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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시 읽어주는 신부: 일상과 환상 사이에서(환상의 빛)

37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7-11

[시(詩) 읽어주는 신부] 일상과 환상 사이에서(환상의 빛)

 

 

삶은 일상 속에서 평범합니다. 자고, 일어나고, 먹고, 일하고, 말하며 살아갑니다. 일상은 이렇듯 늘 진부하고 밋밋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삶의 형식의 단순함과 밋밋함에 대한 것이지, 고단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한편으로 세상 안에는 특이한 사건과 사고들이 숱하게 발생하지만 나에게 벌어진 것이 아닌 한, 그것은 그저 사회적 풍경과 배경으로 작동될 뿐입니다. 사건과 사고와 타자의 일들이 공감의 정서를 통해 나에게 밀접하게 다가오는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구체적인 행동으로 참여하고 마음으로 깊이 연대하지 않는 한, 그것도 결국 타인의 문제에 그치고 맙니다. 일상이 건조하고 밋밋한 이유에는 실존적 이유도 있지만 사회적 요인도 강하게 작용합니다. 현대 기술 문명은 점점 우리를 왜소화하고 고립된 존재로 만들어 갑니다. 모든 것을 연결하는 디지털 매체 시대의 묘한 역설입니다. 뉴욕타임즈의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가 주장하듯, 사람들의 통교 방식(communication style)은 사람들의 생각과 의식을 변화시킵니다. 디지털 매체는 사람들을 더 복잡하고 광범위한 방식으로 연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사람들을 더 단절시키고 파편화시킵니다. 인쇄 매체 시절에 사람들의 이야기(storytelling)는 매우 현실적이고 연결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통교는 협력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매체 시대에 사람들의 이야기는 자극적이거나 가상적(virtual)입니다. 디지털 시대의 통교는 경쟁적이고 인위적 조작의 형태를 지닙니다. 경쟁적이고 조작적인 방식으로 자극적이고 가상적인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감정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을 끌어내서 이 시대의 통교가 굉장히 역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들 간의 간격과 괴리가 멀어지고 깊어지는 상황입니다. 디지털 시대에 사람들은 더 고립적이고 일상은 더 단조로운 것 같습니다.

 

삶은 시간 속에서 대부분 단순하고 건조합니다. 물론 삶의 마디마디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저마다의 삶은 다 고유하고 특별합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삶은 그저 흘러온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시간의 긴 여정에서 보면 무슨 특별한 것도 무슨 대단한 것도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냥 지금 여기에서, 그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 같습니다. 단지 가끔 어느 순간 기이한 느낌과 묘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일상은 단조롭고 삶은 평범하지만 조금만 각도를 바꾸어 생각하면 뭔가 신기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아득하지만 생생한 기억으로 있는데 내가 이렇게 늙어 있다니’, ‘지금은 죽음이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언젠가 나도 죽어야 하는 운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뭔가 이상하고 기이한 느낌이 듭니다. 이처럼 삶의 어느 순간에 아연하고 기이한 느낌이 들 때 삶은 한편으로 참 묘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시간의 흐름 그 자체가 마술이나 마법 같습니다. 지나온 시간의 거리는 아득하지만 내 체험의 영역에서 과거는 분명한 사실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가올 운명의 모습은 흐릿하지만 미래의 어느 시점에 죽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오히려 현재가 꿈같고 환상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저마다 장자의 호접몽(胡蝶夢) 이야기가 가끔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 안에서 일상과 환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느낌말입니다.

 

밋밋하고 평범한 우리의 삶이 ‘시간’이라는 마술 속에서, ‘생각’이라는 마법 속에서 기이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을 가끔 경험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기이한 경험을 가끔 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더 자주 하는 것 같습니다.

 

“작은 여자아이였던 내가 작은 여자어른이 되었다. 그것을 마술이나 기적이라고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어쩐지 나는 모든 사람의 마술, 세상의 모든 마법으로 둘러싸여 있는 기분이다. 소년소녀들을 위한 세계문학전집에서 보았던 기이한 세계처럼.” 강성은 시인(1973년생)이 자신의 첫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창비, 2009)에서 고백한 ‘시인의 말’입니다. 강성은의 시를 읽다 보면 기이하고 짧은 동화를 읽는 느낌이 듭니다. 강성은의 시는 일상과 환상이 뒤섞여서 이해하기 어려운 느낌도 들지만 시가 담고 있는 묘한 분위기가 매혹적입니다. 강성은의 시는 평범하고 밋밋한 일상이 시간의 흐름과 생각(환상, 잠과 꿈의 몽상) 속에서 마술처럼 변환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강성은 시인은 일상과 환상의 교차 속에서 우리 삶이 갖는 마술과 기적의 특성을 끊임없이 이야기합니다. “옛날이야기 들려줄까 악몽처럼 가볍고 공기처럼 무겁고 움켜잡으면 모래처럼 빠져나가 버리는 이야기 조용한 비명 같은 이야기.”(「세헤라자데」) 이처럼 자신의 첫 시집, 첫 시에서 강성은 시인은 천일야화의 여주인공이 자신의 시적 정체성임을 드러냅니다. 자신의 시가 아라비안나이트의 기이한 동화 같은 것임을 암시합니다. 세헤라자데 시인이 이야기하는 동화는 슬프고 기이한 동화입니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죠/ 파도에 휩쓸려 왔다갔다 할 뿐.”(「양수 속에서」) “우리는 내일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지만/ 내일의 악몽을 점칠 수는 없었어요.”(「고딕시대와 낭만주의자들」)

