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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콘산책14-15: 방주의 틀 - 영원을 향한 창문

1063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4-25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14) 방주의 틀 - 영원을 향한 창문 (1)


이콘의 세계는 하느님의 세계, 우주이자 노아의 방주

 

 

- 판토크라토(온 우주의 창조자), IC XC(예수 그리스도), 후광에 있는 글자는 ‘있는 자’라는 뜻.

 

 

1. 문과 창문의 차이

 

어릴 때 야단을 맞으면서도 어머니 몰래 창호지 문에 구멍을 내곤 했습니다. 손가락에 침을 발라 창호지에 살짝 대도 구멍이 나는 재미에 여기저기 구멍을 내고, 그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작은 구멍인데도 앞뜰의 꽃밭이 다 보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부지런히 창호지를 작게 자른 뒤 밥풀로 다시 발라 그 구멍을 메우셨습니다. 미관상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도 그 구멍으로 겨울철 찬바람과 여름철 모기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여름에 아이들이 모기에 물릴까, 겨울에 춥지 않을까 구멍을 막아두는 것은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문은 일반적으로 불투명 재질로 만들어 밖을 들락날락하기에 좋고, 열리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또 문은 열리지 않으면 무엇을 받아들일 수 없고, 또한 내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문은 적당히 열려야 하고 적당히 닫혀야 합니다.

 

거기에 비교하면 창문은 재질부터 다릅니다. 창문은 빛이 들어올 수 있는 재질로 만드는 것이 원칙입니다. 유리가 없던 시절, 우리나라에서는 대문이나 광문을 제외하고 들어오는 방문들에 창호지를 발라 두었습니다. 밖의 빛을 받은 창호지는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요즈음은 거의 유리 창문이라 문을 열지 않아도 밖을 내다보면서 나름대로 사색과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창문은 몸이 들고 나는 문이 아니고, 시선이 들고 나는 문입니다. 창문이 열려 있을 때는 새로운 공기가 들어와 집안 공기를 정화하고, 닫혀 있어도 빛을 받아들여 방안을 밝혀줍니다. 창문은 문처럼 몸이 왕래할 수 없지만, 멀리까지 눈이 왕래할 수 있는 통로로 활용됩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현재 나의 위치(현실)이며, 작은 창문으로 보는 창 너머는 다른 세계, 즉 시선으로 사색하고 소요(逍遙)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내가 창문을 통해 산(이사 25,6-10)을 바라보면서 그분께 감사드리는 것은 중간에 아무것도 없으니 산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리라. 그 사이로 날아가는 황조롱이도 보고,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와 아직도 녹지 않은 하얀 눈도 보이는데, 햇빛이 어찌 이리 강렬하게 눈 위로 비치니, 밖은 아직 너무 차가운 날씨인 거야! 내가 손을 좌우로 흔드니, 손등에서 느끼는 것은 보이지 않아도 아마도 그분의 숨결인 거야!

 

우리는 창문을 통해 자연을 보고 자연을 통해 하느님을 느끼듯이, 이콘 안에 그려진 세계는 정화된 하느님의 세계입니다. 이콘의 돌출된 테두리는 마치 하나의 창을 연상케 합니다. 우리는 이콘이라는 창문 앞에 서서 창밖의 성스러운 이미지를 통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호 교차하는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따라서 이콘은 ‘영원성을 향한 창문’으로 하느님과 사람이 ‘교차하는 시선의 교환’, 즉 상호 소통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이콘의 네모난 형태는 창문을 의미하며, 이콘 안의 세계는 하느님 섭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세계, 즉 전 우주를 의미하기도 하고, 모든 생물체를 모아두신 노아의 방주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곳은 아름답고, 오직 하느님의 빛만이 존재하는 곳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또 하느님의 영원성을 표현하기 위해 인물 이외의 여백 부분, 하늘이나 공간을 변치 않는 황금으로 장식합니다.

