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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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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특별 전교의 달 신앙의 증인 (중) 성인 16명

559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10-15

특별 전교의 달 ‘신앙의 증인’ (중) 성인(16명)


아프리카·아시아 등 낯선 타국에서 복음 전하다 희생된 선교사들

 

 

특별 전교의 달을 맞아 교황청이 소개한 신앙의 증인 33인 가운데 성인 16명을 살펴본다. 대부분이 자신이 살던 나라를 떠나 낯선 나라에서 복음을 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경환 성인이 포함됐다.

 

성인들 가운데 중국에서 선교한 성인은 4명이다. 장 가브리엘 토랭 뒤프레세(1750~1818)ㆍ장 가브리엘 펄보아(1802~1840, 프랑스) 신부는 프랑스 출신으로 중국에서 선교하다 순교했다. 뒤프레세 신부는 박해 현실을 알면서도 중국으로 향했고, 선교 중에 체포돼 감옥에서 6개월간 지냈다. 마카오에서 잠시 피신해 있었지만, 신자들을 위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배교자의 밀고로 체포돼 참수형(머리가 잘리는 형)으로 순교했다. 펄보아 신부는 사제가 되고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늘 마음속에는 중국 선교의 꿈을 품고 있었다. 10년 넘게 기다린 끝에 중국으로 떠나게 된 그는 중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하느님 말씀을 전하다 박해 중에 십자가에 못 박혀 숨졌다.

 

알베리크 크레시텔리(1863~1900) 신부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교황청 외방전교회에 입회해 중국에서 선교했다. 중국 문화를 존중하며 변발을 하고 중국 옷을 입고 다니며 선교했다. 중국 이름(郭西德, 구오샤이데)까지 얻을 정도로 중국인들과 가깝게 지냈으나 박해의 칼날에 순교했다. 오스트리아 출신 조셉 프라이나데메츠(1852~1908) 신부는 교구 사제로 살았지만 해외 선교에 대한 열망으로 말씀의 선교 수도회에 입회한 후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에서 직접 교리교육 책을 만들며 현지인 교리교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탈리아 출신 다니엘 콤보니(1831~1881) 주교는 사제가 된 뒤 아프리카로 떠났다. 열악한 환경으로 같이 갔던 동료 사제들이 3명이나 목숨을 잃어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로 아프리카를 구원한다’는 선교 계획을 세우고 베로나사제회를 설립해 아프리카 선교를 이어갔다. 유럽 주교들에게 아프리카 선교 사목에 관심과 도움을 요청했고, 중앙아프리카대목구장에 임명돼 아프리카 복음화에 헌신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스리랑카에 사목방문 중 조셉 바즈 신부 시성식을 주례했다. 조셉 바즈 신부 시성식에 참석한 한 학생이 성인화를 들고 있다. [CNS 자료 사진]

 

 

프랑스 출신인 테오도라 게랭(1798~1856) 수녀는 천주의섭리수녀회에 입회해 미국 인디애나 주에서 학교를 설립하며 선교했다. 통나무 오두막집을 수녀원으로 삼아 교육 사업에 열정을 쏟았다. 여성 수도자에 대한 차별, 오해, 질병의 고통을 이겨내며 하느님을 알렸다.

 

스리랑카 첫 성인 조셉 바즈(1651~1711) 신부는 인도 출신으로 수도회 사제가 되고 싶어했지만, 당시 수도회 입회는 유럽 출신에게만 허용돼 포기했다. 인도 고아대교구에서 사제품을 받고 스리랑카로 건너갔다. 스리랑카는 네덜란드 통치하에 개신교회가 성행해 가톨릭 신자들이 탄압받던 때였다. 묵주를 목에 걸고 집집마다 구걸하고 다니며 묵주를 보고 호의를 보이는 이들에게 선교했다.

 

포르투갈 사제로 인도에서 선교한 존 드 브리투(1647~1693) 신부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같은 선교사를 희망하며 예수회에 입회했다. 인도에서 힌두교 수행자 복장으로 다니며 선교했다. 지역 주민들 문화를 존중하면서도 계급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대했다.

 

아놀드 얀센 신부.

