《동아일보》를 통하여 한국 일반에 알려졌다.112) 이어 바티칸 궁궐 서편의 넓은 화원에 건축된 20여 개의 전시관에서 전교박람회가 열리고 있다는 내용이 《경향잡지》에 수록되었다. 전시관 건축비는 1923년 봄에 뉴욕과 시카고에 두 명의 주교가 임명된 것을 기념하여 뉴욕과 시카고의 신자들이 보낸 50만 달러로 충당되었다는 내용이었다.113) 이어 바티칸에서 개최되고 있는 전교박람회가 시카고박람회나 파리박람회에 비길 것이 아닐 만큼 대단하고 의미가 크다고 강조하였다. 파리박람회와 같은 만국박람회는 각국의 산물, 제작물, 새롭게 발명한 기계 등을 진열하는데, 바티칸 전교박람회에는 이러한 것들은 물론 창립 이래 2천 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발달하였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제1관 성지관, 제2관 로마관, 제3관 치명자의 관, 제4관 인류관, 제5관 서적관 등 그리스도교 관들을 진열하였는데 이것들이 바티칸 전교박람회의 총론, 서문과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는 천주교회가 선교된 순서대로 각국 관을 진열하였다고 설명하였다.114)

 

1925년 3월 17일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는 부산을 출발, 시모노세키를 거쳐 고베에서 ‘콩피엔느’(Conpiegne) 호를 타고 4월 30일 파리의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에 도착하였다.115) 그런데 당시 교회잡지는 두 주교의 로마행이 교황에게 각 교구의 상황을 알리는 것, 한국 순교자 시복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전교박람회를 구경하러 가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하였다.116) 교황과의 만남도, 한국 순교자 시복식도, 전교박람회도 바티칸에서 있으니 앞 두 개의 목적을 우선적인 목적으로 할지라도, 1년여에 걸쳐 주교 · 선교사 · 한국인 성직자 · 한국인 신자들이 함께 참여해 보낸 물품들을 출품한 전교박람회에 가는 것도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전교박람회 구경을 고국 · 고향을 방문하는 일, 어딘가를 여행하는 세속일과 같다고 함으로써 전교박람회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 · 전달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는 1925년 6월 20일 전교박람회장을 방문하였다. 중국관과 일본관을 구경하고 한국관을 찾았다. 그런데 한국 물품들이 있어야 할 자리는 다른 것들로 채워져 있었고, 한국 물품들은 전시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떤 것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사무실에 있었다. 사무실 한 구석에 한국 코너가 있을 뿐이었는데 정성을 기울인 큰 그림도, 교우촌 지도도, 금속활자판도, 책들도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한국에서 보낸 물품들은 소홀히 취급되고 있었다. 주교들은 서운했고 불쾌했다.117)

 

훼손된 물품을 정리, 교환하여 두 번째로 꼬리표 붙이는 작업을 드브레 주교가 마무리한 것이 1924년 12월 12일이었다. 그래서 박람회가 시작되었을 때 한국천주교회에서 준비한 물품은 바티칸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1925년 4월 30일 로마에서 파리의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온 성직자를 통하여 이미 한국 물품들이 바티칸에 도착해 있다는 것을 전해 들었고, 그로부터 약 두 달이 지난 후 뮈텔과 드망즈 주교는 전교박람회장을 방문하였기에 한국 물품들이 이러한 취급을 당하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한기근(韓基根, 1867/1868-1939) 신부도 전교박람회장을 방문하였다. 1924년 한국인 신부는 44명(서울 32, 대구 12)을 기록하였는데118) 1913년 5월부터 경향잡지사 사장을 맡고 있던 한기근 신부가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식에 44명 한국인 신부 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5월 1일 경성을 출발,119) 고베를 거쳐 바티칸에 도착한 것은 1925년 6월 30일이었다.120) 한기근 신부는 당시 바티칸으로 가는 사람들의 목적이 성년 전대사를 입기 위해서 그리고 전교박람회를 관람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중국관 끝에 초라하게 진열되어 있던 몇 개의 한국 물건을 본 한기근 진부는 “전교박람회, 바티칸 궁궐 내 동산에 진열한 물품을 수차 열람하였으나 조선 물품은 별로 말할 것 없도다. 유 주교께서 그렇게 애를 쓰시고 땀을 흘려가며 예비하여 보내셨건만 신호에서 수침한 연고로 인하여 기한이 지난 후 도착하였도다. 이러므로 조선관은 당초에 따로 진설한 것이 없고, 진설한 것이 있기는 있었으나 정한 시에 도착치 아니하는 고로 다른 데 이용한 듯하며 청국관 끝 몇 칸에 몇 가지 조선 물건을 진열하였더라”라고 상황을 전하며 안타까워하였다.121)