 

강성은의 시에서 삶은 아름답고 이상한 모습으로 자주 드러납니다. 첫 시집에서부터 강성은 시인은 ‘아름다운’, ‘이상한’이라는 형용사를 자주 사용합니다. 삶은 슬프고 이상해서 아름답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시집인 『단지 조금 이상한』(문학과지성사, 2013)에서도 시인은, 때때로 우리의 생각(환상) 속에서 삶은 ‘이상하고 아름다운’ 형태로 드러난다고 서술합니다. 우리의 삶은 “아직 이름이 없고 증상도 없는/ 어떤 생각에 빠져 있을 땐 멈춰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다시 생동하는 세계와 같은// 단지 조금 이상한 병처럼/ 단지 조금 이상한 잠”(단지 조금 이상한) 같다고 시인은 나직이 읊조리고 있습니다. 시인이 바라보는 삶은 ‘환상의 빛’ 속에서 모든 경계가 사라지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최근 시인들이 동일한 제목으로 여러 편의 시를 발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강성은 시인 역시 ‘환상의 빛’, ‘Ghost’, ‘Lo-fi’라는 제목으로 여러 편의 시를 발표합니다. 어쩌면 시인에게 가장 중심이 되는 시적 화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환상의 빛 속에서 모든 구분과 경계가 사라집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흐릿하기에 사람은 유령(ghost)의 삶을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삶은 낮은 톤의(lo-fi) 우울한 모습이라고 시인은 노래하는 것 같습니다.

 

옛날 영화를 보다가

옛날 음악을 듣다가

나는 옛날 사람이 되었구나 생각했다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생각했다.

 

명백한 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몇 세기 전의 사람을 사랑하고

몇 세기 전의 장면을 그리워하며

단 한 번의 여름을 보냈다 보냈을 뿐인데

 

내게서 일어난 적이 없는 일들이

조용히 우거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눈 속에 빛이 가득해서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환상의 빛」(『단지 조금 이상한』, p.50)이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환상의 빛 속에서는 명백한 것마저도 생각(환상) 속에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하루는 거대해지고/ 하루는 입자처럼 작아져 보이지 않는”(「환상의 빛」, 『단지 조금 이상한』, p.50) 것처럼 모든 것이 불안정합니다. 현실이 잠과 꿈같이 여겨질 때 모든 것들의 경계가 흐릿해집니다. “어제와 내일의 경계가 사라지고/ 여성과 남성의 경계가 사라”(「올란도」)지고, “공동묘지와 아파트가 구분되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과 죽어 있다는 것이 구분되지 않는”(「0℃」)다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한편으로 “이 오랜 꿈이 끝나고/ 나 자신이 희고 빛나는 밤이 될 때/ 이것이 어떤 잠이었는지 알게 되리”(「올란도」)라고 기대해보지만, “내가 잠들면 시작되는/ 이 겨울밤의 자막은/ 내가 쓴 이름들과 기호들과/ 본 적 없는 빛의 알 수 없는 조합/ 나는 끝내 읽지 못한다”(「환상의 빛」,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p.38)고 시인은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진 자리에 오히려 죽음이 더 자주 출몰합니다. 죽음은 여전히 무심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해 여름 믿을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고 죽은 줄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Ghost」, 『Lo-fi』, 문학과지성사, 2018, p.67)고, “우린 다 죽었지/ 그런데 우리가 죽었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유령선」)고 시인은 탄식합니다. 또 시인은 쓸쓸하게 노래합니다. “산 사람들도 죽음과 손잡고 있다는 걸/ 그게 어떤 기분인지/ 그게 어떤 슬픔인지/ ……/ 우린 곧 아프거나 죽겠지만/ 지구엔 누가 남을까요/ 그때에도 햇빛은 저렇게 찬란히 빛나겠지만”(「전염병」) 라고 말입니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면/ 죽음이 무슨 소용인가요”(「계면界面」) 라고 반문해보지만 “어쩌면 우린 이미 죽은 시체들일까……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배불리 먹고 잠들면 그만이라고”(「악령」) 중얼거리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 채 걷고 있”는 “산책하는 유령들” 같은 삶이 우리의 생이라고 시인은 서늘하게 고백합니다.(「공원」) 유령은 “살아 있을 때도/ 죽어서도 입이 있어도/ 말은 못”(「Ghost」, 『Lo-fi』, p.11)하는 존재이며 “어제는 취한 자였는데/ 오늘은 병든 자”(「안식일의 유령들」)입니다. 강성은 시인에게 시는 “무엇이 살아 있는 것이고, 무엇이 죽어 있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재규정하는 일”(장은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들이 사라지고 나선/ 이제 인간이 사라지는 일만 남”(「동물원」)은 세상에서, 인간은 벌써 유령이 되었고 또 되어가고 있다고 시인은 느끼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강성은 시인 역시 “고통이 빛이 되는/ 삶은 내 것이 아니길 바랐”(「환상의 빛」, 『Lo-fi』, p.47)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삶을 포기하고 나면/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면/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카프카의 잠」)을 알기에 모든 것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나는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일어나/ 좋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쌀을 씻고 두부를 썰다/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고/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워// 생각한다/ 생각한다// 생각한다.”(「죄와 벌」) “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소설小雪」) 그저 반복되는 일상을 견디면서 좋은 사람과 좋은 시를 ‘생각하며’ 지내는 일이 최선이라고 여기지만, 시인에게 삶은 여전히 슬픈 겨울의 풍경입니다. “승객들은 모두 잠이 들었다 창밖은 빠르게 지나가는 겨울 나는 혼자 깨어 있다…… 기차는 어디를 향해 달리는 것일까 아무도 깨지 않는 밤.”(「객차」) “영혼이 있다는 믿음은/ 잊어버린 지 오래”(「말년의 양식」)고, “친구는 우울하다고 했다/ 친구여 오늘은 내가 옆에 있어줄게/ 하지만 내가 옆에 있어도/ 우울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Lo-fi」, 『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 현대문학, 2018, p.18)고 시인은 쓸쓸하게 노래합니다.