 

우리가 대화할 사람을 만나면 어떤 태도를 취할까요? 당연히 얼굴을 마주보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콘이라는 열린 창문을 통해 우리 눈은 하느님의 눈과 마주 대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콘을 유리로 덮어씌우거나 유리로 덮는 액자에 넣지 않습니다. (작품 : 판토크라토)

 

 

2. 이콘 제작 과정과 구성 요소

 

이콘 제작은 ‘영원하다’는 근본 사상을 위해 모든 과정을 깊이 있게 준비합니다. 제작 방법은 프레스코화, 또는 돌조각으로 이뤄진 모자이크로 벽면에 직접 도상하는 경우도 있지만, 작은 형태로 벽에 거는 것으로 나무판을 사용합니다. 이콘을 제작하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나 그 과정을 간단히 설명합니다.

 

- 이콘 나무판 선택과 창문 깎기

 

이콘 판 깎기(완쪽 사진)와 사포로 갈기

 

 

나무판은 잘 말라야 하며, 나무판이 터져 실금이 간 것이라든지 곰팡이가 피었거나 옹이가 있는 나무는 제외합니다. 소나무는 송진이 흘러내리고 다듬기도 불편해 쓰지 않습니다. 많이 쓰는 것은 피나무·오리나무·측백나무·너도밤나무·물푸레나무·은행나무 등을 씁니다. 폭이 넓은 외국산도 좋은 통나무 재목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나무들을 제재소에서 통으로 켜서(두께 3~5㎝) 서늘하고 습기 없는 장소에 수년 동안 뒤틀리지 않도록 보관한 다음 사용합니다. 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재단한 다음 붓으로 물을 묻혀 칠해봅니다. 실금이 있으면 눈으로 보아도 표시 안 나던 곳이 물기가 들어가 표시가 납니다.

 

창문 형태로 이콘 판 주변을 적당한 간격을 두고 연필로 줄을 긋습니다. A4용지 크기라면 좌우 양측에 2.5~3㎝, 위·아래에 3.5~4㎝ 정도로 창문 형태를 만듭니다. 이콘의 크기에 따라 창문 크기도 달라집니다. 큰 이콘은 창문 크기를 좌우 7~8㎝, 위·아래에 10㎝ 정도를 둡니다. 그어진 줄을 중심으로 칼집을 넣고 이콘 크기에 따라 3~7㎜ 깊이의 V 형태로 깎아줍니다. 그리고 그림이 들어갈 부분을 사포(砂布)로 밀어내 매끈하게 갈아줍니다.

 

- 천 씌우기와 석회 올리기

 

- 석회칠하기

 

 

이콘 판에 석회를 바르기 위해 잘 다듬어진 나무판에 중탕된 아교를 발라주고 천을 잘 펴서 깨끗하게 붙여줍니다. 천은 순면으로 넓은 의료형 붕대가 적합합니다. 천과 아교가 나무에 발라준 석회 성분들을 잘 고착시킬 뿐만 아니라 세월이 지나도 손상 없이 보존케 해줍니다.

 

중탕된 적당량의 아교와 비율에 맞춘 석회를 넣고 넓은 붓으로 잘 저어 발라줍니다. 잘 말랐으면 여러 번 발라줍니다. 이때 주의할 것은 실내가 따뜻하고 습기가 없어야 좋습니다. 바르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아교 성분을 조금씩 줄이고 석회 성분을 조금씩 늘려갑니다. 바르는 횟수는 하루에 한 번씩 7~10회 바릅니다.

 

금박 올리기

 

석회 칠이 끝났을 때 앞·뒷면, 옆면을 사포로 밀어 전체적으로 깔끔한 모양을 만듭니다. 처음에는 거친 사포로 정리한 다음, 더 고운 사포로 다듬고, 아주 고운 사포로 밀어낸 다음, 마지막에는 적당량의 목화솜으로 문질러 더욱더 매끈한 윤을 내줍니다. 이콘 판이 유리처럼 매끈해진다면 금박을 붙였을 때 더 찬란한 광채를 냅니다.