 

한국 순교자 시복식에 한국인 신자대표로 선출된 장면(張勉)과122) 그의 동생 장발(張勃)도 전교박람회를 관람하였을 것이고 초라하게 진열되어 있던 한국 물품들을 보았을 것이다. 장면과 장발은 1925년 7월 1일 뉴욕에서 바티칸에 도착하였고123) 7월 5일의 한국 순교자 시복식에 참석하였다. 따라서 전교박람회장을 찾았을 것이다. 기낭(Guinand, Pierre, 1872-1944) 신부도 한국 물품들을 보았을 것이다. 1900년부터 용산예수성신학교 교장을 맡고 있던 기낭 신부는 본국 휴가 중124)인 1925년 7월 3일 바티칸에 도착, 이튿날 교황을 알현하고, 다음날의 시복식에 참석하였으니125) 그 사이 혹은 그 이후 전교박람회장을 찾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925년 로마를 방문하여 성년 대사를 입은 사람들의 숫자는 단체 참배로 983차, 35만 9,810명이었다. 나라별로 구별하면, 이태리인 21만 2천 명, 독일인 3만 9천여 명, 스페인인 1만 2천여 명, 프랑스인 1만 1천여 명, 영국과 아이레인 6천여 명, 고가 슬납 · 셔서 · 벨기에 · 헝가리인 각 5천여 명, 체코 · 네델란드 · 포르투칼인 각 3천여 명, 아메리카인 5,700여 명, 동양인 800여 명, 아프리카인은 500여 명, 대양주인 300여 명이었다.126) 이들은 대부분 전교박람회장을 찾았을 것이고, 이들 외에 개인적으로 로마를 방문하고 박람회장을 찾은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한국천주교회에서는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 한기근 신부와 장면·장발 형제, 그리고 휴가 중 시복식에 참석한 기낭 신부 등 6명이 박람회장을 찾았다.127) 물론 이들이 바티칸을 방문한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목적은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식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도 물품을 준비하여 참가한 박람회를 관람하기 위해 전교박람회장도 방문하였다. 전 세계의 전교지역에서 출품하여 마련된 전교박람회장은 많은 것을 보여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늦게 도착된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구석에 치우쳐 있는 한국 물품을 보면서 한국천주교회의 구성원들은 전교지역 한국의 위치를 보았을 것이다. 특히 한기근 신부와 장면·장발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의 상황을 절감하였을 것이다.128) 그랬기에 이들 중 누구도 그 이후 전교박람회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한기근 신부는 그의 유럽 여행을 《경향잡지》에 ‘로마 여행일기’라는 제목으로 오랜 동안 자세히 게재하였는데,129) 전교박람회에 대한 기록은 단 몇 줄뿐이다.130)

 

1925년 5월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장식미술공예품박람회(Exposition Internationale des Arts et Industriels Modernes)에 담배합, 화병, 수함(手函) 등 3점의 나전칠기가 조선공예품이지만 일본관에 진열되었다.131) 한국이라는 존재가 없었다. 그러나 1925년의 전교박람회에 한국천주교회는 일본천주교회의 식민지로서가 아니라 독립된 존재로서 참가하였다. 즉 일제 강점 이후 한국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국제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을 수 없었지만, 전교박람회 참가는 한국의 존재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전시한 것이었다. 따라서 종교 목적의 박람회였지만 1925년 전교박람회 참가는 한국천주교회사는 물론 한국사적으로도 큰 의의를 갖는다. 그러므로 한국천주교회는 물론 한국으로서도 1925년의 전교박람회 한국관과 한국 물품 전시는 중요하였고 의미가 컸다. 그런데 발송 사고로 도착이 지연된 한국 물품은 전시될 곳을 상실하였고 소홀히 취급당함으로써 큰 아쉬움을 남겼다.

