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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19년 6월 16일 (일)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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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과학 시대의 신앙: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실까?

372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5-22

[과학 시대의 신앙]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실까?

 

 

어린 시절 세상의 구석구석을 모두 가 보는 꿈을 가져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골목골목을 이 잡듯이 누비고 다녀야 세상을 다 가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모든 곳을 가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바로 결론을 내렸다.

 

또 다른 생각을 해 본다. 런던은 여덟 살에, 로마는 아홉 살에 간다고 가정해 보자. 아홉 살 때 간 로마와 여덟 살 때 간 런던은 시공간이 달라 똑같은 경험을 할 수가 없다. 이는 모든 시점에 모든 곳을 전부 가 보겠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나는 시간과 공간에 모두 제한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할 수 없는 것’과 ‘말이 안 되는 것’

 

그렇다면 ‘모든 곳에 존재하고’(ubiquitous), ‘모든 것을 알며’(omniscient), ‘무엇이든 할 수 있는’(omnipotent), 그야말로 전지전능한 신은 정말로 그 어떤 것이라도 다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 어렸을 때 읽은 ‘장화 신은 고양이’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필자의 기억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해 보았다.

 

꾀가 많은 한 고양이가 가난한 자신의 주인을 위하여 마왕의 성을 빼앗기로 마음먹고 마왕을 찾아갔다.

 

“위대하신 마왕님, 마왕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렇다. 난 뭐든 할 수 있는 위대한 마왕이다.”

 

“무엇으로든 변신하실 수도 있으시지요.”

 

“그럼, 당연하지.”

 

“무례하다고 나무라지 마시고, 제 청을 들어주세요. 그 무시무시한 용으로 한번 변신해 주시겠어요?”

 

그러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마왕은 용으로 변했고, 고양이는 그 앞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아이코, 너무 무섭습니다. 마왕님, 그럼 이번에는 아주 예쁘고 귀여운 생쥐로 변신해 주세요. 그럼 마왕님이 얼마나 전지전능하신지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자 다시 한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마왕이 생쥐로 변신했다. 고양이는 그 틈을 타 생쥐가 된 마왕을 날름 잡아먹어 버렸다.

 

하느님께서는 ‘동그란 사각형’을 그리실 수 있을까? 또 ‘당신이 아닌 존재’가 되실 수 있을까? 고양이처럼 그런 생각은 해 볼 수 있겠지만, 그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하느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것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월적 존재로서의 하느님

 

포항공과대학교 초대 총장이었던 김호길 박사의 호를 딴 ‘무은재 도서관’에는 김호길 박사의 과학적 신념을 담은 글이 크게 걸려 있다. “자연 법칙은 신도 바꿀 수 없지요.”

 

그 반면에 한동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영길 박사는 그의 형 김호길 박사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창조 과학자인 그는 ‘한국창조과학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을 지내면서 우리나라 생물학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지우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다.

 

두 분 모두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신앙에 관한 한 두 분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김호길 박사는 모든 피조물을 창조한 초월적인 신을 피조물과 같은 수준에 놓아 비교했고, 김영길 박사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신을 붙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진화론을 가설 이상으로 받아들이며, 종교와 과학이 조화롭게 양립할 수 있음을 밝히셨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젊은 시절 마니교에 빠져 방탕하게 살았다고 알려졌지만, 실은 나름대로 진리 추구의 길을 걸었던 모양이다. 마침내 ‘진리의 교회’로 돌아온 성인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려고 고심했다.

 

어느 날 머리를 식힐 겸 바닷가를 거닐던 성인은 행동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 한 아이에게 다가가 물어보았다.

 

“너 뭐 하고 있니?”

 

“바닷물을 조개껍질로 떠서 전부 여기 모래 구멍에 담으려고요.”

 

“바닷물이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그 조그만 구멍에 다 들어가겠니?”

 

그 순간 성인은 그 말이 바로 자신에게 해야 할 말인 것을 깨달았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진리에 도달하는 길에는 크게 두 가지, ‘계시’를 믿는 신앙과 ‘이성’을 따르는 과학과 철학이 있다.

 

계시는 조금씩 ‘베일’(veil)을 ‘걷어’(re) 내듯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진리를 ‘드러내 보이는’(reveal) 것을 말하고, 두 자연수의 조화로운 ‘비율’(ratio)에서 우주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피타고라스처럼 비율을 계산하여 이를 ‘따지는’(reason) 것이 이성이다. 하지만 계시와 이성 모두 유한한 인간에게 진리를 ‘온전히’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인터넷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손쉽게 검색하여 뭐든지 알아볼 수 있는 시대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하느님보다 과학 기술의 속성을 더 따르는 것 같다. 오늘날의 과학 기술, 특히 ‘인공 지능’(AI) 분야는 갈수록 발달하여 전지전능할 듯한 기세이니 말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느님께 불만이 많아 보인다. 반면에 갈수록 뛰어난 능력으로 사람들과 원활히 소통하여 자율 주행 운전도 척척 하고, 심심할 때에 말동무까지 되어 주는 인공 지능에 대해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렇지만 인공 지능이 어떤 결정을 내리거나 실행했을 때, 왜 그렇게 했는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밝혀내는 단계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한 수준이다. 인공 지능의 내부 계산 과정이 너무나도 복잡하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을지는 결국 인간 자신의 능력에 달려 있다.

 

인간이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인공 지능의 결정을 이해하는 데에도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인공 지능 또한 인간이 만들었기에 완벽하지 않고 실수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초고속으로 달리는 인공 지능의 자율 주행 자동차에 우리의 생명을 온전히 맡길 수 있을까? 혹시 사고가 나면 인공 지능이 책임져 줄 수 있을까? 아무리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이성의 열매’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주님 뜻대로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요한 16,12).

 

이성을 초월하신 주님을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파악조차 할 수 없다. 설령 계시의 도움이 있어도 성경 말씀에서처럼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우리 자신의 능력이 너무도 부족하다.

 

첫 인간의 이름 ‘아담’(Adam)과 라틴어 ‘humus’에서 유래한 인간을 뜻하는 ‘휴먼’(human)은 모두 ‘흙’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겸손’(humble)도 마찬가지이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르시는 말, 곧 하느님의 계시를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 김재완 요한 세례자 – 고등과학원(KIAS) 계산과학부 교수로 양자 컴퓨터, 양자 암호, 양자 텔레포테이션 등을 연구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9년 5월호, 김재완 요한 세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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