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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과학 시대의 그리스도인: 과학 시대의 특징 과학주의

389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1-20

[과학 시대의 그리스도인] 과학 시대의 특징 ‘과학주의’

 

 

2015년에 우리말로 번역된 뒤 여전히 베스트셀러 책인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담겨 있다.

 

“생물학에 따르면, 사람은 창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무언가를 ‘부여’하는 ‘창조주’ 같은 것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맹목적인 진화 과정뿐이며, 개인은 어떤 목적도 없는 그 과정에서 탄생한다. ‘창조주에게 부여받았다’는 단순히 ‘태어났다’고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전문 과학자가 아닌 역사학자인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 자신 있게 주장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왜 이러한 주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경외심에서 비롯된 종교와 자연 과학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류의 학문 가운데 합리적인 추론과 보편적이거나 논리적인 근거를 통해 세계와 자연의 이치를 탐색하는 학문을 우리는 특별히 ‘과학’(science)이라고 부른다. 특히 자연을 그 대상으로 두고 탐구하는 자연 과학은 오늘날 우리의 삶과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유발 하라리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자연 과학의 결정적인 영향력을 보여 주는 중요한 예이다.

 

태초에 자연 과학, 좀 더 정확하게 말해 자연 철학은 종교와 함께 출발했다. 고대인들은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과 아름다운 바다, 일출과 일몰의 장엄함을 바라보면서 ‘경외심’을 느꼈고, 바로 이 경외심으로부터 종교와 자연 과학이 함께 탄생한 것이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다.”(지혜 13,5)라는 성경 구절은 바로 이러한 ‘경외심’이 드러난 적절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부터 탄생한 쌍둥이 가운데 하나인 종교가 그 큰 ‘경외심’을 유발하는 세상 만물의 창조주가 누구인지를 묻기 시작하는 동안, 또 다른 쌍둥이인 자연 과학은 그 큰 ‘경외심’을 유발하는 피조물과 천체 그 자체의 본성과 질서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쌍둥이였던 종교와 과학의 대립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 시대 이래로 무신론적, 반종교적 성향의 과학자들이 출현하면서 동일한 ‘경외심’에서 비롯된 종교와 과학은 빠른 속도로 갈라져 나갔고, 동시에 종교는 정치적, 사회적인 이유로 과학교육을 받은 이들로부터 배척되기 시작했다. 한 예로, 프랑스 전역에서 일어난 계몽주의는 반종교적인 움직임도 함께 불러일으켰다.

 

다큐멘터리 ‘위대한 침묵’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봉쇄 수도회 카르투시오회는 프랑스 대혁명(1787-99년)이 발발하였을 때 프랑스에 있던 75개의 수도원 전부가 ‘성직자 공민 헌장’으로 말미암아 혁명 정부에 의해 몰수되었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5개의 수도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수도원이 사라지게 되었고, 19세기 중반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스위스 등지의 모든 카르투시오 수도원이 해산되고 재산도 몰수당했다.

 

바로 이러한 반종교적인 분위기가 팽배하던 이 시기에 이르러 과학자들이 강조하는 ‘이성적이고 회의적인 추론방식’은 눈에 보이지 않고 관찰 불가능한 것들, 특히 신과 천사, 영혼 등 영적인 실체들의 존재와 교회의 전통적인 교의들에 대해서도 서서히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다 보니 과학의 발전과 비례하여 자연스럽게 물질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면서 교회가 전통적으로 중요시해 온 영적인 실체를 전면적으로 무시, 거부하는 시대가 되어 갔다.

 

이러한 유물론적인 흐름이 수백 년간 지속되면서 오늘날 많은 이가 ‘과학과 종교는 서로 양립할 수 없고 대립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흐름을 주도하는 몇몇 유물론적 자연 과학자는 “하느님은 존재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라는 조롱으로 가득한 주장까지 과감하게 표현한다.

 

또한 많은 일반인이 그들의 주장에 큰 공감을 표시하고 동조하며, 나아가 과학의 범주 바깥에 있는 것으로 여겨져 온 영적이고 종교적인 내용조차도 머지않아 자연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명확히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는 역사적으로 볼 때 인류 역사상 종교가 가장 많은 무시와 공격을 받는 시기일 듯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종교적 신앙의 힘에 의지해서 해결해 왔던 수많은 문제가 이제는 과학적인 접근 방식을 통해 해결되다 보니, 종교는 인간의 나약함에 기대는 미신 정도로 보이는 상황이다.

 

 

신앙의 의미와 가치 탐구

 

이러한 상황에 우리는 다음의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과연 과학은 이 세상의 모든 사실, 모든 진리를 정확히 다 설명해 줄 수 있는가?’

 

과학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해 줄 수 있다는 신념을 우리는 ‘과학주의, 과학만능주의’(scientism)라고 부른다. 과학주의에 따르면, 과학은 이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 지난날에 종교의 영역에 속했던 초자연적 현상까지도 다 명확하게 이성적 · 논리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가톨릭을 포함한 전통적인 신앙과 종교의 교의와 주장은 사실상 허구와 허상, 망상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의 원제가 ‘The God Delusion’(신 망상)이라는 점이 이러한 경향의 좋은 예다. 오늘날 전 세계의 자연 과학자의 대다수가 무신론적 과학주의자들이며, 이들의 과학주의적 영향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인 것이다.

 

우리나라도 가톨릭을 포함한 주요 종교에 젊은이들의 참여율이 급격하게 감소하는 공통적인 현상이 발견된다. 우리는 이 현상의 기저에는 바로 과학주의가 팽배한 유물론적이고 반종교적인 사회적 분위기가 예상보다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과학주의자들의 주장대로 과연 과학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오늘날의 과학 시대에 우리의 신앙과 종교는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리가 ‘과학 시대의 그리스도인’으로 제대로 살아가려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과학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과학주의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하고자 필자는 올 한 해 동안 과학주의에 관해 총 여섯 가지 방식으로 비판적인 고찰을 한 뒤 결론적으로 신앙의 의미와 가치를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탐색해 보고자 한다. ‘현대의 과학 시대에서도 신앙은 과연 의미가 있는가?: 과학주의에 관한 비판적 고찰을 통한 신앙의 의미 탐색’

(「신학전망」, 204호, 2019년, 130-170면)을 참고해 주시기 바란다.

 

「경향잡지」 기고가 특히 한국의 젊은이들이 맹목적인 과학주의에서 벗어나 신앙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되새길 수 있도록 돕는 데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 김도현 바오로 - 예수회 한국관구 소속 신부로 현재 서강대학교에서 통계물리학과 ‘과학과 종교’를 연구, 강의하고 있다.

 

[경향잡지, 2020년 1월호, 김도현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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