 

서양인 선교사는 물론 한국인 성직자들과 많은 한국인 신자들이 참여하여 준비하고, 바닷물에 빠져 복구하고 교체하여 다시 보낸, 즉 두 번에 걸친 한국천주교회의 노력들이 한 켠에 밀려나 있었던 것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인 만큼 실망도 컸다. 그러나 한국천주교회는 전교박람회보다는 한국 순교자 시복식에 가치를 두었고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기에, 이후 시복된 복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였고, 아직 시복되지 못한 순교자들 조사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 물품 등 전교박람회에 전시된 전시품들은 1926년 비오 11세에 의해 라테란 성당 옆 사도궁에 보관되었고, 이후 1963년 요한 23세가 바티칸에 건립한 선교민속박물관(Missionary Ethnological Museum)으로 옮겨졌다.132) 그리고 1973년 바티칸 선교민속박물관에 한국실이 마련되었고,133) 1983년 현재 한국관의 주 전시장에는 십계명판 · 제기 · 무구 등의 종교 관계 전시품과 경회루 모형 · 자개 제품 · 도자기 화병 · 병풍 등이, 부전시장에는 놋그릇 · 갓 · 옷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134)

 

1925년의 전교박람회 이후 한국천주교회는 1950년의 성년 박람회에 참가하였다. 한국의 고미술품 10여 종을 출품하기로 하여 1949년 10월 6일부터 3일 동안 명동성당에서 전람회를 열고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였다.135) 그리고 1950년 5월 15일 서울교구의 노기남(섃基南) 주교, 대전교구의 라리보(Larribeau, Adrien Joseph) 주교, 윤을수(尹乙洙) 신부, 그리고 한국신자대표로 경향신문사 사장 한창우(韓昌愚) 등이 로마를 향하여 김포공항을 출발하였다.136) 그러나 이 박람회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V. 맺음말

 

국치 이후 일제가 강점한 동안 한국은 만국박람회에 참가할 수 없었는데, 교회 차원이기는 하지만 1925년바티칸의 전교박람회에 참가하였다. 전교박람회는 선교를 목적으로 하였지만, 전교지역의 각종 물품들이 전시되었다. 따라서 1925년 한국천주교회의 전교박람회 참가는 한국교회사는 물론 한국사에서도 의미를 갖는다.

 

한국천주교회가 전교박람회에 참가한 이유는 교황 비오 11세의 칙령 때문이었다. 비오 11세는 1925년 성년대사를 반포할 때 바티칸에서 만국전교박람회도 개최하겠다고 하였다.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이 전교지역에 해당하고, 1925년에 많은 한국순교자들이 시복될 것이기에 전교박람회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한국천주교회는 출품할 물품을 60여 종으로 하고, 경성·대구·원산의 세 교구가 공동으로 큰 한국 전시실을 마련하며 나머지는 분담하기로 하였으며, 30여 종은 신자들에게 기부를 요구하였다. 신자들의 기부품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한국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들, 한국인들의 의류로 이들은 파리박람회에서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것들이다. 이들 물품은 서구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전교지역 한국과 그곳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들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우송 사고로 한국천주교회의 물품들은 두 번의 준비를 거쳐 원래의 예정보다 늦게 바티칸에 도착되었다.

 

한국천주교회에서는 한국 순교자 시복식에 참가한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 한기근 신부, 장면·장발 형제, 그리고 기낭 신부 등 6명이 박람회장을 찾았다. 그런데 한국 물품들이 있어야 할 자리는 다른 것들로 채워져 있었고, 한국 물품들은 어떤 것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사무실에 있었다. 그러나 한국천주교회는 식민지 한국으로서가 아니라 독립된 존재로서 전교박람회에 참가하였다. 즉 일제 강점 이후 한국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국제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을 수 없었지만, 전교박람회 참가는 한국의 존재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전시한 것이었다. 따라서 종교 목적의 박람회였지만 1925년 전교박람회 참가는 한국천주교회사는 물론 한국사적으로도 큰 의의를 갖는다. 그리고 그때 출품한 물품들은 서구인들에게 한국을 알리고 이후 바티칸의 민족선교박물관에 한국실이 마련되는 토대가 되었다.

 

 

[참고문헌]

 

《가톨릭신문》, 《경향잡지》, 《동아일보》, 《평화신문》, 《헤럴드경제》

《뮈텔주교일기》, 《드망즈주교일기》

《羅馬 朴覽會 朝鮮 出品者 物品 뿠品 氏名簿》, 필사본, 1책, 1924.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편찬, 《고려대 한국어사전》, 2009.

국사편찬위원회, 《한불관계자료 – 주불공사 · 파리박람회 · 홍종우》, 2001.