 

- 금박 올리기

 

 

이콘 판 옆면과 뒷면과 앞면에 금박을 붙이기 전에 밤색 또는 붉은색을 올려 마무리합니다. 앞면에는 이콘에 관련된 형태를, 그리고 가는 바늘 또는 송곳으로 긁어냅니다. 가는 송곳으로 긁는 이유는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뼈와 살을 주시고 영을 불어넣어 주시니, 우리는 그 뼈대 위에 영성이라는 색깔을 입히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옆면과 뒷면에 이콘에 얼룩진 것을 말끔히 정리하고 이콘으로 가치를 높입니다.

 

앞면 창문과 공간에는 순금박을 올립니다. 금박 올리기는 섬세한 작업이어서 먼지가 발생하지 않도록 청소한 뒤 주변을 잘 정리해 마음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이콘 판에 금박을 올리기 위해 붓 종류와 가위 등을 정리해놓고 먼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덮어둡니다. 주변이 안정되면 금을 붙여 갑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4월 14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15) 방주의 틀 - 영원을 향한 창문 (2)


이콘을 보는 것은 하느님에게 내가 보여지는 것

 

 

 

- 역원근법으로 구성된 이콘의 예: ‘천사의 알림’ 이콘의 투영도  94.5 x 80.3 cm, 14세기, 성 클레멘스 성당, 오흐리드, 마케도니아. 이 이콘은 성모님께서 성전의 동쪽 문(에제 43,1-4) 앞에 앉아 계시는 형태로 가브리엘 대천사의 인사를 받으시는 모습이다.(루카 1,28-38) 대천사는 오른손을 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성모님께 축복과 함께 인사를 전한다. 모든 구성은 성전의 동쪽 문 앞 의자에 앉아 계시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 문 앞에는 네모진 야곱의 우물이 있다. 모든 가구나 발판, 우물, 위에는 천정의 형태가 성모님의 복부를 중심으로 역원근법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는 하느님의 눈이 성모님의 복부에 계신다는 의미다.

 

 

2.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심하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다섯 살 어린 남동생과 다투다가 동생을 한 대 쥐어박았는데, 동생이 아버지께 일러 꾸지람을 들은 것입니다. 막내 여동생과 남동생은 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해서 두 동생과 다투면 늘 나만 야단맞았죠.

 

어릴 적 난 내성적이고 조용했지만, 고양이처럼 얌전히 있다가도 건드리면 앙칼진 면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동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때리기만 한다는 아버지의 꾸지람에 속이 상해 대문을 발로 걷어차고 나갔습니다. 그러자 그 행동에 화가나신 아버지께서 지게 작대기를 들고 쫓아오시는 게 아닙니까! 놀라서 막 달아났습니다.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에 냇가로 달아나 하릴없이 빙빙 돌았습니다. 그러다 멀리 사는 친구네 집에 가서 놀다가, 저녁 나절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들어가기가 무서웠습니다.

 

내가 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누구에겐가 ‘보여져야’만 했습니다. 특히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보여져야 했기에 대문을 들락날락하고, 발에 무엇이 걸려 나는 소리도 냈습니다. 그래야 눈치를 채신 부모님께서 “들어와 밥 먹지 뭐하냐?”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누구를 본다는 것은 부담스럽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내가 보여지는 것은 부담스럽습니다. 집이 무너질까 걱정이 될 때는 행동이 조심스러워지듯이 창문을 통해 누군가 나를 본다고 생각하면 말과 행동이 조심스러워지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콘을 바라볼 때도, 우리가 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 속에는 ‘보여지는’ 원리가 함께 있습니다. 이콘의 세상은 정화된 거룩한 세상이고, 성령께서 감도(感導)하시는 곳이기에 영원하신 하느님의 눈을 구성하는 원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감출 것 없이 보여진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시공간적 삶의 차원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걸음마 하는 아기를 데리고 밖을 나가면, 아기는 두 손을 들고 마치 병아리처럼 쪼르르 몇 걸음을 뛰듯이 걷다가 잠시 서서 뒤에 있는 엄마·아빠를 바라보며 웃고, 또 몇 걸음 쪼르르 뛰듯 걸어갑니다. 아기는 걸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엄마·아빠를 자랑스럽게 바라보고, 또 엄마·아빠가 있어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최고의 행복감을 느낄 것입니다. 아기는 부모로부터 ‘보여지는’ 위치에 있으므로 안정적입니다.