 

 

필리핀 출신으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세례를 받은 피터 칼룽소(1654~1672)는 선교 여행을 다니며 교리교사, 선교사로 활동했다. 괌으로 건너가 원주민들에게 선교하던 중 세례를 받은 아이가 죽자, 세례 때문에 죽었다는 모함을 받게 돼 주민들에게 잡혀 순교했다.

 

벨기에 사제 요제프 데 뵈스터(1840~1889) 신부는 몰로카이의 성자 다미안 신부로 더 잘 알려졌다. 그는 한센병 환자들이 격리된 하와이 몰로카이섬에 들어갔다. 가족들조차 버린 한센병 환자들을 돌봤고 마을에 교회와 병원, 공공건물을 세우는 데 노력했다.

 

독일 출신의 아놀드 얀센(1837~1909) 신부는 선교의 중요성을 깨닫고 선교사 양성을 위한 신학원과 여러 공동체를 설립했다. 당시 독일 가톨릭교회는 정부와 충돌을 빚으며 탄압받던 시절이었다. 얀센 신부는 네덜란드로 건너가 말씀의 선교 수도회를 설립하며 선교 사제와 수도자 양성에 평생을 몸바쳤다.

 

이탈리아 출신 귀도 마리아 콘포르티(1865~1931) 대주교는 중국에서 직접 선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설립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선교회 사제들을 중국으로 파견하며 선교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중국을 사목 방문해 선교사들 활동을 격려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교리 교육과 청년 사목에 활성화에 앞장섰다.

 

- 카테리 테카크위타.

 

 

멕시코에서 태어난 라파엘 귀자르 발렌시아(1878~1938) 주교는 멕시코를 비롯한 과테말라, 쿠바 등지에서도 활발히 하느님을 전했다. 특히 멕시코 혁명 정부가 종교를 탄압하던 시절, 길거리 상인 또는 의사 등으로 위장하고 다니며 병든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돌봤다.

 

우간다의 거룩한 순교자 22위(1885~1887 순교)는 우간다 무왕가 2세 정권 아래에 순교한 이들이다.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로 알려져 있다. 무왕가 2세는 자신을 섬기던 몸종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명령을 따르지 않자 대대적으로 가톨릭을 박해했다. 대부분 무왕가 2세의 몸종이었고 판사와 교리교사도 있다.

 

카테리 테카크위타(1656~1680)는 미국 원주민(인디언) 출신의 첫 성인이다. 어릴 때 천연두로 시력을 잃었고 가족도 숨져 고아가 됐다.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하느님 사랑에 눈을 뜬 그는 인디언 사회에 가톨릭 신앙을 전파했다. 부족장의 반대와 탄압으로 캐나다 퀘벡 주로 이동, 예수회 선교사들 마을에 살며 기도와 고행의 삶을 살다 선종했다. [가톨릭신문, 2019년 10월 13일 박수정 기자]

 

 

'신앙의 증인]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 한국)

박해에도 기도, 극기, 나눔으로 모범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최경환 성인은 일찍 신앙을 받아들인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박해를 피해 경기도 수리산(현재 경기도 안양)으로 들어가 가족들과 함께 살아갔다. 그는 기도와 극기, 나눔으로 신앙생활에 모범을 보였는데, 사람들이 점차 소문을 듣고 찾아와 교우촌을 이뤘다.

 

성인은 새로 이주해 온 신자들이 잘 정착하도록 돕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있으면 제일 먼저 달려가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노력했다. 신자들은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고, 그의 가르침을 들으려 멀리서 찾아오는 이가 생길 정도였다. 조선 교회에서 선교 중인 모방(파리외방전교회) 신부는 성인을 교우촌 회장으로 임명했다. 조선 교회에 사제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성인은 모방 신부에게 아들(최양업 토마스,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을 맡기며 유학을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이들이 굶주림과 고문 등으로 고통을 겪자 성인은 투옥된 신자와 그 가족을 돌보는 데 헌신했다. 성인이 체포돼 감옥에서 고문당할 때 아들이 마카오에서 신학 공부를 하러 간 사실이 드러나자 형리들은 그를 더 심하게 고문했다. 그는 두 달간 감옥에 있으면서 매일 고문을 당했지만, 늘 기쁨에 가득 차 하느님을 노래하며 감옥에서도 선교했다. 그는 결국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순교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10월 13일, 박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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