이민식 역, 《근대한미관계사》, 백산자료원, 2001.

이민식 지음, 《세계박람회란 무엇인가》, 한국학술정보, 2010.

주강현, 《세계박람회 1851-2012》, 블루&노트, 2012.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원산교구 연대기》, 함경도천주교회사간행사업회, 1991.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 7·10·12, 2004·2004·2006.

 

김영나, 〈‘박람회’라는 전시공간 :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와 조선관 전시〉,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13, 2000.

정태헌, 〈근대주의의 허상과 식민지적 근대〉, 《한국의 식민지적 근대 성찰》, 선인, 2007.

차기진,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 《교회사연구》12, 1997.

 

………………………………………………………………………………………

 

1) 이민식 역, 《근대한미관계사》, 백산자료원, 2001, 220쪽.

2) 《한성순보》1884년 2월 21일 자(음), “박람회설”.

3) 김영나, 〈‘박람회’라는 전시공간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와 조선관 전시〉,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13, 2000, 87~89쪽.

4) 국사편찬위원회, 《한불관계자료 – 주불공사 · 파리박람회 · 홍종우》, 2001 참조.

 

5) 해방 후 1962년 시애틀박람회(Century 21 Exposition)에 처음으로 참가하였다.(이민식, 《세계박람회란 무엇인가?》, 한국학술정보, 2010, 67쪽)

 

6)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고려대 한국어사전》, 2009, 2401쪽.

7) 《경향잡지》 534호, 1924년 1월 31일, “만국 전교 박람회 : 교황칙령의 대개”, 25~26쪽.

8) 주강현, 《세계박람회 1851-2012》, 블루&노트, 2012, 9~10쪽.

9) 《경향잡지》 534호, 1924년 1월 31일, “만국 전교 박람회 : 교황칙령의 대개”, 25~26쪽.

10) 위와 같음.

11) 《경향잡지》 534호, 1924년 1월 31일, “만국 전교박람회 : 전교성성장의 통첩”, 25쪽.

12) 《경향잡지》 525호, 1923년 9월 15일, “로마에 만국 종교박람회”, 404~406쪽.

 

13) 왜 미국 전례에 의하여 25년마다 성년으로 정하였다고 《경향잡지》에 기록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1294-1303년 재위)가 1300년에 라테란 대성전에서 교회 역사상 최초의 성년을 선포하였는데, 이때 사용한 용어는 ‘희년’(Jubilaeum)이었다. 1500년경부터‘성년’(聖年, Holy Year)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1343년에 교황 클레멘스 6세(1342-1352년 재위)가 50년마다 희년을 거행한다고 정하였고, 1470년 교황 바오로 2세(1464~1471년 재위)는 ‘성년’이란 용어를 사용하도록 제안하면서 25년마다 거행하도록 하였는데 이 전통이 이후 계속되고 있다.(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 7, 2004, 4535~4542쪽)

 

14) 暹羅. 오늘날 타이.

15) 緬甸. 오늘날 미얀마.

16) 차기진,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 《교회사연구》 12, 1997, 225~227쪽.

17) 《경향잡지》 514호, 1923년 3월 31일, “별보: 삼일긔구 반포”, 121쪽.

 

18) “1924년 1월~4월”(Chronik, 1924 Nr. 5, pp.2~4), 《원산교구 연대기》,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함경도천주교회사간행사업회, 1991, 56~57쪽.

 

19) 《뮈텔주교일기》에는 이러한 곳들을 방문한 기록이 많이 있다.

20) 《뮈텔주교일기》 1923년 10월 15일.

21) 《드망즈주교일기》 1923년 12월 25일.

 

22) 《뮈텔주교일기》 1924년 1월 8·11일 ; 《드망즈주교일기》 1924년 1월 7·8·11일 ; “1924년 1월~4월”(Chronik, 1924 Nr. 5, pp.2~4), 《원산교구 연대기》, 56-57쪽.

 

23) 《뮈텔주교일기》 1924년 1월 11일.

24) 《드망즈주교일기》 1924년 1월 11일.

25) 《경향잡지》 534호, 1924년 1월 31일, “만국 전교박람회: 3주교 협의 결정사항”, 26~28쪽.

26) 《경향잡지》 537호, 1924년 3월 15일, “회보: 유주교 대구 행차”, 112쪽.