 

왜 삶은 쓸쓸하고 슬픈지 모르겠습니다. 죽음을 향해가는 시간 속의 존재라는 실존적(존재적) 본성 탓인지, 아니면 최근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섬세하게 그려내듯이 이 시대의 거대한 체제 속에서 보잘것없는 비참한 존재로 내몰려지는 사회적 현실 때문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강성은 시인이 묘사하듯이 사람들은 점점 유령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현대 기술 문명의 발전 속에서 사람들이 물질의 풍요를 누리지만 행복해 보이진 않습니다. 디지털과 가상의 세계 안에서 사람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지만 점점 더 외롭고 고립되는 것 같습니다. 현대 기술 문명의 묘한 아이러니입니다. 사람들 간의 진정한 소통이 더 힘들어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반려동물에 애정을 붙이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개체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이기에 점점 감정 소통의 대상으로서 고양이나 개를 선택하는 것이 요즘의 풍속도입니다. 강성은 시인 역시 친구가 키웠던 늙은(할머니) 고양이의 죽음을 보면서 아름다운 시 한 편을 노래합니다. “네가 태어나던 날과/ 네가 죽은 날 모두를 기억하는 건/ 행복이겠니? 불행이겠니?”(「향이」) 그 시를 읽으면서 묘한 생각이 교차했고 작은 의문이 생겼습니다. 어떤 존재의 시작과 마지막을 안다는 것이 그를 가장 잘 알고 사랑하는 일인지. 일반적으로 우리는 산 사람의 생일을 기억하고 죽은 사람의 기일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왜 죽은 사람의 생일은 기억하지 않는지. (아, 물론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은 생일과 기일을 기억합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일뿐만 아니라 생일도 기억하고 기도해야겠다는 뜬금없는 다짐을 합니다.

 

우리는 일상과 환상의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환상의 빛’에 나오는 여주인공은 전남편의 설명할 수 없는 죽음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일상 속에서 죽음의 흔적과 끈을 놓지 못하면서도 동시에 재혼한 남편과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을 영위하며 살아갑니다. 일상의 물성(物性) 속에서 생각(환상)만이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드러낸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물질시대에 “정신의 고귀함”(롭 리멘)을 생뚱맞게 강조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물성과 영성은 항상 연결되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생각(환상)이 우리 삶의 중요한 요소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강성은 시인이 말하는 “생각한다”와 “환상의 빛” 속에서 본다는 것은 단순히 망상과 몽상처럼 현실에서 도피와 회피를 뜻한다기보다는 ‘새롭게 생각한다.’와 ‘다른 각도에서 근본적으로 성찰한다.’는 의미로 저에게 다가옵니다. 밋밋하고 건조한 일상 안에서 타성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새롭게 상상하는 것이 ‘환상의 빛 안에서 생각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회 안에 만연해있는 기능주의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과 문제점들에 대해 기능주의적 방식으로 접근하는 경향과 풍조를 교황님께서 강하게 질책하고 있습니다. 사목계획을 짜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어떤 행사들을 거행함으로써 교회 안의 어려움과 문제점들을 해결하려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하고 때때로 반복음주의적이라고 말입니다. 참다운 복음선포는 성령과 함께 새로운 마음으로 근본적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라고 교황님께서는 강조합니다. 강성은 시인이 서술하는 ‘환상의 빛’이라는 시적 화두를 통해 일상과 신앙의 자리에서 근본적으로 생각한다는 것과 새롭게 바라본다는 것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습니다.

 

[월간빛, 2019년 7월호, 정희완 요한 신부(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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