 

내가 나를 제일 잘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옛날 과거제도에서처럼 어려움 없이 소년등과(少年登科)한 사람들을 요즘에도 종종 봅니다. 그들은 비교적 젊은 나이부터 탄탄대로를 걸어 세상살이에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정원에 있는 소나무와 비바람을 맞고 자란 나무는 생김새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피와 땀과 눈물 없는 인생사는 융통성과 관대함이 부족해 이른바 공감 능력이 떨어집니다. 그러니 본인 시각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합니다. 본인이 본인을 제일 잘 안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자기모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삼자의 눈으로 봐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만약 제삼자의 눈이 ‘영원성의 시선’이라면 어떨까요? 우리에게 오신 ‘말씀’은 하느님의 시각이라는 것을 이콘에 넣는다면 어떨까요?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은 시간에 의해 변하는 존재들이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오늘 바라본 모든 것이 내일이면 조금씩 변합니다. 모든 세상사는 내가 조금만 위치를 바꿔 바라보면 모양이 달라져 있습니다. 시각에 따라 그 관점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원성을 지닌 하느님의 눈은 추상적이지만 시간과 무관합니다. 따라서 하느님 세계의 이콘 안에서도 시간과는 무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콘 안의 세계가 하느님의 세계라면, 보는 사람이 내가 아니고 내가 ‘보여지는’ 원리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콘에서는 이를 위해 외부의 관점을 내부의 관점으로 돌려 바라보는 주체를 ‘변화하지 않는 영원성’으로 바꿉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밖을 바라보는 것인데 오히려 하느님의 시선이 나를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관점으로 구성 체계가 바뀌고, 모든 것이 하느님의 시선 안으로 포괄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나는 하느님의 세계에 참여하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영원성을 바라보는 창문은 영원성이 강림하는 통로이며, 그 안에 있는 눈에 보이는 분, 즉 예수님 성모님 성인들을 통해 하느님과 대화가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볼 수 없지만 내가 보여지는 조건이라면 내 앞에는 언제나 하느님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가! 내가 ‘보여져서⋯’. 특히 배가 고픈 것처럼 보여진다면 “얘야, 들어와 밥 먹어라”하시지 않을까요!

 

 

3. 보여지는 세계는 어떻게 구성될까?

 

원근법에 따른 세계는 ‘보는’ 세계이므로 내가 주체가 됩니다. 원근법에 따르면 멀리 있는 것은 점점 작게 보이므로 많은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00층짜리 건물에 둥글게 원형으로 만들어진 계단이 있다고 합시다. 맨 위층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맨 아래층 계단까지 점점 작아지며 무한히 연속적으로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 역원근법의 시각: 원근법과는 반대로 보는 주체가 그림 안에 있는 형태로 구사한다.

 

 

 

- 원근법의 시각: 보는 사람 중심으로 물체의 거리감에 따라 화면에 묘사한다.

 

 

보여지는 세계는 보는 주체가 내가 아니고 하느님이므로 나도 그림 안에 동참합니다. 원근법에 따른 세계가 없다는 개념입니다. 시간이 흐른다면 원근법에 따른 모든 세계는 변화하고 언젠가는 없어질 세상이지만, 이콘에서는 그러한 세상이 아닙니다. 이콘의 세계는 하느님의 세계이므로 시간적 편차가 없는 세계이고, 모든 것은 동시에 있는 세상이며, 다양한 시선들과 시간이 한 공간 안에 형성됩니다. 이것은 어느 곳에서든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즉 시간의 흐름에 방해받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느님 세계에서는 같은 순간에 공존합니다. 따라서 이콘에서는 다윗 왕과 요한 세례자와 근래의 성인들이 공존할 수 있게 되는 셈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4월 21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16) 방주의 틀 - 영원을 향한 창문 (3)


입체파 그림처럼… 한 작품에 담긴 여러 의미와 시선

 

 

- (작품 1) 모든 성인 : 템페라, 74 x 49 cm, 17세기 말, 개인 소장, 파리, 프랑스. 화면에 병치·대치·여러 개의 공간 등이 망라된 이콘의 사례다.