 

27) 《뮈텔주교일기》 1924년 3월 8일. 아마도 한국천주교회 전체의 전교상황을 알리는 전교지도 작성을 대구교구의 드망즈 주교가 담당하기로 세 주교가 결정한 때문일 것이다.

 

28) 《뮈텔주교일기》 1924년 3월 3일.

 

29) 1924년 기준 프와요 신부보다 먼저 한국에 입국하여 활동 중이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다. ( ) 안은 입국 연도. 공베르 형제(1900), 기낭(1895), 드뇌(1902), 드비즈(1894), 라크루(1894), 루블레(1900), 르메르(1887), 르장드르(1891), 멜리장(1902), 무쎄(1900), 미알롱(1896), 베르모렐(1888), 부이용(1893), 비에모(1892), 퀴를리에(1889), 타게(1898), 페네(1897), 프와넬(1893) 신부.

 

30) 《뮈텔주교일기》 1924년 3월 17일.

31) “1924년 4월-8월”(Chronik, 1924 Nr. 8, pp.10~12), 《원산교구 연대기》, 61쪽.

32) 《동아일보》 1924년 3월 27일, “종교 박람회, 大赦祭를 機會”.

33) 《경향잡지》 539호, 1924년 4월 15일, “바티칸궁궐 내에 박람회 준비”, 165~166쪽.

34) 《드망즈주교일기》 1924년 5월 31일.

35) “1924년 4월~8월”(Chronik, 1924 Nr. 8, pp.10~12), 《원산교구 연대기》, 61쪽.

36) 《뮈텔주교일기》 1924년 6월 11일.

 

37) 전교성성장의 통첩에 언급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 세계 공용어(《경향잡지》 525호, 1923년 9월 15일, “로마에 만국 종교박람회”, 404~406쪽) 중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서울교구와 대구교구는 프랑스를 모국으로 하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원산교구는 독일을 모국으로 하는 베네딕도회가 선교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티칸이 위치한 이탈리아어를 채택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38) “1월에 한국의 3개 교구의 주교들이 모임을 가졌는데, 여기서 ‘바티칸 포교박람회’에 출품할 전시품을 서울에 집결시키도록 결정되었습니다. 모든 교우들에게 현물로든 현금으로든 여기에 참여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잘 진행되어 6월 말경 천여 개의 물품이 모아졌습니다. 이 물품이 든 상자들을 고베로 보내 지난 9월 12일 선적을 기다리고 있던 중, 심한 폭풍우로 이 모든 짐이 크게 파손되어 그런 상태에서는 발송이 불가능하다고 선박회사에서 통고해 왔습니다. 이 사고 소식을 듣고 한 명의 베네딕도회 신부가 즉시 현장으로 떠났는데, 그는 파손되지 않은 물건들을 로마로 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서울교구 1924년도 보고서〉, 《서울교구연보》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207쪽)

 

39) 《경향잡지》 544호, 1924년 6월 30일, “바티칸박람회에 물건 발송”, 281쪽.

40) 위와 같음.

 

41) 드브레 주교를 도와 전교박람회 일을 하였던 프와요 신부가 1924년 7월 6일 저녁 만주로 떠났기에(뮈텔주교일기 1924년 7월 6일) 작업은 늦어도 7월 6일 오전에는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42) 《뮈텔주교일기》 1924년 7월 7일.

43) “1924년 4월~8월”(Chronik, 1924 Nr. 8, pp.10~12), 《원산교구 연대기》, 61쪽.

 

44) 전문은 “11일 폭풍우로 14개 상자의 전시품들이 크게 손상됨. 검사관은 [판독 불가]을 하라고 함. 물품을 발송할 필요 없음. 전신 훈령. 산넬”이었다.(《드망즈주교일기》 1924년 9월 17일)

 

45) 1923년부터 서울 베네딕도수도원의 원장 직을 맡고 있었다.

46) 《뮈텔주교일기》 1924년 9월 16일.

47) 《드망즈주교일기》 1924년 9월 17일.

48) “1924년 8월~12월”(Chronik, 1925 Nr. 1, pp.18~20), 《원산교구 연대기》, 67쪽.

49) 1924년 9월 1일 한국에 도착하였다.(《드망즈주교일기》 1924년 9월 1일)

50) 《뮈텔주교일기》 1924년 9월 22일 ; 《드망즈주교일기》 1924년 9월 22일.

 

51) 《경향잡지》 551호, 1924년 10월 15일, “박람회 물품 수침”, 446쪽 ; “1924년 8월~12월”(Chronik, 1925 Nr. 1, pp.18~20), 《원산교구 연대기》, 67쪽.

 

52) 《뮈텔주교일기》 1924년 10월 23일.

 

53) 조제 신부는 1923년 3월 서울교구 당가로 임명되어 1942년까지 활동하였다.(《한국가톨릭대사전》 10, 2004, 7704쪽) 따라서 당시 드브레 주교를 도와 이 일을 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54) 《뮈텔주교일기》 1924년 11월 5, 24일.

 

55) 《뮈텔주교일기》 1924년 11월 5, 14, 25일 ; “1924년 8월~12월”(Chronik, 1925 Nr. 1, pp.18~20), 《원산교구 연대기》, 67쪽.

 

56) 《뮈텔주교일기》 1924년 12월 12일.

 

57) “1924년 8월~12월”(Chronik, 1925 Nr. 1, pp.18~20), 《원산교구 연대기》, 67쪽. 1925년 4월 30일 로마에서 파리의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로 돌아온 리우프레이(Rioufreyt) 신부는 바티칸에 한국의 전시품 상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뮈텔주교일기》 1925년 4월 30일)

 

58) 《경향잡지》 564호, 1925년 4월 30일, “박람회의 박람회”, 184~186쪽.

59) 김영나, 〈‘박람회’라는 전시공간 :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와 조선관 전시〉, 87쪽.

60) 당시는 ‘조선’이 국명이었지만, 본고에서는 한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61) 시카고박람회에 출품한 한국 물품 목록(영문)은 김영나, 〈‘박람회’라는 전시공간 :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와 조선관 전시〉, 101~104쪽 참조.

 

62) 김영나, 〈‘박람회’라는 전시공간 :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와 조선관 전시〉, 89쪽.

 

63) 피바디박물관에 있던 시카고박람회 출품 물품 중 해금, 용고를 제외한 거문고, 당비파, 양금, 피리, 대금, 생황, 장구 등 8점이 2013년 9월 30일 한국으로 돌아왔다.(《연합뉴스》 2013년 9월 30일, “미국에 간 조선악기 120년만에 한국으로 귀환”; 《헤럴드경제》 2013년 9월 30일, “120년 전 미국 ‘시카고박람회’ 갔던 국악기 돌아온다”)

 

64) 1993년 8월 7일부터 11월 7일까지 대전엑스포 박람회장 내 문예전시관에서 ‘시카고 엑스포 참가전시품 특별전’을 개최하고 누리저고리, 모시도포, 버선, 결혼예복, 갓, 혁화초혜 등 복식류 18점과 호준포 투구 銅砲 동채(지휘봉) 명주모자(방한모) 등 군사용품류 8점, 채상, 방석 보료 등 주거용품 4점 등 필드 뮤지엄 소장품 24종 30점을 전시하였다.(《동아일보》 1993년 7월 15일, “백년 전 조선 참가품, 1893년 시카고 박람회 대전엑스포서 다시 본다”; 《동아일보》 1993년 11월 6일, “93대전 엑스포 결산”)

 

65) 김영나, 〈‘박람회’라는 전시공간 :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와 조선관 전시〉, 92쪽.

66) 김영나, 〈‘박람회’라는 전시공간 :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와 조선관 전시〉, 81·85쪽.

67) 당시의 국명은 대한제국이었지만, 본고에서는 한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68) 국사편찬위원회, 《한불관계자료 – 주불공사 · 파리박람회 · 홍종우》, 221~223쪽.

69) 김영나, 〈‘박람회’라는 전시공간 :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와 조선관 전시〉, 95~96쪽.

70) 국사편찬위원회, 《한불관계자료 – 주불공사 · 파리박람회 · 홍종우》, 191쪽.

71) 국사편찬위원회, 《한불관계자료 – 주불공사 · 파리박람회 · 홍종우》, 204~224쪽.

72) 원산교구의 사우어 주교는 1921년 주교로 서품되었고,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의 의견을 존중하였다.

 

73) 1910년부터 1923년까지 숭공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던 베네딕도수도회의 서울수도원에는 목공 · 철공 · 원예 등 7개의 작업장이 있었다. 1920년 설립된 원산교구의 선교를 담당하게 되면서 서울수도원은 1927년 함경남도 덕원으로 모두 이전하였다.