 

 

3. 이콘의 구성

 

동양사상에서 등장하는 무(無)의 개념과 서방에서 등장하는 초월성을 설명하기란 어렵습니다. 전부이면서 아무것도 아니고 어느 곳에도 없으면서 동시에 어느 곳에나 있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까요? 구약에서 바람은 하느님의 영이며 생명을 주시는 숨이고, 하느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로 해석합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붑니다. 보이지 않는 공기의 움직임을 바람이라고 하며, 하느님의 초월성을 느낄 수 있는 대리 역할이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초월성을 표현하기 위해 이콘은 부정주의·정적주의·신화사상을 종합하여 독특한 미학을 형성하였습니다. 등장 인물의 경직성, 그림의 고요함, 피부의 갈색, 빛의 표현, 일정하게 굽이치는 머리카락, 직선과 평행선처럼 움직이는 옷 주름들, 바라보는 눈의 위치, 원근법의 반대 현상, 색깔의 의미, 금의 사용과 의미, 몸에서 발산하는 빛 등은 앞서 언급한 신학 사상의 회화적 표현입니다.

 

이콘의 구성과 처리 방법에서도 그것이 드러납니다. 각각의 사건과 인물의 위치와 의미에 따라 개별 공간을 두어 구성하고, 화면 전체를 여러 겹으로 겹치거나(중첩) 또는 나란히 늘어놓거나(병렬), 혹은바라보는 방향을 여러 개로 응용하여 배열합니다. 이러한 방법은 현실 세계와 맞지 않는 모순(矛盾)이발생합니다. 이러한 구성은 좁은 화면에서 많은 내용을 보여주면서도 질서를 유지하게 합니다. 이는 이콘 이미지의 구성 방식에 시각적 응용과 미학적 형식을 의도적으로 왜곡시킴으로써 초월적 대상을 느끼게 하려는 것입니다. 장엄함은 크게, 숭고함은 높게, 종말론적 의식은 미완성으로, 초월적인 상태는 여백으로, 아름답고 충만한 소리는 침묵으로 표현합니다. 그 외에도 과장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여러 개의 시선을 표시하는 다중점·왜곡 등을 써서 나타냅니다.

 

이콘 ‘모든 성인’(작품 1)은 병치·병렬·대치·여러 개의 공간 등으로 구성한 것입니다. 이콘의 맨 윗부분에는 붉은 글씨로 ‘모든 성인’이라고 쓰여있습니다. 이 이콘은 최후의 심판과 연결됩니다. 이콘의 가운데에 붉고 푸른 둥근 공간이 있습니다. 가운데에는 황금빛 광채와 더불어 하느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앉아계십니다.

 

황금색 원 왼편에는 불쌍한 영혼을 위해 청원하는 성모 마리아(성자 하느님 옥좌의 오른편)가 있고 오른편에 요한 세례자가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구세주 탄생 이후의 영혼들을 위해, 요한 세례자는 구세주 탄생 이전 구약의 영혼들을 위해 하느님께 청원하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팔각 후광이 있는 천사 모습으로 ‘지혜’께서 서 계십니다. 지혜 주위에 천사들의 군단이 있습니다.

 

창궁의 위아래에는 해와 달·별들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는 최후의 심판 때 오실 주님을 위해 준비된 옥좌가 있습니다. 그 옥좌 위에는 청색의 천이 놓여있습니다. 옥좌 뒤에는 그리스도에 의해 윗부분이 가려진 갈색 십자가가 걸쳐 있습니다. 옥좌 앞에는 아담과 하와가 무릎을 꿇고 하느님을 경배합니다. 성자 하느님 좌우에는 군중이 다섯 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천사 군단 아랫부분에는 왕·예언자·구약의 성조들이 있고, 그 밑에는 예수님의 사도들이 있습니다. 그 아래 계층은 교부·주교·사제들입니다. 그 밑의 왼쪽은 순교자들, 오른쪽은 은수자들과 수도자들입니다. 가장 아랫부분 왼편에는 성덕이 가득한 귀부인들이 있고 맞은 편에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반 나신의 늙은 여인이 있는데 이 여인은 이집트의 마리아이며 속죄와 참회 여인으로 성녀들과 함께 참여하고 있습니다.