 

74) 베네딕도수도원의 1924년 1월-4월 기록에는 “호궁(虎宮)에 있는 용호정(龍虎亭)(‘조선’과 대조적), 조선 양반의 여름 집, 농부의 집을 완성하였다”(“1924년 1월~4월”(Chronik, 1924 Nr. 5, pp.2~4), 《원산교구 연대기》, 56-57쪽)고 하였고, 1924년 4월-8월의 기록에는 4개의 모형이 만들어졌다고만 하여(“1924년 4월~8월”(Chronik, 1924 Nr. 8, pp.10~12), 《원산교구 연대기》, 61쪽) 나머지 하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75) “1924년 4월~8월”(Chronik, 1924 Nr. 8, pp.10~12), 《원산교구 연대기》, 61쪽.

 

76) 이외에 세 교구가 각각 교구 차원에서 준비한 것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출품한 목록들도 바티칸으로 함께 보냈다고 했으니 바티칸 박물관 또는 도서관에 그 목록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로는 확인할 수 없다.

 

77) 《경향잡지》 534호, 1924년 1월 31일, “바티칸 전교박람회에 보내기로 예비하는 물품 목록”, 28~30쪽.

78)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 도서관 소장.

79) 필사본에 ‘경성교구’라 기록되어 있다. 서울교구를 가리킨다.

80) 醫宗損益. 1868년(고종 5) 황도연(黃쇐淵)이 저술, 간행한 의서(醫書).

81) 짚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

82) 足械. 죄수를 가두어 둘 때 쓰던 형구(刑具).

83) 風簪. 망건(網巾)의 당 중앙에 꾸미는 지름 4㎝ 내외의 타원 또는 반달 모양의 장식물.

84) 활을 쏠 때에 시위를 잡아당기기 위하여 엄지손가락의 아랫마디에 끼는 뿔로 만든 기구.

85) 장구의 줄을 조이는 축수.

86) 풀솜(실을 켤 수 없는 허드레 고치를 삶아서 늘여 만든 솜).

87) 蠶絹. 누에가 스스로 실을 토해서 몸을 감싸고 만드는 집.

88) 싸리로 가로로 퍼지게 둥긋이 결어 만든 그릇. 채롱과 비슷하나 뚜껑이 없다.

89) 당을 매고 당에 올리는 떡을 총칭하는 말.

90) 당혜(唐鞋) 모양으로 만들어 기름에 결은 재래식 가죽신.

91) 곱돌로 만든 담뱃대.

92) 둥글고 바닥이 편평한 놋그릇.

93) 布扇. 상제가 외출할 때에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가지고 다니던 물건.

94) 儒巾. 유생들이 도포 · 창의에 쓰던 검은 베로 만든 실내용 관모.

95) 고리버들[杞柳]로 동글납작하게 만든 고리.

96) 외출용 쓰개.

97) 方笠. 주로 상제가 밖에 나갈 때 쓰던 갓.

98) 상제(喪制)가 초상 때부터 졸곡(卒哭) 때까지 신는 짚신.

99) 바디[緯打具]를 끼우는 테.

100) 布網. 상제가 쓰는, 베로 만든 망건.

101) 程子冠. 선비들이 평상시에 머리에 쓰던, 말총으로 만든 관(冠).

102) 喪笠. 상제가 밖에 나갈 때 쓰던 갓.

103) 짚신.

 

104) ‘연죽’(각종 담대배)이라고 한 것, ‘고물비녀류’라고 되어 있는 항목은 물품이 정확하게 몇 개인지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이보다 많을 것이나 필사본에서는 정확한 개수를 확인할 수 없다.

 

105) 목록에 이렇게만 기록되어 있기에 정확하게 책 명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106) 김유룡(金裕龍) 신부.

107) 멜리장(P. Melizan, 梅履霜) 신부.

108) 이필경(李弼景) 신부.

109) 주재용(朱在用) 신부로 1922년부터 목포본당과 제주본당을 함께 책임맡고 있었다.

110) 뤼카(L. Lucas, 柳嘉鴻) 신부.

 

111) 1924년 서울교구의 신자수는 54,079명,(〈서울교구 1924년도 보고서〉, 202쪽) 대구교구의 신자수는 32,061명을 기록하였다(〈대구교구 1924년도 보고서〉, 《천주교 부산교구사자료집 교구연보》,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118쪽) 원산교구는 1920년 약 8,800명이었다.

 

112) 《동아일보》 1924년 12월 27일, “布敎 博覽會에 羅馬法王 參列.”

113) 《경향잡지》 559호, 1925년 2월 15일, “바티칸 박람회 개시”, 66~67쪽.

114) 《경향잡지》 564호, 1925년 4월 30일, “박람회의 박람회”, 184~186쪽.

115) 《뮈텔주교일기》 1925년 3월 16, 17, 18, 21일, 4월 30일 ; 《드망즈주교일기》 1925년 3월 17, 18, 21일, 4월 30일.

116) 《경향잡지》 562호, 1925년 3월 31일, “논설: 양위 주교 로마 행차”, 121쪽.

117) 《뮈텔주교일기》 1925년 6월 20일 ; 《드망즈주교일기》 1925년 6월 20일.

118) 《경향잡지》 548호, 1924년 8월 31일, “조선 성교회 현상”, 380쪽.

119) 《경향잡지》 565호, 1924년 5월 15일, “한신부, 로마를 향하여 떠나면서”, 198쪽.

120) 《뮈텔주교일기》 1925년 6월 30일.

121) 《경향잡지》 573호, 1925년 9월 15일, 한신부, “로마 여행일기”, 403쪽.

122) 《경향잡지》 566호, 1925년 5월 31일, “회보: 장면씨로 대표자 선거”, 232쪽.

123) 《뮈텔주교일기》 1925년 7월 1일.

 

124) 프랑스 본국으로 휴가를 가기 위해 1925년 2월 16일 용산역을 출발하였다.(《경향잡지》 560호, 1925년 2월 28일, “진신부 법국 여행”, 82~83쪽)

 

125) 《뮈텔주교일기》 1925년 7월 3, 4, 5일 ; 《드망즈주교일기》 7월 4, 5일.

126) 《경향잡지》 594호, 1926년 7월 31일, “회보 : 작년 성년에 로마부에 참배인 수”, 331쪽.

127) 이후에 한국인으로 또는 한국천주교회에서 선교활동을 펼친 외국인 선교사들이 전교박람회장을 찾았는지는 알 수 없다.

 

128) 교회잡지에도 ‘특정 국가의 식민지에 천주교신자 몇 명’이라는 표기를 하였다. “통계를 종합하면 아시아에 있는 천주공교인 수는 다음과 같더라. 영국식민지 2,682,841 / 지나 2,208,800 / 불국 식민지 1,200,000 / 일본 84,401 / 조선 99,123 / 포도아 식민지 300,000 / 파사시리아 25,000 / 시베리아 149,689 / 토이기 시리아(불국위임통치) 560,000 / 팔레스티나(영국 위임통치) 28,421 / 이구라(동상) 17,760 / 합계 7,355,945”(《경향잡지》 552호, 1924년 10월 31일, “회보: 아시아의 천주교인”, 477쪽)

 

129) 566호(1925년 5월 30일)부터 615호(1927년 6월 15일)까지 거의 매호에 수록하였다.

130) 《경향잡지》 573호, 1925년 9월 15일, 한신부, “로마 여행일기”, 403쪽.

 

131) 《동아일보》 1926년 1월 7일, “萬國博覽會에 入賞된 朝鮮의 美術工藝品, 불란서 파리에서 열린 만국미술공예품박람회에 조선서 출품한 라뎐칠긔 세 가지가 모다 입상되여, 螺鈿漆器로 銀賞 金奉龍 銅賞 金成圭.”

 

132) 바티칸박물관 홈페이지(http://www.christusrex.org/www1/vaticano) “PONTIFICAL MONUMENTS, MUSEUMS AND GALLERIES”(2013년 11월 14일 검색) ; 《평화신문》 2006년 2월 26일, “바티칸박물관, 설립 500주년 맞아 각종 기념행사”; 《가톨릭신문》 2007년 10월 7일, “바티칸박물관 내 선교민속박물관을 가다.”

 

133) 《평화신문》 2000년 1월 16일, “교황청 민족박물관 ‘한국실’ 확장.”

134) 《경향신문》 1983년 8월 11일, “바티칸 박물관 한국관 등 보완하다.”

135) 《자유신문》 1949년 10월 9일, “로마 聖年 박람회, 한국서도 미술품 출품.”

136) 《경향잡지》 1023호, 1950년 6월 1일, “회보: 한국성년 참배단 로마에”, 99쪽.

 

[학술지 교회사학 vol 10, 2013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윤선자(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212804&Page=11&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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