 

성자 하느님의 옥좌 주위에 복음 사가들의 상징인 사람(마태오)·사자(마르코)·소(루카)·독수리(요한)가 그려져 있습니다.

 

- (작품 2) 성모님의 얼굴(일부) : 템페라, 94.5 x 80.3cm, 14세기, 성 클레멘스 성당, 오흐리드, 마케도니아.

 

 

이콘의 맨 윗부분 왼쪽 가장자리에 다윗왕이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올곧은 이들에게는 찬양이 어울린다”(시편 33,1)라고 적힌 두루마리를, 오른쪽에는 솔로몬왕이 “저희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어지시고 진실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만물을 자비로 통솔하십니다”(지혜 15,1)라고 적힌 두루마리를 펴는 모습이 보입니다.

 

하단부에는 나무와 꽃들이 만발한 천국에 노인 두 명이 있습니다. 왼쪽(하느님 시각의 오른쪽)은 아브라함, 오른쪽은 야곱입니다. 그들은 금색이 어우러진 옥좌에 앉아서 회백색의 천을 들어 올려 수많은 영혼을 품 안에 거두고 있습니다. 그 영혼들은 밖을 바라보고 있으며 의로운 영혼들입니다.

 

아랫부분 가운데에는 하체만을 가린 채 긴 붉은 십자가를 어깨에 걸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처형을 받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천국을 허락받은 착한 도둑입니다. 이 이콘은 마치 입체파 그림처럼 여러 개의 의미와 시선을 한 작품 안에 담아 총체적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눈동자에 반사하는 흰 점은 찍지 않는다

 

이콘은 눈동자에 반사하는 흰점을 찍지 않습니다. 반사하는 반사광을 사용한다면 사실적이고 좀더 생생한 느낌을 줄 수 있는데도 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탈물질화를 다룬 장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실제 모습을 사실 그대로 표현하지 않는 이유도 있지만, 하느님 세계에서는 하느님의 빛만이 존재한다는 성경 내용이 이콘 세계에도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빛은 물리적인 빛, 즉 태양 빛이나 전기나 불빛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공간과 관계없이 두루 퍼져 있습니다. 또 빛은 그의 창조물 모든 곳을 비추기 때문에 화면 내부에는 그림자가 생길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의 도성에서는 하느님 빛만이 존재하기에(묵시 21,23 참조) 그림자가 없으며, 인물 눈동자에도 흰점을 찍지 않습니다. 이렇듯 이콘은 모든 시간이 모여있다는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치 그리스도의 재림 때와 같이 전 인류가 동시간(同時間)에 하느님과 함께합니다. (작품 2)

 

- (작품 3) 천장화 : 모자이크, 5세기, 성 요한 세례당, 피렌체, 이탈리아. 내용은 최후의 심판이며 온 우주의 창조자는 예수님으로 표현되어 있다.

 

 

5. 이콘의 배치

 

교회 역사 안에서 성화에 대한 논란 후 이콘이 용인되면서 서방교회에서는 주로 가르침이나 교육적인 목적으로 이콘이 쓰였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성인 성녀를 함께 현존시킴으로써 공동체의 증인으로, 또 공동체 삶에 동참하고 장려하려는 의도로 그려졌습니다. 또 교회 벽을 장식함으로써 전례에 나타나는 사실들, 즉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제대 위는 하늘을, 제대 밑은 땅을 나타냅니다.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인 전례 안에서 특히 미사 중에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을 현존시킴으로써 인간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 보호 안에 들어가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물의 창조자(Pantokrator)로 천장화에 나타냈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지배하시는 권위자로 군림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받아들이시는 구세주로서 축복하는 모습입니다. (작품 3)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4월 28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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